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글쎄,
"다녀오겠습니다"
문을 열고 나가는 발걸음이 왜인지 모르게 가벼웠다. 즐겁게 흥얼흥얼 노래까지 불러가며 엘레베이터에 탔다. 엘레베이터에서도 계속 노래를 흥얼거리며 거울을 보았다. 곧 사람들이 타기 시작하면서 흥얼거림은 멈췄지만.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라 거울에만 고정시키다 층을 안내하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저번처럼 엘레베이터 창에 얼굴을 대고 김종빈을 관찰하기는 힘들 것 같다. 사람들 사이에 낑겨있던 몸이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자 마자 튀어나왔다. 빠른 걸음으로 자동문 앞까지 단숨에 걸어가 평소와 다름없이 김종빈이 있을 방향으로 눈을 움직였다. 자동문이 열리고 나서는 걸음이 느려졌다. 뒤에 오는 사람들을 피해 비켜서며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잠시 후에는 내 뒤에서 오던 사람들도 모두 사라졌다. 여섯 번은 더 눈을 돌리며 김종빈을 찾던 내가 힘없이 어깨를 축 내리며 중얼댔다.
"없네"
왜 안 온걸까. 애꿎은 휴대폰에다 화풀이를 했다. 다행히 휴대폰은 부서지지 않은 것 같았다. 새삼 휴대폰의 견고함에 감탄하다 홀드키를 눌렀다. 화면이 밝아지며 시각이 띄워졌다. 이 시각까지도 아무 문자도 전화도 없고. 차분히 액정이 꺼져갈 때까지 액정을 응시했다. 결국은 화면이 어두워질 때까지 아무 것도 오지 않았다.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원래는 잘 가지도 않는 곳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때가 때이니 종빈이의 교실로 찾아가기로 했다. 긴 거리는 아니었지만 발이 갑자기 무거워져서인지 김종빈의 교실로 가는 거리는 멀게만 느껴졌다. 발 하나하나가 돌 다섯개는 매단 듯 무겁다. 문득 책상 위에 남겨져 있을 수학문제집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러고보니 내가 굳이 이렇게까지 걱정해줄 필요는 없을텐데, 얘가 학교 한 번 안 나온 것 가지고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스치듯 나를 보는 아이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생각했다. 정말로 내가 이럴 필요가 있나. 다시 돌아가야겠다. 몸을 틀어서 다시 우리반으로 향했다. 하지만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다시 몸을 한번 더 틀어 김종빈의 교실로 향했다. 그래도 친구니까.
없다. 김종빈의 반을 주욱 둘러보던 눈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단순히 늦는건가. 주머니 안에 있는 휴대폰을 꽉 쥐어보았다. 바깥공기는 싸늘한데 휴대폰은 따뜻했다. 반대쪽 손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무언가를 해야되는데,라는 어렴풋한 생각이 들었다. 하다못해 옷을 만지작거리는 일 같은 아주 작은, 하찮은 일이라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을 더 굴리며 김종빈을 찾아보았지만 김종빈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애의 자리에 있어야 할 가방도 보이지가 않았다.
슬슬 김종빈네 반 애들이 나를 흘끗흘끗 보는 게 느껴졌다. 눈치가 보여 뒷문 쪽에서 몸을 뺐다. 나중에, 수업시간에는 올 거야. 마지못해 혼잣말로 웅얼거리며 그 애반 앞 복도를 빠져나왔다. 그래, 그럴거야. 누구에게 장담하듯 말을 하는 건지도 모르면서.
책상 위에 남겨진 수학 문제집이 쓸쓸해보였다. 서둘러 빠른 걸음으로 자리로 향해 힘있게 엉덩이를 의자에 붙였다. 털썩. 정돈하지 않아도 될 치마를 시간 때우듯 꿋꿋이 정리했다. 치마를 몇 번이나 정돈했을까, 그제야 샤프를 들었다. 물론 샤프는 들었지만 푸는 문제는 어제 풀었던 문제의 양의 반도 채 못되는 양이었다. 탁, 신경질적으로 샤프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샤프심이 부러졌는지 작은 샤프심 조각이 책상 위에 남아 있었다. 검지손가락으로 샤프심 조각을 한번에 찍어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처음 시작하면 끝을 낼 수가 없다. 정말로. 끝도 없이 생각나서, 홍수나듯 한번에 우르르 생각나서 끝을 낼 수가 없어.
