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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지혜는 태어났다.>
▥ 잠언의 말씀입니다. 8,22-31
하느님의 지혜가 이렇게 말하였다.
22 “주님께서는 그 옛날 모든 일을 하시기 전에
당신의 첫 작품으로 나를 지으셨다.
23 나는 한처음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영원에서부터 모습이 갖추어졌다.
24 심연이 생기기 전에, 물 많은 샘들이 생기기 전에 나는 태어났다.
25 산들이 자리 잡기 전에, 언덕들이 생기기 전에 나는 태어났다.
26 그분께서 땅과 들을, 누리의 첫 흙을 만드시기 전이다.
27 그분께서 하늘을 세우실 때,
심연 위에 테두리를 정하실 때 나 거기 있었다.
28 그분께서 위의 구름을 굳히시고 심연의 샘들을 솟구치게 하실 때,
29 물이 그분의 명령을 어기지 않도록 바다에 경계를 두실 때,
그분께서 땅의 기초를 놓으실 때
30 나는 그분 곁에서 사랑받는 아이였다.
나는 날마다 그분께 즐거움이었고 언제나 그분 앞에서 뛰놀았다.
31 나는 그분께서 지으신 땅 위에서 뛰놀며 사람들을 내 기쁨으로 삼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우리는 성령께서 부어 주시는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갑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5,1-5
형제 여러분,
1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2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4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5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2-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14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15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잠언의 저자는, 하느님의 지혜는 한처음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태어났다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우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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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은 주님께서 한처음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당신의 첫 작품으로 지혜를 지으셨다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살아가며,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다고 말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앞으로 올 일들을 알려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제1독서는 심연이 생기기 전, 하느님께서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지혜’가 있었음을 전합니다. 영원에서부터 계시는 그 지혜는 바로 ‘말씀’(로고스)이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요한 1,1-2 참조). 창세기는 한 처음에 ‘하느님의 영’이 함께 계셨음을 전합니다(1,2 참조). 이런 까닭에 한낱 미천한 인간 피조물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논한다는 것은 매우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복음 말씀은 이러한 성부, 성자, 성령의 친밀한 관계를 잘 보여 줍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느님과 언제나 일치를 이루십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이는 다음 장에서 이어지는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제 것입니다.”(요한 17,10)라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느님을 온전히 드러내 보이십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하느님 계시의 충만함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시어 하느님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을 보여 주시고 이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시어 제자들을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시며 성자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으로 하느님과 평화를 누리며 은총 속에 머물게 됩니다. 세상의 환난 가운데에서도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으로 살아갑니다. 그 희망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부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믿음, 희망, 사랑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에게서 먼저 우리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향하는 우리의 모든 발걸음은 믿음, 희망, 사랑으로 지극히 충만하신 삼위일체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바랍니다. 오늘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섭리에 감사드리며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저희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크시옵니까!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시나이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시나이까?”(시편 8,2.5)(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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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으로 구별되지만 한 분이시라는 삼위일체의 교리는, 일단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삼위일체는 하느님 생명과 사랑의 움직임이기에 단순히 하느님 안에서의 신비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당신을 계시하시며 우리를 그 신비 안으로 초대하십니다.
성경에서 거듭 말하고 있듯이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런데 참사랑이란 자신 안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향하여 열려 있는 것이고, 그에게 가서 자신을 내어 줌으로써 관계를 맺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하느님의 구원 경륜 안에서 계시된 사건, 그리스도의 육화 사건 안에서 발견합니다. 성부께서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실 때 성자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사람이 되신 성자께서는 십자가상 죽음으로 당신이 성부께 받은 것을 온전히 성부께 돌려 드리십니다.
이렇게 성부와 성자 간의 완벽한 상호 증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성취되었고, 거기에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파견되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완전한 사랑을 나눔으로써 생겨난 공통의 사랑이 성령이시며, 그 성령께서는 이제 하느님 안에 머물던 사랑의 신비를 우리에게도 나누어 주십니다. 우리도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를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고, 성부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삼위일체의 신비는 ‘나’와 ‘너’가 만나서 관계를 이루고 사랑으로 일치하면서도 결코 한 쪽에 치우치거나 개성을 포기하는 일 없이, 서로의 존중 속에 하나가 되어 결국 ‘우리’가 되는 공동체의 신비이기도 합니다. 비록 우리가 하느님의 신비를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겸손과 흠숭으로 이 신비를 경축하며, 그 신비를 우리 삶 속에서 드러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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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14,20).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을 벗어나는 자는 아무도 하느님을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이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는 이라야 아버지도 아드님도 모십니다”(2요한 1,9).
삼위일체 신비는 우리 삶으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루에 몇 번이나 십자 성호를 긋습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우리는 이미 삼위일체 안에 머물며 기도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머무시며 하느님 아버지와 아드님의 현존을 깨닫게 하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천지창조 이전에 누리고 계신 사랑의 일치를 알려 주십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1요한 4,16)은 삼위일체의 내적 친교 안에서 아낌없이 서로를 내어 주고 계십니다. 세 위격은 ‘가장 완전한 친교와 상호 증여’를 이룹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한다면(요한 15,12 참조),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우리 ‘삶의 자리’에 현존하시게 합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우리가 이해하고 설명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 신비 안에 살고 숨 쉬는 진리입니다. 십자 성호를 그으며 하루에도 수없이 삼위일체를 고백하면, 삼위이신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수련을 하면, 우리 영혼 안에 체득되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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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삼위일체의 ‘단일성’(세 위격이 하나의 신성을 이룸)과 ‘다양성’(한 분 하느님께서 세 위격으로 구별됨)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삼 위일체의 ‘단일성’을 이해하고자 남녀 사이의 사랑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남남이었으나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알게 되면서 점점 더 많은 시간을 같은 공간 안에 머무르고, 사랑이 깊어지면서 서로 닮아 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남자와 여자는 더 이상 둘이 아니라 한 몸을 이룹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단일성은 바로 이러한 사랑에 비추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서로 너무나 사랑하여 완전한 일치의 공동체를 이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세 분이 아니라 한 분이라고 합니다.
삼 위일체의 ‘다양성’은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은 처음에는 어머니 배 속에서 하나가 된 상태로 시작됩니다. 그러다가 아기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조금씩 그 거리가 멀어집니다. 배 속에서 품속으로, 품속에서 집 안으로, 집 안에서 동네로, 동네에서 다른 지역으로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이렇듯 부모와 자식은 처음에는 온전히 한 몸이었다가 사랑이 성숙되면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삼위의 하느님께서 서로 사랑하신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랑에 비추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신다는 면에서 우리는 서로 다름, 곧 ‘다양성’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께서 엄연히 구분된다고 고백합니다.
이 처럼 삼위일체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남녀의 사랑처럼 서로 다른 위격이 온전히 하나가 된 것이며, 부모와 자식의 사랑처럼 서로의 영역을 인정해 주는 사랑이 곧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삼위일체의 신비, 곧 사랑의 신비를 살아가도록 초대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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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성호경은 신앙생활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모르는 새 삼위일체를 고백하며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삼위일체란, 하느님 안에 세 위격(位格)이 있다는 표현입니다. 위(位)는 자리를 뜻하는 한자이지요. 굳이 이렇게 표현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의 기록 때문입니다. 성경 안에 성부, 성자, 성령께서 따로 등장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설명을 위해 삼위일체 용어를 만든 것입니다. 그렇지만 교리에 정통하다고 믿음이 강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론은 이론일 뿐입니다. 실천은 언제나 별개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섬기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린이가 “아빠, 아버지!” 하고 부르듯 그렇게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구약의 하느님께서는 너무 멀리 계셨습니다. 아버지로 접근하기에는 너무나 두려운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개념을 바꾸려 하신 것입니다. 놀라운 가르침입니다.
훗날 사도들은 성령께서 오신 뒤에야 스승님의 가르침을 깨닫게 됩니다. 성령께서 오시지 않았더라면 하느님으로 알아뵙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의 신앙인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며 산다면 성령께서는 도와주십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일치 안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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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성호를 긋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시작합니다. 기도하기 전이나 음식을 먹기 전에 바치는 성호경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무의식 속에서도 삼위일체를 고백하며 살고 있습니다.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한 분 하느님으로 계신다는 뜻입니다. 굳이 이러한 표현을 해야 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의 기록 때문입니다. 곧 성경에 하느님, 예수님, 성령께서 따로 등장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설명하고자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아버지와 하나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성령 강림 뒤에 비로소 예수님과 아버지께서 한 분이심을 깨닫습니다. 성령께서 오시지 않았더라면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심을 몰랐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것도 성령께서 도와주신 결과입니다. 삼위일체는 아버지 하느님을 깨닫는 열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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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는 14세기 중엽 이탈리아에서 태어납니다. 당시는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던 시기였습니다. 성녀는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목격합니다. 그리하여 일찍이 영적 생활에 몰두했습니다. 18세 되던 해에는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합니다. 이후 고독과 명상으로 주님의 수난에 깊이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의 ‘오상 기적’을 받습니다. 예수님처럼 손과 발과 가슴에 상처를 받았던 것입니다.
성녀는 30세 되던 해에 프랑스에 머물고 있던 교황을 로마로 모셔 오는 중재에 나섭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령의 이끄심으로 성공합니다. 당시 유럽을 우울하게 만들었던 ‘대립 교황’의 해결입니다. 이후 성녀는 수많은 편지들을 남겼습니다. 그 편지들은 오늘날 『대화』라는 책 속에 대부분 남아 있습니다. 가타리나 성녀는 정식으로 교육받은 분이 아닙니다. 정리된 신학을 연구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실천하셨습니다.
진리는 단순합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가르침이 복잡할 리 없습니다. 사람들이 각색하고, 조건을 달고, 계산하며, 순서를 따지기에 어렵게 만드는 것이지요. 무심하게 바라보면 모든 것이 소박합니다. 관계 또한 따스하고 평범합니다. 그런 시각을 가질 때 삶은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올바른 시각은 단순한 시각의 또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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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영’께서는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실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비난하고 헐뜯는 말은 성령에게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이를 무시하고 깔보는 자는 성령께서 보낸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깎아내리는 행위를 어떻게 성령께서 하시는 일로 간주할 수 있을는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예사로 비난하고 거칠게 불평합니다. 몰라서 그러는 것이지요. 원망하고 공격한다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마음의 평화는 주님께서 주셔야 가능합니다.
비판할 때에는 자신의 살을 깎는 느낌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신중하라는 말입니다. 그만큼 아픔을 갖고 하라는 옛사람들의 가르침입니다.
모든 깨달음은 성령께서 베푸시는 은총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 늘 그분을 접촉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깨달음은 갑자기 옵니다. 성령께서는 예고 없이 오시는 분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 깨달음을 붙잡고 실천하는 일입니다.
진리는 단순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진리가 복잡할 리 없습니다. 사람인 우리가 계산하고 조건을 달고 까탈을 부립니다. 순서를 따지며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단순하게 받아들이면 주변은 늘 새롭습니다. 단순하게 인정하면 사람은 언제나 달리 보입니다. 단순함이 ‘성령 체험’의 첫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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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 역시 은총이며 하느님의 이끄심입니다. 준비되어 있으면 누구에게나 깨달음은 주어집니다. 아니, 준비하는 과정을 통하여 이미 깨달음은 시작됩니다. 그러기에 은총은 갑자기 옵니다. 성령께서는 예고 없이 오시는 분이십니다.
깨달음을 위한 첫 준비는 바른 시?都求? 올바르게 보려는 노력입니다. 불교에서는 올바르게 보고 판단하는 지혜를 ‘정견’(正見)이라 합니다.‘더하지도 말고 덜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것입니다.
성철 스님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유명한 말씀을 남겼습니다. 정견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입니다. 득도하여 돌아왔지만 여전히 산은 그대로 산이고, 물은 그대로 물이었다는 말입니다. 바뀐 것은 산천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네가 바뀌어야 내가 바뀐다.’는 마음에는 깨달음이 오지 않습니다.
진리는 단순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진리가 복잡할 리 없습니다. 우리가 계산을 하고 조건을 달고 순서를 따질 따름입니다. 오히려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모든 지식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면 산천초목부터 달리 보입니다. 모든 관계를 단순하게 인정하면 사람이 달리 보입니다. '바른 시' '단순한 시' 또 다른 표현입니다.
지난 3월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는 역대급 선거라는 말을 합니다. 2위와의 득표율 차가 0.73%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몇몇 분으로부터 “이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자신이 반대했던 후보가 당선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0.73%라도 더 지지받았다는 것을 왜 잊을까요?
자기는 옳고 남은 틀렸다는 생각입니다. 만약 자신이 반대했던 후보에게 투표한 사람 모두 사라져서 자기가 지지했던 후보가 100%의 지지로 당선된다면 어떨까요?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견제 세력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발전도 없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0.73%의 득표율 차는 양측에 큰 깨달음을 주었을 것입니다. 잘 하지 않으면 더 큰 반대를 받을 수 있다는 것과 새로운 변화로 지지받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하지 않을까요?
서로 이념의 차이로 갈라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념을 떠나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하나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기에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노력을 하는 이 세상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각기 다른 위격을 가지고 있지만 한 몸을 이룬다.”라는 뜻의 삼위일체입니다. 잘 이해하기 힘든 교리입니다. 그러나 이 안에 담긴 사랑만을 보았으면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끊임없이 우리에게 그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 역시 하느님의 뜻을 따라 무상으로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베푸셨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인류 역사 안에 그 베푸심을 계속해 나가십니다. 이처럼 참사랑을 주시기 위해 성격이 다른 세 위격이 하나가 되는 신비가 바로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사랑과 신뢰로 하나를 이루셨듯이, 우리 역시 이제 후회할 짓을 하지 않고, 특히 우리 신앙의 공동체가 서로 사랑과 신뢰로 하나를 이루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모습이 삼위일체의 삶을 우리 공동체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제 나 자신이 얼마나 삼위일체의 삶을 살고 있는지 반성했으면 합니다. 사랑 없이, 자기의 기준만을 내세우면서 판단하고 단죄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서로 사랑과 신뢰로 하나를 이루면서, 세상에 하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에 그런 삶을 충분히 살 수 있습니다.
정면으로 죽음을 마주하며 살아가면서, 나는 이제야 삶을 시작하는 기분이다(라이너 마리아 릴케).
결국 삼위일체 신비는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건네주시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희 사제들에게 언제나 부담스럽고 껄끄러운 삼위일체대축일이 돌아왔습니다. 매년 어떻게 하면 신자들에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설득력 있게 설명할까 고민하다가 어떤 때는 얼토당토않은 ‘이단’으로 빠진 적도 종종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삼위로 존재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모든 구원 역사는 성부로부터 유래하고, 성자에 의해서 실현되며, 성령에 의해서 충만히 성취됩니다. 성자와 성령은 성부이신 ‘하느님의 두 손’입니다.”(이레네우스 교부)
“성부께서는 ‘낳으시는 분’이시고, 성자께서는 ‘나시는 분’이시며, 성령께서는 ‘발(發)하시는 분’이십니다.”(아우구스티누스 교부)
하느님 아버지(聖父)께서는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聖子)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는데, 그 아들은 성부께 도달하는 길이자 성부께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 아들에 이어 더욱 완벽하게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한 협조자(聖靈)를 우리 가운데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성령은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보내시는 최고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 성삼위는 완벽하게 하나로 일치되고 통합되어 상호 긴밀하게 협조하는 한 하느님이십니다.
이렇게 성삼위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성부와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구체화된 자비와 연민의 성자와 감미로움과 은은함과 섬세함의 근원이신 성령께서 온전히 한 몸이 돼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삼위로 존재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성삼위께서는 상호 온전히 하나로 결속되어 완벽한 일치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성삼위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항상 소통하시고 상호 증여하시며 한 마음 한 몸이 어떤 것인지를 모델로 제시하고 계십니다.
언제나 자기 본위의 자세를 탈피해서 서로 낮추시고 서로 순명하시며 사랑하십니다. 성삼위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통합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의 발밑을 한번 내려다봅니다. 이리 갈라지고 저리 찢겨지고 사분오열되어 있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더 자주 바라볼 순간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오늘 우리 사이, 우리 공동체 사이, 국가와 민족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높은 장벽을 당장 허물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나와 너무 다른’ 너를 너그럽고 관대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삼위일체 신비와 관련된 박준양 신부님의 가르침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결국 삼위일체 신비는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건네주시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미천한 인간에게 당신에 관한 가장 내밀(內密)하며 지고(地高)한 신비인 삼위일체를 드러내시는 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 신비를 온전히 깨닫지는 못하지만, 사랑의 관계 안에서 삼위일체 신비를 몸으로 살아 나갈 수는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기 위하여 노력할 때, 성삼위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 안에 함께 하시어 내주(內住)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우리는 ‘삼위일체적 삶’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어느 한 위격에게 드리는 기도가 더 효과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지금 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우리 삶의 자리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더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기도드리면 됩니다. 한 위격만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며 바치는 기도라 할지라도 이는 곧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사랑 참여 방법: 기도와 말씀 봉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 신비를 어려워하는 분들이 계시지만 사실 모든 사랑은 삼위일체 신비입니다. 사랑하면 삼위일체 신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신비에 참여하면 창조자가 되고 그러면 영원히 삽니다. 우리가 어떻게 삼위일체 신비에 참여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유방암 투병 중인 미국의 한 초등학교 교사가 학기 마지막 날, 제자들의 선물을 받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피아노 반주에 맞춰 학생들의 노래가 강당 가득 울려 퍼집니다. 교단에 앉아있던 선생님은 정성을 다해 부르는 제자들의 모습에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합니다. 학생들이 유방암 투병 중인 애드리아나 로페즈 선생님께 바치는 사랑의 세레나데입니다.
