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10월 10일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제1독서 : 갈라 3,22-29
복 음 : 루카 11,27-28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7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2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참행복, 참사람의 길
-말씀과의 일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말씀을 사랑하는 이들은 영혼이 아름답습니다. 얼굴도 생명의 빛으로 환합니다.
어제 벼르고 별러 생전 처음 다섯 분이 멀리서 1박2일 수도원에 피정 왔습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제 매일 강론을 읽으며 삶의 지침으로 삼아
매일 말씀으로 살아 왔다는 참 아름다운 분들이라 사진에 담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단 두 절로 짧지만 울림은 참 깊습니다.
말씀 주제를 ‘한 부인의 성모 칭송’이라 일컫기도 하고, ‘참행복’이라 일컫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실 때 군중 속에서 한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말합니다.
아이를 둔 모든 어머니들의 심중을 반영합니다.
한 여자와 예수님의 주고받는 대화가
흡사 선사들의 선문답처럼 짧지만 간절하고 절실합니다.
“행복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은!”
둘 다입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낳아 기르셨기에 복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킨 신앙인이기에 복되다는 것입니다.
우선적인 참행복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눈에 위대함은 부여받은 은사와 특권에 있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 바치는 응답에 있습니다.
성모님의 위대함의 참 원천은 그녀가 예수님의 어머니로 선택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천사의 수태고지시 무조건적 “예Yes”의 응답에 있습니다.
성모님은 십자가 예수님의 발치에 슬픔 중에 서 계실 때도
참으로 믿음 깊이 '예Yes'의 자세로 응답하셨고,
시종일관 끝가지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지켰습니다.
모전자전, 성모님에 그 아드님 예수님입니다.
이런 “예Yes’의 응답에서는 모자분이 일치합니다.
말씀의 사람, 순종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 성모님이자 예수님입니다.
한마디로 “Yes-man”(‘예’의 사람)이자 자기를 비운 ‘케노시스, 비움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위대함도 악령들에 대한 지배나 적대자들에게 침묵 중에 보인
그분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지켰다는 데 있습니다.
하여 아버지께서 원하신 것과 당신이 말씀하시고 행하신 것이
전적인 일치를 이뤘던 예수님이셨습니다.
바로 이점이 예수님은 물론 성모님의 위대한 점입니다.
참 행복한 삶을 위해 평생 끝까지 말씀사랑이 말씀 들음과 말씀실천이
얼마나 결정적이요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겸손도 순종도 믿음도 이런 말씀사랑과 말씀 들음과 말씀실천의 열매입니다.
저절로 믿음의 성장과 성숙이 아닙니다.
말씀을 통한 주님과의 일치가 깊어지면서 이와 함께 하는 믿음의 성장과 성숙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강조하는 바도 이런 믿음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주님은 바오로를 통해 오늘의 우리에게 은혜로운 말씀을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믿는 여러분들이 약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 되게 하는 믿음의 은총입니다.
세례은총은 물론 말씀을 통한 믿음은총이 우리를 그리스도를 옷 입게 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믿음의 자녀가 되어,
믿음의 형제자매가 되어 온전한 평등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평생 날마다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들으며 말씀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결정적인 구원의 열쇠인지 깨닫습니다.
저절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과제요,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이 바로 평생과제입니다.
누구나의 공통적 소망은 참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전 가끔 주고받던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그 사람 진국이다!’ 참되어 거짓이 없는 사람이,
바보스러울 정도로 진실하고 성실하고 충실한 사람이 진국입니다.
바로 말씀을 통해 주님과 일치가 깊어질수록 이런 진국의 참사람에 참행복입니다.
말씀 없는 영혼은 반쪽입니다. 말씀은 빛이자 생명이자 영입니다.
말씀과 영혼의 일치가 깊어질 때 생명의 빛을 발하는 성령 충만한 영혼입니다.
그러니 참사람이 되는데 평생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일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인간 영혼의 고질적 질병인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말씀뿐임을 깨닫습니다.
말씀에 대한 전적 순종의 응답뿐입니다. ‘예스 맨’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빛이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말씀을 사랑합니다. 말씀은 주님의 현존입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 치유 받고 위로받는 영혼들이요,
희망과 기쁨, 평화와 행복을 선사받는 우리들입니다.
시편1장도 참행복이 말씀에 있음을 밝혀 줍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2-3)
시편 119장은 무려 176절까지 계속되는데 아마 시편에서 가장 길 것입니다.
‘말씀 찬가’로 명명하고 싶습니다.
얼마나 주님의 가르침을, 말씀을 사랑한 시편의 사람들인지 깨닫습니다.
