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관전투 (왜관전투기념관에 있음)

저는 군대에 있을때 근무지가 작전처 상황실 이었던 관계로 (전사)戰史를 읽을 기회가 많았었습니다. 그런데
개성 송악산 전투와 6.25발발 당시 까지의 상황에 관한 육군 전사를 읽으며 6.25가 기습남침이었다는 우리측의 주장에 의문을 갖게 되었었습니다. 그 의문의 시발점은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것과 달리 육탄 10용사가 장렬하게 산화했다는 전투는 1949년 5월 3일 에 일어났던 전투였던 것이라는것을 알고부터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우리들이 잘 알지 못하고 있던부분이죠..) 1949년 1월부터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38선에서 남과 북의 충돌이 874차례 일어나 전사자가 무려 1만명이 넘고있었습니다. 38선은 사실상 이미 전쟁터가 되어 있었던 것이죠. 그와중에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육탄 10용사의 개성 송악산 전투도 있었고요.
저는 6.25동란이 일어나기전에 이미 1만명이 넘는 병사들이 사망한 치열한 전투가 있었는데 한국군은 북한군의 전면적인 공격에 대한 대비를 왜 전혀 하지 못했었는가 하는 의문이 강하게 들었고
과연 정부의 발표대로 또한 지금까지 우리가 교육받은대로(?) 평화로운 6월 25일 일요일 새벽 을 기해 북한이 기습남침을 하였다면 무려 1만명이 넘는 병사들이 전투중 사망한 당시 상황이 평화적인 상황이었는지에 대한 의문도 떨치기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육탄 10용사는 과연 장열하게 전사한 용사들이었는가 하는 의문들에 대해서
자료를 확인해 볼때마나 정부의 발표가 얼마나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진 허구였는지 그리고 우리가 6.25전쟁의 실체를 잘못알고 있지는 않았는지 하는 의문들을 떨쳐 버릴 수 가 없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에치슨라인"이라는것이 발표된 후 미군이 한반도에서 모두 철수해 남과 북에서는 38선을 사이에 두고 양측의 끊임없는 교전이 벌어지던 상황에서 남한 군부는 북측의 도발에 대해 어떻게 대비하고 있었길래 전투중에도 거의 대부분의 지휘관들이 전선을 비우고 외출,외박을 나올 수 있었는지 상식적이고 초보적인 군사상식만 있으면 이해하기 힘든 일이 많았습니다.
수백회의 교전을 통해 남한측의 전투력을 시험해본 북한이 동시에 모든전선에서 쳐내려 올때까지 남한의 군당국은 어떤 조치를 하고 있었을까요...
다음은 제가 이런 의문에서 시작해 찾아본 자료에서 발췌한
몇가지 증언과 기록들입니다.
송악산지구 육탄 10용사의 진상... (증언자료)

제1사단 제13연대 연대장 대령 김 익 열
. 일 시:1964년 5월 4일
. 장 소:전 국방부장관 박병권의 자택
. 대 담: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 주요 증언 내용
△ 전쟁발발전 상황
. 송악산지구 육탄 10용사의 진상
□ 세부 증언 내용
이 이야기는 1964년 5월 4일 14:30∼17:30에 걸쳐 전 국방부장관 박병권댁에서 제5연대 창설에
대한 간담회 석상에서 김○○이 공개한 내용이다.
나는 당시 김석원 장군이 지휘하는 제1사단 휘하 제13연대장으로 있었다.
적이 송악산을 점령하고 피아 교전이 전개되었을 때 제11연대(연대장 최경록 중
령)가 공격하고 있었는데 제11연대가 지탱하기가 곤란하면 제13연대(당시 예비연
대)가 투입되겠끔 대기상태에 있었다.
제11연대장은 송악산에서 격전중인 일선부대에 박격포탄을 보급하기 위하여 공병
소대장(박모)으로 하여금 10명을 공동 지휘하여 박격포탄을 짊어지고 송악산으
로 출발시켰다. 그러나 박소위는 지형을 숙지하지 못하여 이동도중 적과 불의에
조우하게 되자 부하들을 수습지휘하지 못하고 혼자서 탈출하였다. 대원 10명은
박격포탄을 진채 모조리 적에게 포로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보고를 받
은 정보주임은 계통을 따라 사단 G-2에 보고하였다.
