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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이사야서의 말씀 35,1-6ㄴ.10>
1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2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레바논의 영광과, 카르멜과 사론의 영화가 그곳에 내려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3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4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복수가 들이닥친다, 하느님의 보복이!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5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6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10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 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 제2독서
<야고보서의 말씀 5,7-10>
7 형제 여러분,
주님의 재림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리는 농부를 보십시오.
그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맞아 곡식이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8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
9 형제 여러분,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심판받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심판자께서 문 앞에 서 계십니다.
10 형제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끈기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 복음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1,2-11>
그때에
2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5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6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7 그들이 떠나가자 예수님께서 요한을 두고 군중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고운 옷을 걸친 자들은 왕궁에 있다.
9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10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해가 뜨기 전 먼동이 터오듯, 참 빛이신 아기 예수의 탄생이 가까워지면서 세상에 희망의 동이 터옵니다.
이토록 보랏빛 동녘 하늘 타오르는, 오늘은 기쁨 주일입니다.
이 기쁨을 오늘 입당송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기뻐하여라.
거듭 말하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도 기쁨을 선포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이사 35,1-2)
오늘 우리는 이 기쁨 주일에 핑크빛 옷을 입고서 설레이는 기다림과 고대하는 기쁨으로 벅차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광야에 머물러 있습니다.
아직도 감옥이라는 광야에 갇혀 있습니다.
감옥이라는 광야는 목을 내밀고 메시아를 애타게 기다릴 수밖에 없는 장소입니다.
기다림만으로 온전히 꽉 찬 공간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지금 감옥에서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서 과연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인지 확인하고자 하였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마태 11,3)
요한의 이 의구심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자신이 선포했던 메시아 상과는 달랐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타작마당에서 곡식을 가려 쭉정이를 불태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나쁜 나무를 찍는 도끼의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과 함께 고통당하는 사랑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불의를 징벌하고 정의를 세우는 심판자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죄인을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을 구하기 위해 용서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요한이 알고 기다리고 있었던 메시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이 다급한 물음에, ‘나는 메시아다’라고 분명한 대답을 주지 않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요한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들을 통하여/, 신앙고백에 이르러야 했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마태 11,6)
이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혼란에 빠지지 않는 사람에게 들려주는 행복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활동 모습이 자신이 생각했던 메시아의 표상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는 복되다는 진복선언입니다.
동시에 이는 의심을 품지 말라는 아주 냉혹한 경고의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기존 표상과 관념에 따라 생각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질책과 경고의 말씀입니다.
아니 자신 안에서 먼저 자기 관념을 깨부수라는 철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마태 11,4) 이르시면서, ‘보고 들었던’ 내용을 이사야를 인용하여 표현하셨습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마태 11,5)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생명의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보여주셨습니다.
실로 인간 삶의 길과 하느님 생명의 길은 사뭇 다릅니다.
인간 삶의 길은 먼저 살고 나중에 죽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생명의 길은 먼저 죽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 항상 살기 위해서 애를 쓰며 모든 힘을 다 쏟습니다.
그러다가 모든 힘을 다 탕진하고 애를 쓸 힘이 더 이상 없으면 죽게 됩니다.
결국 우리는 살려고 옥신각신하다가 하는 수 없이 죽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길은 먼저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잃은 사람은 살릴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 생명의 길을 따라 자신을 버리면, 진정 행복한 삶일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죽고 다음에 살아간다면, 진정 하느님의 생명, 참된 생명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기쁨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기쁨 주일인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행복선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마태 11,6)
주님!
먼저 죽고 나중에 사는 생명의 길을 가게 하소서.
먼저 떨어져 죽고, 나중에 열매 맺게 하소서.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죽으면서 살아가게 하소서.
살기 위해서 모든 힘을 다 쏟고 난 후에서야 죽지 않고, 죽기 위해서 모든 힘을 다 쏟고 난 후에서야 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정말 예수님을 기다리십니까?>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많이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고 우리가 당신 사랑을 살고 또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마음 안에 주님의 사랑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성탄을 준비하며 잘 준비된 마음 안에 예수님을 낳아 드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제의 색깔은 장미색입니다.
오늘 불이 당겨진 대림초도 장미색입니다.
오늘의 이 색은 희망을 안겨줍니다.
얼마 남지 않은 성탄을 기다리며 남은 시간도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회개의 삶에 충실하여 기쁨을 간직할 수 있기를 다짐하게 하는 날입니다.
결코 지치지 말고 중단하지 말며 천상을 바라보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의 후손이 이집트에서 사백여 년의 노예생활을 했고, 시나이 반도에서는 사십년의 방랑생활을 하였으며, 바빌로니아에 끌려가서는 오십년이 넘는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오늘 1독서의 내용은 바로 바빌론 유배 때의 이야기입니다.
유다인들은 오 천리나 떨어진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가 많은 고난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무서운 징벌이었고, 그들은 다시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이 희망을 잃고 살았습니다.
나라는 폐허가 되었고 백성들의 민족정신도 쇠퇴한 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예언자는 포로생활에 짓눌려 있는 유다인들에게 기쁨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1독서의 내용을 보면, ‘나라가 망해 페허가 된 유다의 사막과 황무지는 꽃을 피우고, 주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것입니다. 맥 풀린 손에 힘을 넣어주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 주며 마음이 불안한 이들을 주님께서 오셔서 구원해 주십니다.’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립니다.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 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게 됩니다....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집니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제 본디 모습으로 돌아감을 뜻합니다.
