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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뒤안길에 선
의안대군과 주변 인물] 정병경
ㅡ탄생 배경ㅡ
조선을 개국한 태조太祖 이성계(1335~1408)는 파란波瀾이 끊이질 않는다. 그는 두 부인에게서 8남 3녀의 자녀를 두었다. 둘째부인 신덕왕후神德王后(1356~1396) 강씨康氏에게서 두 아들과 딸 경순공주를 낳는다. 1381년 태어난 무안대군撫安大君(방번芳蕃)과 연년생인 의안대군宜安大君(방석芳碩)은 날개를 펴보지도 못한채 어린 나이에 세상을 하직한다.
태조의 여덟번째 아들로 태어난 방석은 현빈賢嬪 유씨柳氏와 혼인했으나 폐출된다. 춘추관대제학 심효생沈孝生(1349~1398)의 딸과 재혼해 귀염둥이 아들을 낳지만 행복한 날은 잠시뿐이다. 이후 조선의 역사는 또다른 방향으로 펼쳐진다.
1392년 7월 17일 조선을 건국한 지 한 달 만에 열한 살의 방석은 세자로 책봉된다. 신덕왕후가 적극 개입했다는 의혹이 불거진다. 태조는 의안군의 형인 무안군을 세자로 택한다. 배극렴과 조준, 정도전 등은 무안군의 자질에 문제가 있다며 반대한다.
충신들의 뜻에 따라 후계자는 막내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다. 급진개혁 세력인 정도전과 남은, 방석의 장인 심효생 등이 지지한 덕에 세자 책봉은 순조로워진다. 이들은 1397년 태조에게 군사를 장악해서 명나라 요동 정벌을 주장하나 조준의 반대로 무산된다.
강씨가 죽고 태조도 병으로 눕게되자 한씨 소생인 정안군貞安君 방원(태종太宗1367~1422)이 기회를 포착한다. 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국을 혼란에 빠뜨린다. 강씨 측근인 봉화백 정도전과 의성군 남은, 부성군 심효생 등을 제거하기에 이른다. 방원은 이복 동생인 방번과 방석 두 형제를 유배 후 이숙번을 시켜 주살誅殺한다. 제일 큰 걸림돌이 제거되니 계획된 일이 순조로워진다. 열여섯살의 의안군이 7년간 이어온 세자 자리를 탈취당하자 태조는 고뇌의 늪에 빠진다.
조선 최초 폐세자가 된 의안대군은 광주廣州 남한산성면(엄미리 산152)에 잠들어 있다. 비운의 왕자로 태어난 운명이다. 묘역이 있는 가파른 능선길은 그의 여정을 대변하는 모습이다. 600년의 세월 동안 내곡동 헌릉에 누워있는 태종을 주시한 방석의 마음을 짐작한다. 의안대군의 묘는 1988년 4월 13일 경기도 기념물 제 166호로 지정된다.
골육간의 싸움에 환멸을 느낀 태조는 방원으로부터 마음이 멀어진다. 둘째 형 방과(정종)를 보위에 앉히고 방원 자신은 세제가 된다. 양위 받기 위한 수순이다. 태종은 아버지와 형을 왕위에 앉히는데 뜻을 이루지만 권력욕은 멈추지 않는다. 자신이 재위한 18년과 아들 세종 대에 왕위를 이어받는 동안까지 30여 년을 공들인 태종이다.
태평성대를 누리기 위해 많은 희생자가 생긴 의미를 새겨본다. 외척이 성하면 나라가 망한다며 민무질과 민무구 등 처남에게까지 사사賜死를 멈추지 않는다. 사돈인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13751419)에게도 자결을 명한다. 왕자의 난 공신인 친구 이숙번을 귀양보내 죽게 한 방원이다.
개국 실세이며 쿠데타의 실세인 태종 두뇌에 거사擧事할 설계도가 그려져 있다. 상왕으로 물러나기 전 1418년 장자인 양녕대군을 세자에서 폐한다. 덕성과 외모를 갖춘 셋째 아들 충녕을 세자로 책봉한다. 2개월 뒤에 충녕에게 왕권을 이양하게 된다. 그가 조선 제 4대왕 세종이다.
태종은 왕권 강화에 힘쓴다. 군사를 삼군부로 집중시킨다. 도평의사사는 의정부로 고쳐 정무를 담당케 한다. 중추원은 삼군부로 고쳐 군정을 맡도록 한다. 입법과 행정은 하나로 합쳐 왕의 권한을 강화시킨다. 백성의 소리를 듣는 신문고도 설치하나 유명무실하다. 절차가 복잡하고 지방에서 한양까지 올라오는 번거로움이 있어 후에 폐지를 반복한다. 태종이 펼친 개혁 정책은 개국과 쿠데타의 경험에서 나온 발상이다.
