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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d we, didn't we, should
we, couldn't we
I'm not sure 'cause
sometimes we're so blind
Struggling through the
day
어쨌든 백두대간에 들었습니다.
할 수 있을까?
해 왔잖아?
꼭 해야만 할까?
우리가?
의문 부호도 많이 찍었고 갈등도 많이 했으며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대간길도 그 끝을 향해 달음박질 치고 있습니다.
잘 해냈습니다.
처음에는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가끔 뭔가에 홀린 듯 얼마간을 방황도 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무조건 백두대간에 들고 말았습니다.
즉 방황의 끝은 결국 산이었고 산줄기였으며 백두대간이었습니다.
백두대간이 뭔지 왜 내가 백두대간 산행을 해야 하는지 당위성에 대한 의문조차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저 남들이 하니 따라서 하는 그런 격이었습니다.
It looks like rain today
For heavy eyes could hardly hold us
Aching legs that often told us
무박산행이나 우중 산행.
발바닥이 불어 트고 쥐가 나는 고통이 뒤따르더라도
It's all worth it
내가 걷는 백두대간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믿음이었습니다.
작년 3월에 시작했나요?
진부령을 출발한 대간팀이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었습니다.
지리산 구간에 든 게 지난 구간부토 였이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지리 주릉에 접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다른 구간도 아닌 지리산 구간이니 대간팀 졸업을 축하해 드려야겠다는 의무감이 발동합니다.
약 720km에 달하는 그 긴 구간을 그 어떤 고통도 마다하기는커녕 오히려 즐기며 오신 분들이니 '격려激勵'라는 말은 그분들의 노고에 대한 모독입니다.
지리산으로 들어섰으니 이제 하나하나 대간을 정리하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대간 졸업.
너무 낯선 느낌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뭔가는 끝내긴 끝낸 거 같은데 이상하게 허전한 느낌.
아무 것도 한 게 없는 것 같은 느낌.
그저 어린애 같이 걷기만 했던 단조롭고 순진한 산행 방식이 혹여 이런 허전한 느낌을 갖게 한 것은 아닌지......
하지만 그래도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백두대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된 것 만 같을 겁니다.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아니 1년 반 넘게 고락을 같이 했던 백두대간을 떠나기가 너무 아쉽다면?
한 번 더 사랑에 빠지시면 됩니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혼자서 걷듯이 걸으시면 됩니다.
예습도 하시고 지도도 보시고....
그리고 대장님께 물어도 봐 가면서.....
백두대간이 어렵다고들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백두대간을 아니 산줄기를 인간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여 산맥이라 이름지었습니다.
그러나 동양 특히 우리나라의 우리 선조들은 인간을 산줄기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였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그런 산맥 교육을 받았으니 산줄기가 어려울 수밖에.....
사랑하고 존경하는 산벗 고남님이 귀향을 한 지 벌써 1년이 넘었습니다.
하는 양봉 일도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것 같고 지리산이나 주위 산들을 보는 눈도 괄목상대할 만합니다.
이번 구간이 고기3거리 ~ 성삼재 구간인 만큼 참석을 한다고 하는군요.
영광입니다.
운봉사거리에서 '고남'님을 만납니다.
전국 막걸리 품평회에서 1위를 차지한 운봉 막걸리를 두 박스나 준비해 주시고....
정말이지 맛있게 먹었습니다.
다시 한 번 고마운 마음 전해드립니다.
10:47
고기삼거리에 도착하여 산행을 준비합니다.
원천천 상류부의 고기저수지.
우측 하단의 원천천 물줄기가 아주 빠르게 그것도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물줄기는 요천으로 합류되어 섬진강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몇 십 만년 전 혹은 몇 백만 년 전에는 람천이 되어 임천이 된 다음 남강에 합류되어 낙동강이 될 물이었습니다.
하천쟁탈stream piracy 때문에 지금은 요천이 되었다는 것이죠?
지난 번 살펴 본 백두대간 글을 다시 인용해 보면,
지형도를 봅니다.
핑크색 굵은 선이 지금의 백두대간입니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능선으로 백두대간은 고남산에서 들어와 여원재를 거쳐 수정봉805.1m ~ 노치마을 ~ 고기3거리 ~ 고리봉1305.4m ~ 만복대1433.4m → 성삼재로 진행을 합니다.
그리고 그 백두대간 라인을 따라 운봉읍과 주천면의 면계가 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복대 부근에서 서시지맥을 가지 치게 되죠?
그런데 예전에는 그러니까 몇 십 만년 전이나 그 보다 더 옛날에는 백두대간 라인이 위 지형도의 서시(견두)지맥 상 1109.3봉에서 우측으로 흘러(빨간 선) 지금의 구룡폭포(예전에는 능선이 지나가고 있었을 것임) 능선으로 진행하여 728.4봉으로 오른 다음 759.2봉(속칭 덕운봉)에서 지금의 백두대간 라인에 접속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舊 주촌천이자 현 원천천은 아주 옛날에는 주촌천이었는데 하천쟁탈에 의해 원천천이 되어 요천으로 진행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전 그러니까 적어도 몇 천만 년 전에는 백두대간이 지금의 고남산 ~ 여원치 ~ 수정봉에서 노치마을로 내려가지 않고 이백면과 주천면의 면계를 따라 진행하다가 728.8봉에서 덕치리 방향으로 꺾어 지금의 구룡폭포를 넘어 906.2봉 ~ 1109.3봉을 지나 만복대로 가는 루트였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신생대 제4기 이후 우리나라의 지형이 현재의 모습을 갖춘 다음 이 부근에서 하천쟁탈stream piracy이 일어났다.
