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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9월 1일(음력 8월 5일) 가을 석전제가 종로구 명륜동(성균관대학교)에 위치한 문묘에서 열립니다. 오전 10시에 시작하여 오후 1시에 끝납니다. 관심이 계신 분들의 많은 참석을 바랍니다. 궁궐지킴이 선생님들은 물론이고 특히 종묘지킴이 선생님들께서는 필히 참관하시기 바랍니다. 종묘제례와 비교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아래의 자료는 '서울육백년사'와 '백과사전' '장사훈의 국악개론' 및 기타 인터넷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잘못된 곳이 있으면 정정해주시기 바랍니다. -종묘지킴이, 김승호입니다 -
하마비
정문
대성전
명륜당
** 문묘(文廟)
문묘는 문선왕(文宣王), 즉 공자를 제사하는 묘우(廟宇)이다. 지금 종로구 명륜동에 자리잡고 있는 문묘는 보물 제141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태조 6년(1397)에 착공하여 그 이듬해 준공된 것이 그 처음이다. 이 때 창건된 문묘는 대성전(大成殿, 大聖殿)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 동무(東黛)와 서무(西黛)가 있었고 묘후(廟後)에는 학사(學舍)로 명륜당이 있어 좌우에 협실이 있었고, 명륜당 동쪽에는 청랑(廳廊)이 있어 그 규모는 모두 96칸에 달하였다.
이렇게 창건된 문묘는 정종 2년(1400)에 화재를 입어 대성전이 소실되었으며 태종 7(1407)에 그것을 재건하였다. 그리고 태종 10년에 문묘의 묘정비(廟庭碑)를 세웠고, 단종 원년(1453)에는 그 동안 대성전(大聖殿)이라 하던 문묘의 액(額)을 대성전(大成殿)으로 개서(改書)하였다.
조선시대의 문묘는 두 차례에 걸쳐 큰 수난을 당하였다. 그 중의 하나는 연산군에 의해 문묘가 철폐된 것이고, 또 하나는 임진왜란 때 병화(兵火)를 입어 불타 버린 것이다. 연산군은 왕 10년 7월에 성균관을 폐쇄하여 유생들을 내쫓고 문묘의 위판(位板)을 철거하였다. 그리하여 문묘를 비롯한 성균관을 금수(禽獸)를 기르고 유연(遊宴)하는 놀이터로 삼았다. 이렇게 연산군이 성균관을 폐쇄한 것은 성균관이 궁궐 후원에 접하여 있어 유생들이 궁내에서 유연하는 것을 규망(窺望:몰래 엿봄)한다는 것이었으며, 성균관의 폐쇄와 아울러 성균관 근처 고지에 자리잡은 민가도 철거시키는 동시, 금표(禁標)를 세워 후원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올라가는 것을 금하였다.
이렇게 연산군 때 수난을 당한 문묘는 중종이 즉위하면서 복구되었으나,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으로 문묘를 비롯하여 성균관의 모든 건물이 불타버리고 말았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문묘의 대성전이 중건된 것은 10년 후인 선조 35년이었다. 이것은 궁궐과 종묘의 중건이 있기 6년이나 앞서는 것으로, 유교사회에서의 유교의 본산인 문묘와 그 인재양성이 그만큼 중요시되었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 된다. 대성전 중건에 뒤이어 2년 뒤에는 동서무(東西黛)와 신문(神門)이 중건되어 이것으로 문묘는 완전히 복구되었으며, 다시 2년 뒤에는 명륜당이 중건되었다. 이것으로 선조 39년(1606)에 이르러 성균관은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임진왜란 후에 중건된 문묘는 고종 6년(1869)의 개수를 거쳐 지금에 전하나, 그 규모는 다음과 같다. 대성전은 남향으로 모두 20칸이며 전당(前堂) 후실(後室)로 되어 있다. 동무는 서향으로 모두 11칸으로 되어 있고, 서무는 동향으로 또한 11칸으로 되어 있다. 대성전의 동남우(東南隅)에 묘정비(廟庭碑)의 비각이 있어 서향으로 1칸이며, 신문은 남향으로 3칸, 동삼문은 동무의 북쪽에 있어 동향으로서 3칸으로 되어 있다.