사단장 김석원 장군은 대노하여 당장 박소위를 총살하라 하였다. 이때 변호한 것
이 제11연대장 최경록 중령이었다. 사실상 박소위와는 친구지간으로서 일본 학병
의 동기인가 하여 막역한 사이였다. 따라서 박소위를 총살에서 구출하기 위하여
서는 사단장에게 거짓말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연대장은 사단장에게 정식보고를 하는데 있어서 “사실은 참모보고는 사실이 아
니고 대원 10명이 모조리 포탄을 안고 적진에서 자폭한 것이라고 정정보고를 하
게 되었다.” 이 보고를 듣고 사단장은 그 자리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일
본군에는 육탄 3용사가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육탄 10용사가 나왔다고 하면서 이
사실을 대통령에게까지 보고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최중령이 자기 친구인 박소위를 살리기 위한 일시적인 임시조치에 지나
지 않는 허위 조작한 보고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사단장은 연대장의 보고를
사실로 알고 상부에 건의하여 대대적인 장례식 행사준비를 하였는데 당시 채병
덕 참모총장은 장례식 하루 전까지 행사를 불승인하였다.그러나 이종찬, 이용문
대령 등이 채총장에게 육탄 10용사는 국군의 전통과 사기진작에도 좋으니 행사
를 하자고 권고하게 되어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채장군은 어느 정도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당시 김석원 장군
과 채장군과는 남북교역문제로 극히 감정대립이 악화되어 있었고 채장군으로서
는 육탄10용사를 냈다고 이박사에게 보고하여 김장군의 사기가 올라가는 것에 시
기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여하간에 장례식행사는 서울운동장에
서 성대히 거행되었다.그러나 자폭했다는 육탄10용사는 포로가 되어 평양에서 대
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살아 있다는 방송도 하고 가족들에게 편지도 보냈다고 한
다. 김익열 장군이 평양에 입성하였을 때 육탄10용사가 꽃다발을 받고 있는 사진
을 보고 놀랬다고 하면서 이는 순전히 최경록 중령의 조작에 의한 것으로 판단하
였다.김석원 장군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당시의 북한방송 등을
녹음한 것이 정부기관에 보관되어 있을 것으로 알고 있다.
[여기서 거명된 사단장 김석원은 서울 성남고등학교의 창립자를 말하며
일본군 대좌(대령)출신입니다.]
6.25당시의 상황은 어땠을까에 대한 자료들...
["1950년 6월 24일 육군본부 정보국이 북조선의 대규모 병력이 38선에 집결했다는 보고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군 수뇌부는 바로 그 날 비상경계를 해제하였다. 그 날은 주말이라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이 외출했다. 그 날 저녁 육군본부 장교 클럽 낙성 파티에는 전방부대 사단장들까지 초청되었었다."
《사선을 넘고 넘어: 채명신 회고록 中에서....》(매일경제신문사, 1994년) 97~98쪽.] * 채명신이 누구인지 궁금한분은 인물검색을 하시면 알 수 있습니다.
6.25전쟁때 남쪽의 장수는 누구였고. 북쪽의 장수는 어떤 사람이었을가에 대한 궁금증도 일어 검색을 해보니
남쪽의 수장은 채병덕 소장(당시 31세)이었고
북쪽에는 "무정"같은 백전노장들이 포진을 하고 있었더군요..(자세한 내용은 주석의 참고도서들을 찾아보세요)
아래 자료는 위키 백과사전에서 검색해본 6.25당시 남한의 육군참모총장 이었던 채병덕에 대한 자료입니다.
(사진은 다른곳에서 가져왔습니다.)
채병덕

한국전쟁 이전의 생애
채관수(蔡觀洙)의 둘째 아들이다. 평안남도 평양 출생. 평양 종로 공립 보통학교와 평양 공립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1937년 6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49기로 졸업하고 일본군 육군소위로 임관되었다. 그뒤 일본군 포공학교를 졸업, 병기장교가 되었다. 해방 후 장사를 하다가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가 1946년 1월 15일 졸업 후 바로 정위(正尉: 현재의 대위)로 임관, 같은 날 창설된 남조선국방경비대 제1연대장을 맡았다. [1] 또한 1 보급 부대장·병기 부대 사령관·후방 부대 사령관·제4 여단장 등을 지냈다. 1948년 8월 통위부 참모총장, 1948년 8월 16일 국방부 참모총장에 임명되었고, 1948년 12월 육군준장으로 승진하였다. 1949년 2월에는 육군 소장으로 승진하였다. 1949년 5월 국방부의 기구간소화로 종래의 육·해군을 통합지휘하던 국방부참모총장제가 폐지되고 국방부장관이 통할하게 됨에 따라 1949년 5월 9일 제2대 육군총참모장이 되었다. 총참모장 재직 중 전력 증강을 위한 부대 증설, 교육 강화를 위한 각종 군사학교의 신설, 북한 대남유격대의 토벌 작전 수행 등의 많은 업적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1949년 10월 남북한간의 물자교역과정에서 발생한 남북교역사건 및 제1사단장 김석원과의 갈등으로 참모총장직에서 해임, 예편되었다가 1949년 12월 14일 국방부 병기 행정 본부장으로 복귀하였고 1950년 4월 말에 제4대 육군총참모장 겸 육해공군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2]
한국전쟁
그러나, 야전군 지휘 경험이 없는 병기 장교 출신으로서 참모총장으로서는 문제가 있었다. 취임 초기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북한의 남침 정보를 접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38선에서의 무력 침공 사건이 발생하거나 대남유격대가 준동할 때마다 비상 경계의 형식으로 대처하였고, 또한 그것으로 실효를 거두었다. 이에 정보국의 정보 분석과 북한 남침 경고를 무시하였다가 1950년 6월 발발한 한국전쟁에서 서울이 함락되는 등 패전을 거듭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6일 오후 국무회의에서 서울 사수를 공언하였고 명령만 있으면 나흘 안에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3] 결국 한국전쟁 초기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 쓰고 1950년 6월 30일 육군참모총장에서 해임되 '경남 지구 편성군 사령관'이란 직책으로 좌천되었다. 맥아더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도쿄에서 날아와 잠시 이승만을 만났을 때 채병덕의 해임을 건의했다고 한다. 사태 수습책을 묻는 맥아더의 질문에 채병덕이 200만 남한 청년들을 동원해 훈련시켜 침략을 격퇴하겠다고 답하자, 맥아더는 그 자리에선 칭찬한 뒤 이승만에겐 갈아치우라고 말했다.[4] 1950년 7월 23일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채병덕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 "귀하는 서울을 잃고 중대한 패전을 당했다. 책임은 중하고 크다. 그런데 지금 적은 전남에서 경남으로 지향하고 있다. 이 적을 막지 않으면 전 전선이 붕괴될 것이다. 귀하는 패주 중인 소재 부대를 지휘해서 적을 격퇴하라. 귀하는 선두에 서서 독전할 필요가 있다." [5] 이 명령으로 채병덕은 남해안을 돌아 공격하여오는 적을 저지하기 위해 출전하였다가 7월 27일 하동 고개에서 인민군 6사단의 매복작전에 걸려들어 전사했다.(하동전투) 훗날 채병덕 살해 음모가 제기되기도 했다.[6]
사후
정부는 1계급 특진시켜 중장을 추서하였다. 그러나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참고자료
- 한국전쟁사 1(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68)
- 육군참모총장 연대지 1(육군본부, 1970)
- 悲劇의 軍人들(李起東, 一潮閣, 1982)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조선의용군 사령관 무정장군
무정(武亭)은 초기 중국공산당원이며 첫 팔로군포병퇀 퇀장으로서 우수한 군사지휘관이다. 그는 팽덕회(彭德懷)가 지휘하는 홍군 제3군단에 소속되여 유명한 2만5천리장정에 참가한 조선족혁명가이고 항일전쟁시기 조선의용군 사령원이다.
