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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창세기의 말씀 3,9-15.20>
사람이 나무 열매를 먹은 뒤, 주 하느님께서 그를
9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10 그가 대답하였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11 그분께서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12 사람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13 주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너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하고 물으시자, 여자가 대답하였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
14 주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너는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에서 저주를 받아 네가 사는 동안 줄곧 배로 기어 다니며 먼지를 먹으리라.
15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20 사람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하였다.
그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
▥ 제2독서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 1,3-6.11-12>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4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5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6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11 만물을 당신의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의 의향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 되었습니다.
12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26-38>
그때에
26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28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2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30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3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32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오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이날을 한국교회의 수호자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엄청 기쁜 날입니다.
우리는 입당송에서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나의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라.”라고 노래하였습니다.
화답송에서도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 하여라, 찬미노래 불러라.” 하고 노래하였습니다. 그리고 복음 환호송에서도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하고 기쁨을 노래하였습니다.
오늘 전례의 의미는 본기도에서 잘 요약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동정녀를 원죄 없이 잉태되게 하시어, 성자의 합당한 거처를 마련하셨으며, 성자의 죽음을 미리 보시고 동정 마리아를 어떤 죄에도 물들지 않게 하셨다.’
1854년 12월 8일, 교종 비오 9세께서는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를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잉태된 첫 순간부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전능하신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고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 선언은 세 가지 사항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원죄로부터의 면죄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마리아께서 지니신 특전의 성격을 말해줍니다.
둘째는 이는 그리스도의 공로와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특전의 이유를 말해줍니다.
셋째는 마리아께서 원죄에서 보호된 것은 예수님께서 갈바리아에서 얻은 구원의 '선행된' 효과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특전의 방법을 말해줍니다.
이 교의의 선포는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보편적인 구원으로부터 예외받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원을 미리 입으셨다는 뜻을 말합니다.
그래서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견된 공로에 비추어'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교의는 선포된 지 4년 후인 1858년의 루르드의 성모님 발현으로 확증되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발현하시어 자신을 '원죄 없이 잉태된 자'라고 밝히셨습니다.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는 우리에게 두 가지를 사실을 깊이 일깨워 줍니다.
하나는 성모님께서는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루가 1,28)이라는 사실이요, 또 하나는 ‘복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성 안셀모는 성모님께서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가리켜 이렇게 찬양하였습니다.
“당신이 받으신 축복으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로부터 축복을 받고, 창조주께서는 그들로부터 찬미를 받으신다.”
이는 성모님께서는 원죄조차 없는, 티 없이 아름답고 거룩한 대성전이셨음을 말해줍니다.
바로 여기에 구세주 하느님의 아들을 품으신 까닭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성모님을 원죄로부터 보호받는 축복을 가득 부어주신 까닭입니다.
이는 비록 인간이 죄의 굴레에 있다 하더라도 결코 하느님의 축복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또 성모님께서 ‘복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가리켜 이렇게 찬양하였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당신의 충만함의 흘러넘침을 입어 새싹이 트듯 되살아났다.”
그리하여 성모님으로 하여 우리도 이제 ‘은총에 은총을 입게 되었고’(요한 1,16), 축복에 축복을 입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성모님처럼, ‘사랑의 감실이요, 거룩한 대성전’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제 성모님뿐만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우리가 원죄에 물들어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하지 못하지만, 이제는 저희 안에 주님을 모심으로써 저희 죄가 씻기게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저희 또한 당신을 건네줄 수 있는 ‘복을 주는 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도 성모님을 말미암아 이토록 큰 축복을 받았으니, 우리도 역시 ‘복을 주는 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이미 은총을 가득히 입었고,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까닭입니다(1,28 참조).
성모님처럼 우리 역시 사랑의 감실이요, 거룩한 성전이 된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이토록 한없는 기쁨으로 성모님과 함께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나의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라.”
(입당송)
<오늘의 말 · 샘 기도>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루카 1,28)
주님!
참으로 큰 기쁨입니다.
제 안에 사랑이 있다는 이 사실, 참으로 놀랍고 아찔한 감미로움입니다.
하오니 이제는 그 사랑에 승복하게 하소서.