태조의 첫째 부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1337~1391)는 조선 개국 1년 전에 55세로 세상을 떠난다. 그녀가 낳은 자녀는 6남 2녀이다. 둘째 아들이 제2대 정종이고 제3대 왕을 지낸 태종(방원)은 다섯째 아들이다. 방원은 아버지로부터 외면당한다. 개국공신 정몽주를 죽였기 때문에 세자 책봉에서 배제된다.
비도덕적인 행동이 못마땅한 아버지는 "충효의 집안에 먹칠했다"며 방원을 질책하게 된다. 세자 책봉에서 제외된 것이 조선 개국 1등 공신 정희계의 입김도 가세했다. 이방원과 신덕왕후의 사이는 비교적 좋았었다. 정몽주를 살해했을 때 이방원을 두둔한 여인이다.
ㅡ신덕왕후와 가족ㅡ
신덕왕후는 개경의 권문세가 판삼사사 강윤성康允成 딸이다. 본관은 곡산이다. 조상은 호경과 강충으로 고려 태조 왕건의 외가쪽이다.
강충의 셋째 아들 강보전 후손이다. 그의 8대조인 고려 고종 때 문하시중 신성부원군 강지영 대에서 가문을 일으킨다. 강지연의 6세손인 강서는 상산부원군에 봉해지면서 곡산 강씨 시조가 된다. 7세손인 친부 강윤성은 문하찬성사를 지낸다.
조선 개국 때 일조한 강씨는 1392년 조선의 첫 왕비가 되어 현비에 봉해진다. 정릉에 누운 강씨는 사후에도 태종으로부터 시달림을 받는다. 여러 차례 이장한 이유는 방석의 세자 책봉에 대한 분풀이로 여긴다. 태종은 그녀를 왕비로 인정하지 않는다. 제례 때 서모로 취급하고 능을 파헤쳐 석물은 청계천 광통교에 쓰기까지 한다.
왕비의 대우를 받지 못하다가 겨우 2백여년 뒤 현종 때 종묘에 배향되고 능지도 정릉으로 정해진다. 이는 유교 이념을 강조한 서인 영수 송시열의 힘이 강했기에 어렵사리 복권된 것이다. 그녀는 태조 둘째 부인이지만 조선의 첫 국모인 셈이다.
태조는 재위 7년 동안 방원을 정치적 실권에서도 배제한다. 1392년 8월 20일 방석을 세자로 결정한 태조는 교지를 내린다. 43명의 개국공신 대상자 명단(후에 52명)에 이방원은 제외된다. 이때부터 부자간의 갈등이 시작된다.
이방원은 아버지를 왕으로 세운 킹메이커이다. 남은, 조인옥 등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할것을 이방원에 먼저 알린것은 부자 사이 이심전심을 읽기 때문이다.
이방원은 태조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소식을 듣는다. 포천에 있는 아버지의 두 부인과 가족을 동북면으로 피신시켜 화를 면하게 한다. 위화도 회군의 성공에 일조한 것이다. 이후 지신사知申事에 임명된다. 국왕의 비서실장격이다. 권력욕이 지나쳐 부자 관계가 소원해지는 데에 개탄한다.
ㅡ개국공신과의 관계ㅡ
이성계가 정몽주를 처음 만난것은 1364년(공민왕13년) 2월이다. 이후 여러 전쟁터에서 자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의 관계는 윤이ㆍ이초 사건을 계기로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1390년(공양왕2년) 고려의 무관인 윤이와 이초가 명나라 태조에게 무고한 사건이 발단이다. 이성계 일파가 명을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준비한다며, 이를 반대한 이색ㆍ우현보 등을 살해하거나 감금했다는 무고 사건이다.
고려에서는 정도전을 명나라에 보내 윤이ㆍ이초의 고변이 거짓임을 해명한다. 급진개혁파인 이성계와 정도전은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온건개혁파를 못마땅해 한다. 이색ㆍ우현보ㆍ이숭인ㆍ권근 등을 윤이ㆍ이초를 배후로 지목해 숙청하려 하자 정몽주가 반발한 것이다. 끝내 온건개혁파 세력이 제거되기에 이른다. 이후 두 사람은 정치적 동지에서 혁명 세력의 적으로 바뀐 것이다. 별이 된 개국공신과 이슬로 사라진 인물은 동전의 앞뒷면이다.
ㅡ세력 다툼ㅡ
신진 사대부는 고려 후기 기존 지배 세력인 권문세족에 대항한 집단이다. 사대부란 학자적 관료를 말한다. 불교의 비리를 비판하고, 공민왕의 개혁에 가담한다. 정치ㆍ사회ㆍ경제에 미치는 모순을 제거하고 민생 안정의 개혁정치를 이끌며 진일보한다.