애드리아나 로페즈 선생님은 말합니다.
“어떻게 고마움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겁니다.”
학생들이 부른 곡은 ‘아무리 힘들어도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한 미국 가수의 노래, 원곡 멜로디에 자신들의 마음을 담은 이야기로 가사를 바꿔서 불렀습니다.
합창단 감독인 그렉 브라인버그는 로페즈 선생님에 대해 이렇게 평합니다.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 헌신적인 교사입니다.”
합창을 마친 학생들은 힘찬 응원과 격려로 스승의 쾌유를 기원했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응원 때문이었는지 치료를 잘 마치고 완쾌하였습니다.
여기에 삼위일체 신비가 있습니다. 분명 그렉 선생님과 로페즈 선생님, 그리고 아이들이 하나의 사랑을 만들고 있습니다. 먼저 그렉 선생님이 로페즈 선생님에게 힘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만으로는 부족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동원하였습니다. 아이들은 그렉 선생님의 사랑에 동참하였습니다. 노래를 배우고 꽃을 준비하고 깜짝 선물을 해 주었습니다. 로페즈 선생님은 아이들의 사랑을 받아들여 건강을 회복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먼저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2-13)
여기서 예수님은 그렉 선생님입니다. 주고 싶은 것이 있는데 본인 힘만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동원하였듯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도와줄 성령을 동원하십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그렉 선생님에게 순종하였듯이, 성령께서도 그리스도께 순종하시고 그분을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요한 16,13-14)
‘그렉 선생님 – 아이들 – 로페즈 선생님’이 삼위일체이듯이 ‘그리스도 – 성령 – 교회’가 삼위일체입니다. 이 삼위일체 신비는 두 사람의 사랑을 이어주는 성령과 같은 아이들의 역할에 의해 완성됩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신비가 아닌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이들처럼 삼위일체 사랑에 참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이들처럼 그렉 선생님으로부터 노래를 배우는 시간을 가져야 하고 또 그것을 로페즈 선생님에게 불려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를 ‘기도와 말씀 봉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배우는 시간이고 말씀 봉사는 그 배운 것을 가르치는 시간입니다.
초대 교회 때 사도들이 바빠서 부제 일곱을 뽑았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삼위일체 신비에 온전히 참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사도 6,2-4)
기도와 말씀 봉사로 삼위일체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할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기도와 말씀 봉사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삼위일체 신비에 참여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사랑하지 못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구원에서 제외된다는 뜻입니다.
저는 ‘개는 훌륭하다’에서 개를 키울 자격이 없는 수준의 견주가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코비라는 보더콜리를 키우는 모녀인데 강형욱 훈련사의 지시를 전혀 따르지 않았습니다. 코비가 활동량이 부족하여 옷도 찢고 사람도 무는데, 말도 없이 또 다른 강아지 담비를 입양한 것입니다. 코비는 담비를 괴롭히고 담비는 변기 뒤에 숨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도 “쟤네 원래 저렇게 놀아요!”라고 말합니다.
보더콜리는 워낙 지치지 않는 활동량을 자랑하기 때문에 하루에 3번 정도는 산책시켜줘야 하고 엄청난 애정을 쏟아부어야 스트레스가 생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강 조련사는 모녀에게 무릎을 꿇고 담비를 다른 곳으로 보내달라고 청합니다. 그들은 그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에 촬영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그래도 촬영을 이어가기 위해 훈련장으로 코비만 데려오라고 신신당부했지만, 모녀는 담비를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아주 간단한 훈련을 하는데도 견주는 불성실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촬영이 중단됩니다. 모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는 배우러 온 건데…. 그런 쪽으로 훈련을 한 게 없고…. 잘 모르겠어요.”
오늘 복음에서 성령께서는 아드님께 순종하시고 아드님께 영광을 올립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교회를 이어주십니다. 배우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그분께 무릎 꿇는 행위입니다. 그렇게 배운 순종을 알려주는 것이 성령의 역할입니다. 성령의 역할을 할 때 삼위일체에 속하게 됩니다. 삼위일체는 사랑입니다. 순종 없는 사랑은 그래서 있을 수 없습니다. 무엇에 순종해야 할까요? 기도와 말씀 봉사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사제는 매일 미사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인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은 복음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눈이 먼 사람, 귀가 먼 사람은 보고 듣게 해 주셨습니다. 중풍병자는 일어나게 해 주셨고,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나눔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아낌없이 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는 만큼 하느님께서 넉넉하게 채워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목숨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나중에 제자들은 주님을 위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순교의 영광을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근원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과 자손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와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과 멀어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느님께 인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하느님과 더 멀어졌을 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극하신 사랑 때문에 우리를 심판하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어서 구원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요한 1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요한1서 4장 7-12)”
성령의 친교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줍니다. 성령을 체험한 사도들은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었습니다. 사도행전은 그 모습을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때에 예루살렘에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말소리가 나자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 그리고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어리둥절해하였다. 그들은 놀라워하고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사도행전 2장, 4-11)” 성령의 친교는 교회의 직분에 다양한 은사를 주었습니다. 어떤 이는 가르치는 은사를, 어떤 이는 예언하는 은사를, 어떤 이는 복음을 선포하는 은사를, 어떤 이는 심령의 언어를 말하는 은사를, 어떤 이는 치유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성령의 친교입니다.
초대교회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체험하였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신앙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제자들과 초대교회 공동체는 삼위이신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 체험이 교회 역사를 통해서 신학이 되고 교리가 된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체험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친교, 나눔, 사랑’의 하느님이셨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권한을 예수님께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권한을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용하셨습니다. 성령은 이제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를 따뜻하게 감싸 주시고, 용기와 힘을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초대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고, 삼위이신 하느님은 교회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가정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친교, 나눔, 사랑이 드러나는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입니다. 아빠의 권위는 가족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하여 행사되어야 합니다. 엄마의 사랑은 가족들을 위한 배려와 희생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아빠의 보살핌과 엄마의 사랑을 받은 자녀들은 가정의 미래가 될 것입니다. 성호경을 할 때마다, 영광송을 바칠 때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살도록 다짐하고 그 은총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신비의 베일을 벗겨 주셨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신비는 어디 하나더냐? 보이는 것 모두가 신비였다. 신비는 창조주 하느님이 감추어 계신다는 뜻이다. 두꺼운 나무 표피를 뚫고 나온 연약한 새싹이 무슨 힘으로 뚫고 나왔지? 하며 신비로워 했고, 아름답게 피어낸 꽃 한송이가 신비로웠고, 일곱가지 색상으로 갖가지 열매 맺는 채소들의 모습을 보다 신비 안에 숨어계신 하느님을 보았다, 그래서 상형문자에서 비롯된 신비라는 단어도 하느님이 감추어 계신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오늘 주일 전례는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낸다. 성품을 받고 강론대에 서면 삼위일체 도리를 말하려다 어려움을 겪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비를 헤아릴 수 있는 여력이 없을 때였다. 솔직히 이 믿을 교리가 신비라고 하면 더 잘 알 수 있도록 도왔을 텐데, 언어적 한계로 또한 믿음의 한계로 매번 했던 강론은 내 것이 아닌 어디서 주워담은 것으로 진땀을 흘렸던 기억이다.
벌써 성품성사 생활도 40년을 맞이하고 있다. 이제 삼위일체 도리가 확실히 감이 온다. 감을 잡은 것이다. 하나의 믿을 도리로 시작했지만 연륜이 쌓이고 이제 교리의 진 맛이 난다. 맛나는 정도를 넘어 감칠맛이 난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알려 주신 덕분이다. 언제나 믿음의 한계를 넘으면 이성과 논리로써가 아닌 하느님 내면의 소리로 참임을 알려 주셨다. 이제 뜬구름 잡지 않는다.
하느님은 나에게 사랑이시다. 어려움이 있을 때 나에게 믿음의 바람을 불게 하셨다. 바로 성령의 바람이 일어 예수님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참인간으로 알게 해 주셨고, 숨어계신 하느님을 볼 수 있고 살아계신 하느님으로 베일을 벗겨 주셨다. 하느님은 삼위일체로 계시며 나를 사랑하신다.
지극한 흠숭을 받으시는 하느님 세분이시며, 온전히 사랑으로 하나 되신 한 분이신 하느님, 나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며 하느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린다. '야훼이레' 하느님께서 모든 것 마련해 주시니 하느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으로 드러나시는 하느님이 바로 한분이신 하느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이하면서 성자 예수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이끄심이 여러분과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우리가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왜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성부, 성자, 성령의 하느님으로 우리에게 드러나셨는지 근본 이유가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사랑입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세상을 창조하셨고,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고,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십자가의 재물이 되시면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주셨고,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성령을 통해 구원으로 이끌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7장에서 보면 예수님의 대사제의 기도에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우리가 그저 선입견만으로 삼위일체의 신비는 그저 헷갈리는 어려운 교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신비는 바로 예수님께서 성부와 성령과 하나이듯이 우리도 역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룰 수 있도록 우리를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위대하신 사랑입니다.
예전 우리 영화중에 ‘달마야 놀자’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전체 줄거리는 조폭들이 절에 숨어들어가 스님들과 생활하는 내용인데, 거기에서 보면 서로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는 것을 걸고 조폭 팀과 스님 팀이 게임을 하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게임 중에 물독에 물을 먼저 채우는 게임이 있었습니다. 게임이 시작되고 열심히 물을 채우지만 물이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물독의 밑바닥이 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아챈 순간 조폭두목이 그 항아리를 연못에 던지게 되고, 그렇게 연못에 던져진 물독은 자연스럽게 물이 채워지면서 결국 조폭들이 승리하게 됩니다. 그 때 그것을 바라보시던 주지스님이 이렇게 말했었습니다. “나도 네들같이 깨진 물독을 내 마음의 연못에 던졌어.”
삼위일체의 신비는 어쩌면 이와도 같이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깨진 물독과 같은 우리 모두를 당신의 마음의 연못에 품으신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그 하느님의 품에 우리의 몸과 마음을 던질 때 우리도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16)
성부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성자 하느님도 사랑이시고,
성령 하느님도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사랑이신 한, 성부, 성자, 성령 간에 친교를 이루십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본질적으로 그 자체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우리가 살아가야 할 본질적인 조화입니다
우리 모두 이 신비를 살아낼 수 있습니다
복음의 아름다움은 일치를 살고 우리 상호간의 조화를 증거하라고 요구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삼위 일체 강론 중)
우리의 삶속에서 이 아름다운 신비의 사랑을 증거하고 살아가게 하소서.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when he comes
한현택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신학을 아무리 공부해도 삼위일체의 신비는 이해하기도 어렵고 설명하기는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매년 삼위일체 강론을 준비할 때마다 같은 고민에 빠집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삼위일체라는 신앙 고백은 학자들의 연구에서 나온 고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초기 교회의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음의 두 가지 진리를 자신들의 피부와 영혼으로 체험하였습니다.
1)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시구나! 그리고 그분은 하느님의 권위로 말씀하시고 행동하셨지! 그분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시다!
2) 예수님의 몸은 이제 지상에서 보이지 않으시지만, 그분께서는 우리 곁에 신비롭게 현존하고 계신다! 또 그분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영이 우리의 활동을 이끌어가시는구나!
이 체험들을 통해, 교회는 공의회들을 통해 다음의 진리를 명문화 합니다.
1) 예수님은 완전한 하느님, 완전한 인간이시다.
2) 성령께서는 하느님과 같은 영광을 받으신다.
교회 구성원들의 이 모든 체험과 논의를 한 단어로 압착한 것이 "삼위일체"(Trinitas)입니다.
삼위일체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무엇보다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흠숭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구원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기도 합니다.
1) 예수님께서는 성자 하느님이시다.
2) 그런데 그분은 또한 완전한 인간이기도 하시다.
3) 또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실 때,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벗어두고 하늘로 오르시지 않으시고, 당신의 인성과 함께 승천하셨다.
4) 그러니 예수님과 같은 인성을 지니고 있는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신성과 하나 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잇는 다리이시다.
5) 하느님께서는 단순히 어떤 선물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당신과 일치하기를 바라시고, 은총으로 그렇게 이끄신다.
6) 이렇게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 다시 말해 하느님화(deificatio) 되는 것이 인간의 구원이다.
7) 따라서 하느님과 이웃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과 하나가 될 것이다.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시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천국의 문이 활짝 열려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만해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가슴이 뜁니다.
하지만 인간은 아무리 누군가를 사랑해도 다른 인간과도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불완전함 앞에서 인간은 늘 목마름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 목마름은 오직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 일치할 때 완전히 채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느님은 그 영원한 일치로 우리를 초대하고 이끌어주십니다.
지극히 엄위하신 삼위일체의 신비를 찬양합시다!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은 초기 교회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에 대해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라고들 합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이해하려 하지 말고 그저 믿는 것이라고요. 우리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라는 말을 통해서 기도를 시작하고 끝을 맺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삼위일체를 고백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삼위일체의 근본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끝이 없는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이신 성부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서 본성으로써 같은 아들 성자 하느님이신 말씀이신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또한 우리들을 위해 희생하신 성자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대신해 성령 하느님을 보내셨지요. 바로 이것이 우리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본성으로 같은 분이신 예수님과 성령을 보내주심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증명해주셨던 것입니다. 저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사랑의 신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신비의 중심은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랑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들 모두가 하느님의 이러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이며 더불어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하느님의 참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삼위일체 대축일을 보내는 진정한 의미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매일 매일 하느님으로부터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느끼지 못한다면 누구의 탓일까요. 바로 세상의 유혹에 쉽게 빠지는 우리들의 탓입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보내셨고 그리고 성령까지 보내시며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셨으며 단 하루도 우리들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알려주십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을 외면하였으며 부족한 자신을 탓하기보다는 하느님을 탓하거나 원망을 하며 세상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삼위일체의 뜨거운 사랑의 신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과 자신을 아낌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는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 또는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지 생각하면서 반성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용서가 없는, 받아들이지 않는 악의 길을 걷고 있는 세상의 사람들을 보면서 나 자신은 어떠한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한번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아멘!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3)
김솔 신부님
삼위일체 교리는 인간이 만들어낸 논리가 아닙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느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계시하신 진리입니다.
수많은 신학자들이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든, 사물의 비유를 통해서든,
삼위일체를 완전하게 담아낼 수 없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가장 근접한 설명은 ‘사랑의 관계’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누군가를 궁금하게 합니다.
어떤 일상을 보냈는지, 무엇을 보았고, 누구를 만났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그렇게 일상을 공유하며, 사랑이 깊어지고, 공유하는 부분이 확장됩니다.
생각을 공유하고, 가치를 공유하고, 미래를 공유하고,
마침내 삶 전체를 하나로 묶는 결혼을 맺게 됩니다.
복음은 이를 두고 ‘둘이 한 몸이 된다’(마태 19,6)고 표현합니다.
곧 사랑의 관계는,
삶의 모든 부분을 공유하는 관계,
그래서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관계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살펴보면,
아버지는 성령께 ‘들려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모든 것을 공유하시는 분’입니다.
또 예수님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가지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성령께 그대로 나눠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이고,
‘들은 것만 이야기하시는 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이루시는 일치의 모습입니다.
자기 것을 자기 것으로 두지 않고, 서로를 위해 내어줍니다.
모든 것을 공유하고, 서로에게 통하게 하면서, 완전한 일치를 이룹니다.
사랑으로, 온 존재를 서로에게 내어주는 일치,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성령의 몇 가지 모습이 더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오시는 분’이시고,
‘우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주시는 분’이며,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분’입니다.
곧, 삼위 하느님께서 진정한 일치를 이루는 사랑,
함께 공유하는 사랑이 향하는 곳에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삼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일치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제 2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더 분명하게 들립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습니다.”
분명 삼위일체는 신비입니다.
완전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삼위 하느님의 사랑의 친교가 우리를 향해 있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우리는 삶으로 그 신비를 살아낼 수 있는 충분한 힘이 있습니다.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잠언 8,22-31)는 하느님의 초월적 속성인 지혜에 대하여 말합니다.