항상 저를 향하여 있는 당신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물듦에 대하여>
오늘 축일의 본기도는 축일의 의미를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녀를 통하여 성자의 합당한 거처를 마련하시고
성자의 죽음을 미리 내다보시어 동정 마리아를 어떤 죄에도 물들지 않게 하셨으니
동정녀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하느님께 나아가게 하소서.”
그러니까 우리도 동정녀 마리아처럼 죄에 물들지 않도록 마리아를 어떤 죄에도 물들지 않게 하셨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오늘 첫째 독서와 연결하면 우리가 아담과 하와를 본받지 말고 새로운 아담이신 주님과 새로운 하와이신 마리아를 본받으라는 얘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물드는 존재입니다.
나는 죽어도 다른 물들지 않고 내 색깔대로 살 거야 할지라도 같이 살다 보면 물들기도 하고 물들이기도 하는 것이 우리 존재입니다.
그러니 독야청청 물 안 들겠다고 하기보다는, 물이 들되 하와의 물이 아니라 마리아의 물이 들기로 마음먹는 것이
더 현명하고 오늘 축일을 잘 지내는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오늘 강론도 이 의미만 간단히 나누기로 하였습니다.
사실 어제부터 오늘까지 오늘 축일의 의미를 끙끙대며 묵상했는데, 전에 했던 얘기 빼고 안 한 얘기를 하려다 보니 좀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어려운 얘기는 집어치우고 이렇게 간단히 물듦의 의미만 나누기로 하였는데,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의미를 알고 싶으시면 전에 올린 강론을 보시기 바랍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세상은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또 돈이 많은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정작 돈을 가지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돈으로 하느님을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돈이 하느님을 멀리하게 만듭니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했지만, 사실은 돈이 하느님을 만나는 데 결정적으로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물질, 재물을 따르기보다 '불가능한 일이 없는' 하느님께 마음을 두어야겠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
‘곰곰이’ 생각한다는 것은 그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에 대한 대답은 감당하는 책임과 희생이 들어있습니다.
그 바탕에 다시 ‘아기를 잉태’ 하게 되리라는 소식을 전달받았습니다.
더군다나 천사는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하며 명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가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늙은 나이에 임신한 엘리사벳의 잉태 소식을 전하며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고 말했습니다.
마리아가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38)
마리아는 ‘곰곰이 생각한 후’ 자유의지로 응답하였습니다.
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 말씀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처녀가 임신을 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이 두려움을 몰아냈습니다.
결국, 구세주의 잉태는 하느님의 은총과 거룩한 어머니 마리아의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잉태되고 또 태어나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우리의 응답을 통하여 세상에 구세주를 낳아드려야 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의 응답과 협력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훌륭한 연장입니다.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지 않습니다.
우리의 몫이 그만큼 소중합니다.
마리아가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를 굴려 계산하고 앞으로 닥칠 일을 고민했더라면 아마도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응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약혼한 처녀가 부모도 모르고 약혼자도 모르게 배가 불러온다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그 아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믿어주기나 할까요?
하느님을 모독한 죄로 쫓겨나든지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저에게 이루어 주소서’ 한 것은 곧 자신의 모두를 바친 것을 의미합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주님의 뜻을 겸손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봉헌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실 ‘안 되는 것이 없는 세상’에서 ‘불가능이 없는 하느님을 차지’하기란 너무도 힘이 듭니다.
그래도 우리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순명의 모범을 보이시고 실제로 구원을 이루셨으니 우리도 일상 안에서 성모님의 마음과 하나 되어 단호한 결단과 더불어 온전한 봉헌의 삶으로 한 발 나아가야겠습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겸손과 순명으로 하느님을 잉태하셨습니다.”
(성 베르나르도)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에 오셨으니 역시 마리아를 통하여 이 세상을 다스리기를 원하시며, 또한 마리아를 통하여 다시 오실 것이므로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의 구원이 성취될 것입니다.”
(성 루도비꼬)
어머니를 통하여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 먼저 겸손과 순명의 어머니 마리아께 다가가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어머니를 통하여 예수님께로,
예수님을 위하여 어머니께로!
어떤 사업가가 신부님께 와서 물었답니다.
“신부님, 제가 1억 원을 봉헌하면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러자 신부님께서 대답하셨답니다.
“그거 한번 시험해 봅시다!”
봉헌한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 나의 이득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봉헌을 통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어떤 기대나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 재물을 내놓는다면 그것은 예물이 아니라 뇌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결코 뇌물을 즐기지 않으십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위하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을 희망하였고 우리 모두를 위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였습니다.