처음부터 마음 설레게 하는 시편의 고백입니다.
“행복하여라, 그 길이 온전한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걷는 이들!
행복하여라, 그분의 법을 따르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
불의를 저지르지 아니하고 그분의 길을 걷는 이들!”(시편119,1-3).
시간되면 시편119장 176절 끝가지 잘 음미하며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배는 밥으로 채울 수 있어도 영혼은 밥으로 채울 수 없습니다.
영혼의 식이자 약인 주님 말씀만으로 채울 수 있는 영혼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말씀과 성체의 은총으로,
우리 모두 영혼과 육신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시고 튼튼히 하십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저는 소설책 읽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런데 소설 중에서도 단편보다는 장편을 훨씬 좋아하고 재미있어합니다.
단편소설은 특별한 사건도 없고 얘기를 하다가 만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에 반해 장편소설은 이야기 중심이고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느낌입니다.
이렇게 비교를 해보니, 문득 우리의 삶도 단편소설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별한 사건도 없고, 문제의 해결도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등장인물과의 갈등도 흐지부지하게 끝나곤 합니다. 정말로 비슷하지 않습니까?
어떤 분은 자신의 삶을 책으로 쓰면 10권을 써도 부족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과연 자신의 삶이 특별한 스토리를 가지고 독자를 이끄는 장편소설 같을까요?
그렇게 특별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나 경험하는 어떤 일에 새로운 사건 몇 가지만 붙었을 뿐입니다.
또 명확한 해결을 원하지만, 그런 일은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삶도 바로 나의 삶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단편소설의 재미는 세세한 감정들을 바라볼 수 있을 때입니다.
소소한 행복을 체험하는 우리의 삶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의 삶을 비로소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결말이 이루어지지 않고, 문제의 해결이 힘들어도
그 자체만으로도 괜찮다면서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 안에서 소소한 행복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행복은 하느님과의 연결고리를 찾으면 자동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는 이 연결고리를 찾으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대단한 결말을 가져오는 행복만을 구하고 있습니다.
어떤 여인이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행복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배었고 젖을 먹였던 성모님은 분명히 복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성모님의 행복은 단순히 예수님을 배었고, 젖을 먹였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켰기 때문에 행복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삶의 행복은 대단한 결말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단편소설과 같은 작은 일상 안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면서
굳은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어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행복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갈라 3,26)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군중 속에서 한 여인이 목소리를 높여 말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여인의 행복선언과 예수님의 행복선언은 사뭇 다릅니다.
이처럼, 우리는 모두 ‘행복’을 찾지만, 각자가 찾는 행복이 서로 다릅니다.
대체 어떤 행복이 참된 행복일까요?
여인은 아기를 간직했던 태중과 젖을 먹인 가슴이 행복하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보낸 찬사를 떠올려봅니다.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복되십니다.”(루가 1,45)
아우구스티노 역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마리아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을 잉태한 것보다,
그리스도를 믿었던 점에 있어서 더욱 복됩니다.’
그렇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으셨습니다.
하여, 말씀을 잉태하시고 이루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허용한 것입니다.
아빠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승복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믿고 지키고 실행한 것입니다.
이처럼, 행복은 어딘 가에 있어 그것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믿고 지키면 발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행복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서 발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주님께 있을 뿐이요,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서 발생하는 일입니다.
‘말씀을 경청하는 일’, 그것을 우리는 성모님에게서 배웁니다.
그것은 먼저 “믿는” 일입니다. 말씀보다 앞서 말씀하시는 분을 믿는 일입니다.
그래서 비록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하더라도
그분을 믿고 말씀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베네딕도의 [규칙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들어라. 아들아, ~마음의 귀를 기울이고 .
~기꺼이 받아들여 보람 있게 채움으로써 ~순명의 노고로 되돌아가라”
이는 ‘마음의 귀로 듣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가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은 들려주는 대로 듣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듣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듣는다는 것은 마음의 귀로 듣는 일,
곧 말씀하시는 분의 마음에 주파수를 맞추는 일입니다.
마음의 귀를 경작하여 사랑과 믿음으로 듣는 일입니다.
먼저 사랑하고 믿는 일입니다. 말씀보다 앞서 말씀하시는 분을 사랑하고 믿는 일입니다.
그 사랑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렇게 받아들여지면, 그 믿음의 능력으로 말씀이 성취되고 실현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진정 참된 행복을 바란다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들은 바를 사랑과 믿음으로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행복할 것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주님!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듣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들은 말씀을 잉태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으로 잉태하게 하소서.
하여, 말씀을 품은 감실이 되게 하소서.
주님, 품은 말씀을 지키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말씀을 알아듣지 못할 때도 사랑으로 지키게 하소서.