현자는 우리 마음속에서 활동하면서 인간적 경험을 통해 하느님을 체험하도록 이끄는 지혜를 모든 피조물에 앞서 존재했고, 우주의 창조에 활동했다고 합니다. 창조에 대한 시적인 아름다운 표현으로서 창세기(1-3장)를 능가하며, 요한복음(1장)을 뛰어넘습니다. 피조물인 이 지혜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연루되어 있으며 만물에 형태를 준 것(지혜 7,22-30; 8,4)은 물론 “만물이 그분의 말씀에 따라 잘 정돈되어 있기”(집회 43,26) 때문에 하느님의 백성은 지혜를 간직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마치 하느님의 구원계획 속에 담긴 무엇인 듯합니다. 하느님과 세상 사이의 중개자와 같은 이런 지혜를 추구하도록 부추기면서 구원에 대한 확신을 주기 위해 지혜가 인격체가 되어 말을 하는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지혜는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며’(2,6)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하느님의 속성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지혜를 얻으면 생명을 얻게 되고, 지혜를 잃으면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은 물론 죽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8,35-36) 합니다. 하느님의 백성 앞에 제시된 삶과 죽음, 축복과 저주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했듯이(신명 11,26-31) “하느님의 지혜”(1코린 1,24)를 택하느냐 아니냐가 구원을 좌우한다고 합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도(마태 11,28-30; 요한 1,1-3; 1코린 1,21-31; 콜로 1,15-17) 이 내용을 인용합니다.
복음(요한 16,12-15)은 성령의 활동과 더불어 성자와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의 시기가 끝났기 때문에 제자들이 더 이상 당신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오시면 예수님을 믿지 않은 죄와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힐(16,8) 것이고, 제자들을 진리의 핵심으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12-13ㄱ). 성자께서는 성부에게서 들은 말씀을 제자들에게 들려주셨으며, 성령께서는 그 말씀을 다시 제자들에게 일깨워주시면서 성자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13ㄴ-15). 성령과 성자는 둘이지만 활동에 있어서는 모두 성부의 일을 하십니다. 이것을 위격은 다르지만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알려주었음에도(15,15) 아직도 하실 말씀이 많이 있는데 제자들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말하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제자들과 함께 있는 동안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관해 모두 말해주셨지만 제자들의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인간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8,28)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드님의 이름으로 보내실 진리의 성령께서 오셔야만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모두 기억하는 가운데 예수님에 관한 계시를 감당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14,25-26). 성령께서는 성자의 말씀을 기억하고 깨닫게 해주시는 해석자이십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성자의 시대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자의 가르침을 깨우쳐주기 때문에 성자께서 성령과 함께 말씀으로 우리 안에 머무르시게 됩니다. 비록 성자의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머무름이지만 인성을 취하신 성자의 떠나심은 오히려 성자를 다시 만나게 할 것입니다(16,16). 성령께서 전해주시는 성자의 말씀과 사랑은 성부께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의 완전한 일치 안에서 공유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제자들에게 전해주실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 성부께서 “위의 구름을 굳히시고 심연의 샘들을 솟구치게 하실 때, 물이 그분의 명령을 어기지 않도록 바다에 경계를 두실 때, 그분께서 땅의 기초를 놓으실 때”(잠언 8,28-29)부터 성자와 성령께서는 늘 함께 하셨습니다. 지금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본성에 참여하리라는(2베드 1,4) 희망을 자랑으로 여기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제2독서(로마 5,1-5)는 의롭게 된 이들이 누리게 될 희망에 대해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을 위협하는 세력을 다루기(6-7장) 전에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들이 누리고 있는 은총의 상태인 평화를 말하면서(1-2절) 선물로 주어진 성령의 역할을 설명합니다. 죄(6장)와 율법(7장)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적대 세력으로 돌변하는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율법으로 인해 받게 되는 고난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이 고통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덕분에”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솟아오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희망의 근거는 바로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겨내야 할 환난은 오히려 성령의 보호를 통하여 성자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에게 희망에 대한 인내를 자아내게 하고, 그 인내는 덕을 쌓도록 수양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8,2) 또한 우리가 수양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에 바탕을 둔 희망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희망을 가능케 하는 것은 성자의 협조자이신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 때문이라서 우리가 자랑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사랑이 어떤 역경도 이겨내게 하는 불굴의 희망의 원천이기에(8,31-39) 그리스도인은 기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삼위일체라는 말은 없지만 우리를 위한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 안에서 계시된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의 영광을 성자와 성령께서도 누리시고, 성부와 나누시던 사랑을 성자께서는 말씀과 행동으로 세상에 드러내셨고, 사랑이신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들은 것을 제자들에게 기억하게 하시면서 우리를 진리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행동은 다르지만 같은 사랑을 말하고, 방식은 다르지만 같은 실천을 말하고, 역할은 다르지만 같은 의미를 남깁니다. 성자께서는 날마다 성부께 즐거움이었고, 언제나 성부와 함께 지으신 땅(아버지의 그늘)에서 일하시면서 사람들(제자들)을 당신의 기쁨으로 삼으셨으며, 성부 곁에서 사랑받는 아들이십니다. 성부와 성자를 완전하게 묶어주는 사랑의 끈인(콜로 3,14) 성령께서는 이런 일을 다 보셨던 그대로 제자들을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같은 사랑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실천하시고, 드러내시면서 같은 기쁨으로 삼으신다는 심오한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알거나 상상할 수 있는 사랑보다 훨씬 더 강하고 열정적이며 격렬한 불길과 같아서(아가 8,6-7). 인간이 쉽게 이해할 수 없기에 참으로 엄청난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는 성부의 말씀을 성자께서 직접 하시는 말씀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 속삭이시는 말씀을 통해서 중개하십니다. 그런데 초기교회는 성령의 보호와 가르침을 잘 받아들여서 중개자라는 이름으로 오류들을 끌어들이는 이단적 생각을 막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 4-5백 년 동안은 다신적 개념이라는 뜻에서 삼위일체라는 말을 쓰지 못하게 하다가 하느님 아버지의 그늘, 예수님의 역할,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성령으로 표현하셨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서 성부 성자 성령을 세 위격으로 표현했고, 한 분이신 하느님으로 고백했습니다.
촛불의 빛은 불이 아니며, 빛 또한 불은 아니지만 빛과 불에서 나오는 뜨거운 열로 한 자루의 초를 태웁니다. 삼위일체를 촛불에 비유한다면, 성부는 불이고, 성자는 불에서 나오는 빛이며, 성령은 불과 빛이 동시에 지니고 있는 열입니다. 이렇듯이 삼위일체는 어떤 한 위격이 독점하지 않으시고, 지혜롭게 역할을 나눕니다. 이름이 달라도 나눔에서도 같은 능력을 발휘하시면서 세상 구원을 위한 하나의 목표를 지향하시는 한 분 하느님이십니다. 세 가지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세 가지 역할로 같은 일을 하시고, 세 가지 위격으로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시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삼위일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모든 일을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모든 성사들이 그렇지만, 특히 성체성사는 거룩한 삼위의 일치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우리 공동체 역시 너와 나의 만남이 사랑으로 우리를 만들게 하면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구현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신앙생활 전체는 삼위일체의 신비인 사랑과 기쁨이 깃들어 있기에 어떤 역경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하느님을 희망의 원천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지혜에 탄복하고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아멘.”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등촌3동 한국순교성인 성당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천주의 성 요한 의료봉사 수도회 고상열 리카르도 수사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저희 수도 가족에게 이 자리와 시간을 형제애로 내어주신 심흥보 베드로 주임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면서 주임 신부님의 배려로 오늘 이렇게 모금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코로나 19 펜데믹 상황에서 “이제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우리가 하는 행동의 결과가 이웃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더욱 명백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연대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연대할 수 있다면 이 불안한 시대를 극복하고 구원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돕는다면 모든 이들이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십니다.
여기 서서 보면 어떤 분들은 제 모습을 보고 웃고 계신 분들이 보입니다. 아마도 이 망태 때문에 그러시지요? 저희 수도회가 탁발수도회이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망태를 메고 올라왔습니다. 오늘 저희가 등촌3동 103위 한국순교성인 성당을 찾아온 이유를 아시겠지요?
루카복음 8장 1-3절에 <여자들이 예수님의 활동을 돕다>라는 예수님의 선교활동을 돕는 여인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여인들을 거룩한 예루살렘 여인들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들이 예수님을 물심양면으로 도왔기 때문입니다. 저희에게도 등촌3동 한국순교성인 성당 교우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수도자는 매일 매일 자신을 죽이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자면 세상 것을 내려놓고 오직 하느님을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 축성생활의 본질은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저희는 그 방법으로 이렇게 탁발을 통해 가난하고 병든 이웃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 합니다.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는 500년 전 스페인의 그라나다에서 시작되어 1572년 탁발수도회로 인준되었고, 총본부는 로마에 있으며, 현재 세계 53개국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1958년 진출하여 현재 광주에서는 천주의 성요한 정신 병원과 호스피스 병동, 정신장애인을 위한 사회복귀시설 요한 빌리지, 동구 정신건강센터, 알코올 중독 회복을 돕기 위한 광주 북구 중독센터와 취업을 위한 늘품 센터, 어르신들을 위한 광주공원 노인복지관, 재가 복지 센터, 전남 담양에서 메니 노인전문요양원, 서울 강서구에서는 지적발달장애인을 위한 늘푸른나무 복지관, 보호작업을 위한 그라나다센터와 카페, 그룹 홈 푸른터 3곳과 주간보호시설 늘푸른집, 생활시설 H2빌, 교육시설인 강서평생교육센터를 운영합니다. 요약하면 자신의 필요와 권리를 스스로 주장할 수 없는 정신장애인, 지적 자폐성 발달장애인과 말기 암 환자, 가족이 돌볼 수 없는 장애인과 생활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앉아계신 자리 앞에 저희 수도회를 소개하는 리플렛이 있습니다. 표지를 보시면 저희 창립자와 관련한 성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열어보시면 기도문이 있습니다. 창립자가 병자와 간호인들의 주보 성인입니다. 이 기도로 환자들을 위해 기도하신다면 영적 위안이 있을 것입니다.
수도회가 이들을 위해서 봉헌의 삶을 살아가는 영성은 Hospitality입니다. 우리말로 의료봉사/환대로 번역하여 사용하기도 하지만 영성적인 의미가 제한되어 요즘은 호스피탤러티로 말하고 이렇게 설명합니다. 호스피탤러티는 주인이 손님을 맞아들여서 예수님 말씀처럼 먼저 마음 열고 다가서고, 그 손님에게 지금 무엇이 필요한지 헤아려서 나누는 것입니다. 호스피탤러티 영성은 성경 여러 곳에 배여 있는데 특히 저희는 루가복음 10,25-37의 착한 사마리아인을 복음적 토대로 살아갑니다.
이 영성은 “멈추고, 보고, 행하라.”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시간관계상 지금 이 자리에서 더 깊이 있는 말씀을 드릴 수는 없지만,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자세히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예수님 사랑 안에 함께 머물러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희 수도자들에게 있어서 다른 것은 몰라도 병들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멈추어서 보고 다가서야 합니다. 지금 저에게 예수님 사랑 안에 함께 머물러야 하는 이들은 함께 살고 있는 발달장애인들입니다.
저희가 개화동에서 함께 살고 있는 발달장애인 중에 저의 아들이라 하는 요한이가 있습니다. 요한이는 다른 시설에서 생활하다가 2017년 7월에 우리 집으로 옮겨왔습니다. 다운증후군이고, 150m의 왜소한 체구에 언어로는 어떤 의사 표현이 어렵고 오직 눈빛과 몸짓으로 소통합니다.
누구보다 더 마음이 기울었던 여러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처음 우리 집에서 식사할 때 본 모습이 시작입니다. 음식을 씹지 않고 본능적으로 삼키는데 그 음식이 다시 코로 넘어 나오는 일이 반복되어 병원 진료를 받았습니다. 그 결과를 들으면서 저도 모르게 울화가 치밀었습니다. “입천장과 코가 동전만 한 크기로 천공되어있다.”
의학적으로 치료 불가능한 것도, 많은 치료비가 들어간 것 아니었습니다. 그의 고통과 아픔을 조금만 헤아렸다면……. 그가 말로 불편과 고통을 표현할 수 있었거나 가족이 있었다면, 그 누군가 그 사정을 미리 헤아렸다면 26년 세월 동안 그대로 두었을까요? 그런데 요한이는 하루 세 끼 식사를 할 때마다 그런 고통을 겪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시술 후에 정상적으로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좋은 일 하십니다.’ ‘수사님들이 아니면 누가 이렇게 하겠습니까?’ 물론 인간의 눈, 가치로 보면 복지는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하는 일은 다릅니다.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교회가 하는 사도직은 남달라야 하고 고통에 민감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충실히 따르셨던 저희 창립자는 세상에 선한 일을 보여 주었으며, 인간에 대한 연민을 보여 주었습니다. 연민이라는 것은 마음 안에서 뭔가 아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즉 타인의 아픔을 느끼고 그들의 소리를 민감하게 듣는 것입니다. 피가 흐를 때 우리는 산 것입니다. 심장이 뛰어야 합니다. 그래서 심장이 삶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인간 중심의 삶일 것입니다.
등촌3동 한국순교성인 성당 교우 여러분!
지금, 이 순간에도 어쩔 수 없이 누군가의 따뜻한 돌봄이 필요한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웃음과 희망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따뜻한 손을 내어주십시오.
저희 이웃들을 꾸준하게 도와주실 수 있는 후원회원 가입은!!
본당에 들어오실 때 받으셨던 팸플릿의 가입 신청서를 자르셔서 작성해주시고 미사 후 저희 수도자들에게 주시면 됩니다. 부탁드릴 것은 가급적 지로용지보다는 자동이체를 선택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계좌번호가 기억이 안 나시더라도 이름과 전화번호만 명확하게 적어주시면 1주일 안에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수도회에서는 매주 월/화 은인들을 위한 미사, 매월 후원회 미사를 봉헌하고, 저희 수도자들의 기도 중에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기도지향을 원하시는 분들은 신청서 뒷면 <메모하세요>에 구체적으로 적어주세요.
경청해주신 모든 교우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직접 계좌 이체로 도움을 주실 분들은 우리은행, 예금주: 천주의성요한수도회
1005-701-445950으로 입금하여 주시면 됩니다.
좋은 대화, 좋은 관계
남창현 토마스데아퀴노 신부님
한 신자분과 면담을 했습니다. 자녀 문제로 고민 중이신 자매님이셨습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전형적인 내용 같아 무심하게 원론적인 조언을 해드렸습니다. 그러자 자매님의 표정이 다소 어두워지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셨습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그게 잘 안 되네요.” 면담을 마치고 저의 태도를 다시금 돌아보았습니다. 그때 그분의 마음이 어떤지 더 구체적으로 물어봤더라면, 자녀의 상황에 대해 좀더 물었더라면 어땠을까. 앞으로는 어떻게 하고 싶은지 물었다면 어땠을까. 그분의 이야기를 전형적인 이야기가 아닌 그분 입장에 서서 그 난처함과 당혹감을 더 들여다봤다면 어땠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날의 면담은 저에게 실패한 대화의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좋은 대화는 다음의 세 가지로 구성된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경청, 두 번째는 호응, 세 번째가 질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내가 무엇인가를 잘 전달하는 데만 집중해서 이 세 가지를 놓치곤 합니다. 하지만 성부, 성자, 성령께서 스스로를 비움으로써(Kenosis) 삼위가 일체 되시듯, 내 안에 상대방이 들어올 공간이 없다면 대화든, 관계든 걷돌 수밖에 없습니다. 나 중심의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에서 타자 중심으로 넘어갈 때 우리는 진정 일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를 우리는 ‘삼위일체적 사랑’이라 부릅니다.
