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 (외 1편) 이강하 님께서 아흔아홉 번째 눈을 뿌렸다 잠시 쉬었다 가라고 "새로운 시작을 응원합니다"라고 정년퇴임 기념식에서 축하하며 손뼉 친 범고래들 어제도 고마웠다 마당과 화단 사이 하얀 새끼 부엉이 닮은 눈사람들, 눈이 부시다 밤새 잠꼬대가 심했을까 눈사람 하나가 목이 삐딱하다 범고래는 떠났는데 눈사람은 살이 붙었다 밤새 얼마나 탐닉했을까 눈의 골짜기를 바람 구름 고요의 섞임이 팽팽하다 지붕 끝에 매달린 고드름 속 사방도 오늘만큼은 샤갈의 그림이고 싶은 날 갈라진 흰빛 뒷면은 누구에나 거룩한 여백이 될 것이라고 중얼거린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사느냐 언제 사라지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지금, 내 몸에 스며들고 있는 서늘한 흰빛 무더기 이것이 화두다.
칸나의 해안
나는 꿈꾸는 사계 어린 아이들이 맨발로 저벅저벅 나를 밟으면 긴장이 풀리면서 붕 뜬 마음 네가 최초 걸음마를 배울 때 파도 사이로 지나가는 새끼 거북이가 된 것처럼 중심을 잃지 않게 아치를 바로잡아준 그때 그 스침이 번진다 큰 꿈이 작은 꿈을 통과하면 지우고 싶은 구멍과 상실감이 박살날까 호미 들고 뛰어온 사내아이가 갯벌 깊숙이 힘을 가하면 더 멀리 달아나는 것들 아직 상대도 스침이 두려운 것일까 그래, 아이야 그렇게 어디에서나 최선을 다하면 된다 다시 스치면 된다 매일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라는 말 먼저 삶을 경험한 어른들의 소망일 테다 그러고 보니 끝없이 움직이는 수평선도 구름과 물소리를 빚어 신비한 빛이 된 저물녘도 나의 최초 조력자를 닮았다.
(제15회 시와세계 작품상 수상작) ― 계간 《시와 세계》 2024 여름호 --------------------- 이강하 / 2016년 《시와세계》 신인상 등단. 시집 『화몽花夢』 『붉은 첼로』 『파랑의 파란』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