그 참된 봉헌을 통해 우리에게 구세주를 낳아주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봉헌의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성모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자격이 있다는 근거는?>
오늘은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날을 기념하는 대축일입니다.
성모님께서 원죄가 없으시다는 근거는 오늘 복음에서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 마리아께 이렇게 인사하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루카 1,28)
은총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 인간에게서 떠난 성령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 은총이 가득하시니 죄가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물론 에덴 동산에서처럼 하느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도 죄가 없다면 은총이 가득해야 옳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함께 계시고 그것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다고 다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은총이 없는 이들은 주님께서 함께 계심이 고통입니다.
그래서 마귀 들린 이들은 주님께 자신들을 떠나주십사고 청합니다.
견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제가 되어 어떤 피정 교육에 들어갈 때 어떤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들어가시면 이러저러한 프로그램이 있는데 거기에서 꼭 일등 하셔서 우리 성당을 빛내셔야 해요!”
장난으로 하신 말씀인데 이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경쟁하면 누구나 느끼듯이 그곳이 지옥이 됩니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곳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 무언가를 열심히 해야 한다면 이는 은총이 가득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은총은 곧 ‘자격’입니다.
은총을 가지지 않고 어딘가에 머무르려 하거나 누군가를 만나려 하면 그것은 자격 없이 만나는 것입니다.
은총은 기도로 오는데, 기도하지 않고 누군가를 만난다는 말은 자신 안에 이미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죽어서 주님 앞에 설 수 없는 사람들은 “내가 무슨 죄가 있어?”라고 이 세상에서 말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죄 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자격인 성령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한 자격은 은총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느님께 합당하지 않다고 여겨 은총으로 당신을 가득 채우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내가 주님께 합당하다고 여기는 만큼 합당하지 못합니다.
저도 술을 마시고 용기백배하여 성당에 올라가 성모상으로 보았지만, 성모상이 인간의 모습으로 보일 때는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아니면 성모 마리아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내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때 자격이 없어집니다.
내 힘으로 하려 하고 성령을 원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125회’에 보면 중2 남자아이인데 호흡 곤란으로 4년째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고 나서 그 상처 때문에 학교 가기를 거부합니다.
오은영 박사는 이것이 꾀병은 아니지만, 자신이 그런 병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싶어서 진짜 그런 병이 든 것처럼 믿어진 증상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부모에게 이것저것을 얻어내는 것입니다.
왜 부모는 아이에게 이용당하게 된 것일까요?
부모는 너무 착하고 아이가 해 달라는 것은 지나칠 정도로 다 해줍니다.
아이는 부모의 이 약함을 아는 것입니다.
부모의 약함은 내 힘으로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다는, 이런 말 하면 죄송하지만, 교만에서 나옵니다.
권위를 내세워야만 교만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믿으면 교만입니다.
금쪽 처방을 받고서도 부모는 “너는 할 수 있어”, 혹은 “우리는 할 수 있어”라고 용기를 줍니다.
아이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도움입니다.
그러니 아이는 조금 따라주다가도 힘에 부치면 이내 폭발하고 맙니다.
처음부터 부모가 아이에게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았다면 아이가 스스로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을 것입니다.
부모의 탓을 해서는 안 되겠지만, 우리가 아이에게 합당한 부모가 될 자격이 있다고 믿으면 그 순간부터 합당한 부모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자격’이신데 그 자격을 이미 자기가 가지고 있다고 믿기에 성령의 힘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자격이 있다고 믿을 때 자격을 잃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누구에게도 자격이 없다고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이 은총을 지니셨기에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맡기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자신의 힘이 아닌 성령의 힘으로 아드님을 키울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의 상징이 아브라함이 자기 종에게 온갖 패물을 주며 아들의 신붓감을 찾아오라고 한 이야기입니다.
레베카는 아브라함의 종에게 자신의 것을 내어주며 그 종에게 합당하지 못한 존재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브라함의 종은 레베카를 자신이 가져온 패물로 꾸며주었습니다.
이것이 ‘은총’이고 이사악을 만날 ‘자격’이 됩니다.
여기서 레베카가 아브라함의 종을 위해서 종과 종이 몰고 온 낙타들에게 물을 주는 시간을 ‘기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격이 없다고 고백하는 이에게 하느님은 은총으로 자격을 주십니다.