무정의 본명은 김무정이며 1905년 조선 함경남도 경성군에서 태여났다. 14세때 3·1운동에 참가했으며 그후 서울 기독교중학교를 졸업하고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학비난으로 하여 18세때에 퇴학당하였다. 혁명의 길을 찾아 중국에 건너 북경에 온 그는 19세때 중국 하북성 보정군관학교(강무당) 포병과에 들어가 공부하였고 22세에 포병중좌가 되였다. 1924년에 포병과를 졸업하였고 그 이듬해 북경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후 무정은 상해에 가서 중국공산당 상해조선인지부에서 사업하다가 다시 서금에 가서 중국로농홍군에 입대하였다.
서금은 제2차 국내혁명전쟁시기에 중앙쏘베트구역이라고 불리웠고 거기에는 30여명의 조선족혁명가들이 있었다. 무정은 서금에서 팽덕회가 전위서기로 있는 홍군 제3군단에 소속되였다. 1930년 7월에 제3군단이 동정호전투를 할 때였다. 수중에 홍군이 적에게서 로획한 야전포 4문과 산포 2문을 수중에 장악하고 있은 무정은 팽덕회를 찾아가 대포로 적들을 반격할 생각을 털어놓았다. 팽덕회는 그의 의견을 동의하였다. 홍군패장인 무정은 전사들에게 포사격요령을 가르치고 포에 장탄하였다. 적들이 다가오자 무정은 친히 적들을 묘준하면서 사격하였다. 적들은 무더기로 쓰려졌고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그후 무정은 홍군 제3군단의 포병련장이 되였으며 그의 이름은 전 홍군에 알려졌고 홍군에 조선인이 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1934년 10월 세계를 뒤흔든 2만5천리장정이 시작되였다. 홍군대학과 팽양보병학교, 공량보병학교 및 특과학교 등 4개소의 홍군학교 장병들로 홍색간부퇀을 편성하였는데 퇀장은 진갱(陳 ), 정치위원은 송임궁(宋任窮)이였다. 양림(楊林)은 이 간부퇀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였다. 홍군특과학교 교장 겸 포병영장으로 있던 무정은 중앙군사위원회 기관인원들로 구성된 군사위원회 제1종대 제3대대의 사령원 겸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여 장정의 길에 올랐다. 대도하를 건느고 설산을 넘어 파서에 이르렀을 때였다. 장국도는 각 군과 당중앙과의 련계를 끊어버리고 자기의 우세한 병력으로 홍군 제3군단을 남하하도록 강박하기 위하여 홍군 제4방면군의 무전암호를 거두어들였다. 장국도의 이 음모를 분쇄하려면 홍군 제3군단은 아계로 진출한 홍군 제1방면군과 무전련계를 가져야 했다. 그러자면 홍군 제3군단에서 만든 무전암호를 홍군 제1방면군에 보내주어야 했다. 이 중요한 임무를 팽덕회는 무정에게 맡겼다. 인적없는 초원에서 길잡이도 없이 홀로 방향을 잡는다는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였다. 무정은 지남침을 들고 북쪽을 향해 달렸다. 그러던 그는 물웅뎅이옆에서 풀무데기 하나를 발견했는데 헤치고 보니 한 홍군전사의 시체가 묻혀있었다. 그는 다시 시체를 묻고 얼마간 걸었는데 앞에 솥을 걸었던 자리가 있어서 만져보니 온기가 있었다. 그는 발걸음을 다그쳐 끝내 제1방면군의 대오를 따라잡고 무전암호를 넘겨주었다.
홍군은 아계를 지나 백룡강 량안의 험준한 낭떠러지인 랍자구의 천험을 정복하였다. 팽덕회의 조수로 일하던 무정은 부대를 따라 행군하였다. 중앙홍군에는 조선인이 원래 10여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이 장정의 길에 올랐다. 하지만 장정도중에 조선인전사들은 대부분이 희생되고 섬북에 도착한 사람은 무정과 양림 두사람이였다.