운봉고원의 지질은 대부분 중생대 대보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고, 고원의 남쪽과 북쪽에는 지리산 변성암 복합체가 분포하고 있다.
운봉고원은 해발고도 450~550m 범위의 분지상 고원이다.
남동쪽의 산지에서 주촌천周村川이 발원하여 람천濫川에 합류한 후, 북류 및 동류하여 임천강과 남강에 유입되어 결국 낙동강에 흘러든다.
한편 백두대간 너머인 운봉 고원 최남단의 고기리에서는 원천천이 발원하여 좁고 깊은 협곡을 형성하며 서쪽으로 흘러 요천에 유입되어 결국 섬진강으로 흘러든다.
운봉 고원 내에서도 상대적으로 경사가 완만한 주촌천의 유역은 침식 작용이 활발하지 않지만 경사가 매우 급한 원천천 유역은 하천의 침식작용이 매우 활발할 것이다.
그러니 좁고 깊은 협곡을 이루며 상류쪽으로 골짜기를 확대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원천천과 주촌천의 경계를 이루는 고기리, 덕치리와 주촌리 일대에서는 원천천이 주촌천 유역에 침입하여 원천천의 유역으로 취하는 하천 쟁탈(stream piracy)이 진행된 것이고 지금도 진행 중인 것이다.
그러니 위 지형도의 지역 'B'는 운봉땅이었을 것이고 그 하천인 '舊 주촌천'은 지금같이 서진西進하지 않고 북동진하여 람천으로 합류되어 남강 → 낙동강으로 가는 물줄기였을 것이다. 또한 원천천은 지금의 고기리가 아닌 덕치리와 호경리의 경계에서 그저 호경리로 흘러 요천에 합류하여 섬진강으로 흐르는 물줄기였을 것이라는 얘기다.
- 졸고 '현오와 걷는 지리산 둘레길' 중에서 발췌
수 많은 비석들.
모두 효자비, 열녀비이더군요.
자, 그럼 오늘 구간을 시작합니다.
고기3거리에서 대간길로 올라섭니다.
아직은 비가 오지 않는데 고리봉이 가까워오자 빗발이 날리기 시작합니다.
고기3거리의 고도가 약 560여 m 정도이고 고리봉이 1305.4m이니 해발 고도차는 약760여 m나 됩니다.
그 거리를 3.2km로 올라와서 그런지 힘듦을 별로 느끼지 못합니다.
12:19
고리봉입니다.
이곳에서 지리서부(북)능선을 만납니다.
성삼재 소고(小考)
성삼재 주차장에서 산행 준비를 하는 장감독의 자세가 자못 결연하다.
“오늘 우리는 서울에서 밤 열차를 타고 왔잖아? 그 시간에 맞춰 구례구역에 구례군내 버스가 대기하고 있어. 그걸 타고 구례버스터미널을 거쳐 여기까지 왔고. 일반 대중교통은 그 버스 한 대가 1일 7회 운행하지. 또 그 역에서 4명이 한 조가 되어 합승택시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어. 아까 택시 즐비하게 서 있는 거 봤지? 그 외는 다 관광버스를 타고 오는 안내산악회야. 한결같이 코스는 다 주릉 방향이지. 그러니까 성삼재 ~ 노고단 ~ 연하천으로 해서 천왕봉 가는 방향.”
“우리가 가는 방향으로는?”
“대간 타는 사람들 이외에는 거의 없다고 보면 돼. 혹 서부능선을 타는 사람들도 있는데 거리가 짧다보니 당일 산행 위주로 오지. ‘지리’하면 역시 지리 주릉이지 이쪽 서부능선을 얘기하는 게 아니잖아.”
“서부능선은 또 뭐야?”
아주 뿌리를 뽑겠다는 사람같이 집요하게 물어온다.
“영신봉과 삼각고지에서 일부 얘기했던 거야. 서북능선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는데 천왕봉 ~ 밤머리재의 동부능선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보면 돼. 근데 사실 이 서부능선은 방향이 북쪽으로 향하고 있어서 어떤 이들은 ‘서북능선’이 맞는다고 우기기도 하지. 그런데 서북능선하면 설악산의 ‘대청봉 ~ 끝청 ~ 귀청 ~ 안산’ 구간이 떠오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지리동부능선에 대(對)한 개념이니 일반적으로 서부능선으로 보는 게 맞는다고들 해. 그리고 보통 이 성삼재 ~ 천왕봉 구간을 주릉(主稜)이라고 하잖아. 이게 다 예전에 백두대간을 몰랐을 때 능선 산행을 하면서 붙여진 이름이야. 그러니까 산을 기준으로 본다면야 반야봉과 천왕봉이 지리산의 중심이고 기준 아니겠어? 하지만 접근성과 등로를 기준으로 본다면 이 성삼재와 천왕봉을 중심으로 봐야 하겠지.”
