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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사모(국악을 사랑하는 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금난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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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의 시기 사랑은 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깊어졌다.
노국공주는 안동에서 공민왕을 설득해 말 타는 연습을 시키기도 했다.
천생의 베필이었다.
"왕과 공주는 밤이면 후원에 나가서 말타기 연습을 하였다." - <고려사>
2년 뒤 흥왕사(1363년 윤3월)
괴한 50여 명이 공민왕의 처소에 침입했다.
반역이었다.
그런데 목숨을 걸고 그녀가 나섰다.
"저 방에 들어가려거든 나의 목을 베고 가라."
반란군은 원나라 공주의 기세에 역모를 포기했다.
"공민왕의 개혁 움직임들을 노국공주가 동조하지 않았다면,
적극적으로 아니더라도 호응을 하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고,
그후의 흥왕사의 반란이라든가 이런 걸 봤을 때
그냥 단순한 부부관계를 넘어서
정치적 목적에 상당히 동조를 해서 움직인 것으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이형우 박사(서울시 문화재과 팀장)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이야기는
7세기가 지나도록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조선시대 관원의 녹봉으로 쓰일 양곡을 저장하던 창고터.
서울 마포 광흥장 터(廣興倉 址).
여기에 '공민왕 사당(恭愍王 祠堂)'이 있다.
그런데 '공민왕 사당'엔 그 홀로 모셔져 있지 않다.
노국공주도 함께 있다.
사당에 부부를 함께 모시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공민왕은 노국공주와 따로 떨어져 생각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4. '자주독립국가'의 꿈!
숙청의 칼끝은 원나라를 향했다!
노국공주는 공민왕의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노국공주의 사랑에 힘입어 공민왕은
거침없는 개혁정치를 펼쳐 나가기 시작했다.
반원의 기치를 들고 피의 숙청을 진행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는
<고려사>의 내용을 축약한 역사서다.
<고려사>에 누락된 내용도 실려있는데, 공민왕에 대한 일화도 첨가되어 있다.
<고려사절요>는 그날의 기록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1356년 5월 18일.
피비린네가 진동한 날이었다.
그것은 친원세력(권문세족)의 처단이었다.
기철(奇轍)과 그의 아들, 조카, 그리고 권겸(權謙) 등 대대적인 숙청이었다.
기씨 일당은 이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피가 궁문에 낭자하고 칼날이 길에 가득했다" - <고려사절요>
기철 일당의 처단,
그것은 위험한 선택이었다.
기철은 원나라 기황후의 친오빠였기 때문이다.
누이가 황후에,
조카가 황태자,
기철은 스스로를 신하라고 칭하지도 않았다.
"기철이 왕에게 시를 올려 치하하였는데 신(臣)이라 일컫지 않았다."
오만은 도를 넘었다.
친원파(권문세족)는 고려를 원의 속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운, 조익청, 기철 등은 백성들을 안착시키기 위해
고려를 원나라의 한 성으로 만들어달라고
원 황제에게 상소하였다."
- <고려사> (충혜왕 후 4년, 1343년)
원에 속한 권문세족(친원파)들은,
아녀자를 범하고,
돈으로 관직을 사고 팔고,
각지에 농장을 만들어서 수탈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그들의 딸까지 기꺼이 조공했다.
"복안부원군 권겸이 원나라 황태자에게 딸을 바쳤다." - <고려사절요> (공민왕 원년)
"경양대군 노책이 딸을 원에 바쳤다." -<고려사절요> (공민왕 3년)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인사권을 장악한다던가,
탈점을 한다던가, 고리대금업을 한다던가,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수탈을 하기 때문에
바로 그들이 개혁의 특별 대상이 되었다고 봅니다."
- 홍영의(국민대 교수)
공민왕은 계엄령을 선언한 뒤
이것이 공정한 처사였음을 원에 알렸다.
"기철 등이 권력을 빙자하여 임금의 통제에서 벗어나
관리의 선발을 제 기분에 따라 결정하였고, 법을 제 편의대로 운용하였다."
-<고려사> (공민왕 5년 6월)
베이징 시 후통거리.
원의 골목 구조가 아직도 남아있다.
하지만 원래 흔적은 많지 않다.
보수중인 <원 만송 노인탑>은 많지 않은 원대 탑이다.
14세기 원.명 교체기.
공민왕이 친원세력을 제거할 당시
원은 각종 농민 반란에 시달리는 말기였다.
고려에 정벌군을 보내기엔 역부족인 상황,
공민왕은 이 정세를 노렸다.
""당시 공민왕이 친원세력들을 척결할 수 있었던 배경은
원나라 정권이 불안정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농민반란(홍건적의 난)까지 일어나
원나라가 고려에게 보복할 만한 여력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황후의 가족을 살해했습니다."
- 짱판 교수(베이징대 역사학과)
원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자주국가 고려를 건설하고자 하는 공민왕의 꿈은
즉위와 함께 실현되기 시작했다.
10년만에 귀국한 공민왕은
먼저 100여 년간에 이어졌던 풍습부터 바로잡았다.