대성전은 문묘의 정전으로 거기에는 정위(正位)에 문선왕(文宣王, 공자)을 제사하고, 동위(東位)에 안자(顔子) · 자사(子思), 서위(西位)에 증자(曾子) · 맹자(孟子)를 배향하고 동전과 서전에는 공자의 제자 72현 중 10철(十哲)과 송의 정자(程子) · 주자(朱子)를 비롯한 6현(六賢)을 합한 16위를 종향하였다. 그리고 동무와 서무는 문묘의 부묘(副廟)로서 거기에는 10철(哲)을 제외한 공자의 62제자와 한 · 당 · 송 · 원대의 현인과 우리나라의 18현(賢)을 합한 112위를 종향(從享)하였다. 문묘의 종향 내용은 시대에 따라 많은 변동이 있었으나, 위의 것은 조선 후기의 것을 들었다.
광복 후 민족적 자각과 재정상의 원인으로 배향과 종향 내용에 있어서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즉 정부가 수립된 이듬해인 1949년 6월에 전국유림대회(全國儒林大會)의 결의로 중국의 선현 가운데 5현(공자 · 안자 · 증자 · 자사 · 맹자)과 2현(정호 · 주희)만을 남기고 나머지 113위를 매안(埋安:땅에 묻음)하는 한편, 우리나라 선현 18위를 대성전으로 옮기고 동무와 서무의 종향을 폐지하였다. 따라서 대성전에는 중앙 정위에 공자를 제사하고 그 동쪽으로 안자와 자사, 서쪽으로 증자와 맹자를 배향하고, 다시 그 동쪽 후열(後列)로 최치원(崔致遠) · 정호(程顥) · 안향(安珦) · 김굉필(金宏弼) · 조광조(趙光祖) · 이황(李滉) · 이이(李珥) · 김장생(金長生) · 김집(金集) · 송준길(宋浚吉)을, 서쪽 후열로 설총(薛聰) · 주희(朱熹) · 정몽주(鄭夢周) · 정여창(鄭汝昌) · 이언적(李彦迪) · 김인후(金麟厚) · 성혼(成渾) · 조헌(趙憲) · 송시열(宋時烈) · 박세채(朴世采)를 종향하게 되었다.
** 석전(釋奠)
문묘(文廟)에서 공자(孔子:文宣王)를 비롯한 4성(四聖) 10철(十哲) 72현(七十二賢)을 제사지내는 의식으로 석전제·석채(釋菜)·상정제(上丁祭)·정제(丁祭)라고도 한다.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초정일)에 거행한다. 올해 2003년 가을제는 음력 8월 5일(양력 9월 1일) 정축일(丁丑日)에 거행된다.
석전이라는 이름은 '채(菜)를 놓고(釋), 폐(幣)를 올린다(奠)'에서 유래한다. 처음에는 간략하게 채소만 놓고 지냈으나 뒤에는 고기·과일 등 풍성한 제물을 마련하여 지냈다.
중국의 상대(上代)에는 선성(先聖)·선사(先師)의 제사로 발전하여 주공(周公)을 제사하다가 한(漢)나라 이후 유교가 중요시되자 공자를 제사하게 되었다. 후한(後漢)의 명제(明帝:재위 57∼75)는 공자의 옛 집까지 가서 공자와 72제자를 제사한 기록이 있으며, 당(唐)나라에서는 628년 공자를 선성(先聖), 안회(顔回)를 선사(先師)라 해서 제사를 지냈다. 739년에는 공자에게 문선왕(文宣王)의 시호가 추증되었고, 명(明)나라 초기에는 대학에 묘(廟)를 설치하고 대성전(大成殿)이라 하였다.