1936년 2월 홍군은 중앙의 지시에 따라 일제침략군과 싸우기 위하여 황하를 건너 동정을 시작하였다. 홍군동정부대는 팽덕회가 지휘하였는데 무정과 양림도 출정하였다. 황하도강작전은 동정부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투였다. 무정은 용감하고 지혜롭게 정찰임무를 완성하였다. 한달동안의 준비가 끝나자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제15군단 제75사의 참모장이던 양림은 소속 제223퇀 1영을 지휘하여 도하작전의 선봉대가 되고 무정은 참모가 되였다. 작전임무를 완수한후 무정은 홍군대학에서 특과영 영장으로 있으면서 포병간부와 포사격수를 양성하였다.
1937년 8월 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18집단군)으로 개편되였다. 무정은 팔로군 총부 작전과장으로 임명되였다. 주덕(朱德)과 팽덕회의 사랑과 신임을 받은 그는 성격이 과격하였지만 군인으로서의 강한 의지를 갖고있었다. 팽덕회의 주선으로 직속포병퇀의 한 지도원과 결혼한 무정은 평소에는 라서경(羅瑞卿)과 함께 숙식하였다. 1937년말에 무정은 부대를 거느리고 진서남 림분에 주둔하고있었다. 항일전쟁형세의 새로운 변화에 따라 팔로군총부에서는 포병퇀을 건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총부에서는 무정에게 그가 거느리고있는 병력을 기초로 평양, 평성 일대에서 활동하고있는 총부직속 유격제2대를 접수하여 포병퇀을 편성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리하여 총병력이 천여명에 달하는 포병퇀이 건립되였는데 포병퇀에는 6개 련이 있고 그외에 봉사기관과 관찰통신대 및 선전대가 있었다. 이 포병퇀은 팔로군의 력사에서 처음으로 창건된 포병퇀이였다. 팔로군총부에서는 무정을 퇀장으로, 구창선을 정치위원으로 임명하였다. 1938년 1월 28일 림분부근의 류촌과 와구지간의 한 광장에서 포병퇀성립대회가 열렸다. 팔로군판사처 주임 팽설풍(彭雪楓)이 중공중앙군사위원회의 임명서를 랑독하고 중앙북방국 책임자 양상곤(楊尙昆)이 축사를 하였으며 항일구국10대강령을 랑독하였다. 대회가 끝난후 무정의 제의에 의해 포병퇀의 명의로 전국에 팔로군포병퇀의 성립을 알리는 통보를 발포였다.
1938년 2월 일본침략군은 태원을 강점한후 계속하여 진남을 진공하였다. 포병퇀은 상급의 명령에 따라 연안을 거쳐 락천에 가 정비훈련을 하였다. 이 기간 주은래(周恩來), 주덕, 팽덕회가 포병퇀을 시찰하였다. 주은래는 짧은 시일내에 포병퇀사업이 신속하게 궤도에 오르고 훌륭한 성과를 올렸다고 치하하였다. 그후 동필무(董必武), 하룡(賀龍)도 포병퇀을 시찰하고 격려하였다. 정비훈련을 거쳐 포병퇀은 5월에 황하를 건너 중양현에서 류백승(劉伯承), 등소평(鄧小平)이 지휘하는 129사와 련합하여 전투를 하였고 일본침략군이 섬감녕변구에 침입했을 때 4년, 9련, 관찰통신대의 일부 병력이 황하가의 미가천에서 포진지를 구축하고 변구를 보위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1940년 국내외를 진감한 백퇀대전이 벌어졌다. 총부포병퇀은 정태선전역에 참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명령에 따라 무정은 부대를 거느리고 적진지의 가까이에 포를 걸어놓고 사격하여 적의 또치까를 까부심으로써 부대의 작전을 엄호하고 진공의 길을 열어주었다. 이렇게 포병퇀은 항일전쟁의 포화속에서 전투의 세례를 받으면서 끊임없이 장성하였다. 이때 포병퇀에 소속되였던 지휘관과 전사들은 그후 중국인민해방군의 여러 포병부대에서 활약하였고 많은 고위급지휘원들이 나왔다.
백퇀대전이 끝난후 팔로군내의 조선간부들을 앞으로 본 민족간부양성에 중점을 두라는 중앙의 지시에 따라 무정은 관내 여러 지방에서 활동하고있는 조선인항일단체들을 통일하고 련합하는 사업을 맡게 되였다. 당시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팔로군과 신사군이 활동하던 각 유격구내에는 무정과 같은 많은 조선인혁명가들이 팔로군, 신사군과 함께 일본침략군에 항거하고 있었다. 1939년초, 연안에서 무정 등 조선인혁명가 12명이 중국관내지구의 많은 저명한 항일독립운동가 김구, 김약산 등 26명에게 편지를 보내 중국내의 항일운동단체들이 합작하고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건립할것을 호소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황하이남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대의 대부분이 황하를 넘어 그 활동지역을 화북으로 지정하였다.
