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자라나게 하시고
저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제1독서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8,18-25
형제 여러분, 18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9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20 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21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22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23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24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25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복음
<겨자씨는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18-21
그때에 1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19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21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시계는 태엽만 감을 줄 알면 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행복입니다. 행복한 사람이 영원히 삽니다. 하느님 나라를 거부하면 이 세상에서부터 지옥을 체험하고 결국 그곳으로 갑니다. 우리는 행복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우리 안에 겨자씨와 누룩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겨자씨와 누룩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영화 ‘먼지로 돌아가다’(2022)에서 한 중국 시골 노총각은 단돈 4만 원에 장애가 있는 여자를 아내로 사옵니다. 이런 관계가 잘 될 수 있을까요? 결국 잘 됩니다. 노총각은 사랑을 해 보지는 못했지만, 사랑은 주는 것임을 압니다. 아내도 남편의 진심을 이해하고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내가 사고로 죽습니다. 남편은 더는 살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아내를 따라갑니다.
이 영화에서 남자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사랑을 몰랐을 것이고 그러면 더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을 알고 나서 사랑하지 않는 삶은 사는 게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우리 안에 받아들여야 하는 한 가지는 ‘사랑’입니다. 그것뿐입니다.
시계는 태엽을 감거나 건전지만 갈아주면 저절로 갑니다. 우리는 겨자씨가 어떻게 싹이 터서 어떻게 자라는지 알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겨자씨가 심겨지면 자라서 새들을 쉬게 할 수 있음만 알면 됩니다. 새들은 힘든 사람들입니다. 나에게 사랑이 심겨지면 사람들을 쉬게 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도가에서는 이것을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 합니다.
누룩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떨어지면 나를 정화시킵니다. 밀가루 서 말은 곧 우리 안의 삼구, 곧 탐욕-성욕-교만을 꺾어 정화시킨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청빈과 정결과 순명의 덕이 생겨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기로 남습니다.
저도 신학교에 들어가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는 나 자신이 정화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분께 붙어있기만 하려니까 저절로 성령의 열매들이 맺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도만 하면 됩니다. 기도란 은총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시간입니다. 성찬의 전례, 말씀의 전례와 같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것은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읽은 후였습니다. 그것을 읽으니 사랑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결혼 안 하고 혼자 살 수 있는 에너지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신학교에 들어가서는 성체에서 울려 나오는 다 주셨다는 그분의 목소리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죽을 때까지 사제로 살아갈 힘을 줄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되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저 사랑을 받아들이면 인간은 마치 다시 태엽기 감긴 시계처럼 째깍째깍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유튜브 동영상에서 한 아빠가 코로나로 식당이 잘되지 않자 새 메뉴 개발을 한다고 힘들어 식당 의자에 앉아 엎드려 자고 있었습니다. 작은 딸아이가 아빠를 찾다가 피곤해서 자는 모습을 보더니 자기 조끼를 벗어 아빠를 덮어드립니다. 아빠는 자고 일어나 자기 등에 아이의 조끼가 있는 것을 알고는 눈물을 흘립니다. 그렇게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은 것입니다.
삶에 힘이 빠진다면 사랑받지 못해서입니다. 그것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기 위해 열심히 진리를 받아들입시다. 책을 읽는 것이 가장 좋고 저 같으면 하.사.시.를 추천합니다. 그리고 기도합시다. 그분께서 성체로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을 느끼기만 해도 그분께서 우리를 감싸주심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살 힘을 얻습니다. 연료를 넣지 않고 혼자 움직일 수 있는 자동차는 없듯이, 사랑 없이 살 수 있는 인간도 없습니다. 우리에겐 사랑만 있으면 됩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는 장애물을 만나 목표에서 멀어지는 게 아니다. 눈앞에 보이는 덜 중요한 목표를 추구하다가 진정한 목표에서 멀어진다.”
미국의 작가 로버트 브롤트의 말로, 크게 공감되는 글입니다. 어떤 사람이 산 정상을 향해 힘차게 걸어가는데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정상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얼른 지도를 펼쳐 보니, 예상처럼 산 정상과 전혀 다른 쪽으로 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 어떤 마음이 필요할까요?
첫 번째, ‘어차피 길은 하나로 통한다고 하잖아? 가다 보면 다시 정상으로 가겠지.’
두 번째, ‘그냥 산에 가기만 하면 되잖아? 굳이 정상에 가지 못했어도, 이 산은 간 거지.’
이런 마음으로는 산 정상에 오를 수 없습니다. 산 정상이라는 목표를 결정했다면 산 정상만을 바라보고, 그곳을 향해 걸어야 합니다. 우리 삶 안에서도 목표만을 봐야 합니다. 이런 예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아들이 다쳤습니다. 다친 아이를 데리고 어디에 가겠습니까? 당연히 병원이고 병원만을 바라보고 바쁘게 뛰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저는 목요일마다 신학교에 가서 강의합니다. 어느 날 강의하러 가기가 너무 싫은 것입니다. 어떻게 했을까요? 싫다고 가지 않았을까요? 아닙니다. 당연히 강의하러 갔습니다. 반드시 해야 할 중요한 일이기에 하기 싫다고 안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인 ‘사랑 실천’이 하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도 해야 합니다. 나의 구원이 결정되는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목표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 순간에는 작고 중요하지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목표를 바라보고 실천해 나갈 때, 목표에 가까워지면서 엄청난 결과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와 누룩과 같다고 하십니다. 처음에는 작고 볼품없어 보이지만, 겨자씨가 나무가 되고 누룩은 반죽을 부풀리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도 점점 성장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라는 목표를 바라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 목표에 가까워지면 어떨까요? 엄청나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나라인 하느님 나라를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중요한 것을 과연 소홀히 해야 할까요?
하느님 나라라는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은 사랑 실천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안일한 마음을 가지고서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랑의 삶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인간은 자신의 모습이 완성됐다고 착각하지만, 누구나 미완성의 존재다. 지금까지 당신이 경험한 대로 현재의 당신 모습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이며 금방 바뀐다(대니얼 길버트).
사진설명: 겨자씨는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