스스로 먼저 변발을 풀고
몽골복을 벗었다.
"왕은 땋은 머리를 풀고 몽골복을 벗었다." -<고려사절요> (공민왕 원년)
풍습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
우리 고유의 것으로 알고 있는 전통 혼례에도 몽골 풍습이 남아있다.
신부의 족도리나 연지, 곤지가 그렇다.
풍속이 섞이면 정착하기 마련이다.
공민왕은 또한 원의 연호 사용을 금지했다
(停志正年號-정지정년호)
그리고 고려에 설치된 원의 관아,
정동행성 이문소(罷征東行中書省理問소)를 폐지했다.
이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공민왕에겐 더 큰 포부가 있었다.
쌍성총관부 수복
쌍성총관부를 격파하고
잃어버린 국방 영토를 되찾는 것이었다.
고려의 땅을 수복하는데 불과 두 달이 걸렸을 뿐이었다.
"본래 우리나라 영토였는데
고종 무오년에 원에 함몰된 뒤, 무려 99년 만에 수복한 것이다."
- <고려사절요> (공민왕 5년 7월)
북벌에 대한 공민왕의 야심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고구려의 옛 땅까지 수복하겠다고 결심했고
그 각오는 마침내 요동을 점령하게 되었다.
"進襲遼域(진습요역) - 요성을 습격하였다." - <고려사절요>
"요동이라고 하는 지역은 예전부터 고려의 영토라 인식되어왔고
원.명 교체기에 국제 질서의 틈바구니를 공민왕은 적절하게 이용했고
그리하여 요동을 정벌한 것입니다."
- 홍영의 교수
공민왕의 목표는 한가지였다.
'자주 독립 국가 고려'
노국공주에겐
자신의 조국을 배신하는 것이었지만
그녀는 공민왕의 가장 든든한 동반자이자 조력자였다.
공민왕의 거침없는 개혁에 대해서
기득권층의 반발은 극심했다.
"전답을 몰수하고 조세를 징수하자, 오히려 이 제도의 폐지를 요구했다."
(收其田仍追累年之租 '請罷' -수기전잉추루년지조 '청파' )
공민왕은 권문세족에 이렇게 응수했다.
"좀도둑이 밤에 다니다가 달 밝음을 미워하는 격이구나"
공민왕의 개혁 정치는 재위 내내 지속되었다.
무려 네 번에 걸쳐 개혁 조치를 발표했다.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하고,
백성들이 빼앗긴 토지를 돌려주고 노비 신분을 회복시켜주는 등
파격적인 정책을 펼쳐 나갔다.
5. 개혁과 사랑을 함께 한 노국공주의 죽음.
- 공민왕의 절망, 기행...
노국공주와의 사랑과 거침없는 고려의 개혁.
하지만 행복한 시간은 거기까지였다.
공민왕의 말로에는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1365년 2월.
16년만에 첫 임신.
공주가 위중했다.
"공주의 병이 위독하였으므로 일급 죄인까지 사면하였다." - <고려사>
산달이 되며 병이 위급해지자
공은 죄인까지 사면하여 공주의 무탈을 빌었다.
그러나 공주는 죽었다.
"왕은 분향하며 단정히 앉아서 잠시도 공주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공주는 이내 죽었다.
왕은 비통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 <고려사, (후비열전)>
"나라를 가지고 가정을 가지는데 배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이렇게 내조의 공을 세운 이에 대해서는 더욱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노국공주 덕에 우리 나라가 오늘까지 존속하게 되었다.
영원히 국가를 지키고 함께 살아야 할 터인데 그만 세상을 떠났구나!
슬픈 마음은 더욱 깊어만 간다."
- <고려사, (후비열전)>
공민왕 노국공주 쌍릉 (개성시 개풍군)
개성시 개풍군에 노국공주의 정릉이 있다.
그리고 그 곁에 공민왕의 현릉도 있다.
고려시대 왕과 왕비를 함께 모신 유일한 쌍릉이다.
노국공주의 무덤을 만들 때 공민왕은 쌍릉을 계획했다.
공민왕은 능을 지으며 또한 한 켠에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진행시켰다.
공주의 초상화를 걸어둘 전각을 짓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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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통보제선사 터>
3천명의 승려가 지낼 수 있는 절이었다고 한다.
"모든 관원들이 등급에 따라서 역부를 내어 나무와 돌을 운반하였다.
나무 한 개를 수백 명이 끌어도 앞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 있어서
'어기어차' 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죽은 소가 길에 연이어 넘어져 있었다."
- <고려사>
공주가 죽은 지 8년 뒤 어느날.
"어찌하여 비빈들을 가까이 하지 않소?"
"공주만한 여자가 없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당연한 이치요,
왕도 또한 죽음을 면치 못할 터인데 어찌 그다지 심히 슬퍼하시오.
남들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우니 다시는 그리 슬퍼마시오."