따라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을 만날 자격 뿐 아니라 하느님을 만날 자격을 잃습니다.
자격 자체가 기도로 오시는 성령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무죄한 몸이 거처하실 수 있도록 가꾸어진 순결한 나무입니다!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과거에는 무염시태대축일이라고 했습니다.
무염시태!
저도 한때 무슨 뜻인가 의아해했고 알쏭달쏭해 했습니다.
한자로 표현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무염시태(無染始胎)!
우리 말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없을 무자에, 물들 염자입니다.
비로소 시자에, 아이 밸 태자입니다.
그럼 한번 연결해볼까요?
성모님께서 ‘시태!’ 잉태되셨는데, 어떻게 잉태되셨습니까?
무염 상태, 즉 오염되지 않은 상태로 잉태되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물들지 않은 상태?
원죄에 물들지 않은 상태로 잉태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모님께서는 아무런 흠 없이 무죄한 상태로 잉태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성모 무염시태’라는 용어 대신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라는 말로 대체되었습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에 대한 교리는 오랜 연구와 반박, 옹호가 거듭되어왔습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에 대한 초기 교부들의 표현이 참 아름답습니다.
“요아킴과 안나의 거룩한 딸인 마리아는 성령의 신방에서 티 없이 살았기에 하느님의 신부가 되고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 강생을 위해 마리아의 영혼을 준비시키셨습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무죄한 몸이 거처하실 수 있도록 가꾸어진 순결한 나무입니다.
순결하며 거룩한 영혼과 육신의 소유자 마리아는 가시덤불 속에 핀 한 송이 백합화 같습니다.”
성모님을 극진히 사랑했으며 성모님에 대한 탁월한 신심의 소유자였던 8세기 수도자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인류는 모두 죄인이 되어 하느님의 크신 은총에서 흘러나오는 큰 선물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선물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육체와 영혼의 질병으로부터의 자유, 욕정과 무지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인류 역사 안에서 마리아만이 은총이 가득하며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자유롭습니다.
마리아는 단 한 번도 당신의 시선을 창조주로부터 뗀 적이 없습니다.”
마침내 1854년 12월 8일 비오 9세 교황님께서 원죄없이 잉태되신 교리를 장업하게 선포되었습니다.
회칙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잉태된 첫 순간부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전능하신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고 보존되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세상 창조 이전에>
제2독서 말씀으로 듣고 있는 에페소서의 신앙고백은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의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 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에페 1,3-5)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인류 구원은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계획하신 일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세상 창조 이전’이라는 말은 인간은 알 수 없는 ‘한처음’을 뜻하는데(요한 1,1), 우리는 이 말에 대해서 “인간을 창조하기 전부터 인간 구원을 계획하셨다는 뜻인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창조 이전’의 상황을, 또는 ‘한처음’의 상황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입장에서는 그냥 단순하게, ‘처음부터’ 하느님께서 계획하셨다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우연’이란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인간은 ‘우연히’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일부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만일에 우주 전체가, 또 인간이 우연히 생긴 존재라면, 우리는 정말로 아무 가치가 없는, 비참하고 불쌍한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우연히 생겼다면 우연히 사라져도 그만이기 때문이고, 무슨 존엄성 같은 것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모든 일을 처음부터 계획하셨다고 해서, 모든 일이 잘 만들어진 각본대로 진행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 구원받을 사람을 미리 정해 놓으셨다는 뜻도 아닙니다.
우리는 로봇이 아닙니다.
교회 격언에 “하느님께서는 사람 없이 세상을 만드셨지만, 사람 없이 세상을 완성하는 것은 바라지 않으신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이 하느님 나라 건설을 함께 하는 협력자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동시에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그 자유의지를 존중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과 거부하는 일은 모두 자유의지로 하는 일입니다.
바로 그 자유의지 때문에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방해를 받기도 하고, 난관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래도 끝까지 가면 결국에는 하느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섭리’입니다(로마 8,28).
제2독서의 ‘우리’ 라는 말은 ‘모든 사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우리를 선택하시어” 라는 말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무시하고 하느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신앙인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우리 쪽에서는 ‘응답’이고, 하느님 쪽에서는 ‘선택’입니다.