무정은 중앙의 지시를 받고 1941년 1월 10일에 팔로군항일근거지인 산서성 료현 동욕에서 화북조선청년련합회를 창립하였다. 회의는 3일동안이나 계속되였고 첫날 회의에는 팔로군 부총사령 팽덕회가 축사를 하였다. 마지막날에는 여섯가지 강령을 발표하였다. 회장에 무정, 조직부장에 리유민, 선전부장에 장지광, 경제부장에 한덕지로 한 지도부가 구성되였다. 1941년 4월에서 6월 사이에 조선의용대 대부분의 대원들이 차례로 락양에서 산서 료현 동욕에 도착하였고 따라서 화북조선청년련합회와 접촉하고 련계하였다. 1941년 7월 산서 료현 동욕에 있는 조선의용대는 화북조선청년련합회의 령도를 받아들여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되였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성립후 화북조선청년련합회의 령도하에 대원들은 모두 무기를 갖추고 화북의 태항산과 진찰기변구 산서 중부, 산동, 안휘 등지의 유격구와 항일근거지에서 활약하였고 팔로군, 신사군과 함께 작전에 참가하여 투쟁과 선전을 진행하였다. 1942년 7월 11일부터 14일까지 화북조선청년련합회는 태항산에서 제4차대표대회를 열었다. 회의는 4일동안 열렸고 참석인원은 20여명이였다. 팔로군 부총사령 팽덕회가 당중앙과 팔로군의 대표로 대회에서 축사를 하였다. 대회는 여러차례의 토론을 거쳐 화북조선청년련합회를 확대, 개편하고 조선독립동맹으로 명칭을 바꾸며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할것을 전원일치로 결의하였다.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을 군정련합의 통일체로 규정하였다. 화북조선독립동맹 제1기 집행위원은 김두봉, 무정, 최창익, 박효삼, 김학무, 채야화, 김창만, 왕지연, 리유민, 진한중, 리춘암이였고 조선의용군 사령은 무정, 부사령은 박효삼, 박일우였다. 사령부는 잠시 동욕에 두기로 하였다. 이때부터 조선의용군은 조선독립동맹의 지도하에 팔로군과 함께 작전하여 적을 용감히 무찔렀다.
인재양성을 위해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총부는 군정학교를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화북조선간부훈련반으로 명칭을 달았다가 후에 화북조선청년학명학교로 개칭하였으며 1944년에는 화북조선혁명군사학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때부터 광복까지 이 학교의 교장은 무정이 직접 맡았다.
1945년 8월 항일전쟁의 승리에 눈앞에 박두하자 팔로군 총사령 주덕은 무정이 지휘하는 조선의용군에게 팔로군총부의 제6호명령을 내렸다. 그 명령은 다음과 같다.
중국과 조선경내로 진출하여 쏘련홍군과 합동작전을 하고 조선인민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나는 지금 화북에서 대일작전을 하고있는 조선의용군 무정사령원과 박효삼, 박일우 부사령원에게 소속부대를 통솔하고 팔로군과 원동북군과 함께 동북으로 진출하여 일본군과 괴뢰군을 소멸하고 동북에 있는 조선인민을 조직함으로써 조선을 해방하는 임무를 완수할것을 명령한다.
1945년 8월 11일 주덕
주덕총사령의 명령에 따라 관내에 있던 조선의용군은 무정사령원의 령도하에 륙속 동북으로 진출하며 1945년 11월경에 심양에 집결하였다. 심양에 도착한 조선독립동맹은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중공중앙 동북국의 지시에 따라 아래와 같은 결정을 짓게 되였다.
1, 조선독립동맹지도부와 조선의용군의 일부 간부들은 즉시 북조선으로 귀국한다.
2, 조선의용군의 나머지 간부와 대원들은 중국에 남아서 지역을 분할하여 부대를 확대하고 우리 동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
3, 남만, 북만, 동만으로 구분하여 각 지대를 편성하고 주요책임자를 임명한다.
긴급회의 직후 동북조선의용군 군인대회를 심양시 대홍구 오가황학교 운동장에서 진행하였고 무정사령원이 국내외형세에 대해서 연설을 하였으며 남만에 조선의용군 1지대를, 북만에 조선의용군 3지대를, 동만에 조선의용군 5지대를 파견한다고 선포하고 각 지대의 주요간부명단을 발표하였는바 1지대 지대장은 김웅, 정치위원은 방호산, 3지대 지대장은 김택명, 정치위원은 주덕해, 5지대 지대장은 리익성, 정치위원은 박훈일이였다. 이때로부터 동북에서 조선의용군의 활동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였다.
회의후 무정을 포함한 조선독립동맹 전체 중앙집행위원과 일부 간부들은 북조선으로 귀국하였다. 그후 무정은 민족보위성부상, 1946년 포병담당 부사령, 조선인민군 제2군단장, 평양방위사령을 력임하였다. 1952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저자 리광일 (출처:다음까페-아리랑100년 발자취에서 가져옴) | |
참고한 자료들..
- ↑ South Korean POWs
- ↑ Statistical Data On Strength And Casualties For Korean War And Vietnam
- ↑ http://www.nyconsulate.prchina.org/eng/xw/t31430.htm
- ↑ Office of the DefenceAttache, British Embassy Seoul
- ↑ The Korean War: An Overview
- ↑ The Turks in the Korean War
- ↑ Korean War: In the View of Cost-effectiveness
- ↑ 1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1권〉 46쪽.