스틱으로 반야봉 방향과 고리봉 방향을 번갈아 가리키면서 얘기를 계속 이어나간다.
“결국 천왕봉에서 중봉 ~ 하봉 ~ 왕등재 ~ 밤머리재 방향으로 가는 줄기를 동부능선. 천왕봉에서 이 성삼재까지를 주릉. 그리고 성삼재에서 고리봉 ~ 바래봉 ~ 인월 방면으로 가는 줄기를 서부능선. 그렇게 동서를 만들었으니 이번에는 남북능선도 하나씩 만들어야겠지. 그래서 삼각고지에서 삼정산을 거쳐 실상사로 가는 루트를 북부능선 그리고 영신봉에서 삼신봉을 거쳐 형(성)제봉으로 가는 줄기를 남부능선이라고 하는 거지. 예전에는 산깨나 다녔다는 꾼들이라면 1년에 한두 번 정도는 지리에 들어와서 이들 루트를 헤집고 다녔어.”
발목 스패츠를 잊지 않고 착용하면서 묻는다.
“요즘도 그런 사람들이 많나?”
“글쎄. 예전보다야... 어쨌든 이우형 선생이 산경표를 찾은 해가 1980년이잖아. 그러고 나서도 그 산경표의 존재가 일반인들에게까지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한 게 대개 약 1988년경이라고 봐. 그러니까 1988년경 이전까지만 해도 이 지리산에서는 이들 루트가 능선 종주하는 꾼들의 로망이었다고 봐야지. 그러다가 이 루트들이 대간이니 지리태극종주, 덕천지맥이나 서시지맥, 횡천지맥 등 지맥 산행이 활성화되면서 요즘은 약간 빛이 바랜 느낌이야. 더군다나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는 관리의 어려움 그리고 야생동물의 서식지 보존, 희귀 동식물 보존 차원에서 많은 구간을 비탐방구간으로 지정해서 놔서 다니기도 쉽지 않아졌고.”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75쪽
지리서부능선 방향도 그저 이렇고....
2등급 삼각점(운봉 25)을 확인하고....
우틀하여 성삼재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정령치가 새로 단장되었습니다.
12:48
금수강산 형님이 포즈를 취해주셨습니다.
북진에 이어 이번에 남진에도 참여하셨으니 2번 째 대간 진행이시죠?
새로 단장한 정령치 터널과 표지석.
우리 민족의 불행한 근대사를 다룬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보면 달궁에서 열리는 '10월 혁명 기념 씨름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하대치 부대가 피아골을 떠나 달궁으로 향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 달궁에 남부군의 사령부가 있었던 곳이라는 설명도 나온다. 물론 소설 속 하대치의 속내는 멀리서나마 그의 마음 속 영웅 이현상을 보기 위함이었겠지만 어쨌든 깊은 골짜기 안에서도 달궁은 남부군 사령부가 들어앉을만한 비교적 커다란 장소로 묘사된다.
그런 달궁이 2천 년 전으로 올라가면 처음 지리산이 열린 날이 된다. 즉 2천 년 전 인간이 처음 지리산 달궁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신비神秘를 간직한 마한馬韓의 피란 도성 달궁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된다는 것이다.
후대의 사람들은 그들의 궁전을 ‘달의 궁전’이라 불렀다. 지리산에 사람이 들어와 최초로 인문적 환경을 꽃피웠다고 전해지는 ‘달의 궁전’은 그 이름만 들어도 신비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지리산의 깊고 좁은 골짜기에 2천 년 전 신비스런 궁전이 들어섰다는 사실, 이는 지리산 ‘개산開山의 역사’를 의미한다. 즉 그로부터 지리산은 ‘자연으로서의 산’에서 ‘사람의 산’이 된 것이다.
“반야봉 좌우에 두 봉우리가 있는데 황령黃嶺과 정령鄭嶺이라 한다. 옛날 한나라 소제昭帝 3년(BC78)에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에 쫓기어 지리산에 와서 도성을 쌓을 때 黃·鄭 두 장수에게 일을 맡겨 감독케 했다. 도성이 완공된 후 도성을 에워싼 고개 이름을 두 장수의 성姓을 따서 각각 황령, 정령으로 불렀다. 도성은 그로부터 72년을 보전하였다.”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리고 당시 달궁의 도성을 중심으로 천혜의 요새인 황령과 정령을 전초기지로 삼았음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다 반야봉, 노고단, 만복대, 고리봉, 바래봉 등의 고산준령으로 에워싸인 달궁은 그야말로 지정학적으로 천혜의 요새로 손색이 없다.
끝내는 함락, 패망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마한의 피란도성인 달의 궁전은 지금은 잡초더미에 묻힌 몇 안 되는 돌더미와 주춧돌 등 잔해만 남아있을 뿐이지만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이곳을 달궁月宮으로 불렀다.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 달궁月宮이란 한자 지명도 마한의 그 한 맺힌 역사가 시간이 흐르면서 잊혀져가듯 바뀌어 지금은 "達宮"으로 표기된다.
- 졸고 '현오와 걷는 지리산 둘레길' 중에서 발췌
좋습니다.
정령은 여기라 치고 그렇다면 황령은 어디 있습니까?