인영균 클레멘스 신부님
어둔 밤 가로등 아래서 웅크린 채 무언가를 찾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길을 지나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뭘 하고 있습니까?” 웅크리고 있던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금반지를 잃어버려서 찾고 있지요.” 또 물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 가로등 밑에서만 찾고 있습니까?” 금반지를 찾고 있던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기는 밝아서 눈에 잘 보이거든요.” 금반지는 밝은 가로등 아래 있을 수도 있지만, 어두운 길가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으로 확인되는 영역 밖에도 진리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때 진리를 찾기 위해서는 과학적 이성적 지식 외에 다른 방법이 필요합니다. ‘믿음’ ‘신뢰’가 필요한 것이지요.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믿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삼위일체 신비 역시 무엇보다 우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믿어야 보이기 시작합니다. 육신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보기 시작할 때 조금씩 삼위일체의 신비, 곧 하느님은 전능하신 아버지와 진리의 말씀이신 아드님과 만물을 거룩하게 하시는 영으로 계시는 분이시고 동시에 이 세분이 한 분이라는 사실을 알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마음으로 믿는 것은 단 한 순간에 거저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어둡기만 한, 마치 깜깜한 터널을 통과하는 것과 같은 우리 전 인생 여정을 걸쳐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단단해지고 깊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5년 동안 살았다 왔습니다. 거기서 만난 순례자들은 종교와 상관 없이 하나같이 말합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우리 인생의 축소판이다’라고 말합니다. 야고보 사도 무덤이 모셔져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해 걸어가는 800Km가 훨씬 넘는 그 길이 바로 우리 인생길과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두 차례 순례길을 걸었습니다. 저도 그 순례길에서 좋은 사람도 만났고 나와 맞지 않는 사람도 만났으며, 정말 걷기 좋은 상쾌한 좋은 날씨도 만났지만 차가운 겨울비와 눈보라도 만났습니다. 또 좋은 잠자리에서 자기도 했지만 정말 시설이 형편 없는 잠자리에서도 잤습니다. 어떤 때도 날아갈 듯이 마냥 기쁜 마음으로 걸었지만 또 어떤 때는 너무나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은 유혹에 빠질 정도로 무거운 마음으로 걷기도 했습니다. 순례를 다 마쳤을 때 저는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와 동행하셨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나와 같은 순례자로 주님이 나와 함께 걸으셨습니다. 특히 가장 힘들었을 때 진정 주님은 나의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에 순례자로 오셨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전 인생은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순례였다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요한 복음서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아버지께서 친히 여러분을 사랑하시니, 그것은 여러분이 나를 사랑했으며 또한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떠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떠나와서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갑니다”(요한 16,26-27). 이 세상에 순례자로 오신 목적은 단 한 가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드러내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다름 아닌, 당신 아드님을 십자가의 희생제물로 온전히 내어주시기까지 당신 친히 우리의 아버지로 우리의 어머니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힘으로 사랑이신 아버지의 말씀을 들려주셨고, 성령의 힘으로 허약하고 죄 많은 우리를 온갖 질병과 죄에서 치유하셨고, 성령의 그 강한 힘으로 우리를 하느님 사랑에서 떼어놓으려는 악마를 쫓아내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에서 당신 몸과 피를 우리에게 온전히 내어주심으로써,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셨습니다.
이제 지상 순례 여정을 다 마치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부활의 첫 열매인 아버지의 성령을 하늘로부터 우리 마음에 부어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리의 영, 그분이 오시면 여러분을 모든 진리 안에 인도하실 것입니다. 사실, 그분은 자기 나름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자기가 듣게 될 일을 말씀하실 것이며 또한 앞으로 올 일도 여러분에게 알려 주실 것입니다”(요한 16,13). 진리의 성령, 협조자이신 성령, 파라클리토 성령이 우리 마음에 머무시며 우리 내면의 눈이 밝혀주십니다. 우리 자신들이 지금 이 땅에서 하느님 아버지를 향해서, 그분이 계신 하늘 본향을 향해 하루하루 걸어가고 있는 순례자라는 진리를 알게 해 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하나가 된 아드님으로 하늘을 향한 순례길을 걸어가신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아들딸로서 그렇게 순례길을 걷습니다. 참다운 순례자로 걸어갈 때 이제 삼위일체 신비는 더 이상 어둠 속에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몸으로 매일 매 순간 살아가고 있는 실제이며 현실인 것입니다. 순례자로 걸어가고 있는 우리 안에서 아버지, 아드님, 성령께서 하느님으로 하나가 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순례길에서 우리 자신의 약점과 결점을 만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틀거리며 걷기에 불안하고 또 갈 길을 잃어버린 것 같아서 불안합니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 화도 나고 그 화를 다른 순례자에게 쏟아붓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이 하느님 삼위일체의 사랑을 사는 가장 위대한 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사실 우리 순례길에는 폭풍우가 전혀 없는 맑고 찬란한 하늘만 있는 것도, 넓고 잘 닦인 멋진 고속도로만 있는 것도, 맘에 드는 좋은 일터만 있는 것도, 실망과 배신이 없는 좋은 인간 관계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우리를 존경하고 감사하고 사랑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또 이 길에서 사막 한 가운데의 오아시스처럼 위로와 힘도 얻습니다.
하늘 순례자 여러분,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진실한 성숙함, “정말 미안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일 수 있는 투명한 용기, “나는 당신이 정말 필요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신뢰심 깊은 겸손, “참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마음으로 말할 수 있는 진실한 고백이 우리 순례길을 꽃길이 되게 합니다. 이 꽃길이 바로 우리처럼 순례자로 이 세상을 걸어가셨던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우리를 앞서 걸어가셨기에 우리는 그분의 발자국이 찍혀 있는 그 꽃길을 따라 갑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사랑의 꽃내음을 맡으며 걸어갑시다.
하느님은 완전한 일치의 본질입니다. <요한 16, 12-15> 6월 12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말처럼 “완전이란?” 하나 됨에 있습니다. 산에 올라 사방을 보아야 자기가 서 있던 자리가 어딘지 알 수 있으며 생각과 말과 행동의 정확성이 드러납니다.
저는 아침에 일어나 성호경을 놓으면서 하느님의 존재를 우주 안에 현존하심을 의식하며 진실과 사랑을 올려 드립니다.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묵상하면 홀로 계시지 않고, 홀로 일하시지 않고, 독단적이 아니고, 모든 이 안에 모든 것이 존재하듯이 하나로 나타나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 우주에 내가 빨려 들어가듯 일어나서 움직임 속에 하느님의 존재 전체가 제 안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로 현존하심 같이 하느님과 하나 되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아침에 일어나기 힘이 들어도 공동체 안에 하나 되어 기도 주님을 찬미 찬송하는 기도 시간을 기다리며 이렇게 성당에 앉아 있는 저는 행복의 극치에 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고요 속에 30분은 잠에서 일어나 만나는 주님께 “저 당신을 사랑합니다.” 몇 번 반복하고 오늘 저를 하느님 안에 살도록 해주시기를 청하고 그러하리라 확신하며 아침 공동 기도를 준비합니다. “주여, 내 입을 열어주소서. 내 입이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하는 기도의 시작은 천지 창조 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힘을 느끼게 합니다.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시간과 공간에 제가 있습니까?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며 서로 일치를 즐기며 영원에서 여기 시간과 공간 안에 현존하시는 하나이신 하느님을 알고, 믿고, 바라고, 사랑하게 된 것을 찬미 찬송합니다.
혼자이지만 외롭지 않고, 할 일이 없는 것 같아도 온통 할 일이고, 하느님이 하나로 영원으로부터 현존하신 것같이 나도 영원으로 빨려 들어가 하루가 영원으로 살도록 하십니다. 기도 중 시편을 기도하며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이며 영원으로 저를 초대함을 느낍니다.
창조하신 하느님, 구원자신 하느님, 진실과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삶 외 더 필요하고, 귀하고, 함께 할 일이 무엇일까요?
우주적 기도인 성호경을 놓으면서 하나이신 하느님을 찬미하고, 온전히 의탁하고,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사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있을까? 그런 하느님을 인식하고 찾아서 사막으로, 깊은 산골짜기로 나간 선지자들 성인, 성녀들 참으로 복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도 모든 것이 있고, 외로운 것 같아도 우주 전체가 있고, 아무것도 못 가진 것 같아도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이곳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낍니다. 70년 전 선택한 이곳 왜관 분도 수도원에서 이 나이 되도록 살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사는 것 얼마나 행복한 길이었는가? 감사드리며 하나이신 하느님 찬미 찬송합니다.
모두가 하느님 하나 되심을 찬미하며 성호경을 정성껏 몸에 놓으며 감사 찬송하기를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의 최고 표징입니다.
온 인류는 한 우주선을 타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영원한 세상에 가는 여정을 안내자는 어떻게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있어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같은 곳에 도착하여 “여기 오려고 우주선을 타고 있었구나” 합니다. 온 인류는 하느님 아버지에게 초대된 사람들입니다. 하나이신 하느님 집으로 갑시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함승수 신부님
"하느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으로 존재하시지만, 그 본성으로는 하나로 일치하고 계신다"는 '삼위일체' 교리는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핵심적인 내용이지만, '서로 다르면서 동시에 같다'는 그 심오한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또 설명하기도 어려워 '신비'라고 부릅니다. 오죽하면 위대한 교부인 아우구스티노 성인조차 삼위일체 교리를 두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인간의 머리에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규정할 정도이지요. 그렇기에 매년 '삼위일체 대축일'이 되면 사제도 신자도 참 난감해집니다. 사제는 그 신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난감하고, 신자들은 알쏭달쏭한 그 말이 대체 뭔 뜻인지를 몰라 난감해지는 겁니다.
‘삼위일체'라는 개념은 '세 분이신 하느님이 오묘하게 하나로 계신다'는 식으로 이해하려 들지 말아야 합니다. 세 위격이 '어떻게' 일치하고 계시는지 그 원리를 논리적으로 분석하려 들지 말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은 세 분이면서 동시에 한 분이라는 사실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원리'가 아니라 '이유'에, '결과'가 아니라 '마음'에 집중해야만,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가린 무지의 장막을 걷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버지', '아들 예수 그리스도', '성령' 이렇게 세 분으로 계시는 것은 우리를 더 다양하고 적합한 방식으로, 보다 깊고 완전하게 사랑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세상을 '좋은' 모습으로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일은 성부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죄로 인해 하느님과 멀어진 우리를,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는 가장 큰 사랑으로 구원하시고 성체로 양육하시는 일은 성자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도록 진리의 빛으로 이끌어주시고 보호하시는 일은 성령께서 하고 계십니다. 촛불이 빛과 열과 색을 동시에 지님으로써 세상을 온전히 밝히듯, 성부 성자 성령께서 각자의 고유한 방식으로 함께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그 깊고 충만한 사랑의 관계 안으로 초대하고 계신 겁니다. 우리는 그 초대에 응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귀감으로 삼아, 성령의 이끄심에 따름으로써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서 삼위이신 하느님이 사랑의 일치를 이루십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 사랑의 친교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 사랑의 친교는 기본적으로 일치를 지향합니다.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무시와 묵살의 일치를 말하는게 아닙니다. 친밀한 사랑의 관계 안에서 양보와 희생, 배려와 이해를 통해 서로 다른 생각을 하나의 뜻으로 모아가는 부부처럼, ‘일심동체’를 이뤄야 하는 것입니다. ‘일심동체’가 되었다는 것은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면 마음이 하나가 되고, 마음이 하나가 되면 서로다른 너와 내가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가며 기쁘고 행복하게 ‘공존’할 수 있지요. 이처럼 우리도 우리를 위해 사랑으로 하나되신 하느님과 마음으로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마음과 뜻을 적극적으로 헤아리며, 사랑 안에서 내 뜻이 그분 뜻과 하나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과 함께 하는 ‘기쁨의 삶’이 시작되지요.
삼위일체 교리를 ‘신비'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을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해도 삶으로 살아내자는 뜻입니다. 우리는 ‘인체의 신비’를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호흡이, 소화가, 체온이나 맥박 같은 항상성의 유지가 어떤 원리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신비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도 내 몸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신비를 머리로 이해하지 못해도, 나의 노력과 관리를 통해 얼마든지 그 신비를 내 삶 속에서 구현할 수 있는 겁니다. 그것은 ‘사랑의 신비’인 삼위일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 신비의 심오한 의미를 다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드리는 기도 안에서, 우리의 신앙생활 안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이 살아 움직이시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면, 성령께서는 기도하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으로, 성자는 기도하는 법을 알려주시며 중재하시는 분으로, 성부는 기도를 들으시며 응답해 주시는 분으로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그렇게 사랑의 신비가 내 삶 속에서 실현되면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좋은 것들을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요한 16, 1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랑의
위대한 힘을
믿는다.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우리들
생명이다.
삼위일체는
우리의 참된
정체성이다.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은
우리들이기에
소중하고
고귀한
품위를 지닌
사랑의 값진
존재들이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온전한
사랑이시다.
사랑은
사랑의 관계로
흘러간다.
사랑의 관계는
신뢰와
내어드림
확신으로
더욱 깊어간다.
이렇듯
사랑의 본질은
서로의 관계성
안에서
친밀감과 열정
헌신으로
드러난다.
성부의 선의와
성자의 나눔과
성령의 일치로
사랑이신
하느님은
우리를 더욱
풍요롭게
하신다.
삼위일체의 삶에
응답하는 삶이
하느님 자녀들의
올바른 삶이다.
올바른 삶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끄심에
순명하는
삶이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시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과의
관계가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는다.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과 함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랑의 대축일이다.
삼위일체
하느님께
우리의 현실을
전적으로
봉헌하는
은총의
신비이다.
삼위일체는
가장 좋으신
하느님의
뜻이시다.
하느님의 뜻은
가장 좋은
사랑의 나눔이다.
우리의
나눔 안에
함께 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이시다.
전에 제주도에 갔을 때였습니다. 사복을 입고 있었고 제주도의 한 성지에 방문해서 순례를 한 뒤에 나오려는 뒤에 갑자기 뒤에서 이런 외침이 들렸습니다.
“신부님!”
저는 저 말고도 다른 신부가 성지순례를 왔나 보다 하면서 계속 걸어가는데, 다시 뒤에서 “신부님!”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뒤를 돌아보니 한 자매님께서 환하게 웃으면서 저를 보고 계셨습니다. 자신도 성지순례를 왔는데, 뒷모습을 보고서 신부님인 것 같아서 불렀다는 것입니다. 뒷모습만 보고도 저를 알아보신 것이지요. 그런데 제 자신은 이 분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대화를 나눠보니 전에 있었던 본당의 신자였습니다. 이 성당을 떠난 지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를 생생히 기억하셨고, 제 뒷모습만 봐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너무나도 부끄럽고 죄송했습니다. 이분과 달리 저는 이 분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만큼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고 만났다는 증거는 아닐까요? 조금 더 주의 깊게 보지 않았다는 것을, 조금 더 사랑으로 다가서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관심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을 말하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진짜 사랑을 한다고 말할 수가 없겠지요. 어쩌면 주님과의 관계도 이렇지 않을까요?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계속해서 말하면서,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고 그분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내 바로 앞에 주님이 계셔도 알아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사랑으로만이 주님과 하나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내 이웃과도 하나를 이룰 수 있는 힘을 이룹니다. 이렇게 하나 되어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하나 되는 신비를 통해서 다시금 깨닫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끊임없는 사랑을 베푸십니다. 예수님도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푸시지요. 이제 성령을 통해서 인류 역사 안에 그 사랑을 계속해서 베푸십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끊임없는 사랑을 전해 주기 위해서 성격이 전혀 다른 세 위격이 하나가 되는 신비가 삼위일체입니다.
이 삼위일체의 신비에 동참하려면 우리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즉,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사랑을 받는 데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주는데 집중해야 하며, 나를 알아달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사랑을 심는 삶을 살 때,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쁘게 살 수가 있습니다.
행복해야지만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감사한 마음이 행복을 불러옵니다(데이비드 스타인들 라스트).
좋은 삶을 사는 방법
좋은 삶을 사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좋아하는 것을 많이 하고, 싫어하는 것을 줄이면 됩니다. 그런데 이 구분을 명확하게 하지 못하는 우리는 아닐까 싶습니다. 즉,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 지를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때 그때 기분에 따라서 좋다고 또 싫다고 말할 뿐입니다.
언젠가 간호대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간호대를 다니고 있다는 것은 간호사가 되기 위한 것이겠지요. 그래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떤 간호사가 되고 싶어요?”
4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아무도 대답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질문했습니다.
“그러면 왜 이 길을 선택했어요?”
그러자 답이 쏟아집니다. 하지만 실망스러운 답변이었습니다.
“여자 직업으로는 안정적이고 돈도 많이 벌잖아요.”
“최고의 직업이라고 사람들이 말해요.”
“폼 나잖아요.”
실망스러운 마음에 “자신의 삶에 대해 어떤 목표가 없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라고 했더니, “모두 이렇게 사는 것 아닌가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
“우리 엄마, 아빠도 그래요.”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모르는 이유는 목표가 없고 꿈이 없어서가 아닐까요? 그래서 좋아하는 것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싫어하지만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산다면 과연 세상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해줄 수 있을까요?
나와 은총과 진리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한 엄마가 1 살배기 아기를 폐가에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우연히 폐가에서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은 주민들은 당장 경찰에 신고를 했습니다. 잠시 후, 경찰이 도착했을 때 더럽고 차가운 바닥에는 1살짜리 여자아이가 버려져 있었습니다. 경찰은 아기가 최소한 며칠 동안 이곳에 홀로 버려져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 경찰은 추가 조사 후, 아이의 이름이 ‘리자’라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행방불명 상태였습니다. 리자는 몹시 쇠약해진 상태였기에 즉시 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리자는 병원에서 생각지도 못한 한 여성을 만납니다. ‘이나’라는 여성은 리자의 옆 병실에서 아픈 아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이나는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처음 리자를 만나게 됩니다. 보호자 없이 혼자 울고 있는 아이를 보자, 이나는 금세 연민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아들을 찾아갈 때마다 리자의 선물과 옷들을 함께 준비해갔습니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리자를 찾아간 이나는 빈 침대밖에 볼 수 없었습니다. 이나는 병원 직원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고 직원은 리자가 퇴원할 정도로 건강해져 고아원으로 보내졌다고 말했습니다.