- ↑ 김학준, 《북한 50년사: 우리가 떠안아야 할 반쪽의 우리 역사》(동아출판사, 1995년) 146쪽; 로버트 T. 올리버, 박일영 옮김, 《이승만 비록》(한국문화출판사, 1982) 322쪽; 윌리엄 스톡, 김형인 외 옮김, 《한국전쟁의 국제사》(푸른역사, 2001년), 65쪽; 채명신, 《사선을 넘고 넘어: 채명신 회고록》(매일경제신문사, 1994년) 94 ~98쪽.
- ↑ 노정팔, 《한국방송과 50년》(나남, 1995년) 159~160쪽.
- ↑ 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 하(下)》(조선일보사, 1996년) 78~79쪽.
-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년) 51쪽.
- ↑ 전쟁기념사업회, 《한국전쟁 제3권》(행림출판, 1992년) 39쪽.
- ↑ 6월 27일 아침 6시에~: 노정팔, 《한국방송과 50년》(나남, 1995) 161~162쪽.
- ↑ 김동춘,《전쟁과 사회: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돌베개, 2000),91쪽.
- ↑ 《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 (하)》(조선일보사, 1996) 84쪽.
- ↑ 김동춘,〈서울시민과 한국전쟁:'잔류'·'도강'·'피난'〉,《역사비평》 제51호(2000년 여름),45쪽.
- ↑ 김동선, 〈돌아온 老兵 “50년6월29일 수원서 맥아더 만났다”〉, 《시사저널》(1991.6.27. 제87호
- ↑ 이기택, 《국제정치사》(일신사, 2000년) 471~472쪽.
- ↑ 김창훈, 《한국외교 어제와 오늘》(다락원, 2002) 50쪽.
- ↑ 6월 30일~: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권) 68쪽.
- ↑ 온창일, 〈한국전쟁과 한미상호방위조약〉, 한국전쟁연구회 편, 《탈냉전시대 한국전쟁의 재조명》(백산서당, 2000), 389쪽.
- ↑ 김동춘,《전쟁과 사회: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돌베개, 2000),292쪽.
사무엘 바버 - '현을 위한 아다지오(Adagio for strings)' op.11
첫댓글 그런대 불자는맞으신가요
저는 신심이 깊지는 못하지만 불자입니다.
지가 고향이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입니다.참고로 화천이 지금은 남한이지만 전쟁전에는 북한이었습니다..어릴적부터 아바지가 6.25에 대해서 가끔말하는걸 들었습니다..6.25가 일어나기 몇일전부터 북에서 인민군이 물밀듯이 내려오더랍니다 .그중에는 떼놈(중공군)도 많이 있었고요.그당시에 중공군과 의사소통이 않되어서 우리할아버지가 한자글씨로 써서 의사소통을 하였다고 합니다..6월24일 날 에(전쟁발발하루전)는 화천고등학교에서(구경갔더래요 꽹과리치고 농악하는걸) 인민군들이 소잡아서 꽹과리치고 하며 잔치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다음날 전쟁이 났다고 말씀하시던 군요..이북에서 기습남침이 맞아요.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것은 당시의 상황대처입니다. 800회가 넘는 크고작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시점에 왜 지휘관들은 적정을 살피지 못하고 다음과 같은 보고에도 태만했는지가 의문스러운거죠....["1950년 6월 24일 육군본부 정보국이 북조선의 대규모 병력이 38선에 집결했다는 보고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군 수뇌부는 바로 그 날 비상경계를 해제하였다. 그 날은 주말이라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이 외출했다. 그 날 저녁 육군본부 장교 클럽 낙성 파티에는 전방부대 사단장들까지 초청되었었다." 《사선을 넘고 넘어: 채명신 회고록 中에서....
귀하의 글은 문제가 많습니다. 매우 부정적이고 정부를 부정하는 듯한 인상입니다. 남침이 있기전에 소규모 전투는 38선을 따라 수시로 있었지만 설마 대규모의 본격적인 남침행위가 있을 줄은 몰랐기때문입니다. 또 남한정부의 요소요소에 잠입한 적색분자들이 정세판단을 호도하고 정부와 국민으로 하여금 방심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 현상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임진왜란때도 그랬지만..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이런 글을 올리는 당신의 의도가 의심스럽습니다. 지금 귀하가 누리는 자유가 불만스러우면 즉시 월북하셔서 지상낙원에서 여생을 보내시길 권유합니다.
역사의 뒤안길에는 그늘과 양지가 언제나 공존합니다. 인간 자체가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때문입니다. 어떤 부분을 보고 강조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품과 사상적 토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완벽을 추구하거나 가장하는 자는 대개가 독재자의 성향이 강한 사람입니다.
흥분 하지 마시구요...같은 불자이시니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기록을 살펴보면 6.25이전에 이미 1949년 한해동안 38선에서는 1년동안 1만명이나 전사자가 발생한 전투상황인데 지휘관들이 적정을 살피지 않았던 정황에 대한 의문이 들어 이때의 상황이 이해가 안가는 거지요...가장 초보적인 군사상식만 있어도 적의 동태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할 수 없을텐데 말이죠...