- <고려사절요, 1373년 3월>
<신돈 등용 - 전민변정도감, 권문세족의 불법 토지, 노비 해방>
공민왕은 신돈을 등용시켜 정사를 돌봤다.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하여
권문세족이 불법으로 빼앗은 토지를 돌려주고 양민을 해방시켰다.
신돈을 통해 개혁정치를 이어가고자 했으나 그는 곧 타락했다.
공민왕이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할수록 신돈의 권력은 막강해져 갔다.
백관들은 궁궐로 가지 않고 그의 집으로 출근했고
결국 공민왕은 신돈을 주살했다.
<미소년으로 구성된 자제위 설치>
공민왕이 마지막으로 의지했던 신돈의 사망 직후,
그는 자제위를 설치,
미소년들로 이루어진 경호 집단을 곁에 두었다.
공민왕은 자제위를 늘 곁에 두고
새로 맞은 왕비조차 가까이 하지 않았다.
"밤낮으로 공주를 생각하여 드디어 정신병이 생겼다."
-<고려사, 공민왕 21년>
이 무렵부터 <고려사>는 공민왕을 정신 이상으로 보고 있다.
공민왕은 극도로 문란해져 갔다.
자제위 소년들의 밤을 훔쳐보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기이한 왕의 행적이었다.
아내들을 멀리 하고,
여장을 하고,
또한 지나치게 총애하는 자제위까지...
<고려사>의 기록은
차마 입에 담기 부끄러울 정도였다.
자제위 소년들의 밤을 훔쳐보는 것은 예삿일이었다(관음증, 觀淫症)
"김흥경과 홍륜 등을 불러들여서 난잡한 행동을 하게 하고
왕은 곁방에서 문틈으로 엿보았다."
- <고려사, 공민왕 21년>
그렇게 2년.
1374년 9월.
공민왕은 자제위 홍륜에 의해 살해되었다.
고려의 개혁군주로 23년,
노국공주의 남편으로 16년,
그리고 그리움에서 벗어나오지 못한 9년.
마흔 다섯의 왕의 죽음은 허무했다.
공민왕은 생전의 바램대로 노국공주 곁에 잠들었다.
고려의 능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능으로 평가받는 공민왕 무덤의 내부.
죽음이 갈라놓지 못하도록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쌍릉은 특별한 구조로 되어있다.
작은 구멍이 그것.
공민왕의 현릉과 노국공주의 정릉을 연결하는 통로가 있다.
두 왕릉 사이, '영혼을 연결하는 길'인 것이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지극한 사랑은
고려가 패망하고 조선이 들어선 뒤에도 곧잘 회절되었다.
조선의 정수를 관통하는 <종묘>.
조선의 왕과 왕비가 아니면 모실 수 없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에 공민왕이 있다.
그리고 공민왕 곁에 노국공주도 있다.
공민왕을 모시기 위해
노국공주도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은 일반 다른 왕과 왕비와는 달랐기 때문 아닌가 싶습니다.
신하들 뿐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공민왕 가는데는 노국공주도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이 민간 신앙으로까지 만들어지고,
심지어 조선의 종묘에 고려 '공민왕 사당'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로 말입니다."
- 이형우 박사(서울시 문화재과 팀장)
조선 태조 이성계가 조선의 성역에 왜 유일하게 고려 공민왕의 사당을 세웠을까.
이성계는 한낱 시골 변방의 호족출신으로
공민왕이 장군으로 발탁 기용하지 않았으면 그는 역사적인 인물이 될 수 없었다.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은
쌍성총관부 고토 회복 전투로 공을 세워
함경도 지역 천호(千戶)에서 만호의 병마사가 되었고,
동녕부에서 고려를 넘보는 몽골군을
동북면원수에 임명된 이성계가
단번에 섬멸해 대승을 거두고 막강한 실력자로 부상한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공민왕 사당을 세운 것은
공민왕과의 의리,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행동 아닐까.
또한 침략 몽골에 항거하여
허약한 국력을 되살려 반석 위에 올려놓은 공민왕의 업적을 존경하며,
정치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원한 스승으로 모시고 싶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은
역사의 신화가 된 세기의 사랑이었다.
공민왕의 마지막 행적이 이처럼 기이한 것은
고려의 마지막 역사가 조선에 의해 씌여진 점도 감안해야 한다.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위해
고려와 공민왕의 말로는 이처럼 어둡게 씌여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국공주와의 사랑만큼은
조선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공민왕은 폄하할 순 있어도,
그 사랑까지는 모욕하지 못한 것이다.
고려의 마지막 중흥기를 이끌었던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은
65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시간을 초월한 사랑으로 기억된다.
첫댓글 일심 광명 화신
감사합니다 청연님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아미타불
감사합니다
일심광명화신아미타아미타아미타()()()
자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자료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금의 정치풍토를 생각해 봤습니다
공 무상 무아를 깊이 통찰하는 위정자가 나오면
국민이 많이 행복할 것 같습니다 (희망이기도 합니다)
일심 광명 화신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불()()()
긴 여정이네요.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사랑이 무서운것이군요 아미타불,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