지키는 말씀을 경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당신의 희망을 경작하게 하소서.
저를 경작하여 당신 말씀을 이루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미국에서 워싱턴 주 부시자로 활동하던
촉망받던 시각장애 정치인 사이러스 하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미주가톨릭평화신문 9월 13일자 보도)
하빌은 어린아이였을 때 안구 암에 걸렸다고 합니다.
수술을 하였지만 시력을 상실하였습니다.
초등학교 때의 일입니다. 놀이터에서 친구들이 놀고 있을 때였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다칠 수 있으니 감시 카메라 앞에 있으라고 했습니다.
하빌의 어머니는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 아이가 놀이터에서 놀다가 팔을 다칠 수도 있고, 넘어질 수도 있고,
머리를 다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치료하면 고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영혼이 다치면 치료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함께 놀도록 해 주십시오.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하빌은 어머니의 격려와 도움으로 자신도 정상인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넘어지고, 다친 적이 있지만 하빌은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마칠 수 있었고, 정치인이 되었습니다. 장애인을 위한 정책을 만들었습니다.
하빌은 본당 신부로부터 ‘모든 것 안에서 계신 하느님 발견하기’라는
마틴 신부의 책을 선물 받았습니다.
정치인으로 더 성공할 수 있었지만 하빌은 새로운 선택을 하였습니다.
예수회에 입회하였습니다. 남은 삶을 사제로 살기로 했습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살기로 했습니다.
육체의 장애를 극복하는 정책을 만드는 것도 좋지만
영적인 장애를 치유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을 통해서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라면
성공보다는 가난을, 건강보다는 아픔을, 오래 사는 것보다는 일찍 죽는 것도
선택할 수 있음을 알았다고 합니다.
예전에 성인전을 읽으면 공주였던 분이 수도자가 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군인이었던 분이 사제가 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정치인이 사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시각 장애이면서 정치인이 사제가 되었던 경우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사제의 길을 선택한 하빌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우리가 악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는 것도 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을 것도 아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감시카메라 앞에 세워 놓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에덴동산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에덴동산을 망칠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생명을 죽일 수 있다는 것도 아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감시카메라 앞에 세워 놓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우리를 하느님의 감시카메라 앞에 세워 놓으셨다면
인류의 문명과 문화는 없었을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예술은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넘어지고, 다치고, 하느님과 멀어질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믿어 주시고,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유와 욕심 때문에 차별하였습니다.
‘종교, 국적, 신분, 계층, 성별, 이념, 사상, 학벌, 지역’이라는 이름으로 차별하였습니다.
육체적인 장애를 ‘죄인’이라고 차별하기도 했습니다.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카메라 앞에 세워 놓기도 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믿음이 온 뒤로 우리는 더 이상 감시자 아래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다면,
여러분이야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약속에 따른 상속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미 2000년 전에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들 또한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오늘 사람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젓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다른 대답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더욱 행복합니다.”
살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성공, 재물, 업적, 인간관계, 가족, 건강’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것들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아프고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것입니다.
친구가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함께 가주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같은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우선순위는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이타적인 삶이었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행복하여라.
신앙인들이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삶의 우선순위로 정한다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삶의 우선순위로 정하면 좋겠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것을 삶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제들은 더욱 행복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삶으로 드러나는 신앙인들은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루카 11, 28)
한상우 바오로 신부
말씀은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을 통해서 깨어난다.
말씀에서 행복으로 번져가는
우리들 관계이다.
말씀 없이 행복할 수 없다.
흩어진 행복을
말씀으로 다시 만난다.
삶의 전부를
하느님 말씀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말씀에 모든 삶을 걸으셨던
성모님과 예수님의 삶이다.
모든 관계는
말씀을 듣고 말씀을 지키며 성장한다.
말씀은
우리의 생활을 살리고
마음을 살린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이다.
행복은 말씀과 함께한다.
행복은 말씀이다.
말씀과 함께하는 행복만이
서로를 살린다.
인간의 3대 고통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군중 속에서 한 여인이 이렇게 소리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마치 “저렇게 훌륭한 자녀를 두었으니 저 엄마는 얼마나 행복할까!”라고
부러워하며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의 생각을 조금 바꿔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그러니 오늘 복음은 ‘행복’에 관한 말씀이 됩니다.
이 짧은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주려 하십니다.
행복을 알려면 고통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자칫 우리는 진정한 고통이 아닐 수 있는 것도 고통이라고 착각할 수가 있습니다.