한국에서는 유교가 전래된 후, 신라에서 공자와 10철 72제파의 화상을 당나라에서 가져와 국학(國學:大學)에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에서도 국자감(國子監:成均館)에 문선왕묘(문묘)를 세워 석전제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는 개국 초부터 성균관에 문묘를 설치하고 여기에 한국의 18현을 합한 112위(位)를 봉안하여 석전제를 지냈는데, 이를 위하여 성균관에 학전(學田)과 학노비(學奴婢)를 지급하였으며 지방에서는 향교에서 석전제를 주관하였다.
**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
문묘제례(文廟祭禮)에 사용되는 음악을 문묘악, 문묘제향악, 석전악(釋奠樂) 등으로 부르는데, 그 본래의 악곡명은 <응안지악(凝安之樂)>이다. 우리나라에서 연주하는 문묘제례악은 본래 중국 상고시대에 기원을 둔 것으로 고려 때 중국 송나라에서 전래되었고, 지금도 성균관
대성전(大成殿)에서 봄, 가을 석전제(釋奠祭)에서 연주되고 있다. 이
음악은 중국 고대 아악(雅樂)의 전통을 잇고 있으며, 세종 때 정비된
이후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는 동양 최고(最古)의 음악이다.
문묘제례에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기악과 노래와 무용이 다 포함된다.
고려 예종 11년(1116) 중국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왕자지(王字之)와 문공미(文公美)가 돌아오면서 송나라의 대성아악(大晟雅樂)을 들여왔다. 이 대성아악은 그 뒤에 원구, 사직(社稷), 태묘(太廟), 문묘(文廟) 등의 제향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조선 시대 세종 때는 박연(朴堧)이 중심이 되어 원나라의 임우(林宇)가 쓴 [석전악보](釋奠樂譜)를 참고로 하여 문묘제례악을 정비하였다. 팔음(八音)을 제대로 갖추고, 아악보를 만들어 옛 주(周)나라의 악제에 가까운 틀을 마련하였다. 그 뒤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거치면서 약화되었다가 영조(英祖)때
다시 복구되었으며,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문묘제례악은 세종 때의 박연이 원나라 임우의 [석전악보]를 참고하여 만든 음악이다. 영신황종궁을 비롯하여 모두 15곡(15宮)이 있으나, 이 중에서 문묘제례에 실제로 연주되고 있는 곡은 영신황종궁(迎神黃鍾宮), 고선궁, 중려궁, 이칙궁, 남려궁, 송신황종궁 등 6곡이다. 7음 음계로 되어 있으며 1자에 1음이 붙는 형태로 되어 있다. 4음이 1句가 되고 8구가 모여 한 곡이 되며, 1구가 끝날 때마다 북을 두 번씩 친다.
문묘제례악에 사용되는 악기는 모두 아악기로서, 팔음을 갖추고 있다. 대뜰 위에 위치하는 등가에는 편종, 편경, 특종, 특경, 금, 슬, 소, 훈, 지, 약, 적, 어, 박, 노래 등이 편성되고, 음려(陰呂)에 해당하는 남려궁을 연주한다. 그리고 대뜰 아래 위치하는 헌가에는 편종, 편경, 노고, 노도, 진고, 훈, 지, 약, 적, 부, 축, 어, 박 등이 편성되고, 양률(陽律)에 해당하는 황종궁, 고선궁 등을 연주한다. 헌가에는 현악기가 하나도 없는 것이 특징이다.
악기 편성이 서로 다른 등가와 헌가는 절차에 따라 교대로 연주하며, 등가의 소리는 매우 밝고 투명하고, 헌가는 증가에 비해 그 음량이 크고 소리도 투박하며 씩씩하다.
문묘제례악에 사용되는 일무는 64명이 추는 8일무이며, 문무와 무무로 나뉜다. 문무는 오른손에 적과 왼손에 약을 들고 춤을 추며, 무무는 오른손에 척(도끼)과 왼손에 간(방패)를 들고 춤을 춘다. 영신. 전폐, 초헌의 의식 절차에서는 문무를 추고, 아헌과 종헌에서는 무무를 춘다.