“미리 정하셨습니다.” 라는 말은 ‘처음부터’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분이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을 안 믿고,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람들도 사랑하시는데, 그들 쪽에서 스스로 거부함으로써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도 ‘한처음’에 시작된 인류 구원 계획이 실행된 일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느 날 갑자기 우발적으로 마리아라는 처녀를 선택하셔서 일을 진행시키신 것이 아니라, ‘한처음’부터 계획하신 일을 ‘정하신 때’가 되었을 때 실행하셨습니다.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은 증명할 수 없는 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일, 즉 ‘신앙에 속한 일’인데, 바오로 사도가 말한 ‘거룩하고 흠 없음’의 원형이 바로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될 텐데, 성모님의 경우에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실 분으로 선택되실 때 이미 하느님에 의해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아드님’의 거룩함을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그 일을 경축하고 기념하는 대축일을 지내는 것은 ‘한처음’부터 우리를 사랑하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성모님의 생애 전체로 시선을 돌리면, 우리가 성모님을 신앙인의 모범으로 공경하는 이유가 분명하게 보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계획에 의해 특별히 ‘선택되신 분’이면서 동시에 선택되신 분으로서(선택되신 분답게) ‘사신 분’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그 ‘응답과 순종의 삶’ 때문에 성모님을 공경합니다.
그리고 이 공경은 우리도 성모님을 본받아서, 성모님처럼 ‘응답과 순종의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일입니다.
사실 우리가 실천하는 응답과 순종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나 자신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받아 누리는 일에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서 하느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으로 완성되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미리 마련해 놓으신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간절하게 원하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억지로 할 수 있는 생활이 아니라 간절하게 원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생활입니다.
억지로 하는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 은총의 삶, 찬미의 삶, 순종의 삶>
한 밤중 일어나면 우선 강론 쓰기 전 인터넷의 뉴스 기사들을 대략 찾아 봅니다.
선과 악의 치열한 전쟁터같습니다.
국내 상황이 더 그러합니다.
무지의 악의 세력이 얼마나 강고한지 때로는 선의 세력이 참 미약해 보입니다.
너무나 극단적인 사회요 분열과 갈등의 사회요, 흡사 내전 상태를 연상케 하는 현실입니다.
주변 곳곳에서 참 힘들게 사는 이들의 사연도 끝이 없습니다.
많이 아프고 병들고 불안과 두려움중에 하루하루 희망없이 살아갑니다.
참으로 찾아보기 힘든 평화입니다.
정말 평화와 정의가 실현되어가는 세상이면 좋겠습니다.
어제 갑자기 우리 요셉 수도원의 최 빠코미오 원장의 부친인 최재목 야고보 형제님이 81세를 일기로 선종하셨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그동안 수도원에 찾았을 때의 기억이 생생한데 인생 노년에 치매의 병고로 잠시 고생하시다가 마침내 선종의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참 선량하고 진실한 분으로 기억합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사부 성 베네딕도의 말씀이 가슴을 칩니다.
고인의 빈소는 대구 파티마 병원 장례식장 403호이고, 장례미사는 12월9일 금요일, 대구 만촌3동 성당에서 오전 10시에 거행됩니다.
너무 진실과 사랑을 잊고, 삶의 중심과 의미를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사람답게 참으로 살아가는 법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니 끝없는 두려움과 불안중에 자기를 잃고 뿌리없이 방황하고 표류하는 영혼 없는 유령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1. “깨어 있어라”, 2. “회개하여라”, 대림1,2주일의 주제에 이어 다음 대림3주일의 3. “기뻐하여라” 세 주제가 우리 삶의 지표가 됩니다.
정말 이렇게 깨어 회개하여 기쁘게 참으로 살아야 할 절박한 시절입니다.
이런저런 어지럽고 혼란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는 물음이 저절로 절박하게 대두 됩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현실성을 띠는 중요한 주제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랑과 진실, 정의와 평화, 온유와 겸손의 삶을 한결같이 인내하며 참답게 살다가 선종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런지요?
바로 오늘 대축일을 지내는 마리아 성모님이 그 답을 줍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바로 성모님이 답을 줍니다.
성모님처럼 살면 됩니다.
오늘은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너무 경사스런 날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잉태되신 순간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다는 믿음은 초대교회때부터 시작됩니다.