이나는 리자가 건강을 찾아 기뻤지만 동시에 깊은 상실감도 느꼈습니다. 그녀는 고아원으로 찾아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리자를 자신의 딸로 입양합니다. 이나는 리자의 엄마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막 2살이 된 리자는 여전히 극도의 공포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어릴 적 트라우마로 음식을 잘 씹지도, 야외에서 걷지도 못했습니다.
그녀는 아픈 아들을 돌보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리자 또한 지극 정성으로 돌보았습니다. 이나는 리자가 자신을 표현하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무용학원에 보내주었습니다. 엄마의 사랑과 지원 덕분에 리자는 조금씩 자신감을 찾아갔습니다. 리자는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지만 굳세게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리자는 미인 경연대회와 장기자랑에서 우승을 휩쓸면서 모델로서 첫 발걸음을 떼었습니다. 리자의 모델 커리어와 인생 이야기는 그녀를 러시아 유명 연예인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10살이 되었을 때 그녀의 친엄마가 이 소식을 듣고 딸과 연락을 하고 싶다고 전해왔습니다. 그러나 리자는 거절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나의 진정한 어머니는 이나입니다. 그녀는 제가 힘든 순간 곁에 있어주었고 저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신 분입니다.”
[출처: ‘폐가에 1살 아기 버렸다가 수십 년 뒤 믿기 힘든 사실 마주한 엄마’, 포크포크, 유튜브]
‘함께 있어줌’과 ‘절대 포기하지 않음’, 이 둘은 함께여야 합니다. 함께 있어주지만 교육을 포기한다던가, 교육은 하지만 함께 있어주지 않으려 한다면 그런 부모 밑에서 아이는 올바로 자라날 수 없습니다. 함께 있어줌을 ‘은총’이라 할 수 있고,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것을 ‘진리’라 할 수 있습니다. 함께 있어줌을 사랑이라 할 수 있고, 포기하지 않는 마음을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은 항상 부모로부터 함께 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실 때 이 두 가지를 충만히 지니고 오셨습니다. 은총과 진리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예수 그리스도는 은총과 진리와 하나이십니다. 이렇게 은총과 진리는 그것을 주는 이와 함께 삼위일체를 이룹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과 함께 삼위일체이신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성령을, 진리로 성자와 함께 하셔서 삼위일체 하느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엄마의 영광을 누리려면 은총과 진리와 항상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은총은 함께 있어주는 것’이고 ‘진리는 가르침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리자가 “나의 진정한 어머니는 이나입니다. 그녀는 제가 힘든 순간 곁에 있어주었고 저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신 분입니다.”라고 할 때, 리자에게 이나는 은총과 진리를 지닌 어머니의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은총과 진리를 갖춰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은 인간이 될 때 그 태어나는 자녀들에 의해 영광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이시고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주시는 ‘은총’이 성령이십니다. 은총과 진리가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고 그 창조자로서의 영광을 받게 만드는 것입니다.
은총은 함께 있어주는 것에서 드러나고 진리는 가르침을 포기하지 않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3년 동안 가르치셨고 승천하시면서도 세상 끝날까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은총과 진리의 충만함입니다.
그렇다면 은총과 진리를 어떻게 지니게 될까요? 받는 수밖에 없습니다. 은총과 진리를 받았다는 것은 새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은총과 진리를 가진 이는 어머니가 되기 때문에 그 은총과 진리를 받은 이는 그 어머니로부터 반드시 태어났어야 합니다. 태어난 이들이 지니는 것은 부모로부터 받은 은총과 진리입니다. 우리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한 그리스도로부터 새로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은총과 진리를 내보내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그 사람은 창조자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창원 씨가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돈을 안 가져온 것에 대해 심하게 나무랐을 때 자신 안에 악마가 들어왔다고 말합니다. 부모와 선생님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려주었지만 그들에겐 은총이 없었습니다. 진리는 있지만 은총이 없을 때 아이는 올바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가르침을 따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어떤 늑대들은 인간의 아이들을 키워주었습니다. 젖도 주고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것들은 은총은 있었지만 진리는 주지 못했습니다. 은총도 늑대 수준의 사랑이고, 진리도 늑대 수준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아이들을 인간으로 성장시킬 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 늑대들은 늑대 수준의 영광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려면 하느님이 되어야 합니다. 올바른 은총과 진리를 주기 위해서는 그 은총과 진리로 하느님처럼 완전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자녀들로부터 영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인간에게 받는 영광과 차원이 다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영광을 받으시는 이유는 하느님의 사랑과 가르침을 내려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으로 사랑합시다. 하느님으로 가르칩시다. 이것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완전함을 닮는 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물을 인식하는 2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추하고, 생각하는 인식입니다. 문학, 철학은 이런 방법으로 인식합니다. 다른 하나는 경험하고, 체험하는 인식입니다. 예술, 과학은 이런 방법으로 인식합니다. 아이는 어떤 방법으로 인식할까요? 아이는 경험과 체험으로 세상을 인식합니다. 어머니가 누군지 모르지만, 어머니의 사랑을 체험하면서 어머니를 알게 됩니다.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지만, 아버지의 손, 아버지의 가슴을 체험하면서 아버지를 알게 됩니다. 형제, 자매가 누군지 모르지만, 함께 뒹굴면서 형과 동생을 알게 됩니다.
1991년 12월에 운전면허를 땄습니다. 28년 동안 운전을 하지만 자동차의 구조나, 자동차의 기능은 잘 모릅니다. 운전은 좀 큰 신발과 같다고 생각했고, 가능하면 안전하게 운전하려 합니다. 운전의 목적은 원하는 곳으로 안전하게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차의 구조와 기능은 몰라도 운전할 수 있습니다. 차의 기능과 구조를 알면 좋겠지만, 올바른 운전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교통신호와 교통법규를 준수해야 합니다. 운전자, 자동차, 교통법규는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야 안전 운전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교회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어떻게 인식하였을까요? 철학적인 사유와 생각으로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알려주는 교회의 전승이 있습니다. 위대한 교부인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신학적으로 풀어보려고 하였습니다. 생각해도, 생각해도 어려웠습니다. 그런 어느 날입니다. 성인이 바닷가를 거닐고 있는데 한 아이가 작은 웅덩이에 바닷물을 손으로 퍼 담았습니다. 성인이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무슨 일을 하니? 아이가 대답하였습니다. 저 바닷물을 이 웅덩이에 모두 담으려고요. 성인은 아이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란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아이도 성인에게 ‘지금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인간의 머리에 담아내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일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뒤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인간의 생각으로 해결하지 않았고, 신비로 남겨두었다고 합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한 분이신 '하느님'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고 믿었지만, 그 "한 분이신 하느님 안에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시다."는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 9)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요한 14, 10)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 10, 30)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성령의 역할에 대해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요한 16, 13) 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라.”(마태 28, 19)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대해서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예수님의 공생활을 통해 계시가 된 하느님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교리는“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역사 안에서 드러난 삼위의 역할을 통해 본다면, 세상을 창조하신 일은 성부께서 이루셨고, 죄로 인해 하느님과 멀어진 인간을, 자신을 완전히 내놓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인간을 구원하신 일은 성자께서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도록 우리에게 깨달음과 능력을 주시며 성화의 길을 가도록 해 주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이는 마치 촛불이 정전(停電)되었을 때는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역할을 하고, 어떤 것을 태우거나 녹일 때는 '열(熱)'로서 역할을 하고, 어떤 장식 할 때는 갖가지 '색(色)'으로 예쁜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촛불은 항상 빛과 열과 색을 같이 지니고 있듯이 세상 창조와 구속사업과 성화에 항상 성부 성자 성령은 함께 계십니다.
초대교회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체험하였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신앙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말을 배울 때 문법과 이론을 먼저 배우지 않고 체험과 반복을 통해서 배우듯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도 이론과 신학이 먼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과 초대교회 공동체는 삼위이신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 체험이 교회 역사를 통해서 신학이 되고 교리가 된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체험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친교, 나눔, 사랑’의 하느님이셨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권한을 예수님께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권한을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용하셨습니다. 성령은 이제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를 따뜻하게 감싸 주시고, 용기와 힘을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초대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고, 삼위이신 하느님은 교회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가정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친교, 나눔, 사랑이 드러나는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입니다. 아빠의 권위는 가족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하여 행사되어야 합니다. 엄마의 사랑은 가족들을 위한 배려와 희생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아빠의 보살핌과 엄마의 사랑을 받은 자녀들은 가정의 미래가 될 것입니다.
본당 공동체에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친교, 나눔, 사랑이 드러나야 합니다. 불화와 대립을 극복하고 화해와 일치의 삶을 사는 것,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누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의 이상입니다. 성호경을 할 때마다, 영광송을 바칠 때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살도록 다짐하고 그 은총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오늘 특별히 우리 정릉동 본당의 주보 축일이기도 합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이 모든 교우 분들의 가정에 함께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삼위일체란 하느님께서 성부 아버지 하느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님, 성령님으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는데, 그 하느님이, 각기 다른 하느님이 아니라, 한 분이신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곧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세주 하느님으로 드러나시고, 성령께서는 언제나 성부와 성자와 함께하시며 우리에게 늘 힘이 되어주시는 성령님으로 다가오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바로 우리의 구원의 역사 속에서 당신 자신을 아버지, 아들, 영으로 드러내시는 것이며 이러한 하느님을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예화를 하나 들려드리자면 어떤 형제가 있었는데 그 형제는 집에서 정말 훌륭한 가장으로서 너무나도 지극한 사랑으로 자녀들을 키우는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그 형제는 또한 학교에서는 수많은 학생들을 바르게 양성하는 최고의 선생님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한 그 형제는 자신의 아버지에게는 너무나도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형제는 집에서는 사랑이 지극한 아버지로서, 학교에서는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님으로서, 또한 자신의 아버지에게는 효성이 지극한 아들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는 데, 각기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세분의 위격으로 드러나시지만 한 분이신 하느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왜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의 모습으로 드러나시는가?’ 입니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사랑’입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우리를 세상에 만드셨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육화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당신의 영을 보내주시며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고백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내면서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마음 속 깊이 담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을 받은 우리도 역시 그 하느님의 사랑과 함께하며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이들을 위해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곧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사랑 안에서 하나이듯이 우리도 그 사랑 안에 머물며, 그 사랑을 또한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랑의 사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비움의 사랑, 삼위일체 영성
곽승룡 비오 신부님
우리는 성경에서 삼위일체 하느님 곧 성부 하느님, 성자 그리스도님, 사랑의 성령님께서 활동하시는 신적 위격들을 발견한다.
성경의 삼위일체 신앙은 성삼위의 상호 친교와 상호 사랑으로 드러난다. 성삼위가 서로에게 내어주는 비움의 영성이 삼위일체 신앙의 핵심이다.
이처럼 성경에서 그리스도교의 특징이 삼위일체 신앙으로 나타난다. 그래서일까 삼위일체란?
"하느님께서 성령으로 사람이 되신 강생의 신비"를 말한다.
성경에서 친교란? 자신을 내어주는 비움이다. 이 사랑이 삼위일체 신앙의 핵심이다.
한편 교회의 역사인 성전(聖傳) 안에서 삼위일체 신앙이 형성되었다.
니케아 공의회(325)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에서 선포된 성자와 성령의 하느님과 동일한 본질의 호칭을 통해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앙을 고백한다.
유다인들과 그리스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받아들이기는 매우 어려웠다. 성령도 하느님이라고 수락하기는 더더욱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역시 "하느님이 사랑이라는 본질"을 받아들여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만날 수 있었다.
이처럼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의 성경과 교회의 역사인 성전을 통하여 그들 그리고 오늘의 우리도 삼위일체 하느님을 신앙고백한다.
하느님은 아버지,그리스도는 아들 하지만 성령은 이들에 비해 불분명하게 드러난다. 사랑은 본디 명확하지 않는듯 은근히 움직인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 13)
특히 성령은 위로자, 조명자, 변호자이신데, 오늘 복음에서는 진리의 영으로 불리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 스스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 6)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의 영을 우리에게 보내실 때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진리는 두 가지의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선포되는 진리요, 또 다른 하나는 이해되는 진리이다. 성령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움직이신다.
교회는 성령의 조명 없이 신적 진리를 말할 수 없다. 예언자들과 교회에 이와 같이 성령의 조명으로 말씀이 선언되고 이해된다. 교회와 믿는 이들의 목소리는 성령의 조명 없이 이해될 수 없다. 영의 조명이 없는 복음은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요한 복음사가를 그리고 있는 매우 유명한 러시아 이콘이 있다. 이 이콘 성화는 높은 곳으로부터 영의 감도를 듣고 있는 자세 곧 머리를 들고 있는 요한 복음사가를 표현하고 있다. 우리도 내 뜻과 내 머리를 넘어 늘 몸과 마음과 머리를 위로 들어 영의 비추심(영감)으로 진리를 선포하고 이해하여야 한다. 성령은 진리를 선포하고 밝히시어 우리를 진리 안에서 살아가도록 인도하신다.
곽승룡 비오 신부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예언자나 율법교사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말씀을 많이 하셨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모세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라고 가르치셨다. 구약의 그 어떤 예언자도 모세의 권위를 교정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모세의 가르침은 구약성경의 가장 근본이기 때문이다. 또 예수님은 “너의 죄는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시며 병자를 고쳐주시기도 하셨다. 이에 율법학자들이 놀라며 예수님이 인간인 주제에 감히 하느님이나 할 수 있는 말을 한다며 예수님을 없앨 모의를 꾸미기도 한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까지 하신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체험하고 나서는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살아계시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하기 시작한다. 처음부터 제자들이 이것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를 시작했던 것은 아니었다.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듯, 처음에 제자들은 유다교의 회당에서 기도 모임을 가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며,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기 시작한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라고 선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유다교에서도 그리스 문화에서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비웃음이나 박해를 초래하는 일이었다. 교회 내부에서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리우스나 네스토리우스… 이 논쟁은 수백년간 이어져서 마침내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거쳐 451년 칼체돈 공의회에서 예수님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시라는 교의를 확정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성령에 대한 논의도 동시대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교회를 이끌어 가시고, 제자들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성부의 영, 성자 예수님의 영께서도 참 하느님이시라는 교리가 선포되었다. 이렇게 하여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도 신앙의 근본 고백이 되었다. 가톨릭 교회 뿐만이 아니라, 정교회와 개신교까지 삼위일체 교리를 흔들림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이나 신천지처럼 삼위일체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그리스도교인이라고 절대로 불릴 수 없다.
잠시 삼위일체 교리 형성 경위에 대해 알아보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삼위일체 교리의 의미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왜 그렇게 중요할까? 그것은 하느님께서 삼위일체라고 고백하는 것은 곧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느님이 위격으로는 셋이시고 실체로는 한 분이신가? 지상에서 이 신비와 직접 비교 가능한 사건이나 인물은 없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시라는 것을 아는 것은 모두 성경의 계시 덕분이다. 그러나 지상에서 삼위일체와 가장 비슷한 예를 찾으라면 나는 서슴없이 깊은 사랑을 나누는 부부라고 말하고 싶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자신의 자유 의지로 인격적으로 사랑하고, 서로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준다. 그리고 사랑에 조건을 달지 않으며 사랑의 한계를 미리 긋지 않는다. 상대방의 무조건적인 선을 원하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자기가 가진 어떤 것도 아끼지 않는다. 또한 그 사랑은 생명이라는 신비로운 열매를 맺는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 두 인격이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끈이 이 둘을 연결할 때 남편과 아내는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된다. 삼위일체를 흔히 삼각형으로 설명하는 분들이 많은데 이는 내가 배우고 묵상한 공의회의 교부들의 가르침들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삼위일체론에 따르면 굉장히 오류가 많은 모델이다. 삼각형은 “너”를 향한 사랑을 설명할 수가 없다. 성부는 성자를 “너”로 사랑하시며 자기 전부를 다 내어주고, 성자는 성부를 “너”로 사랑하시며 자기 전부를 다 내어주신다. 그리고 이 영원한 사랑의 고리가 하느님의 영, 성령이시라고 나는 믿는다.
이를 바탕으로 성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놀랍게도 “하느님은 관계이시다.”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이미 요한 사도는 요한 1서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가르쳤다. 하느님은 저 멀리 높은 곳에서 초월자로 계시며 세상이라는 무대의 연출자로 계시는 분이 아니시다.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요한 사도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하셨지 “하느님은 사랑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라거나 “하느님은 사랑과 비슷한 분이시다.”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 수 없고,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안다.
고구려 시대의 시 로마 시대의 시나 대중가요 가사의 중심 주제는 언제나 사랑이다. 사랑만큼 사람을 끌어들이는 주제는 없다. 왜 그러한가?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고,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의 문제는 사랑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혼란이 많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들을 생각해보자.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최후의 심판 때에 심판 기준이 오로지 사랑일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구원을 받을 이들이 한 일은 굶주린 이와 헐벗은 이, 병약한 이, 감옥에 갇힌 이들로 대표되는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을 도와준 것이었다. 그러나 저주받을 이들이 한 일은 이들을 무시하고 없는 사람 취급한 것이었다.