문묘제례의 의식 절차는 영신(迎神), 전폐(奠幣), 초헌(初獻), 공악(空樂), 아헌(亞獻), 종헌(終獻), 철변두(徹변豆), 송신(送神), 망료(望燎)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 명륜당 앞의 은행나무
명륜당앞에는 천연기념물제59호인 은행나무가 의연한 자태를 자랑하는데 이 나무는 조선조 中宗14년(1519년)에 대사성(大司成) 이탁(尹倬)이 이곳에 심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나무 높이가21m, 가슴높이둘레 12.8m로 우리나라에서 둘레가 가장 큰 나무이다. 특히 앞으로 휘어진 가지에 50-60cm나 되는 희귀한 세 개의 유주(乳柱)가 자라고 있는데 사람들이 만져 손때 흔적이 남아 있다.
원래 공자님이 은행나무밑에서 제자들에게 강론(講論)한 유래로 공자를 모시는 장소에는 꼭 이 나무를 심게 되어 있다고 한다.
** 성균관과 문묘
- 이지호 - (두레문화기행 연구간사)
지금은 종로5가에서 이화동 사거리를 거쳐 혜화동 로터리에 이르는
길을 '대학로'라 한다. 예전의 이곳에 서울대학교가 자리잡고 있었던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는 서울대학교가 우리나라 최고(?)의 국립 명문대학이지만 조선시대의 최고 학부는 유학 교육 기관인 '성균관(成均館)' 이었다. 성균관이 자리한 곳도 지금의 명륜동이니 이곳은
가히 인재 양성의 요람이라 할 수 있겠다.
창덕궁과 창경궁의 주산인 북산 응봉(鷹峯)의 동쪽 기슭과 낙산의 서쪽기슭에 자리잡은 성균관은 동부에서 으뜸가는 명당이었다. 일찍이 명나라 사신 김식은 "풍수가 좋아 그 터전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될 것"이라고 극찬을 했다.
성균관은 조선왕조가 들어서고 궁궐· 종묘·사직이 완공된 직후인 태조 4년에 동부 숭교방에 터를 잡았다. 공자와 성인들을 받들어 모시고 글을 숭상하여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문묘와 명륜당을 세운 것이다. 태조 7년에 완공하였으나 정종이 개성으로 일시 돌아간 사이 불이 나 태종이 한양으로 환도한 후 재건하였다. 대성전과 명륜당, 정록소, 양현고, 식당 등의 건물은 모두 96칸으로 지금의 규모와 비슷하였다. 임진왜란 후 거의 모든 건물이 소실되어 선조가 새로 중건하였으니 지금 남아 있는 건물들은 이때의 것이다. 명륜당과 대성전을 포함한 문묘(文廟)일원은 사적 제 143호로 지정되었다.
성균관이란 주례(周禮)에서 따온 이름이다. < 균등한 법전을 맡아, 나라를 세우는 학문과 정치를 닦는다.(掌成均之法典 以治建國之學政) >
고구려의 태학, 통일신라의 국학, 고려의 국자감, 성균감으로 이어지다 고려 말에 성균관으로 개칭되어 조선왕조가 그대로 계승하였다.
나라의 관리 후보생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인 성균관은 대체로 양반사대부 자제들에게 입학자격이 주어졌다. 정원은 200명이었는데 정규생과 비정규생이 있었다. 정규생은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생원,진사의 자격으로 입학한 경우이고, 비정규생은 정원에 모자라는 경우 4학(중학,동학,서학,남학)의 생도 중에서 선발한다.