하고자하는 말이 먼교? 남침 유도설을 생각해요? 친일파랑 무정을 비교해서? 수시로 적이 대규모 병력을 집결한다고 보고를 했지만 상부에서 무시했슴. 재주껏 역사를 바로 잡아보이소
제목에서 밝혔듯 나의 개인적인 의문입니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기록에서 살펴본 육탄10용사의 진실은 과연 무엇인지?...그리고 800여회의 전투가 치루어지며 1만명의 전사자가 발생한 당시 상황을 평화적 상황으로 볼 수 있는지...왜 대규모 적병의 집결정보를 받고도 오히려 비상령을 해제 했는지 등등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에 대한 의문점들이 많네요...그리고 역사는 이런 의문에서 진실이 밝혀지는것 아닌가요...지구가 왜 돌아가는지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사고가 갈릴레오때 증명되었듯이 말이죠...성불하세요()
6.25전사를 살펴보시면 그러한 내용의 전후가 잘 나와 있습니다. 나무만 보지 말고 숲 전체를 보셨으면 합니다. 후르시쵸프 회고록이나 기밀이 해제된 구 쏘련의 남침개입에 대한 사실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논쟁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나 기왕 시작되었으니 차분히 생각해 보죠.....6.25가 일어나기 직전인 1949년 한해동안에만 800회 이상 전투가 벌어져 1만명이상의 전사자가 발생한 상황에서 전쟁발발 하루전인 6월 24일에도 적정에대한 이상징후의 정보가 계속보고되고 있는데도 비상경계령을 해제한 육군참모총장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 해야 하나요..( 이사실은 대한민국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의 기록입니다.)후루시쵸프의 회고록에 스탈린이 채병덕 보고 비상경계령을 해제하라고 시켰다고 써있지는 않으니 당시 남한 군부는 적정을 도대체 어떻게 살피고 있었던것인지 이해가 안가는 부분입니다.
님께서 제시하는 그러한 내용도 객관적으로 잘 묘사되어있습니다. 그러기에 당시 군 고위층의 안보불감증에 대한 질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처지는 그 당시와 비교해 과연 어떠한지 되씹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김정일은 선군정치를위하여 일년에 수십번씩 군부대를 방문하며 사기를 진작시키면서 유사시에는 반드시 남조선과의 전쟁에서 필승할 것을 격려하면서 점검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남한은 평화통일무드의 환상에 젖어 같은 동족 어쩌구하면서 주적개념도 없애는 처지에 놓여있는 상황입니다. 정부에 대한 비판과 남한정부의 정통성을 문제삼으면서 북한을 긍정하고 동경하게 만들고있는 무리들이 곳곳에서 안보의식을
흐리게 하고 있는 것은 바른 정신을 가진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사안입니다. 제가 우려하는 것은 잘못을 위한 잘못의 지적보다 잘못을 교훈으로 삼아 이를 시정하고 보완하는 대책을 위한 내용은 없이 남한은 모두가 잘못되었고 북한은 잘했다는 뉴앙스를 풍기는 글의 내용을 지적한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어떤시각으로 비판하느냐 하는 문제를 지적한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을 좀 더 깊이 파고 들어볼까요? 당시 남한의 군대는 부패한 지휘관들이 미군이 남기고간 군수물자를 빼돌려 자신의 배를 불려 치부하는데 정신이 없는 썩어빠진 인사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전선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대비하기는 커녕 상부에는 거짓말로 승전보만 보고하고 부하들이 죽어나가는데도 자신은 기생집에서세월을 보내던 무리들이 대부분이었던거지요. 오죽하면 전쟁중에도 "국민방위군" 사건같이 5만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전쟁터에서 제대로 싸움한번 해보지 못하고 굶어죽는 참변이 일어났을까요...북측에선 전면전을 공공연하게 남측에다 협박하던 상황이었는데도 (이것도 못믿겠으면 위의자료를 확인해보세요)
상황대비를 전혀하지않았던것은 기록이 모두 남아있습니다. 단지,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겐 음폐하고 북측의 기습남침이라고 하는게 의심스러운거죠...한국전쟁은 몇가지 주장이 있으나 여기다 대표적인 4가지 설에 대해 나열해드릴테니 기억해두세요. 첫째: 스탈린 주도설, 둘째: 김일성주도설, 셋째:한미공조설, 넷째:내란확전설입니다. 기습남침이라고만 주장하시는 분들에겐 아래두가지 학설은 좌파빨갱이들의 주장으로만 들리겠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학설이라는것을 인정하고 저의 글을 보아주시면 이해가 될 수도 있을겁니다. 필요하다면 위의 학설들을 간단하게 정리해 드리겠으니 말씀하세요..
그런 설들을 양산해내는 자들이 바로 진실을 호도하기 위한 물타기 작전의 전형적인 수법입니다.
당시 군의 부패를 부정하는 것이아닙니다. 그런 현상은 과거의 전쟁에도 북한군에서도 있는 사실입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런 관계로 많은 희생자를 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패한 부분보다 그렇지 않은 부분이 많았기에 전쟁에서 한때는 북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좌절되었지만 님은 부정적인 부분만 확대 조명하고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에 대한 경외심은 전연 없는 것 같습니다. 님과 같은 분에게는 국립현충원이 조소의 대상으로 보이기도 하겠지만 올바른 정신을 가진 분들은 년중 성역을 찾으며 오늘날의 조국이 존재할 수 있게한 그 분들의 영전에 고개를 숙입니다.