상황소류지를 지나면서 좌측으로 삼봉산으로 향하여 올라가는 임천지맥을 보게 된다. 이때 중앙 우측으로 드디어 천왕봉이 눈에 잡힌다. 하봉에서 중봉을 거쳐 천왕봉으로 힘차게 올라가는 지리 주릉의 힘이 느껴진다. 중황마을을 빠져나오면서 우측 아래로 다랭이논과 비닐하우스가 하황마을을 지나 60번 도로로 내려가는 모습이 보이고 언덕을 올라 마지막 민가와 식당이 있는 곳을 지나니 등구재다.
그러고 보니 이 아랫마을(남원시 산내면 중황리)이 상황이니 중황 그리고 하황이라는 ‘황黃’자 돌림 이름의 중심에 황치黃峙라는 지명이 보인다. 황치黃峙는 곧 황령치黃嶺峙일 것이다. 그렇다면 무대를 다시 1구간인 달궁으로 옮겨볼 필요가 있다. 즉 제1구간에서 달궁을 얘기할 때 서산대사의 청허당집에 나오는 황장군과 정장군의 황령치와 정령치를 언급했었다. 그때 정령치는 운봉에서 들어오는 길목 즉 지리서부능선에 자리하고 있는 곳이라 특정했는데 황령치에 대해서는 두루뭉술하게 넘어갔었다. 바로 여기서 얘기하기 위함이었다. 즉 천혜의 요새인 달궁의 서쪽인 운봉은 정장군이 정령치에서 방어하게끔 성을 쌓았다면 달궁의 남쪽과 동쪽은 반야봉과 종석대 같은 험준한 산이 막고 있었다. 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라 할 북쪽은 황장군 몫이란 얘긴가? 람천 너머 이 황치마을은 북부지리인 임천지맥의 투구봉 ~ 삼봉산 ~ 법화산에서 넘어오는 길목임과 동시에 람천의 동서를 커버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니 황장군은 이곳에 성을 쌓고 동으로는 변한의, 동으로는 진한의 그리고 북으로는 백제의 침공으로부터 방어를 할 수 있었으니 황장군의 역할은 그만큼 지대하여 이곳이 황령치가 되었고 황치-물론 필자의 가설에 불과한 것이어서 학자들의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다.-가 된 것이다.
- 졸고 '현오와 걷는 지리산 둘레길' 중에서 발췌
집행부에서 준비한 비빔밥을 맛있게 먹고 고남님이 가져오신 운봉 막걸리 또한 여러 순배 돌립니다.
1시간 넘게 머무르다 정령치를 뜹니다.
1351.5봉을 지나,
14:12
서시지맥 갈림길입니다.
야자나무 잎으로 만든 거적 즉 야자매트를 밟으면서 만복대를 내려오노라면 좌측으로 '곰을 만났을 때 대처방법'이란 현수막이 보인다. 이 갈림길이 서시지맥으로 갈리는 삼거리이다.
“여기가 서시지맥 갈림길이군. 생소한 이름이야. 지도에서 봤는데 여기를 견두지맥이라고 한 것 같던데.”
대간을 처음 진행하는 장감독이 벌써 ‘기맥’이니 ‘지맥’이니 하는 개념을 입에 오르내리는 걸 보니 산줄기에 적응하는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래. 신산경표에서는 이 지맥을 견두지맥이라고 하지. 그런데 신산경표는 산경 위주로 지맥의 선을 긋다보니까 산자분수령에 위배되는 것들이 많이 발견이 돼. 그래서 그에 대한 반동으로 산줄기는 산자분수령에 충실하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나온 게 바로 ‘대한산경표’야. 그 대한산경표는 산경이 아니라 수계(水系)를 중심으로 산줄기를 파악한 거지. 그러니까 오류가 있을 수 없었던 거야. 그래서 나도 당연히 대한산경표의 취지를 지지할 수밖에. ‘산으로’ 박흥섭과 내가 주도했고 ‘범여’ 김복환, ‘수헌’ 금헌수 같은 사람들이 동조를 하고 있지. 그런데 우연찮은 기회에 알게 되었는데 배병만도 같은 견해를 갖고 있더군. 그러니 내가 해주는 이야기는 모두 산자분수령의 원칙에 입각해서 이야기하는 거야. 앞으로 산줄기를 얘기할 때에는 당연히 신산경표가 아닌 대한산경표의 입장에서 설명을 하는 것이니까 장감독도 그 취지를 십분 이해하면서 들어야 해. 그리고 틀리거나 이해가 안 간다 싶으면 언제라도 얘기하고!”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81쪽
조금 더 공부를 해보죠.
심화학습입니다.
이런 거 알려주는 곳 아무 데도 없습니다.
좌측으로 갈림길 하나가 나오는군요.
여기서 남원시 주천면을 만나게 됩니다.
이곳이 아주 의미있는 곳이죠?
이른바 서시지맥西施枝脈 갈림길입니다.
공부거리가 하나 나왔습니다.
서시지맥에대해서는 지난 번 잠깐 맛만 보여드렸습니다.
그러면 오늘 지맥 공부 하나 해볼까요?
과제물은 이 서시지맥입니다.
지맥이 무엇입니까?
정의만 하고 지나가죠.