성균관에 입학한 유생들은 동재와 서재에서 기숙하며 공부하였고 식사 때마다 식당에 들어가 서명해야 원점(圓點) 1점을 얻었다. 이는 지금의 출석점수와 같은 것으로 원칙적으로 원점 300점을 취득한 유생들에게만 관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재학 중에는 엄격한 학칙의 적용을 받았다. 예를 들면 학과시험과 성적기준을 정하고, 조정을 비방하거나 주색을 말하는 자, 주자학 이외의 이단서를 읽는 자 등은 엄격히 배격한다는 내용이며 이러한 학칙에 의해 여러 가지 천거의 특전을 받았다.
또한 유생들의 생활은 자치활동에 의한 엄격한 규칙이 있어 내부적인 문제는 자치회의 기구인 '재회'를 통해서 해결하였다. 외부적인 문제 즉, 조정의 부단한 처사에 대한 시정 요구, 문묘 배향의 제 요구, 이단에 대한 배척의 요구 등의 문제가 발생할 때에는 재회를 열어 소행(집단시위), 권당(수업거부, 단식투쟁), 공관(동맹휴학) 등의 실력행사로 맞섰다.
교육과정은 가장 기본적인 사서와 오경을 중심으로 글을 짓는 방법 및 필법도 익히게 되었다. 입학 규정은 엄하였으나 일정한 재학기간이나 졸업일이 없어 과거에 급제하는 날이 곧바로 졸업일이었다고 한다.
성균관의 유생들은 국가로부터 생활필수품 일체를 지급받는 관비생이었으며 이는 국가에서 내려준 학전(學田)과 성균관 외거노비에 의해 충당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주자학을 연구·보급하는 학문의 전당으로서 인재양성과 관리양성소로의 기능을 발휘하였으나 점차 집권 양반 자제들의 출세의 도구로 이용되었다. 그러므로 사학인 서원이 지방 양반 자제들의 과거 준비 교육기관으로 교육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왕세자 또는 왕자는 8세가 되면 성균관에 입학하는 것이 관례였고 장유유서의 원칙에 의해 자리에 앉게 하였다고 한다. 성균관 유생에 대한 대우는 문예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세종과 성종 시기에 가장 극진하였다고 한다. 이와는 반대로 연산군은 유생들을 성균관에서 쫓아내고 석전제(釋殿祭:문묘에 제를 올리는 일)도 폐하였으며 대성전과 명륜당을 전국에서 뽑아올린 기생들과 어울리는 놀이터로 삼기도 하였다.
중종 때는 왕도정치를 구현하려던 조광조가 훈구파에 의해 옥에 갇히게 되자 이를 반대하는 유생들의 기가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효종 때는 유생들이 당파에 따라 서로 갈라 앉는 일이 생기게 되자 영조는 유생들이 당쟁에 휩쓸려 학업을 소홀히 하는 것을 염려하여 탕평비(蕩平碑)를 세우게 하였다(편당을 짓지 아니하고 두루 화합함은 군자의 공심이고, 두루 화합하지 아니하고 편당을 짓는 것은 소인의 사심이다).
조선후기에는 교육재정이 궁핍해지고 사학인 서원이 발달하였으며, 유생들이 당쟁에 휩쓸려 학업을 소홀히 하고, 과거시험 또한 불공정하게 운용됨으로 교육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부진을 면치 못했다. 1876년 개항 뒤에는 더욱 침체하여 교육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경학원'을 부설하였으나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한 채 1894년 갑오경장 후 과거제도가 폐지 되었으며 일제의 식민지 정책 하에서는 최고학부로서의 기능을 상실 당하고, 석전향사와 재산관리를 주임무로 하는 기관으로 바뀌게 되었다.
성균관대학교의 정문을 들어서면 바로 왼편에 영조때 세운 탕평비가 조그만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오른편에는 현대식 건물로 세워진 유림회관이 있으며 건물 앞에는 문묘의 담장이 보이고 담장을 따라 안쪽으로 걸어보면 문묘 안으로 출입할 수 있는 동문이 나온다. 동문의 바로 앞에는 임금님이 제례에 행차 하실 때 타고 온 가마(연)를 내려놓는 하연대(下輦臺) 자리가 아직 남아있고 바로 안쪽으로는 진사 식당이었던 건물이 나온다.