신진사대부는 조선 건국 무렵 개혁의 틀을 놓고 온건 개혁파와 급진 개혁파로 갈라진다. 이색과 정몽주 등의 온건파는 고려 왕조 체제에서 개혁을 주장한다. 정도전과 조준 등의 급진 개혁파는 새 왕조를 세우자고 주장한다. 권문세족이 고려에 계속 자리잡는 한 진정한 개혁은 없다는 반대 의견이다.
1388년(우왕14) 위화도 회군 이후 개혁파는 정치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 사전私田의 개혁과 새 왕조 수립이다. 과전법을 마련하고 조선 건국의 기초를 세우는데 성공한다. 온건파는 차츰 제거되고 개혁파가 정권을 쥐게 된다. 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 지방의 토착세력을 등용한다.
ㅡ개혁파와의 대립ㅡ
온건개혁파는 고려말 왕조의 테두리 안에서 개혁을 주장한 세력이다. 이제현,이색,정몽주,권근,이숭인 등이다. 정치적이나 학문에 연륜이 있고, 경제적으로도 우월하다. 성리학에서도 이理에 치중한다. 치인治人보다 수기修己에 역점을 둔다. 관념적이나 윤리적 측면에 치중하는 편이다. 개혁 초기에는 함께 동참했으나 위화도 회군 이후 토지 개혁과 새왕조 개창공작에는 반대입장이다.
고려말 역성 혁명을 주창한 개혁세력이 급진 개혁파이다. 정도전,조준,윤소종,남은,남재,조인옥,조박,정탁,이성계 등이다. 무신란 이후 과거를 거쳐 중앙관계에 등장한 사족士族 가문 출신 학자이다.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적 지성을 갖춘 관인들이다. 온건파에 비해 정치적 진출이 늦은 관료이다. 성리학에 있어서 주리이면서 기氣를 중시하며 수기修己보다 치인治人에 역점을 두었다. 새왕조를 건설하면서 전면적인 토지 개혁을 추진한다.
ㅡ의안대군의 묘에서ㅡ
의안대군 방석의 묘역은 산능선 정남향 상하분이다. 의안대군은 위쪽에 모셔져 있고 바로 아래는 부인 신씨 묘이다. 봉분은 사각형이며 장대석으로 호석을 둘렀다. 부인 묘표 앞에 복두 공복차림의 문인석 두쌍과 상석이 세워져 있다. 묘역은 의안군파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조선 초기에 고려시대 묘제의 특징을 지닌 묘역이 잘 보존되고 있다.
석물은 조선 말기의 형태로 보인다. 동자석은 부처 형상이다. 망주석과 금관조복형의 문인석을 갖춘 묘역이다. 조선 최초 폐세자가 된 비운의 왕자인 의안대군 묘역은 지금까지 광주땅에서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제례를 올릴 사당을 갖추지 못해 우중이 우려된다.
방석을 낳은 생모는 정릉에 누워있다. 생부는 구리 동구릉 건원릉이 안식처이다. 앙숙이 된 배다른 형인 태종은 내곡동 헌릉에 잠들어 있다. 일희일비는 장마철 소나기나 다름없다. 반드시 이기려고 하는 것만이 용감한 것은 아니다. 옳고 그름은 현명한 후대에서 냉철하게 분별할 따름이다.
파벌로 인해 희생양이 된 인물이 적지 않다. 세도정치와 척신정치로 인해 빚어진 결과이다. 후대에서도 여전히 습관처럼 답습하는 모습이다. 혁신이나 개혁이라는 명분은 무용지물이다. 시대에 따라 역사는 변천하며 왜곡되는 경우를 본다. 역사의 흐름이 달라졌다면 한글 창제나 경국대전편찬이 이루어졌을까 생각도 해본다.
정치의 달인 성군 세종이 남긴 어록을 되새겨본다. "대개 정치를 잘하려면 반드시 전前 시대의 치란治亂의 자취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 자취를 살펴보려면 오로지 역사의 기록을 상고하여야 한다." 공과功過는 후대에서 분별한다는 의미로 여긴다.
인간의 내면을 꿰뚫는 맹자의 말을 빌린다. "백성(民)이 가장 무겁고 중하며, 나라(社稷)는 그 다음이며, 임금(君)이 제일 가벼우니라." 지도자의 행실을 엿보고 백성이 답습하니 선두 주자는 발자국을 잘 남겨야 한다.
2023.09.30.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왕과 아들.
첫댓글 추석연휴에 다녀오셨네요.
조선초 역사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늘 유익한 자료와 사진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병경선생님 늘 몸소 다녀 오셔서 이렇게 쑥쑥 글을 올려 주시니 잘 읽고 가네요 또다른 우리 나라 역사를 올려 주실지 벌써 궁금합니다 오고가는길 안전하게 다녀오세요 ~~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