너의 생각은.
수업이 모두 끝이 났는데도 종빈이는 보이지가 않았다. 쉬는시간, 점심시간, 틈이 날 때마다 교실에 찾아가 보곤 했지만 그 아이는 볼 수 없었다. 찾아온 횟수가 한 대여섯 번 쯤 되었을까, 그 애 반의 한 명이 나한테 김종빈을 찾으려 왔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아마도 우리 둘을 많이 본 모양이다. 혹시나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해서 그렇다고 대답하려 했지만 말도 꺼내기 전에 곧 그만두었다. 필요없을 것 같다고 조심스레 내뱉자마자 바로 그 아이는 사라져버렸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가본 나는 허무함과 함께 돌아서야했다.
'야, 왜 학교 안 나왔어?'
내가 보내놓고도 쪽팔려서 얼른 홀드키를 눌렀다. 액정이 점점 어두워지다말고 바로 새까매졌다. 누가 보면 무슨 연인 사이나 엄청 특별한 사이인 줄 알겠네. 친구도 엄청 특별한 사이가 아니라고 할 순 없지만. 어이없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새까매진 액정에 얼굴을 비춰보며 뭐 묻은 건 없는지 꼼꼼히 살폈다. 어두운 곳에서 어두운 휴대폰 액정에 비친 모습이 내가 뭘 묻히고 다니는지도 모를 정도로 보이지 않았지만. 이리저리 휘둘러 대던 휴대폰을 멈췄다. 아 씨, 괜히 보냈나. 어차피 답장 없을 확률이 더 높을지도 모르는데. 휴대폰을 주머니에 쏙 넣고 집으로 향했다. 춥다.
"야 그러면 까짓꺼 전화 한번 해보면 되지, 몇 년 친구인데 전화한번 제대로 못하냐?"
"아니 근데 전화는 좀 그래"
"뭐가 좀 그런데? 이상한 소리할까봐?"
내 얘기를 진지하게 듣던 언니가 당당하게 소리치듯 물었다. 이상한 소리는 무슨. 코웃음을 쳐주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뭔가 잡았다는 모양새로 언니는 탐정의 눈빛과 음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난 언니가 저럴 때가 제일 무섭단 말야. 아직도 말이 안 끝났냐는 물음에 언니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끝났어. 나 간다"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등을 보인 채로 언니가 오른손을 가볍게 들었다. 엉덩이를 씰룩씰룩 흔들거리며 거실로 나가는 꼴이 아무래도 오늘 무언가를 단단히 잘못먹은 것 같다. 그게 아니면 로맨스 영화를 볼 거라던가. 고개를 내젓다가 시선이 우연히 휴대폰에 닿았다. 천천히 다가가 휴대폰 액정을 밝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없다. 하긴 뭘 바란 내가 잘못이지. 다시 침대에 철푸덕하는 소리를 내며 엎드렸다. 벌써 하루가 후딱 지나가버렸다. 아무 생각없이 하늘을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급하게 언니의 잠바를 챙겨들고 방 밖으로 나왔다. 나한테는 관심도 없는 모양인지 달달한 로맨스에 넋이 나간 언니에게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신발을 신었다. 뒤에서 언니가 뭐라고 한 것 같지만 뭐, 괜찮겠지. 엘레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신발 뒤축을 끄집어 올렸다. 친구니까, 미소가 그려졌다.
딩동.
초인종이 가볍게 울렸다. 너가 나에게 통통 뛰어올 때의 그 표정처럼 밝게.
첫댓글 종빈일 좋아하나봐요!친구니까 로 단정짓지만 ㅎㅎ 잘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