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생각해보자. 강도에게 당해서 초주검이 되어있던 사람을 보고 이스라엘의 사제나 레위인은 그냥 지나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돼지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돌보아준다. 사제나 레위가 어떤 사람을 때렸던 것은 아니다. 그들이 율법은 아주 잘 지켰을지 모른다. 그리고 사마리아 인은 율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마리아 인은 죽어가는 사람을 자기 돈과 시간을 들여서 도와주었고, 매일 율법을 읽던 사제와 레위인은 복잡한 일에 얽히기 싫어서 그를 지나쳤다.
마지막으로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비유를 비유를 생각해보자. 이 비유에서 등장 인물에 대한 예수님의 표현조차 놀랍다. 우리는 부자와 권력자의 이름을 잘 기억하지만, 하느님의 책인 성경에는 고통받고 억압받는 이의 이름이 기억된다. 어쨌든, 부자는 라자로를 괴롭힌 적이 없다. 다만, 자기 집 문간에서 몸에 상처가 나서 쓰러져 있는 불쌍한 이를 도와주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게 부자도 죽고 라자로도 죽었다. 그리고 사후에 부자는 고통을 받고 라자로는 위로를 받는다. 왜냐하면 부자는 세상에서 좋은 것을 많이 누렸고, 라자로는 세상에서 고난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렇게 한결 같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이웃의 고통에 무관심한 것이 하느님에게서 가장 멀어지는 방법이다. 그럼 바로 어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가 번 돈으로 내가 누리는 것이 왜 문제냐?”라고 따져 물을 수 있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렇다. 시민법도 그것을 보장해준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주님은 자본주의이지 예수님일 수 없다.
남에게 나쁜 짓을 안 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은 바로 사마리아인을 지나쳤던 사제와 레위, 라자로를 못 본척 했던 부자, 그리고 최후의 심판 때 저주를 받던 사람들이 하던 일이었다. 그들에게는 사랑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길에서 탈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만 행복하면 된다. 우리 가족만 행복하면 된다. 우리 나라만 행복하면 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마음을 갖지 못한 사람이다.
바오로는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참으로 그렇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 비슷한 분도 아니고, 사랑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마는 분도 아닌 “사랑”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우리가 사랑하는 만큼, 그만큼 우리 인생은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큰 돈을 벌거나 전쟁에서 승리하여 역사 책에 아무리 많은 페이지를 장식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인생에 사랑이 없었다면, 그의 삶은 무덤의 몇 바가지의 흙과 인쇄물 위에 쏟아진 몇 병의 잉크만큼의 의미만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크고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작은 일도 사랑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는 실패와 성공이 중요하지 않다. 사랑에는 성공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억압받고 소외된 이들을 “나서서” 도와주어야 한다. 이 사랑의 구체적인 행실들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간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고, 사랑이 있으면 우리는 모든 것들의 모든 것이신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
<삼위일체>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과 나
나뉘면서 갈림 없는 까닭은
당신 안에 언제나 내가 머물고
내 안에 언제나 당신을 품기 때문이지요
당신과 나
다르면서 같은 까닭은
당신 언제나 나만을 드러내고
나 언제나 당신만을 드러내기 때문이지요
당신과 나
홀로이면서 함께인 까닭은
당신 언제나 나만큼 존재하고
나 언제나 당신만큼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당신과 나
구분되면서 하나인 까닭은
당신은 나의 모든 것이요
나는 당신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지요
당신과 나
앞서거나 뒤서지 않는 까닭은
당신 있는 곳이 내 자리요
내 있는 곳이 당신 자리이기 때문이지요.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대축일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이라 하느님 닮은 우리란 점 깊이 생각합시다.
일치란 말을 생각해보면 합치 뜻보다는 동일이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그러니까 성부=성자=성령으로 몸과 말과 행동이 한 주체라는 겁니다.
세상생활에선 함께 공동 같이 섞임 어울림 집단 등 다양하게 씁니다.
성부 성자 성령을 혹시 이처럼 혼동하지 말고 일체라는 점 믿읍시다.
사람만이 아니라 만물은 모두 모양과 질과 결과가 한 주체란 겁니다.
몸말행동이 같아야 인격이 서듯 신앙인은 삼위일체를 닮아야 합니다.
하느님 삼위일체 닮아 인격자로 살자고 널리 알리는 가톨릭이랍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우리는 지난주일 성령강림대축일을 지내며 부활시기를 마쳤는데, 이제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내는 것은 세상을 구원하신 모든 업적은 바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업적임을 다시 한 번 기억하고 감사하며 찬미 드리기 위함이다. 즉 아버지께서 성령 안에서 아들을 통해 이루신 구원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 동시에 삼위일체의 신비의 영광에 대해 흠숭의 예를 바쳐드리는 것이다.
복음: 요한 16,12-15: 아버지의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살아 계신 실체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구원 업적을 통해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삼위의 신비는 소위 ‘위격’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개체성을 통해 실현되는 구원업적들에 의해 그 신비가 드러난다.좀 더 쉽게 말하자면, 만일 우리가 우리에게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나타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다면 결코 삼위의 신비에 가까이 가지를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삼에 대한 계시는 역사적 체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결코 어떤 신학적 이론으로 연역되거나 또는 그렇게 정립되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일깨워주시면서 당신의 구원사명을 완성시켜줄 성령의 선물을 약속하시는 오늘 복음은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15절)
이 말씀에서 우리는 위격의 ‘다양성’이 나타나지만,원초적 ‘단일성’을 언급하고 있다.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구별되지만 모든 것이 공통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그것은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것이며,그 아버지의 것을 아드님과 성령께서 이루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성령의 위격적 특성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해주는 역할과 앞으로 다가올 일들을 알려주는 역할이다.(13절) 요한복음에서‘진리’는 철학적 개념의 존재의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제물이 되신 나자렛 예수를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말한다. 이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지성’이 아니라, 사랑을 동반한 ‘신앙’이다. 즉 그분을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미 ‘진리’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진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할 말이 많지만 그들이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신다.(12절) 이 말씀을 하실 때가 주님의 수난과 죽음의 상황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구원업적을 올바로 알아듣기 위해서도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14절) 성령이 오셔야 했다.
성령은 유일한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신비에 더 깊이 참여케 해주시는 분이시고, 그 진리를 살게 해주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의 진리는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실천적인 실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의 성령’은 ‘생동케 하는 성령’이 되신다. 그래서 우리 모든 신자들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살도록 노력함으로써 자신 안에 성령께서 현존하심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은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13절) 요한복음에서는 “연대기적 차원에서의 미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종말론적 해석에 비추어 현재를 해석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우리가 역사를 그 종말의 빛에 비추어 해석한다면 비록 지금 당장 배반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끝날지라도 그 때에는 승리의 카드가 사랑이 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은 부활하셨다. 분명히 패배한 그 사랑만이 유일한 승리의 실체가 된다.”(B. Maggioni, in I Vangeli, Assisi 1975, 1614)
제2독서: 로마 5,1-5: 사랑 안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로
여기에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들은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1절),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심으로써 보증해주시는(5절)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2절)의 은총을 누린다고 말하고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충실히 이끌어 주시는 분이시다.
성령은 우리 마음을 차지하시어 우리 행위의 내적 원리가 되고자 하신다. 그분이 우리의 내적 원리가 되신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행동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로마 8,14) 우리의 삶을 모두 성령의 인도에 따른다면 우리는 결코 구원에 대한 확고한 기다림 속에서 실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성령 안에 살려 노력하는 삶이 요청된다. 즉 삼위일체의 신비는 추상적인 앎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성령 안에서가 아니면 성령이 무엇인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한다. 하느님은 사랑의 관계로서 하나이신 분이심을 잊지 말고 우리의 사랑의 관계를 통하여 그분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삼위일체의 신비를 깨닫는 것이 될 것이다.
“하느님, 저는 당신의 삼위일체적 생명을 믿습니다.당신 사랑을 통해 그것을 믿습니다. 그 생명의 신비는 당신의 진리를 지켜줍니다. 만일 그 신비가 버려지고 만다면 그 즉시 당신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하느님, 저는 당신 생명의 평화가 우리의 본향이어야 하기 때문에 인간적 이유에서라도 그 생명을 믿습니다.그것은 곧 우리에게 약속된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그 영원한 생명에 희망을 두고 있습니다. 보다 높이 보다 멀리 그리고 그처럼 거룩한 빛을 비추어주는 그 희망의 빛을 저에게서 꺼버리지 마소서. 오 하느님, 그 빛이 꺼지지 않도록 지켜주소서.“(R. Guardini)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대축일다해, 2019년 6월 16일( 요한 복음 16장 12-15절)
아르헨티나 문한림 주교님
사랑하시는 분, 사랑받으시는 분 그리고 또 하나의 사랑!!!
세 분의 사랑 속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당신 자리는 이미 예약되어 있습니다.
삼위일체 대 축일을 축하합니다!!!
오늘 저는 하느님의 사랑을, 15세기러시아의수사이자 성상 화가였던 “안드레이 루블료프”가그린 “삼위일체”이콘을 통해 소개하려 합니다. 이 작품은 세 위격을 지니신 한 분이신 하느님을 매우 아름답게 표현했다는데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삼위일체 이콘’-
성화 속에는 식탁에 앉은 기품 있는 세 천사(참조 Gn 18, 1-15)가 침묵 가운데 부드러운 눈빛으로 상호 긴밀한 교감을 나누고 있습니다. 성자이신 가운데 천사는 성부를 바라보시고, 성부께서는 성령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세분은 성령을 통해 다 함께 식탁 가운데 놓인 속죄를 상징하는 ‘성잔’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오늘 우리가 축하하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느님은 사랑(요한1서4장 8절)이심과 또한 아버지이시고, 아들이시며, 성령 이심을 계시한 것에 기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시는 분은 ‘성부’, 사랑 받으시는 분은 ‘성자’ 그리고 두 분 사이에 흐르는 사랑을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분은 서로 다른 위격을 지니셨지만 같은 위격이십니다. 그리고 서로의 사랑 안에 머무는 “존속적 관계”이므로 단 한분의 하느님이십니다. 이러한 사랑의 공동체가 추구하는 공동의 과제는 속죄입니다. 이는 성화에서 보듯, 서로 주고받는 시선이 속죄의 잔을 집중하고 있는 모습에서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 우리를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하셨으므로(창세기 1장 26절참조)우리 가운데 그분 모습이 반영된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정적이긴 하지만 특히 가족 안에서 나타납니다.
한 가족의 구성원인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녀들이 개성은 다르지만 서로가 자상하게 사랑으로 돌보고 서로간의 선을 찾음으로서 사랑 안에 한 공동체를 형성하게 됩니다.
교황 베네딕도16세는 다음과 같은 덕을 실천에 옮긴다면, 가정은 삼위일체의 사랑을 배우고 반영하는데 가장 적합한 학교라고 단언합니다. 대화, 존중, 신뢰, 대가없이 주는 사랑, 봉사, 인내, 용서, 개방성, 가난한 이에 대한 관심, 사회적 책임 등입니다. 이는 나자렛 성가정이 가장 완벽한 모범입니다(2012년 교황 베네딕트 16세 삼위일체 대 축일 강론참조).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이미 하느님 삼위일체의 사랑에 흠뻑 젖어 있으므로 이러한 덕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제, 성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의 사랑 속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세 분의 천사가 앉아 계신 식탁에 가서 앉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화가는 네번째 주인공의 자리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 자리는 당신을 위해 예약된 자리입니다. 세 천사는 당신을 속죄의 잔 앞에 앉으라고 초대하며 삼위일체의 사랑으로 충만케하여 당신이 그분들과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요한 14장 20절: 17장 22-23절참조). 더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말한다. 네가 내 살을 먹지 않고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생명을 얻지 못 할 것이다(요한 6장 53절참조)”.
만일 당신이 초대에 응한다면, 당신은 삼위일체 공동체의 일부가 될 뿐 아니라, 삶에서 겪는 형제자매들의 고통과 기쁨도 서로 나눔으로써(고린토1서 12장 26절참조) 그들과 삼위일체의 사랑을 반영하며 그들과 함께 공유하며 “한마음 한 뜻이 되어(사도 4장 32절)”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멘.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미사 전례를 시작하며 사제는 회중에게 이렇게 인사를 한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무상으로 받는다. 하느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통하여 드러난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발하시고 한분이신 하느님의 친교가 온전히 이루어 진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 대축일이다. 우리이면서 각각이시고 한분을 이루시는 하느님이시다. 여기서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난다. 오늘 특별히 우리 한반도 남북의 화해와 일치, 친교의 하나됨을 위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기도드리자.
“한 번도 우리가 남의 나라를 침략하지 않은 나라인데, 한 형제가 남북으로 갈라져 70년을 싸우고 있다. 이는 안타까운 일이다. 진정한 평화가 한반도에서 이루어지도록 협력해 주길 바란다.”(문재인 대통령의 스웨덴 의회 연설문 중에서)
최상의 기도
서동신 신부님
삼위일체대축일은 성부 성자 성령 위격으로 참 하느님이요 본성이 하나인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의 거룩한 날입니다. 거룩하신 삼위일체를 기리는 오늘 우리는 풍성한 은혜를 베푸시는 하느님께 무한하게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분은 궁극적으로 하느님 한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최상의 기도는 무엇이며 어떻게 하느님께 올바른 기도를 드려야 할까요?
삶의 스승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71-1327)는 순수한 마음에서 하느님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기도임을 강조합니다. “모든 것을 성취하는 최상의 기도를 향한 사람이 달성할 수 있는 위대한 행위는 순수한 마음에서 나옵니다. 하느님을 추구하기만 하면 모든 좋은 것과 함께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보통 기도를 한다고 하면 초심자들은 자꾸만 하느님께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느님을 찾으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음에도 매혹적인 사랑, 기복적인 재물, 절대적인 권력을 얻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하느님을 찾기 보다는 엉뚱하게도 피조물에 집착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의 옛말에 “제사보다는 잿밥에 관심 있다”는 말이 딱 그 말입니다. 하느님의 창조질서가 피조물 안에 있고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보다 피조물에 집착하는 것은 하느님 자녀로서의 도리가 아닌 것입니다.
한편 영적 진보에 이르고 완덕에 다다른 사람은 하느님을 구하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기도임을 신앙의 감각으로 압니다. 최상의 기도는 하느님을 구하는 것입니다. 순수한 마음에서 최상의 기도가 잉태되고 위대한 행위로 하느님과 합일하여 지복을 누리는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열심한 어떤 이는 젊은 시절에는 “주님, 나에게 세상을 개혁할 힘을 주소서”라고 전적으로 기도했습니다. 중년에 이르러서는 “주님, 나와 만나게 되는 모든 사람들을 변화시킬 은총을 주소서”라고 빌었습니다. 이제 노인이 되어 죽을 날에 다다르자 “주님, 하느님 안에서 저 자신을 고칠 은총을 주소서”라는 최상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내 자신 안에서 하느님을 구하는 최상의 기도를 젊은 날에 바쳤던들 훨씬 풍요롭게 마지막을 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마다 하느님을 찾아 자기를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외적인 상황을 변화시키려고만 하니 안타까울 수밖에요.
여러분, 하루 종일 마음에 품어 기도해 볼까요? “당신이 하느님을 추구한다면 좋은 것과 하느님과 함께 모든 것을 다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집시다. 편안하게 긴장을 풀고 모든 것이 흘러가게 놓아 두십시오. 근심 걱정으로 애태우면서도 기도하지 않은 순간을 기억합시다. 하느님을 찾아 머무는 초연한 이 순간 어떻게 상황이 달라지고 있습니까?
“주님, 제가 순수한 마음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이 창조한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최상의 기도가 당신을 찾는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니 피조물에 집착한 나 자신을 잊어버리게 해 주십시오. 흐트러지지 않은 순수한 마음으로 당신의 길을 오롯이 따라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아멘.
그리스도의 사랑
노우재 신부님
죄는 세력입니다. 죄는 사람이 짓지만, 사람은 죄의 지배를 받습니다.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제 죄를 짓지 말아야지 결심하지만, 이 결심 자체가 죄에 의해 잠식당하기 때문입니다. 죄는 인간의 도덕적 잘못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인간의 내면과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어두운 힘입니다. 인간 영혼의 작용을 기억, 지성, 의지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죄는 먼저 기억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상처 받은 일, 부정적인 감정, 보기 싫은 사람이 마음 안에 있으면, 기억은 죄스러워집니다. 문득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면 의지가 흔들립니다. 선하게 용서하고 이해하며 살아야지 마음먹었는데 그 마음이 꺾이는 것입니다. 지성도 곧바로 뒤틀립니다. 나에게 잘못했는데 왜 용서해야 하지, 생각이 비틀어지는 것입니다. 죄는 이렇게 인간 내면을 지배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죄입니다.”(로마 7,15.17) 바오로 사도의 고백입니다. 죄의 지배 안에 있으면 마음이 어두워지고 얼굴이 그늘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해주셨습니다.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도 밝아지고 얼굴도 환해지며 새롭게 됩니다.