근,현대 세계사에 대해 조금만 공부해도 중공이 왜 한국전에 개입했는지를 아실텐데 아쉽습니다. 38선이북으로 맥아더가 진격을 할때 가장 위협을 느낀나라는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불과 얼마전 국공내전에서 장개석을 대만으로 몰아낸 중공이었습니다. 모택동은 맥아더가 압록강으로 쳐들어오면 장개석군대가 그틈을 이용해 조선반도를 통해 중국으로 쳐들어 올것을 염려해서 미국에 38선 이북으로 올라오지 말것을 요구했는데 맥아더가 막무가내로 본국의 명령조차 무시하고 올라간것이고요...결국 맥아더는 세계전쟁을 염려한 투루먼에 의해 해임되고 만것 정도는 아실테죠..
님의 그 당치않은 괴변은 들을만한 일고의 가치도 없음을 밝힘니다. 저도 한때는 한국전쟁의 이면사를 열심히 연구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과 괴설을 적당히 섞어 진실을 호도하는 것이 오늘날 좌익친북분자의 전형적인 수법임을 밝혀둡니다.
전투에 임해보면 말많고 지식깨나 있는 사람과 주먹깨나 쓰면서 제일 용감한 척 하는 자가 교전이 벌어지면 제일 먼저 대가리 처박고 틈만 나면 전선을 이탈하는 것을 월남전을 통해서 직접 경험했습니다. 평소에 말없고 우직한 듯한 사람이 전투에서는 진정한 용맹심을 발휘합니다. 요즘 세상처럼 제 잘났다고 떠드는 자 치고 전투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생명바쳐 싸울자는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국내에서 감방가고 하는 것은 생명이 보장되고 언젠가는 풀려날 것이라는 사실과 정권과 시대가 바뀌면 영웅도 될 수있다는 소위 비빌 언덕이 있기때문입니다. 진정한 애국자는 나라의 운명이 존망에 달렸을 때 무자비한 적진을 향해 죽음을 각오
하고 뛰어드는 사람이지 생명보호장치가 작동되는 국내법의 테두리안에서 설치면서 제잘났다고 하는 사람이 결코 애국민이 아님을 명심하셨으면 합니다. 이런 사람들 북한에 보내면 숨소리도 한번 제대로 못내지요..
뭐...저의 글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보시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제가 의문을 갖고 있는것이 바로 목숨을 바쳐 포탄을 안고 적진을 향해 뛰어들었다는 육탄10용사의 실체와 6.25직전의 상황대처랍니다.. 국방부에 있는 자료는 우리가 배운것과는 전혀 딴판의 증언이 있으니 황당한것이구요...전시라는 특수성을 이용해 영웅을 만드는것을 어느정도 이해할 수는 있으나. 허구의 사실로 순국선열들을 모조리 욕먹이는 일은 없어야 겠죠..
귀하가 말하는 내용들이 잘한다고 뭘 많이 안다고 하는 자랑일지는 모르나 그런 글들이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면 순국선열을 욕먹이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좀...열등감에 사로잡히신것 같아 여쭙겠습니다. 혹시 님의 집안에 현충원에 안장(묘비만 세운게 아닌 박정희, 이승만처럼)되신 순국선열이 있으신가요...저희 집안엔 대전 현충원에 일본황궁을 비행기로 충돌폭파하려한 혐의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룬분이 지금누워계신답니다. 쪽지로 문의하면 그분의 성함을 알려드릴께요...애국자를 함부로 말씀하지 마시길..제아버님은 6.25동란에 참전하셔서 부상을 당해 명예제대를 하셨고 제형님은 국가유공자입니다. 저희 집안 이야기는 이쯤에서 멈추지요... 애국을 그리 주장하시는 님의 직계가문에 어떤분들이 계신지 궁금합니다.
님의 집안처럼 그리 거창한 애국자도 없는 집안입니다. 다만 육이오당시 아무 이유도 없이 천지분간도 못하는 빨갱이의 앞잽이 노릇하던 사람들 한테 집안이 콩가루가 될 뻔하다가 지인의 도움으로 피해를 면한 전력이 있지요. 글구 저도 군에서 나름대로 충성하다가 월남전의 고엽제 후유증으로 보상한푼 못받고 매일 한번씩 생사를 오르내리는 고통속에 살고있는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이 월남전에서 유공자로 선정되었지만 저는 운이 없는지 부하들만 훈장을 타게하고 저는 나중으로 미루다가 그 흔한 훈장하나 없이 파월기간내내 열사의 장글만 헤치다가 귀국하여 병명도 드러나지 않는 공황장애증세로 나날이 고통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불자가 된것도 이 지긋지긋한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염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님들처럼 그렇게 팔자좋은 사람이 되지못해 죄송합니다.
저런...않됐습니다. 국가를 위해서 희생하셨는데 인정을 못받고 계시군요...대한민국 국가 보훈처에선 사실확인만 되면 모두 국가유공자로 인정을 해주고있으니 함께 참전했던 전우들을 설득해 최소한의 인우보증이라도 세우시지요...그럼 고엽제 피해내지 공황장애증세에 대한보상은 쉽게 받을겁니다. 요즘은 아주 오래전 일제시대때의 일도 확인을해서 국가유공자로 인정해 주는 세상입니다. 제아버님처럼 참전용사들이 찾아가지 않은 국가무공훈장도 보훈처에서 사실확인후 찾아가라고 광고하는 세상이기도 하구요..마지막으로 세상사 고통은 모두 자신의 마음속에서 비롯되는것이니 집착을 끊는 무착심을 가져보세요...팔자가바뀔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