죽음이 고통이라고 여긴다면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돌아가시면서,
“저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몸의 고통이 불행이라고 믿는다면 젊고 예쁜 나이에 온몸에 3도 화상을 입고
수많은 고통스러운 수술을 한 뒤에도 지금 행복하여
자신은 이전의 예쁜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이지선씨를 보면 될 것입니다.
혹은 못생기고 병이 들고 부모로부터 버려지는 것이 불행이라고 여긴다면
얼굴에 모반을 가지고 태어나 부모로부터 버려지고
다른 쪽 얼굴엔 암이 들어 뼈까지 깎아내야 했던 김희아씨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가 불행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들을 가졌음에도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불행과 고통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저는 불행과 행복을 조금 더 본성적이고 근원적으로 접근해 보고 싶습니다.
저는 불행을 3단계로 나눕니다.
첫 번째 불행과 고통은 인간 본성의 자유를 제약받는 것입니다.
정태춘씨 노래에 ‘우리들의 죽음’이란 제목이 있습니다.
이 곡은 1990년 3월 실제 발생했던 어린 남매의 화재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애절한 멜로디와 슬픈 가사로 표현한 곡입니다.
서울 지하 셋방에서 다섯 살 혜영이는 방바닥에 엎드린 채,
세 살 영철이는 옷더미 속에 코를 묻은 채 숨져 있었습니다.
부모는 시골에서 농사짓다가 힘에 겨워 서울에 올라와
지하 셋방을 얻어놓고 맞벌이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아이들을 맡길 데가 없어 방에 두 아이를 놓고
혹시 부엌에 칼을 만지거나 밖에 나가 길을 잃을까 봐 문을 밖에서 걸어 잠근 상태였습니다.
아이들의 유일한 놀이는 성냥으로 불장난하던 것이었고 그렇게 사고가 발생한 것입니다.
부모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존엄성인 자유를 박탈당하였습니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성장하여서도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믿음을 갖기 어렵습니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1995)는 오직 자유만을 위해 싸우는 한 인물이 나옵니다.
세상에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두 번째 고통은 자유롭기는 하지만 자아의 본성을 따르는 삶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행복으로 여기는 것은 자아와 자신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기쁜 것을 우리 기쁨으로 여기지만 실상은 자아의 종살이를 하는 것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가 자신이 늑대인 줄 알고 산다면 자신은 행복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볼 때는 그것은 고통입니다.
마를린 먼로는 부족한 것이 없었지만 약물 과다복용으로 사망하였고, 헤밍웨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운지도 모르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많은 부자와 정치인, 연예인들이 이런 고통을 겪습니다.
자유가 있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채울 수 있다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공허함을 마를린 먼로는 폐장한 해수욕장과 같다고 표현했고
헤밍웨이는 끊어진 필라멘트와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는 인간을 만나야 합니다.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오지 못하면 항상 다 채워져도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세 번째 고통은 더 큰 행복이 무엇을 따름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따르지 못하는 고통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가 인간을 만나 자신이 인간일 수도 있음을 믿어도
자신이 하는 행동은 늑대의 그것을 정확히 닮아있습니다.
하려고 해도 안 되는 이런 상황이 큰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도 가장 힘들었을 때를 보면 조금 늦은 나이에 성소를 느껴
‘신학교 가야 하나, 이대로 살아야 하나?’를 고민할 때였습니다.
이때의 1년은 참으로 힘들어서 겨울 바다에도 빠져보고 술도 많이 마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을 따르기로 하고 나서부터 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과연 예수님을 낳고 젖을 먹여 행복하셨던 것일까요?
성모님께서 기쁨의 노래인 마니피캇을 부르실 때는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엘리사벳을 방문하셨을 때였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잉태하신 것을 넘어 하느님의 뜻을 잉태하셨던 것입니다.
그 뜻을 따르는 삶이 남들이 보기에는 목숨을 건 여행일 수 있으나
그 당사자에게는 위 세 개의 인간의 큰 고통을 넘어서는 참 기쁨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인간의 완성을 이루어줄 수 있는 유일한 보물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에게 인간으로서의 충만한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뜻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 자녀의 행복까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피조물입니다.
하느님의 행복까지도 누릴 수 있는 우리가 기뻐해야 할 유일한 이유는 이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 하느님의 정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야말로 행복 합니다.
루미나 수녀
오늘 화답송 시편에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복음속의 예수님을 배었던 모태를 찬양한 여인은
아마 이 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더불어 예수님의 말씀도 함께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의 행복하다 하십니다.
일단 주님을 찾는 마음이 먼저 선행되었을 때
그 말씀을 올바로 듣고 또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를 일으켜 주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
먼저 내 마음은 무엇을 찾는지 한번 질문해보았으면 합니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