지맥은 대간, 정맥, 지맥에서 가지를 친 산줄기 중 도상 거리 30km 이상의 산줄기(섬 산줄기도 포함)죠?
한강기맥이나 진양기맥 등 기맥은?
기맥은 왜 빼놨냐고요?
여기서 팁 하나. 기맥이라는 개념은 산경표에는 없는 개념이다. ‘태백산맥은 없다’의 저자인 조석필 선생이 산경표를 더욱 유용하게 쓰기 위하여 ‘일정한 세력은 있으나 산경표에서 이름을 얻지 못한 몇몇 산줄기’를 기맥으로 부르자고 했다. 남한의 산줄기 중에서는 가령 남한강과 북한강을 가르는 한강기맥. 영산강의 서쪽 벽인 영산서기맥 등이 그것이다. 대한산경표에서는 이외에 몇 개의 줄기를 더 제시했는데 이것도 다음 기회로 미루자.
- 졸저 전게서 132쪽
신산경표에서는 ①산줄기의 세력이 정맥급이나 끼고 있는 물줄기가 10대강에 들지 않은 것,
②산경표에서는 정맥이었으나 신산경표의 체제 하에서 정맥으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린 것
③도상 거리가 100km 이상 급 중 유역면적이 3,300㎢ 이상의 강을 구획하는 산줄기 등
등의 산줄기를 岐脈이라고 하여 준정맥급으로 취급을 하여 주었으나,
기맥을 넣음으로서,
①기맥에 대한 기준이 모호하여 만든 이들마다 다른 이름으로 부르거나 그 기준도 통일이 되지 않아 산줄기 체계를 복잡하게 한다는 점 즉 지나치게 자의적이라는 점
② 굳이 그러한 산줄기를 준정맥으로 달리 취급할 근거나 필요성, 상당성도 없다는 점,
③ 산맥은 산맥 - 지맥支脈으로 대응 관념 줄기를 구분 할수 있고 , 산줄기는 대간, 정맥 - 지맥枝脈 정도로 대응 관념을 상정할 수 있으나 기맥은 대응 산줄기도 마땅치 않음(물론 대간, 정맥, 기맥 - 지맥으로 상정할 수도 있으나 그러면 산경표에 없는 개념을 도입하는 결과가 됨)
④ 지맥은 30km라는 숫자로 어느 정도 정착이 됐고 지맥에 대해서 만큼은 별다른 이론異論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
등을 들어 '산으로 박흥섭'은 과감하게 '기맥'이라는 개념을 포기하고 이를 산줄기 체계에서 뺐습니다.
- 이는 곧 '대한산경표'라는 책자를 통하여 발표할 예정입니다.
어쨌든 이 지맥에 들기 위해서는 한 개의 전제조건을 충족하여야 합니다.
대전제인 셈이죠.
바로 산자분수령입니다.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들은 개념인 산자분수령!
그 개념에 대해서 알아 봅니다.
왜냐하면 산경표는 산자분수령에 입각하여 대간이나 정맥을 구분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다. ‘산자분수령’이 무엇인가? 실제 이 뜻은 ‘自’를 “스스로”가 아닌 “~으로 부터”라고 해석을 하여 “산은 분수령으로부터 온다.”로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독해법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 산자분수령이 산경표 안으로 들어오면 해석을 달리한다. 이른바 관용구로 쓴다는 말이다. 즉 하나는 문법에 맞춰 “산은 분수령으로부터 온다.”고 하여 분수령을 고유명사로 파악하는 것 이외에 ‘自’를 “스스로”라는 부사로 해석하여 “산은 스스로 분수령이 된다.”라는 보통 명사로 분수령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조선인들은 산줄기와 관련하여 후자를 산자분수령의 참뜻으로 새기고 있었다. 즉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못한다는 대자연의 진리. 그 말은 곧 두 산줄기 사이에는 반드시 물줄기가 나오게끔 되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곧 산줄기는 이 두 물줄기가 만나는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한다는 말이 되고, 그것은 역으로 산줄기는 물줄기를 감싸는 울타리가 된다는 말과도 같다.
고토는 산경표를 제대로 이해했던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산줄기 산행을 하다보면 삼면봉(三面峰)을 무던히도 많이 만난다. 세 개의 읍 · 면이 만나는 봉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우리가 편의상 붙여 부르는 이름이다. 분수령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어디나 분수령은 널려 있다. 보통명사라는 얘기다.
우리가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을 얘기할 때 쓸데없이 지엽적인 문제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산자분수령은 산자분수령이다. 산은 스스로 분수령이 되므로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줄기는 산줄기를 구획한다는 말이다.
산경표에는 백두대간과 정간, 정맥이 나온다. 산경표는 산줄기에 계급을 주었다는 얘기다. 그렇다. 간(幹)은 줄기이고 맥(脈)은 줄기에서 흘러나간 갈래다. 맥이라는 게 무엇인가? 혈관 즉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산맥이란 산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 즉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여러 산줄기들이 가지를 친다. 그 가지 줄기들은 강을 둘러싼 줄기와 그렇지 않은 줄기로 나누었다. 그러니까 강을 둘러싼 줄기를 주맥(主脈)으로 보고 그렇지 않은 줄기를 지맥(支脈)으로 보았다. 주맥은 정간과 정맥이었고 여타 줄기들은 다 지맥이었다. 곧 조선산맥을 중심으로 각 지맥이 작은 산맥으로 나뉘어져 간 것이었다.