동문으로 안을 들어서면 넓은 뜰이 나타난다. 명륜당을 중심으로 양쪽에는 동재·서재가 길게 들어서 있다. 앞뜰에 있는 두 그루의 커다란 은행나무는 중종 때의 윤탁(1472-1534)이 심었다는 기록이 있어 수령이 적어도 450년은 된 것이다.
어느 지방이고 향교 앞뜰에는 은행나무가 있는데 이것은 공자가 고향인 곡부의 은행나무가 있는 성묘전 앞뜰에서 제자들을 가르친 것을 본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균관을 일명 행단(杏檀) 이라한다.
원래 유생들의 숙소이던 동·서재는 지금은 양현재(養賢齋)가 되어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의 학생들이 기숙생활을 하고 있다. 양현재는 장학기구로 예전의 양현고(養賢庫)를 전신으로 한다. 양현고는 토지와 노비를 재원으로 하여 성균관 유생들의 식량과 물품을 공급하는 곳이었다. 더운 여름날이면 열려진 들창 틈으로 학생들의 기숙생활 내부를 엿볼 수 있는데 각 실마다 선풍기와 컴퓨터를 사용하는 모습은 성균관 600년 역사의 변화를 느끼게 해준다.
또한 명륜당 앞뜰에는 휴일에 전통혼례를 치루는 혼례장으로 대여하고 있어 많은 하객들로 붐비고 있고, 때로는 전국에서 모여든 유림들이 명륜당에서 공부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동문과 연결되어 있는 작은 문으로 들어서면 명륜당과는 또 다른 공간인 대성전과 동·서무를 볼 수 있게 된다. 높은 기단 위에 붉은색과 푸른색만을 칠하여 간결한 느낌이며 화단에는 삼강오륜을 상징하는 듯 세 가지로 뻗은 향나무와 대나무 등이 심어져 있다. 대성전의 현판은 한석봉의 글씨다.
문묘는 제사를 위한 의식공간이기 때문에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되게 배치하여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하는데, 이곳도 대성전을 중심축으로 하여 어도가 깔려있고 참배객이 예를 올리는 배전(拜殿)이 중간에 자리잡고 있으며 정문인 신삼문이 있다. 문묘에는 조선조 말에 공자이하 133위를 모시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의 유현(儒賢)은 최치원, 안 유, 정몽주, 김굉필, 조광조 등 모두 18위가 배향 되고 있다.
동무 앞의 네모난 전각안에는 임진왜란때 소실된 묘정비를 인조 4년에 복원하여 세워 놓았다. 일반적으로 제사 공간인 사당이 뒤에 있고 강학 장소인 강당이 앞에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 형식의 지방향교와는 반대로 명륜당이 대성전 뒤에 있어 전묘후학(前廟後學)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명륜당의 뒷편에는 약 십만 여권의 장서가 수장되었던 존경각과 육일각이 나오고 명륜당의 오른편에 나있는 작은 문으로 나서면 예전에 과거시험을 치르던 비천당(丕闡堂)이 넓은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문묘제례인 석전대제는 해마다 음력 2월과 8월에 행하는데 왕은 곤룡포에 면류관 차림으로 임했다. 석전은 지금까지도 보존되어 '석전대제보존위원회'에 의해 거행되며 문묘제례악과 함께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었고 북경아시안게임 행사에도 초청 받았다. 정도 600년이 되던 해에는 왕이 직접 참관하는 옛 과거제인 알성시를 재현하는 행사가 있었다.
첫댓글 전 학교다닐때 하마비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왠 비석이 서 있느냐고 생각했었는데... 맨날 청룡상옆에서 술만 마시고, 친구들을 기다릴때도 하마비옆에서 기다렸는데... 부끄럽네요. 너무 무지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번엔 사진이 안 떳었는데....감사합니다...많은 공부해요...선생님 덕분에 항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