마침내 1854년 12월8일 교황 비오 9세는 교황 무류성에 따라 회칙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에 의해 다음과 같이 가톨릭 교회의 믿을 교리로 선포합니다.
“복된 동정 마리아는 자기의 잉태 첫 순간에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별 은총과 특권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견된 공로에 비추어 원죄의 아무런 흔적도 받지 않도록 보호되셨다.”
오늘 성모님 대축일 미사 감사송은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지요!
성모님 아름다운 영적 삶을 요약합니다.
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원죄에 물들지 않게 지켜 주시고, 은총으로 가득 차게 하시어,
성자의 맞갖는 어머니가 되게 하셨나이다.
또한 성모님을 통하여 티없고 흠없이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배필인 교회의 시작을 알려 주셨나이다.
지극히 깨끗하신 동정 마리아에게서, 저희 죄를 없애시는, 죄없으신 어린양 성자께서 나셨으니,
주님께서는 동정 마리아를 모든 피조물 위에 들어 올리시고,
주님의 백성을 위하여, 은총의 전구자요, 거룩한 삶의 모범으로 미리 정하셨나이다.”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 내용인지요!
한 분의, 한 어머니의 힘이 얼마나 큰지 상상을 초월합니다.
우리 삶에 대한 부단한 자극이 됩니다.
성모님처럼 살고 싶다는 거룩한 욕망도 샘솟습니다.
성모님처럼 사는 것이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요, 이렇게 살아야 참나의 참된 삶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 하나?”는 다음 셋으로 요약됩니다.
첫째, “은총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삶이 은총임을 깨달을 때 저절로 회개와 겸손, 찬미와 감사, 기쁨과 평화의 삶입니다.
은총의 빛 앞에 흔적없이 사라지는 무지와 무의미, 허무주의의 어둠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고백성사 처방전 말씀으로 가장 많이 써드리는 성구입니다.
성모 마리아뿐 아니라 우리 믿는 이들 하나하나가 은총이 가득한 이들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은총에 이어 총애가 역시 우리의 신원입니다.
성모님처럼 은총이 가득한 이요, 하느님의 총애를 받고 있는 우리 임을 철석같이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우리가 은총으로 충만한 존재임을 알려줍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고귀한 신원입니다.
얼마나 은총 가득한 사랑스런 인간 존재인지, 은총 덩어리 삶임지 깨닫습니다.
그러니 인간의 본질은 은총입니다.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은총의 존재임을 깨달아 은총의 삶에 한결같이 충실하도록 합시다.
둘째, “찬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은총의 깨달음에서 저절로 찬미의 기쁨, 찬미의 삶입니다.
찬미, 찬양의 삶이 하느님을 닮은 참나의 삶입니다.
찬미, 찬양은 영혼의 본능입니다.
찬미, 찬양의 맛으로, 기쁨으로 살아가는 믿는 이들입니다.
허무와 무지의 병에 대한 궁극의 치유제도 찬미와 찬양뿐입니다.
성모 마리아뿐 아니라 성인 모두가 한결같이 찬미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제2독서 에페소서 찬미가는 바로 우리 가톨릭교회에서 매주 월요일 저녁성무일도때마다 노래하는 찬미가입니다.
바로 이 찬미가 중 두 대목이 주목됩니다.
우리가 왜 찬양해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은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 역시 우리의 영예로운 신원임을 깨닫습니다.
은총의 존재이자 찬미, 찬양의 존재인 우리들입니다.
은총의 존재임을 깨달을 때 감사에서 샘솟는 하느님 찬미, 하느님 찬양입니다.
셋째, “순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평생 순종의 삶을 사셨던 하느님의 “예스맨(Yes-Man)”이었습니다.
삶은 순종입니다.
사랑의 순종입니다.
일상의 크고 작은 순종에 충실할 때, 마지막 순종의 선종의 죽음입니다.
성모님의 순종이 다음 고백에서 결정적으로 입증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순종의 응답 후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홀가분하게 떠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도 일방적으로 일을 못하십니다.
상대방인 인간의 자발적 사랑의 협조가 있어야 합니다.
마리아의 순종의 응답으로 하느님의 구원역사는 순조로워졌으니 하느님은 마리아가 너무 고맙고 믿음직스럽고 사랑스러웠을 것입니다.
아마도 성모님의 전구는 예수님도, 하느님도 거절하기 힘들 것입니다.