고토는 이해했다. 조선인들은 물줄기를 따라 촌락을 형성하며 살았고 산줄기를 사이에 두고 양쪽 지방의 풍습과 언어도 달라짐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곧 조선인들은 이미 산과 강을 다 꿰차고 거기에 순응하며 사는 사람들이었다. 백두산을 숭배하며 백두산신이 천왕이고, 천왕이 국사대천, 천황이라 불리는 단군 아니던가!
- 졸저 전게서 160쪽 이하
이 산자분수령의 대원칙에 의하여 산경표가 만들어졌으니 산경표의 이 정신을 계승한 신산경표라고 하여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즉 신산경표도 이 '산자분수령'의 원칙이 적용된다는 얘기입니다.
위 설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합수점合水點입니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문법적인 해석은 뒤로 미루고 여기서는 ‘산 곧 산줄기는 스스로 분수령이 된다.’고 해석하자. 이를 ‘산자분수령의 제1법칙’이라고 한다. 여기서 ‘自’를 스스로란 ‘부사(副詞)’로 본 거다. 고로 산줄기는 물을 건너지 못하니까 물을 만나면 그 산줄기는 맥을 다하게 된다. 그 물도 그냥 물이 아니라 두 물줄기가 만나는 합수점에서! 그 합수점도 그냥 합수점이 아닌 자신보다 상위등급의 물줄기와 만나는 합수점에서!
- 졸저 전게서 41쪽 이하
신산경표에서는 과제물의 이 지맥의 이름을 이 산줄기에 있는 산 중 최고봉인 견두산의 이름을 따서 견두지맥이라 불렀습니다.
그럼 먼저 견두지맥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인터넷에 뗘도는 내용을 보면,
견두지맥은 백두대간이 만복대 직전의 능선 분기점(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 남원시 산내면 덕동리,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 위안리의 경계점)에서 동북쪽과 동남쪽 및 남동쪽으로 가지를 쳐 전라남도 구례군 구례읍 신월리로 이어지는 도상거리 약 36.7km의 산줄기로,
분기점에서 시작하여 신월리의 병방 마을에서 그 맥을 섬진강에 넘겨주고 있다.
이 산줄기를 따라가면 영제봉(1048m), 견두산(774.7m), 상무봉(645m), 천마산(653.8m), 깃대봉(690.8m), 도장봉(635m), 가동봉(497.9m), 형제봉(621.7m), 천왕봉(695.0m), 수양봉(615m), 갈미봉(494.7m), 깃대봉(241.7m), 병방산(163m) 등을 만날 수가 있고,
이 산줄기의 북쪽과 서쪽에는 앞냇물, 남원천, 요천, 신덕천, 수지천 등이 섬진강으로 흐르며,이 산줄기의 남쪽과 동쪽에는 계월천, 음천, 둔기천, 신도천, 서시천, 백련천 등이 섬진강으로 흘러간다.
복잡하지만 간단하게 얘기하면 신산경표에서는 만복대 0.5km 못 미친 지점에서 가지를 쳐 다름재 ~ 견두산 ~ 깃대봉 ~ 병방산을 거쳐 섬진강으로 잠기는 37.5km라고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 위 박스에는 36.7km라고 되어 있지만 신산경표 책에는 37.5km로 표기.
여기서 동남쪽, 동북쪽 및 남동쪽이라는 방위각을 자주 거론하는 것도 시야만 어지럽힐 따릅입니다.
그리고 물줄기를 나타낸답시고 요천이나 남원천, 신덕천, 수지천 등을 거론하는 건 내용의 본질을 호도하는 것으로 불필요한 내용들입니다.
이를 개념도로 보면,
참고도 #1
신산경표의 견두지맥 개념도입니다.
산줄기를 파악하는데 방위개념이 불필요하죠?
다음은 견두지맥이 가지를 치는 부분과 물줄기를 보기로 합니다.
참고도 #2
견두(서시)지맥이 백두대간에서 가지를 쳐 나오면서 그 사이에서 물줄기들이 나옵니다.
대두천, 수락천.....
이들이 산동면 면소재지 부근에서 하나로 모이면서 서시천이라는 이름으로 바뀝니다.
산줄기와 물줄기의 끝을 볼까요?
왜냐고요?
그렇죠.
합수점을 보기 위함입니다.
이를 지도로 문제가 되는 649.5봉 이후를 지도로 보기로 합니다.
참고도 #3
위 노란 박스 내용을 보면 복잡하게 기술이 되어 있지만 그 끝은 참고도 #2의 녹색선입니다.
그렇죠?
갈미봉 ~ 병방산을 지나 병방마을에서 그 맥을 다한다고 했으니....
그 끝을 더 확대해 봅니다.
참고도 #4
눈치 채셨죠?
이상한 점이 하나 있죠?
그냥 일반 산줄기로 부르려면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산경표의 대전제 즉 정맥이나 지맥이라는 이름을 갖기 위해서는 아무 데로나 흘러가 맥이 다하면 안 됩니다.
반드시 합수점으로 진행을 하여야 합니다.
물론 예외는 있습니다.