삼위일체 대축일(다해)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오늘 제1독서(잠언 8,22-31)는 지혜는 하느님의 초월적 속성을 말합니다.
인간의 마음속에서 활동하시면서 인간적 경험을 통해서 당신을 체험하도록 이끄시는 하느님의 지혜를 묘사한 것인데, 창조에 대하여 이렇게 시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한 것은 창세기(1-3장)를 능가하며, 요한복음(1장)을 뛰어넘습니다. 인성(persona)이나 위격(hypostasis)을 표현하는 지혜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연루되어 있으며(지혜 8,4) 만물에 형태를 준 것(지혜 7,22)은 물론 “만물이 그분의 말씀에 따라 잘 정돈되어 있기”(집회 43,26) 때문에 하느님의 백성은 지혜를 간직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잠언의 저자는 이런 지혜를 추구하도록 부추기고 용기를 주면서 확신을 갖도록 지혜가 인격체가 되어 말을 하는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지혜는 창조 이전에 존재했었기에 여성으로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여성으로 표현됩니다.
지혜는 마을 어귀와 언덕, 그리고 길거리에서 말을 하지만 사실 온 세상을 다 알고 있습니다(27-30절). 지혜는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며’(잠언 2,6) 이스라엘이 추구해야 하는 하느님의 속성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지혜를 얻으면 생명을 얻게 되고, 지혜를 잃으면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은 물론 죽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잠언 8,35-36) 합니다.
신명기 저자가 백성들 앞에서 삶과 죽음, 축복과 저주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듯이(신명 11,26-31) 지혜를 택하느냐 아니냐가 삶과 죽음을 가르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로마 5,1-5)는 의롭게 된 이들이 누리게 될 희망에 대해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을 위협하는 세력을 다루기(로마 6-7장) 전에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들이 누리고 있는 은총의 상태인 평화를 말하면서(1-2절) 선물로 주어진 성령의 역할을 설명합니다. 죄(로마 6장)와 율법(로마 7장)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적대 세력으로 돌변하는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죄와 율법으로 인해 받게 되는 고난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덕분에”(2절) 갖게 되는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2절) 때문입니다. 그 희망의 근거는 바로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5절) 또한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은 성자께서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환난을 이겨내셨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겨내야 할 환난은 우리에게 희망에 대한 인내를 자아내게 하고, 그 인내는 덕을 쌓게 하면서 수양하게 하고, 수양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에 바탕을 둔 희망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성자의 협조자이신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결국 이 사랑이 어떤 역경도 이겨내게 하는 불굴의 희망의 원천이기에(로마 8,31-39) 그리스도인은 기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요한 16,12-15)은 성령의 활동과 더불어 성자와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부분(12-13ㄱ)은 예수님의 공생활의 시기가 끝나기 때문에 제자들이 더 이상 당신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다고 말씀하시고, 성령께서 오시면 제자들을 진리로 이끌어주신다고 합니다.
둘째 부분(13ㄴ-15)은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은 영광스럽게 되신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령과 성자는 둘이지만 활동에 있어서는 모두 같은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격을 다르지만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알려주었음에도 (요한 15,15) 아직도 하실 말씀이 많이 있는데 제자들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못하신다고 하십니다.
제자들과 함께 있는 동안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관해 모두 말해주셨지만 제자들의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내용이며, 다 기억할 수 없는 분량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요한 8,28)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드님의 이름으로 보내실 진리의 성령께서 오셔야만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모두 기억하는 가운데 예수님에 관한 계시를 감당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요한 14,25-26).
성령께서는 성자의 말씀을 기억하게 해주시는 해석자이십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성자의 시대가 과거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자의 가르침을 깨우쳐주기 때문에 성자께서 성령과 함께 말씀 안에 머무르시게 됩니다. 비록 성자께서 죽으시기 전처럼 말씀을 들으면서가 아니라 성자의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인성을 취하신 성자의 떠나심은 오히려 성자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요한 16,16). 성령께서는 영광스럽게 되신 성자께서 하시는 말씀을 전해주실 것이며, 성부와 성자의 완전한 일치 안에서 공유하고 있는 것(말씀과 사랑)을 그대로 제자들에게 전해줄 것이라고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제자들을 진리로 인도하시기 위해 성자로부터 들은 것만을 이야기하실(13절) 것입니다. 성자께서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는 없지만 제자들은 성령의 중재를 통하여 성자께서 하신 말씀을 마음으로 계속해서 듣습니다.
성령께서 가르쳐주시는 말씀은 자기 마음대로가 아니라 성자께서 하신 말씀이며, 성자 역시 자기 마음대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모두 성부로부터 들은 것을 이 세상에 말씀하셨을 뿐입니다(요한 8,26).
물론 이제는 성자께서 하시는 말씀이 귀에 들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마음에 들리는 것입니다.
원래 말을 하신 분은 성령이 아니라 성부이시고, 성자 역시 성부의 말씀을 전하신 것이며, 성령께서는 단지 성자로부터 들은 것을 전해주기만 하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위의 구름을 굳히시고 심연의 샘들을 솟구치게 하실 때, 물이 그분의 명령을 어기지 않도록 바다에 경계를 두실 때, 그분께서 땅의 기초를 놓으실 때”(잠언 8,28-29) 부터 성자와 성령께서는 늘 함께 하셨습니다.
지금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사랑과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기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삼위일체라는 말은 없지만 우리를 위한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 안에서 계시된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성자와 성령의 관계는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관계란 사랑으로 엮여있는 하나 됨을 말합니다(콜로 3,14).
우리가 믿는 주님의 영광을 성자와 성령께서도 누리시고, 성부와 나누시던 사랑을 성자께서는 말씀과 행동으로 세상에 드러내셨고, 사랑인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들은 것을 제자들에게 기억하게 하시면서 진리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행동은 다르지만 같은 사랑을 말하고, 방식은 다르지만 같은 실천을 말합니다.
성자께서는 날마다 성부께 즐거움이었고, 언제나 성부께서 지으신 땅(아버지의 그늘)에서 뛰놀면서 사람들(제자들)을 당신의 기쁨으로 삼으셨으며, 성부 곁에서 사랑받는 아들이십니다.
성부와 성자를 완전하게 묶어주는 사랑의 끈이신(콜로 3,14) 성령께서는 이런 일을 다 보셨던 그대로 제자들을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결국 삼위일체는 같은 사랑이지만 삼위께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실천하시고,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시면서 기쁨으로 삼으신다는 뜻입니다.
삼위일체는 사랑이 없으면 표현도, 이해도 불가능합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아는 사랑보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사랑보다 훨씬 더 강하고 열정적인 사랑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기에 참으로 엄청난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분명하게 확인되는 실재이면서도 때로는 비이성적이며 불투명한 것으로 인식되거나, 논리적이지 못하므로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현상으로 분류되거나, 혹은 매우 뜨거운 사랑과 열정에서 빚어지는 순간적인 환상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삼위일체를 “신비” 혹은 “신비스럽다”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기에 모든 일을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모든 성사들이 그렇지만 특히 성체성사는 거룩한 삼위의 일치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우리 공동체 역시 너와 나의 만남이 사랑으로 우리를 만들게 하면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구현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신앙생활 전체는 삼위일체의 신비가 깃들어 있기에 사랑과 기쁨 때문에 어떤 역경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하느님을 희망의 원천으로 삼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지금도, 여기에서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저는 여러 차례 하느님을 하나님으로 불러도 된다고 얘기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 유일신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이라고 한 것과는 다른 뜻으로 한 분이신 하느님 또는 하나를 이루시는 하느님의 뜻으로 그러니까 삼위일체 하느님의 뜻으로 하나님이라 해도 괜찮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의 삼위일체 교리는 어떻게 세 분이 하나를 이루시는지에 대해 설명하는데 애를 많이 쓰는데 저도 그렇고 많은 분들이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하나를 이루시는 거라고 설명하곤 합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지만 사랑이시기에 사랑하시는 성부 하느님이 계시고, 사랑 받으시는 성자 하느님이 계시며, 성부와 성자 사이의 오가는 사랑이신 성령께서 계시다는 설명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면서 저는 제가 저를 사랑하는 것을 예로 듭니다. 그러니까 저는 하나이지만 제가 저를 사랑할 때 사랑하는 제가 있고, 사랑받는 제가 있는 것처럼 하느님도 그러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저의 경우 저의 사랑이 불완전하여 제가 저를 사랑할 때는 일치를 이루다가도 미워하면 하나의 제가 둘로 분열이 되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완전하여 완전한 일치와 일체를 이룬다고도 하지요.
이것이 하느님께서 어떻게 하나를 이루시는지를 설명하는 삼위일체 교리의 한 부분이라면 삼위일체 교리의 다른 한 부분이자 오늘 우리가 축일로 기념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어떻게 삼위일체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가에 대해서입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중요하지요. 우리 구원과 상관없다면 하느님이 삼위이든 천위이든 상관할 바 없고 힌두교의 신처럼 신이 천개이면 어떻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오늘 봐야 할 것은 하느님은 삼위일체로서 우리를 창조하셨고,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거지요.
하느님은 당신들의 완전한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십니다. 이는 부모가 서로 사랑하여 사랑의 결실로 나를 낳으시고, 또 사랑의 계획에 따라 나를 낳으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실 부모가 서로 사랑하지 않았으면 저는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고, 서로 너무 사랑할지라도 자기들끼리만 사랑하고 저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다시 말해서 2세 계획이 없었다면 제가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생겨났어도 저는 사랑 받지 못하고 구박덩어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들이 사랑이시기에 우리를 낳으셨고 사랑으로 낳으신 우리를 그러기에 팽개치지 않고 계속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구원하시기 위해 성부께서는 성자를 보내시고 성령을 보내시는데 오늘 우리는 이렇게 오신 하느님과 하느님 사랑을 느끼며 감격하는 겁니다. 그런데 만일 이런 사랑을 우리가 느끼고 감격할 수 없다면 우리에게 이 축일은 삼위일체 교리나 따지는 아주 메마른 축일일 것입니다.
오늘 저는 선교 협동조합의 센터 축복식을 하는데 그 센터의 이름을 <여기 선교의 집>이라고 지었습니다.
여기서 <여기>란 여기애인如己愛人(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라)의 여기와 지금, 여기 할 때의 여기라는 두 가지 뜻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다른 곳이 아닌 지금 여기 이 집이 바로 하느님 사랑이 모든 이웃에게 전해지는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최초의 선교사시다. 하늘로부터 이곳으로 파견되신 선교사시고 성부로부터 파견되신 선교사시다.
당신 안에서 우리를 창조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어머니들처럼 당신의 분신들인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오십니다. 처음에 오실 때처럼 지금도, 베들레헴에서처럼 여기에도.
그리고 사랑의 성령께서는 이런 사랑을 느끼게 해주시고 그럼으로써 우리 안에서도 사랑이 타오르도록 사랑의 불을 점화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이 사랑의 불이 우리 안에서도 점화되고 <여기 선교의 집>에서도 활활 타오르게 되기를 갈망하머 축일을 지냅니다.
'환난, 인내, 수양은 하나'(요한 16장 12~15)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성령이 너희를 모두 진리안으로'
분열을 일치로 이끄시고 절망을 희망으로 이끄시며 육의 노예를 영의 자유인으로 살게 하시는 분 .
환난을 겪게 될때 인내심이 생기고 인내심은 수양하게 되어 더 나은 사람의 모습으로 변화시켜줍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하나이시듯 환난, 인내, 수양은 하나입니다.
그 어느것도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죠.
환난은 십자가요 인내는 기도이며 수양은 덕행입니다.
십자가, 기도, 덕행의 생활은 영의 힘이며 지혜의 원천입니다
이 길을 걷는 이들은 하나가 됩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요한 16, 15)
김웅태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하느님의 신비를 경축하는 대축일이지요.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시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 이렇게 세 위격으로 계시며, 이것은 우리 믿음의 핵심입니다. 구세사 안에서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드러나셨는데, 구약에서는 성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신 백성으로 삼아 구원에 길로 이끄셨고, 신약시대에 와서는 성부께로부터 파견받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두 제자를 모으시고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 유대인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믿고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자께서는 인류를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 가르침과 십자가의 희생, 죽으심과 묻히심, 부활하심, 하늘로의 승천 그리고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이제 성령께서는교회 시대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교회를 이끌고 계시는 분은 성령 하느님이십니다. 이처럼 인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 위격으로 계시는 한 분 하느님에 의해서 구원의 길로 가고 있는 거룩한 백성입니다.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이해서 하느님 자신의 내재적인 신비 즉 성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지만, 서로 높고 낮음도 없고, 같은 한 분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면서 인류의 구원을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의 은혜를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에 잘 표현되어 있지요.
성부•성자•성령 세 위격이지만 한 분 하느님으로 계시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이 바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앙고백입니다. 좀 길긴 하지만 오늘은 이 신경을 통해 그 의미를 깊이 이해하도록 합시다 :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또한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나신 분을 믿나이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
참하느님에게서 나신 참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나이다.
성자께서는 저희 인간을 위하여, 저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음을 믿나이다.
또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음을 믿나이다.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에서 저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수난하고 묻히셨으며,
성서 말씀대로 사흗날에 부활하시어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심을 믿나이다.
그분께서는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
또한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를 믿나이다.
죄를 씻는 유일한 세례를 믿으며,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리나이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하느님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는 삼위일체로서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내가 일치를 이루어야 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는 어떻게 처신합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을 무엇입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성경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표현입니다.
이 세상과 인간을 만드신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이들과 계약을 맺고 그들을 백성으로 삼습니다.
하느님과 백성의 이야기를 통해 믿음의 역사가 시작되는 셈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처음부터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충실하지 못했고 하느님의 길에서 벗어나 죄를 짓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믿는 이들이 다시 바른길로 돌아올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고 끊임없이 그들과 화해하는 분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자비와 화해는 하느님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창조하시고 함께 길을 걸으며 그릇된 길에서 돌아오라는 호소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이 사랑은 예수님의 구원 역사를 통해 더욱 잘 드러납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되어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십니다.
이제 하느님은 백성의 대표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를 가르칩니다.
이렇게 우리는 그분을 눈으로 보고, 만져보고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1요한 1,1 참조).
인간의 나약함 역시 그대로 지닌 하느님은 길에서 벗어난 인간을 위해 아무도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구원을 이룹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구원의 정점이자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을 주는 사건입니다.
하지만 여기가 끝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후에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고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의 가르침을 기억하게 합니다(요한 14,26 참조).
성령은 교회 안에서, 믿는 이들 안에서 지금도 구원의 역사를 지속해 갑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은 공동체 안에서 드러나는 열매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열매 중에 가장 으뜸은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우리는 이런 하느님을 삼위일체로 표현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이지만 한 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표현입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십니다.
업적과 역할은 다르게 보이지만 서로 구분되지 않는 하나의 역사이고, 이것을 이루는 것 역시 한 분이신 하느님입니다.
우리는 창조부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강림을 통해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구원의 역사와 다양한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끝나지 않은 채 우리 안에서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끄심
임두빈 안드레아(생활성가 가수)
익숙하고 밋밋했던 것도 그 배경과 의미를 알게 되면 깊은 감동이 되어 마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도레미파솔라시도 표기법의 기원은 귀도 다레조(Guido d’ Arezzo, c990~1050)에 의해 확립되었고, 각 음계의 이름은 세례자 요한 탄생 축일 저녁기도 가사 첫머리의 단어들의 약자로써, “하느님을 찬양하며 제자들의 입술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한다.”라는 뜻이 숨어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신앙인인 저에게도 음악은 찬양이 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이유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미사 시간에 성가를 가장 크게 부르던 소년이었습니다.
성가를 부르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의 평화가 느껴졌고 기쁨이 솟아났습니다.
그렇게 저는 청년이 되고 성령님의 이끄심으로 전국을 다니며 봉사를 통해 신자들과 성가의 기쁨을 나누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은총이 있는 곳엔 사탄의 방해가 있고, 인간이 하는 일이기에 오해에서 비롯된 모함과 시기 질투도 있었습니다.
또한 가장 견디기 힘든 시련의 고통은, 10여 년의 시간 동안 겪은 생활의 어려움이었습니다.
한때는 “그냥 포기할까?” 아님 “다른 일을 해볼까?” 하는 갈등과 유혹도 있었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성가를 통해 하느님의 강한 부르심을 느꼈고, 그때 주셨던 “실로 황금은 불 속에서 단련되고 사람은 굴욕의 화덕에서 단련되어 하느님을 기쁘게 한다.”(공동번역성서 집회 2,5)는 집회서의 말씀에서 큰 감동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 인내의 시간 동안 스스로를 단련시키다 보니, 많은 성가를 작곡하게 되었고, 그 결과물들이 여러 성가제의 수상과 많은 음반을 만들 수 있는 보물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지금까지 23년의 시간 동안 생활성가 가수, 작곡가, 교회음악기관의 직무자로 일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셨고, 시련을 통해 단단해지도록 하셨습니다. 익숙함이 지속되다 보면 안주하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세상과 타협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이런 저의 약함 가운데 강함이 되어주시는 자비의 하느님께 의지하고 기댈 수 있음에 위안을 받습니다.