참 자랑스럽게도 창세기에서 비겁했던 아담-하와 부부의 실패를 일거에 만회하는 마리아의 통쾌한 순종입니다.
이로부터 마리아의 출현까지 그 장구한 세월을 견뎌내신 하느님의 사랑의 인내가 놀랍습니다.
실낙원이 마리아의 순종으로 복락원이 되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음을 봅니다.
모전자전, 그 어머니 성모 마리아에 그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죽기까지, 성모 마리아를 닮아 순종과 섬김의 삶을 사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은총의 삶, 찬미의 삶, 순종의 삶에 충실함으로 날로 성모님은 물론 예수님과 일치를 깊이해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죄와 구원, 절망과 희망이 교차합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들 안에는 죄와 구원, 절망과 희망이 교차합니다.
먼저 첫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창세 3,13)
제1독서는 우리를 원죄의 현장으로 데려갑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어긴 인류의 조상과 하느님의 가슴 아픈 대면의 현장입니다.
"어찌하여..." 하시는 하느님 마음은 왜 그랬는지를 꼭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추궁의 심정이 아니라, 오히려 탄식에 가까울 겁니다.
오직 그들의 행복을 위해 공들인 모든 게 무너지는 아픔과 그들이 짊어져야 할 결과를 예견하는, 안타까움 가득한 한탄처럼 들립니다.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에페 1,4)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먼 옛날 하느님 앞에서 고개 숙인 채 슬픈 선고를 듣던 "첫 사람"의 처지를 반전시키는 놀라운 사실을 전합니다.
원죄에 물든 우리가 다시 하느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오늘의 이 길지 않은 제2독서 내용 안에 거의 모든 절마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불리웁니다.
첫 사람의 죄는 새 아담인 "그리스도"를 통해 사해지고, 우리는 그 덕분에 거룩하고 흠 없는 본성을 되찾았습니다.
다음은 하와의 이야기입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창세 3,12)
죄의 책임을 전가하면서 하와의 불순종이 드러납니다.
그녀 역시 뱀의 꾐에 넘어갔지요.
이 구차하고 누추한 발뺌의 행태는 누가 먼저냐의 문제라기보다 신뢰와 결속이 무너지는 죄의 결과를 보여 줍니다.
아마도 하느님께는 이 모습이 더 아프셨을 것 같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38)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마리아께서 천사를 통해 하느님께 드렸던 응답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부르심 앞에서 내린 어린 소녀의 이 순수한 결단은 원죄의 결과로 죄악에 물든 세상에 새 희망을 던집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잉태되는 순간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으신 마리아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아드님을 모실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미리 예비하신 존재이십니다.
그녀는 거룩하고 흠 없는 태 안에 자신을 만드신 창조주를 모시도록 준비된 새 하와이십니다.
마리아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창세 3,20)를 넘어 모든 존재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아담의 불순종과 새 아담인 그리스도의 순종, 화와의 불순종과 새 하와인 마리아의 순종.
얼핏 대비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신비로운 인과관계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다"(로마 5,20)는 사도 바오로의 단언처럼, 스스로 범한 죄 때문에 시들어가는 인류를 두고 보실 수 없는 하느님께서 이 모두를 회복할 특단의 조치를 감행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극단의 현실은 우리 안에 고스란히 들어 있고 또 매순간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몸, 같은 존재 안에 아담의 범죄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동시에 지니고 살아가지요.
또 하와의 불순종과 마리아의 순종 또한 나날이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 죄와 은총, 어둠과 빛,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길을 찾아나가는 순례자에 비길 수 있습니다.
가망 없는 죄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온전한 의인도 못되는 가련한 실존을 입고 살아가는 나그네와 같은 존재 말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루카 1,37)
그래서 천사의 이 단언은 그날 마리아에게는 물론 오늘의 우리에게도 커다란 희망이 됩니다.
죄인인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다는 자체가, 엘리사벳의 늙은 나이의 잉태나 동정녀의 잉태 못지 않게 우리 힘만으로는 불가능의 영역이지만, 하느님께는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제도가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거룩하고 흠 없다"고 해 주시니, 우리는 부정하고 불결하고 부족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잉태하고 품고 출산해 키우는 소명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와 함께 기뻐해도 좋습니다.