그건 다시 보기로 하고 오늘 과제는 합수점 아닙니까?
따라서 분명 산줄기는 합수점으로 가서 맥을 다한다고 하였는데 이 견두지맥은 그렇지 않죠?
그저 그 지맥이 갈 수 있는 한 제일 길게 간 것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위 갈색 박스 내용을 보면 분명 산줄기는 다시 말해서 이 지맥은 합수점 그것도 자신보다 한 등급 위의 물줄기가 만나는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하여야 한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참고도 #3의 붉은선인 서시지맥을 봅니다.
그 끝은 서시천과 그보다 한 등급 위의 물줄기인 섬진강이 만나는 합수점(37.4km)에서 그 맥이 다함을 알 수 있습니다.
자!
어떤가요?
이게 곧 대한산경표가 나오게 된 배경입니다.
산줄기가 지맥이라는 개념 혹은 계급에 그 기본이 된 물줄기의 이름을 받아(여기서는 서시천) 고유명사화 될 때(여기서는 서시지맥)에는 그 자격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냥 긴 산줄기로 즉 산경山經 위주로 파악을 하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산경표'라는 이름을 갖다 썼기 때문입니다.
'산경표'는 산줄기를 그저 표로 나타낸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할 때에는 보통명사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책 제목이 되고 '산자분수령'이라는 큰 의미를 함축하고 있을 때에는 고유명사로 봐야 합니다.
그럴 경우 신산경표든 대한산경표든 나아가 한국산경표든 간에 '산경표'라는 개념을 차용한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대전제인 '산자분수령'의 합수점 개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지맥이 되가 위한 조건 중 제1조건인 이 '합수점' 외에 물줄기의 울타리가 되는 조건인 제2조건과 산경의 개념으로 보는 제3조건이 있는데 이는 다음 기회에 보기로 하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갑니다.
날이 어느 정도 밝았습니다.
랜턴을 벗습니다.
이 서시지맥 갈림길을 지나면서 전라남도 구례군을 떠나 이제부터는 전라북도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행정구역도 남원시 주천면과 산내면의 면계를 따라 진행하게됩니다
- 졸고 백두대간 '성삼재 ~ 여원재' 구간 산행 기 중
훼손된 등로를 살리는 방법 중의 하나!
야자매트를 까는 일입니다.
푹신도 하거니와 토사의 유실도 방지할 수 있으니.....
14:23
만복대입니다.
반야봉과 더불어 서부지리산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봉우리입니다.
여기서 보는 서시지맥이나 지리 주릉 그리고 임천지맥 등을 환히 볼 수 있는데 조금은 억울하기만 합니다.
15:32
묘봉치를 지나고 잠시 간식 타임.
살림살이를 책임지고 있는 쿨총무님.
우중에도 대원들 먹거리를 챙기십니다.
대간 총무직 수행하시느라 정말이지 고생 많으셨습니다.
15:58.
아까도 고리봉이 나왔는데 또 고리봉1248m입니다.
편의상 그 고리봉1305.4m을 큰고리봉이라 하고 이 고리봉을 작은 고리봉이라고도 부릅니다.
고리봉 얘기가 나왔으니 이참에 정리하고 지나가자. ‘지리 99 팀에서 나온 얘기다. 즉 지리산의 고리봉은 백두대간의 서부능선 상에 두 곳이 있다. 성삼재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봉1248m이 운봉읍과 주천면 그리고 산내면의 경계에 있는 봉1305.4m에 비해 낮다고 하여 작은고리봉이라 불린다.
예전 국립공원에서 제작한 지도에는 이 '작은 고리봉'이 두리봉으로 실려 있었던 적이 있었다.
지리산의 전설 '김경렬' 님의 저서에도 그렇게 그려졌다. 일설에 의하면 우리 고어古語에서는 고리봉의 고高와 두리봉의 두頭 모두 높은 정상의 봉우리를 뜻하는 공통점이 있어 이에 착안하여 두 봉우리를 구분하기 위하여 그리 붙여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백두대간이 알려지면서 고리봉이 산행 이정의 중심이 되고 두리봉이 인구 회자에 밀려짐에 따라 그 둘을 구분하고자 '큰'자와 '작은'자를 도입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고어를 놓고 보자면 높을高 보다는 머리頭가 더 높고 '대장'의 의미로 자주 채택되었음은 백두산을 통하여 이미 증명이 되었던 터, 그렇다면 오히려 ‘작은고리봉 = 고리봉’, ‘고리봉 = 두리봉’이라 칭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생각건대 국립공원에서는 이런 취지를 반영하여 이 봉우리에 '고리봉'이라는 정상석을 세웠을 것이다.
하지만
예전 서부능선의 고리봉에서 가지를 쳐 고기리로 떨어지던 탈출로가 이제는 거꾸로 백두대간에서 갈라지는 갈림봉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그 고리봉에 삼각점 그것도 2등급
삼각점(운봉
25)이
박혀 있어 그 중요도는 더 하게 되었을 것임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할 것이다.
어쨌든
지리산의 한 축을 담당했던 서부(북)능선의
중심이 만복대보다
오히려 고리봉으로 움직이게 된다.
- 졸고 '현오와 걷는 지리산 둘레길' 중에서 발췌
웅성거리는 소리에 무엇인가 하고 봤더니.....
