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7주간 화요일(마르9,30-37)
섬기는 봉사의 삶을 살아야 한다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 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동고동락하면서도 서로의 마음을 읽지 못할 때는 답답함을 갖게 됩니다. 같은 잠자리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말대로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야말로 동상이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수난과 죽음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마땅히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 너머의 부활을 보지 못하고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기 전에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두 번째 수난 예고를 했는데도 알아듣지 못하고 아옹다옹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안쓰럽기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입니다”(마르9,34). 이 물음은 창세기3장9절의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하는 물음이나 카인에게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는 물음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속을 살펴보아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네 마음의 중심이 어디 있는가를 살피라는 뜻입니다. 사실 큰 사람은 단순히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품이 큰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높은 자리를 희망하고 있었으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복음적인 삶을 잘 살 수 있을까? 섬기고 봉사하며 더 많이 사랑하는 문제로 고민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9,35).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랑으로 섬기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섬긴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대접받기는 쉬워도 상대방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내 중심이 아니라 상대방을 중심으로 내 것을 양보한다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2,6-7).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것입니다. 다 퍼 주고도 적게 준 것이 아닌지 걱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비운만큼 주님께서 채워주십니다. 세상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려면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서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섬기는 봉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이 세상에서 마음의 평화와 위안을 누리려 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바람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보이는 평화를 갈망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을 바라십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의 일시적인 수고와 땀, 희생의 봉헌을 새롭게 하십니다. 주님을 차지한다면야 종이면 어떻고 꼴찌면 어떻습니까? 결국 모든 것을 얻은 것인데 말입니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은 한이 없으십니다.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고 참된 봉사의 삶에 한 발 더 다가가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첫댓글 신부님, 감사합니다 ♡
아멘. 감사합니다 💕
우리는 지금 당장의 평화를 갈망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을 바라십니다.
아멘
아멘
신부님 고맙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것입니다.
아멘!~~~
묵상 하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