아니 기뻐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니 한껏 기뻐하십시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변명’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아담에게 ‘너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아담은 알몸인 것이 부끄러워 숨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묻었습니다.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아담은 자신의 잘못을 이렇게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하느님께 책임을 떠넘기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법적인 책임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도의적인 책임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158명의 숭고한 생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대도 이렇게 변명하였습니다.
‘경찰이 있었어도, 안전조치를 했었어도 사고를 막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많은 인파가 한꺼번에 몰린 것은 하나의 현상입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행동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변명’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진심으로 뉘우치는 ‘회개’입니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무고한 목숨을 잃어버린 사람과 그 유족들에 대한 솔직한 사과와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안전조치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도 ‘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였으면서도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느님께서는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실 것 같습니다.
‘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의 욕심과 욕망 때문에 더불어 살아가는 많은 동물들이 멸종하였습니다.
원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어버렸고, 노예로 전락하였고, 숲은 파괴되었고, 물과 공기는 오염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들도 카인과 같은 대답을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나는 그 사람을 모르오.”
나중에는 거짓이라면 천벌을 받겠다고 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모르오.”라고 이야기합니다.
평소에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위기의 순간이 오면 신앙을 저버리는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눈을 보았던 베드로 사도는, 닭이 우는 시간에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였던 아버지처럼, 우리가 회개하고 뉘우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따뜻하게 품어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100세의 나이에 얻은 아들 이사악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아들 이사악입니다.
그런 이사악을 하느님께서는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아들을 하느님께 바치기 위해서 길을 떠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면 좋겠느냐?’
그러자 이사야 예언자는 주저 없이 대답하였습니다.
‘주님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 주십시오.’
그리고 이사야 예언자는 구세주의 탄생을 알리는 예언을 하게 됩니다.
구세주가 오시면 일어날 일을 예언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고난의 잔을 마시고,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오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마리아 대축일입니다.
교회는 성모님에 대해서 믿을 교리를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교리가 있습니다.
원죄가 없었기에 죽음을 거치지 않고 승천하셨다는 교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시기에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교리가 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셨기에 평생 동정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교리가 있습니다.
교회가 선포한 성모님께 대한 믿을 교리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했던 성모님의 순명입니다.
변명은 우리를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순명은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는 ‘디딤돌’이 됩니다.
“만물을 당신의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의 의향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아이가 중요한 시험을 망쳤습니다.
좋은 결과가 아니라서 크게 실망했는데, 이 아이의 엄마도 크게 실망해서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버립니다.
이런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특히 수능이 끝나고 나면, 실망한 부모의 모습을 많이 봅니다.
분명히 더 큰 실망은 아이일 텐데, 부모가 더 크게 실망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는 그 부모가 심리적으로 아이에게 구속된 것입니다.
아이의 실패가 곧 자기의 실패이기 때문에, 아이의 마음을 돌보기보다 자기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예도 있습니다.
“시험 망친 건 너야. 잘 봤어야지.”라면서 외면하는 부모입니다.
이때에는 부모나 아이 각자 고립된 삶을 살게 됩니다.
관계라는 것은 구속된 것도 아닌 또 고립된 것도 아니어야 합니다.
만약 위의 상황에서 이렇게 말했다면 어떠했을까요?
“매우 속상하지? 실망하는 걸 보니 엄마 아빠도 마음이 안 좋아.
그래도 속상하다는 건, 그만큼 열심히 했고 또 기대했다는 뜻이겠지.
마음 잘 추스르고, 어떤 점을 보완하면 좋을지 함께 살펴보자.
엄마 아빠가 도울 것이 있으면 뭐든 말하렴.”
이렇게 말하는 관계가 된다면, 함께 하면서도 자율적으로 자기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남 탓하면서 주저앉지 않게 됩니다.
함께 하기에 힘낼 수 있으며, 자기 인생을 사는 것이기에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계를 잘 정립했으면 합니다.
함께 하면서도 자율적으로 자기 인생을 살게 하는 관계는 가족, 친구, 이웃… 모든 사람과 이루어야 할 관계입니다.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에 성모님께서 만드신 관계 역시 이 차원에서 묵상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 잉태 소식을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들었을 때, 거부하고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또 그 소식에 좌절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에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아기를 갖게 되면 간음했다고 해서, 돌을 던져 공개 처형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38)
하느님과 함께 하지만 자율적으로 본인의 선택을 내세우시며 자기 인생을 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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