무슨 버섯입니까?
달걀버섯?
16:23
당동마을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아주 중요한 루트입니다.
- 국제신사國祭神祠인 남악사와 사설신사私設神祠인 성모사
지리산 신사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즉 나라에서 주관하는 국제신사國祭神祠와 민간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사설신사私設神祠 등이 그것이다. 즉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는 지리산신이 백성에게 공덕을 베푼 것에 보답하는 일종의 답례 성격의 제사였다. 이는 정기적으로 치러지는 제사가 주主이기도 했지만 반면 나라에 재앙이 생기면 기우제 · 치병제 · 여제厲祭 등을 부정기적으로 지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일반 백성들은 사설신사에서 무격巫覡을 통하여 성모천왕에게 비손이나 굿과 같은 무속 의례를 올렸다. 성모천왕의 신통한 영험으로 개인이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받기를 빌었던 것이다.
이럴 때 그 국제신사가 남악사였으며 사설신사는 성모사, 제석당, 용유당 등이었다. 또한 초기 신라시대의 남악사에서는 선도성모를 모셨겠지만 신라가 망하고 불교나라인 고려로 넘어가면서 남악사는 ‘智異山之神’을 모시게 됐고 천왕봉으로 간 성모는 위숙황후나 마야부인이 되어 성모사를 지키게 됐을 것이다. 이렇듯 지리산 성모신앙은 지모신신앙을 바탕으로 발전했고 전통신앙과 결합하면서 산악숭배신앙과 밀착하게 된다. 그러다 16세기로 들어오면서 당시 중봉이라고도 불리는 제석봉에 제석당이 생기게 되는데 이때 제석당에서 모시는 신은 천신으로 이 천신은 남자 신이었다. 이는 어쩌면 조선사회가 철저한 가부장적 유교 사회임을 시사한다 하겠다.
- 졸고 '현오와 걷는 지리산 둘레길' 중에서 발췌
그 남악사가 노고단에 있었으나 언제인가 구례군 산동면 좌사리로 내려갔다
난동마을에서 방광마을 가는 길은 예술인 마을이라는 좀 특이한 곳을 지나쳐야 한다. 전통 농촌 마을을 걷다가 만나는 예술인 마을은 전원주택 단지를 넘어 카페촌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고급스러운 주택 마당에 세워놓은 조각상이나 조형물들은 지나면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생각을 갖게 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우측 마을은 당동堂洞 마을이다. 남악사南嶽祠라는 사당祠堂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남악사라! 지리산신사智異山神祠라고도 불리는 남악사의 남악南嶽은 지리산의 또 다른 옛 이름이다. 신라시대에 붙여진 이름인 것이다. 신라는 그 영토가 확대됨에 따라 국가의 제사권 장악을 통하여 백제와 고구려 사람들의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통치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명산대천에 사당을 세워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 기도처를 국토를 수호하는 다섯 개의 산 즉 오악에서 지내도록 한 것이다. 그리하여 동악은 토함산, 서악은 계룡산, 북악은 태백산, 중앙은 팔공산 그리고 남악은 이 지리산으로 정했으니 이는 산악숭배사상 즉 산신사상의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남악 즉 지리산에서의 그 제사터는 서부 지리를 책임지고 있는 반야봉 바로 아래 있는 봉우리였다. 언제부터인가 노고단-‘姑’의 훈이 ‘시어머니’인 반면 ‘嫗’는 ‘할머니’ 임에 비추어 ‘노구당 / 노구단 /노고단’이 되지 않았을까?-으로 불리던 봉우리이다. 선교사 유적지와 이에 따른 부대시설의 설치, 빨치산과 한국전쟁 그리고 무분별한 삼림자원 채취 그리고 군부대 주둔 등으로 자연 훼손이 극심한 곳이었다. 최근 관리 공단에서는 나무 데크로 탐방로를 만들어 훼손을 최소화 하려 노력하고 있는데 지금은 이도 모자라 ‘출입 허가제’ 카드까지 들고 나와 하루 출입할 수 인원을 정해 놓아 복원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 졸고 '현오와 걷는 지리산 둘레길' 중에서 발췌
헬기장을 지나니.....
바로 861번 도로가 나오고 오늘의 목적지인 성삼재입니다.
성삼재 얘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죠.
다음 구간은 성삼재 ~ 종석대 ~ 코재 ~ 노고단 ~ 돼지평전 ~ 반야봉으로 진행을 하여야 하는데 종석대는 비탐 구간, 노고단은 허가 구간으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고 새벽이라 천혜의 절경을 감상하지 못하는 억울함이 있습니다.
부디 북진할 때 이 구간을 꼭 진행하시기 당부드립니다.
우중에 수고
많았습니다.
첫댓글 겨울에 자주 올라가는 길이죠.세걸산거쳐 바래봉으로.이제부터 서부능선이라 해야겠네요.많은 가르침 감사합니다.
이곳이 너무좋아 집사람과 고기3거리에 도착하여 정령치 올라서 구경하고 다시 남원으로 갔습니다. 성삼재서-고기리3거리로 하산하여 노치리로 걸어가면서 이곳의 경치를 만끽했는데 자세한 여러자료를 읽어보니 감회가 깊고 역사적 자료를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