코헬렛 3장 11절을 보면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라는 희망의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그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전에도 계셨고 현재도 계시고 앞으로도 함께 계실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다 보면 하느님께서 그때를 마련해 주실 거라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필리 4,6)
<아타나시오 신경>
최민석 신부님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보편적인 신앙을 확고히 가져야 합니다.
누구든지 이 신앙을 완전하고 손상됨 없이 지키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 받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보편적인 신앙이란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삼위로 한 분 하느님이시고 일체로 삼위이신 하느님
삼위가 혼합되거나 본성이 분리됨 이 없는 한 분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왜냐하면 성부가 한 위로 계시고, 성자가 다른 위로 계시고, 성령이 또 다른 위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은 하나이시며, 영광도 동일하며, 그 위엄도 영원히 공존합니다.
성부께서 계심같이, 성자께서도 그렇게 계시고, 성령께서도 그렇게 계십니다.
성부께서도 창조하심을 받지 않으셨고 성자께서도 창조함을 받지 않으셨고, 성령께서도 창조받지 않으셨습니다.
성부께서도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시고, 성자께서도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시며, 성령께도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성부께서도 영원하시고 성령께서도 영원하시고 성령께서도 영원하십니다.
그러나 세 영원하신 분이 아니고 한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창조되지도 않았고 우리의 이해을 초월한 세 하느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지 않고 인간의 히해를 초월한 단 한 하느님민이 계실 뿐이다.
이와 같이 성부께서도 하느님이시고, 성자께서도 하느님이시고, 성령깨서도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세 하느님이 아니시고 한 하느님이십니다.
이와 같이 성부께서도 주님이시고 성자께서도 주님이시며 성령께서도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세 분의 주님이 아니시고 한 주님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의 진리가 우리로 하여금 각 위가 각기 하느님이시요, 주님이심을 고백하도록 하는 것과 같이
보편적인 신앙은 우리가 세 하느님이나 세 주님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부께서는 만들어지지도 않으셨고 창조되거나 누군가로부터 나시지도 않습셨습니다.
성자께서는 오직 아버지에게서만 나시고, 만들어지지도 않으셨고 창조되지도 않으셨고,나시었습니다.
성령께서는 만들어지지도 않으셨고, 창조조되지도 않으셨고,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셨습니다.
그럼으로 한 성부이지 세 성부가 아니시고 한 성자이시지 세 성자가 아니시고 한 성령이시지 세 성령이 아니십니다.
그리고 이 삼위 안에 먼저 되시거나 나중 되신 분이 없으시고 더 큰 자나 더 작은 자도 없으십니다.
그러나 삼위는 세 위가 영원히 서로 공존하시고, 동등하십니다.
그래서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모든 것 가운데서 일체 안에서 삼위이시고 삼위 안에서 일체이신 한 분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따라서 구원을 받으려는 사람은 누구나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영원한 구원을 얻으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이 되신 것을 신실히게 믿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에 대한 참된 신앙은 우리가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하느님 이심과 동시에 사람이심을 믿고 고백합니다.
그는 시간 이전에 성부의 본성에서 나신 하느님이시며, 그는 시간 안에 자기 어머니 본성으로부터 나신 분이십니다.
그는 완전한 하느님이시고, 또한 이성 있는 영혼과 육신을 가진 완전한 사람입니다.
신성으로 말하면 그는 하느님과 동등하시고 인성으로 말하면 성부보다 낮으십니다.
비록 그가 하느님이요, 또한 사람이시지만 두 분이 아니라 한 분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신성이 육신으로 변화됨으로 말미암아 한 분이 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인성을 취하심으로 한 분이 되신 것입니다.
그는 본성의 혼합을 통해서가 아니라 위격의 일치로 말미암아 완전한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영혼과 육신으로 되어있듯이 그는 하느님이시며 인간이신 한 분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고, 음부에 내려가셨다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사 하느님 오른 편에 앉아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그가 오실 때 모든 사람들의 행위를 행한 대로 아뢰일 것입니다.
그래서 선을 행한자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나 악을 행한 자들은 영원한 불로 들어갈 것입니다.
이것은 보편 신앙입니다. 누구든지 이 신앙을 확고하게 그리고 신실하게 믿지 않으면, 그 사람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아멘.
하느님 같이 되어라 <요한 16, 12-15>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우리의 생활 형태는 하느님이 하나이시고 그분을 통하여 구원의 길에 들어가게 됨을 실천적 신앙의 삶을 서는 것입니다. 성호경, 영광송은 하느님을 닮도록 창조된 사람들 이 모든 것은 하나이신 하느님과 구원을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행위이며 하느님의 본질을 드러내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성부는 성자 성령의 현존과 업적으로 존재의 고귀함이 드러나고, 성자는 성부 성령으로 십자가 죽음의 의미가 드러나고, 성령은 성부 성자의 업적을 거룩하게 하는 하느님께로 이끄는 일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성호경을 놓으면서 그리스도 십자가의 형상 안에 성부, 성자, 성령이 현존하심을 드러내고 믿게 합니다. 하나이신 하느님이 성부, 성자, 성령으로 영광 받으심을 드러내며 하느님께 엎드려 찬미 흠숭 드립니다.
하느님은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그 안에 사람을 가장 귀한 존재로 만드셨으며, 이들을 우리와 같이 만들자 하시며 시편 8장에 말과 같이 우리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고 해답을 얻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라고 하시며 우주 만물을 다스려 더 좋은 것으로 만들게 하셨습니다. 인간이 무엇을 하고자 하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아산 병원에 입원하고 10일간 지내며 상황을 보니 사람들의 움직임, 환자 방문자들의 수는 어마어마합니다. 환자를 검사실에 모셔가고 모셔 오는 사람만 170명, 살려고 찾아온 환자는 3,000명, 보호자 한명 아니면 두명 7,000명 3,000명 환자들의 방문자 알 수 없는 수, 외래환자 알 수 없는 수, 이런 것이 식당만 7곱개 수퍼는 없는 것이 없고 제빵 가게는 아침에 산더미 준비한 빵이 저녁이며 남는 것 없이 다 팔리고 cd 방만 12장소 넘고 그 크기는 대한민국에서 제일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더 놀란 것은 살려고 온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수는 영안실에 가면 수십 명이 매일생깁니다. 이곳에 살려고 왔는데 저 같은 사람은 치료 받을 필요가 없다고 나가서 건강 스스로 잘 챙기면 살 수 있다고 해서 퇴원을 결심 하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의탁하고 평화로이 퇴원합니다. 나는 여기 오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삼위 일체인주일 저는 하느님을 닮은 삶을 살아 주님께 영광 찬미 들이며 명을 다하는 날 까지 살아보렵니다. 다만 많은 느낌을 주시고 사는 것이 무엇이며 참으로 겸손하게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크게 가졌습니다.
하느님에게 모든 것 의탁하고 수도원으로 가서 더 열심히 기도하고 일을 하면서 그날을 기다리며 살겠습니다. 기도해 주신여러분에게 감사하며 기도로 보답하겠습니다. 기도의 효과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안에서 삼위일체로부터 나오는 빛과 광휘와 은총
성 아타나시오 주교의 편지에서(Ep. 1 ad Serapionem, 28-30: PG 26,594-595. 599)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사도들이 전파했으며 교부들이 보존해 온 옛 전승, 즉 가톨릭 교회의 교리와 신앙을 살펴보는 것은 유익한 일입니다. 교회는 이 전승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이 전승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은 누구든지 결코 그리스도인일 수 없고 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도 지닐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알고 있는 삼위일체는 거룩하고 완전하십니다. 외부의 다른 것이나 첨가된 것이 조금도 없으시고, 창조자와 창조된 존재로 되어 있지 않으시며, 완전한 창조력과 완전한 활동력을 지니고 계십니다. 성삼위의 본성은 당신 자신과 같고 나뉨이 없으시며 또 그 활력과 활동은 동일합니다. 성부는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만물을 지으심으로 성삼위의 일치가 보존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전하는 하느님은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꿰뚫어 계시며 만물 안에 계시는” 한 분이신 하느님이십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제1원리이시고 기원이신 성부로서 “만물 위에 계시고” 말씀이신 성자를 통하여 “만물을 꿰뚫어 계시며” 성령 안에서 “만물 안에 계십니다.”
성 바오로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신적인 것들에 대해 쓰는 가운데 다음 말씀으로 만사를 근원이신 한분 하느님 아버지께로 소급시킵니다. “은총의 선물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주님을 섬기는 직책은 여러 가지이지만 우리가 섬기는 분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일의 결과는 여러 가지이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일을 이루어 주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성령께서 각 개인에게 나누어 주시는 은총의 선물들은 성부께서 말씀이신 성자를 통하여 주시는 선물입니다. 성부께 속하는 모든 것은 성자께도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자께서 성령 안에서 주시는 것들도 성부의 선물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실 때 우리에게 성령을 통교해 주시는 성자도 우리 안에 계시고 또 말씀이신 성자 안에 성부도 계십니다.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라는 복음서의 말씀은 바로 이것을 말해 줍니다. 빛의 근원이 있는 곳에는 그 빛의 광채도 있고 광채가 있는 곳에는 빛의 활력과 넘치는 은총도 있습니다.
바오로는 고린토 후서에서 다음의 말씀으로 같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기를 빕니다.” 성삼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과 선물은 성부께서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주시는 것입니다. 은총이 성부께로부터 성자를 통하여 오는 것처럼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은총의 친교는 성령 안에서가 아니라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음으로써 성부의 사랑과 성자의 은총과 성령의 친교를 누리게 됩니다.
아름답고 행복한 삶. -아름다운 삼위일체 하느님 닮기-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아침 성무일도 찬미가가 참 아름다워 위로와 치유가 됩니다. 바로 믿는 우리의 미래요 희망입니다.
-“영원한 낙원동산/천사성인들/성부와 말씀이신 독생 성자와
거룩한 바람이신 성령삼위를 한분의 주님으로 고백하도다.”-
성호경과 더불어 삼위일체 하느님 고백으로 미사를 시작한 우리들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일치를 날로 깊게 해 주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제가 참 즐겨 드리는 것이 강복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사제인 저를 통해 주시는 강복입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선물은 강복 하나뿐이 없기에 가장 많이 선물하는 것이 강복입니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성부와 성자와 성신은 ---님께 축복을 내리시어 길이 머물게 하소서.”-
삼위일체 하느님 고백과 더불어 우리 존재 깊이 각인되는 하느님의 이름이며 하느님 방패와 갑옷으로 완전 영적 무장하는 우리들입니다. 날로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아가며 신망애의 삶을, 진선미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우리들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교리는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너무 쉽습니다. 머리로 이해하려 하니 어렵지 하느님을 사랑하면 저절로 깨달아 알게 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충만한 삶에 대한 고백입니다. 바로 성령 안에서 성자 그리스도와 함께 성부 하느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충만한 삶에 대한 믿음과 사랑의 고백이 삼위일체 하느님 고백입니다.
“주-의 이-름 온 세상에 그 얼마나 묘하-신-고”
방금 화답송 후렴이 참 흥겹습니다.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삼위일체 하느님께 참 잘 어울립니다. 누구나 소망하는바 아름답고 행복한 삶입니다. 어떻게 이런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아름다운 사랑의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으면, 사랑하면 됩니다. 사랑의 삼위일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면 할수록 아름답고 행복한 삶입니다. 바로 그 생생한 모범이 성인들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과 사랑의 일치가 깊어질수록 아름답고 행복한 삶입니다. 사실 삼위일체 하느님이 소망하는 바도 당신 자녀들이 당신을 닮아 아름답고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참 아름다운 삼위일체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성심성월, 예수님의 성심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 부활 대축일, 승천대축일, 성령강림대축일 모두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마침내 삼위일체 대축일을 통해 하느님은 사랑으로 자신을 활짝 개방하셨습니다.
며칠전에 이은 어제의 체험을 잊지 못합니다. 집무실 문을 여는 순간 은은한 꽃향기와 싱그러운 공기, 그리고 한 눈 가득 들어오는 아름다운 산, 가슴 가득 안겨 오는 흰구름 푸른 하늘, 흡사 하늘 나라의 실현 같았습니다. 마치 삼위일체 하느님의 문을 연 듯 했습니다. 오래 전에 써놨던 글이 생각났습니다.
-당신이 그리울 때/당신이 보고 싶을 때
문을 열고/하늘을 본다
한 눈 가득 들어 오는/가슴 가득 안겨 오는
푸른 하늘/푸른 산
한 눈 가득 들어오는/가슴 가득 안겨 오는
그리운 당신/보고 싶은 당신-
그리운 당신, 보고 싶은 당신이 가리키는 바 삼위일체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참 아름다운 삼위일체 하느님이십니다. 참 사랑이 충만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이십니다. 사랑은 저절로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과 사랑의 일치가 깊어질수록 아름답고 행복한 삶입니다. 참 아름답고 행복한 신비가의 삶, 관상가의 삶입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첫째, 사랑은 개방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사랑으로 활짝 자신을 개방하셨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으로 자신을 모두의 눈높이에 맞추어 겸손히 자신을 활짝 개방하셨습니다. 모두가 참여할 수 있도록 자신을 개방하셨습니다.
볼 수 없는 초월자 성부 하느님을 볼 수 있는 내재하시는 성자 그리스도로 영적 오관으로 감지할 수 있는 성령으로 개방하셨습니다. 성령에 힘입어 우리도 하느님을 예수님처럼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온 누리에 충만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들입니다. 하여 우리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은총속으로 들어 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끊임없이 부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이 희망이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아 우리를 개방하게 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으면 닮을수록 사랑으로 개방하게 되어 아름답고 행복한 삶입니다.
둘째, 사랑은 관계입니다.
삼위일체 공동체 하느님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의 일치에 참여할수록 우리의 믿음도 사랑도 희망도 성장합니다. 성령안에서 그리스도 성자와 함께 성부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삶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과 연대連帶의 관계는 천국이지만 관계의 단절斷絶은 지옥입니다. 하여 고독과 침묵은 언제나 하느님과 이웃과의 연대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 안에 현존하시는 삼위일체 공동체 하느님이십니다. 공동체의 믿음의 형제들이 모두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을 향하고 있으니 저절로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깊어지는 사랑의 일치요 관계입니다. 공동체의 중심에서 공동체의 일치의 관계를 깊이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이십니다.
셋째, 사랑은 초대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사랑의 친교에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부단히 개방하여 우리를 초대하고 환대하는 하느님이십니다. 진리의 영께서 우리를 모든 진리에로 이끌어 주시며 그리스도께 받은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초대는 바로 성자 그리스도의 초대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주님의 초대에 응하여 주님 사랑 안에 머물 때 비로소 안식의 평화입니다. 어디에나 현존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이십니다. 사랑으로 개방하고 초대하여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원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오늘 지금 여기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 사랑으로 응답하여 그 분 안에 머물면 됩니다. 오늘 잠언에 나오는 하느님의 지혜는 바로 성자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동시에 그리스도와 일치된 우리를 가리킵니다. 성자 그리스도와 일치가 깊어질수록 성령 안에서 성부 하느님과 함께 하는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입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이로 살 수 있습니다.
“나는 그분 곁에서 사랑받는 아이였다. 나는 날마다 그분께 즐거움이었고 언제나 그분 앞에서 뛰놀았다. 나는 그분께서 지으신 땅 위에서 뛰놀며 사람들을 내 기쁨으로 삼았다.”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행복한 모습인지요!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에 참여하면서 일치가 깊어질수록 이런 영원한 아이의 영혼으로 살 수 있습니다.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이십니다. 언제나 성령 안에서 성자 그리스도와 함께 성부 하느님을 바라보며 삼위일체 하느님과 일치되어 살아갈 때 참 아름답고 행복한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삼위일체 하느님과 깊은 친교의 사랑을 살게 해주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깊고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짧은 기도 영광송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요한 16, 1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들에게
건네십니다.
당신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충만한
사랑의 관계가
되게하십니다.
그래서 사랑은
나와 너, 우리를
끊임없이 지향합니다.
우리가 되게하는
사랑의 결합은
내어드림과
내어맡김
내어놓음으로
충만케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는
서로를 향해
열려있는
나눔의 신비입니다.
나눔은 창조와
사랑 그리고
구원으로 드러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을 통해
창조된 소중한
자녀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소중한 사랑은
높음도
낮음도 없으며
언제나 한결같으며
하나의 사랑으로
우리를 설레게합니다.
하나의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들과
하나가 되려
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공동체로 당신자신을
전달하십니다.
사랑과 일치와 나눔
기도와 노동과 친교
섬김과 용서와 존중은
공동체의 중요한
삼위일체의 선물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을 통해
우리의 사랑또한
하느님께 머무르고
기도하고 의탁하는
아름다운 신비이길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