바로 이 예언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던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며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는 타오르는 등불이었고 진리 안에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헤로데한테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바른말을 하였습니다.
그 이유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에 갇힌 요한은 예수님에 관한 이러 저러한 소리를 듣고 예수님께 제자를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하고 물어보게 했습니다.
이때 요한의 마음은 착잡했습니다.
자신은 이제 죽을 것이 뻔한데 모두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신지 아닌지 궁금하고 한편으로 의심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아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속에 던져진다”(마태 3,10)하며 회개의 절박함을 선언했던 요한입니다.
요한은 메시아를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버리실”(마태 3,12), 잘못된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과 어울리고 병자들을 만나시며 먹고 마시고 하니까 그 궁금증이 더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즉답을 피하시고 자기에게서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가서 요한에게 알려주라.’고 하셨습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마태 11,5-6)
결국 이 말씀은 이사야 예언자가 예고한 말씀이 그대로 당신에게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말씀 덧붙이셨습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마태 11,6)
‘의심을 품지 않는다’는 것은 곧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요한 6,47)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고 실천하는 가운데 행복해야 합니다.
물론 요한이 의심한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자비와 섭리를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구세주 예수님은 모든 비정상을 정상으로 회복하시는 일을 하셨고, 죄악으로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내셔서 구원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는 내가 기대하고 바라던 방법대로 주어지고, 또 이루어지지 않으면 투덜대기도 합니다.
가정의 우환, 자녀의 문제, 이웃과의 관계는 물론 사업이 잘 안 풀리고 …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응답이 없어 힘들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믿어야 합니다.
믿음의 시험기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위해 더 좋은 것을 마련해 놓고 계십니다.
내가 기대하고 바라는 모습으로 오지 않으시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오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지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참고 기다리면 좋은 것이 반드시 옵니다.
‘더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스라엘의 ‘통곡의 벽’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유다인들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구세주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고 자기의 소망을 쪽지에 적어 돌틈에 끼워 넣고 있습니다.
그러면 랍비들이 그것을 거두어 가서 기도해 준답니다.
구세주께서 오셨지만 아직도 알아보지 못하고 자기들의 틀에 갇혀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들어갈 때는 남자는 머리에 모자를 쓰고 들어갑니다.
절대자 앞에 고개를 숙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지는 그냥 들어갑니다.
사람만 모자를 씁니다.
여자는 사람이 아니고 소유물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그리스도를 기다립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눈높이를 맞춰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행실대로 상급을 주실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채워주시고 구원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만한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은총의 선물은 많지만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서 그 충만함은 달라집니다.
‘같은 물이지만 꽃이 마시면 꿀이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되는 법입니다.’
아직도 점집을 들락거리고 철학관을 찾으며 양다리 걸치기를 하시는 분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구원자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 선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릇이 없으면 담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차지하면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것은 모두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영원히 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크게 성공한 사람은 예수님을 차지한 사람입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 11,11)는 것은 하느님을 얻으면 모두를 얻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부나 명예나 권력이나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하느님을 잃으면 모두를 잃은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을 믿는 만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으로 바뀌길 희망합니다.
내가 기다리는 분, 주 예수님을 내 입에 맞게 기대하지 말고, 오히려 그분의 기대에 걸맞은 삶으로 기뻐하고 영원히 남을 것에 마음을 두시기 바랍니다.
콜로새서 3장 2절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의 진짜 본성은 낳고 키울 때 드러난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감옥에서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냅니다.
그래서 이렇게 묻게 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입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마태 11,3)
당연히 요한이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의심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요한은 명확하게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 알려주었습니다.
이는 제자들을 위함입니다.
감옥에 갇혀 죽기 직전 자신의 마지막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믿음이 부족한 존재로 여겨지면서까지 제자들을 당신께 보낸 요한을 칭찬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마태 11,11)
그런데 이 말씀에 덧붙여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마태 11,11)
사람 중에서 요한보다 큰 사람은 없는데, 어떻게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도 요한보다는 클까요?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개 중에 가장 훌륭한 개는 인간 중에 가장 작은 인간보다 귀한 존재일까요?
당연히 인간의 본성을 지닌 이 중 가장 작은 이도 개의 본성을 지닌 모든 존재보다 클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은 한 인간의 본성을 지니며 자기 제자들을 그리스도의 본성, 곧 하느님의 본성으로 새로 태어나도록 보낸 것입니다.
그러면 요한은 결국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가 되는 것일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을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힘으로 본성을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혼자 태어날 수 있는 생명체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파리가 열심히 노력하면 꿀벌이 될까요?
만약 파리가 꿀벌이 되었다면 그 중간에 꿀벌로 새로 태어나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있어야만 합니다.
<투머로우랜드>(2015)란 공상 과학 판타지 영화가 있습니다.
여기에 아테나란 여자아이가 나옵니다.
주인공 남자는 그 여자아이가 따라오라고 해서 따라갑니다.
그런데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곳은 아주 먼 미래입니다.
아테나는 시간 여행을 시켜줄 수 있는 여자아이였던 것입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미래로 인도할 수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미래로 가는 것은 본성을 바꾸는 일만큼 어렵습니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는 이미 그럴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미래에서 왔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하느님으로 태어나지 않고 하느님의 본성으로 사람을 만들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하늘 나라에서도 가장 큰 인물 중의 하나입니다.
하늘 나라의 본성을 가진 이를 태어나게 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영화 <킹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노예 소년이 대장군이 되기로 결심하고 노력한 결과 그냥 싸움 잘하는 노예가 되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구해 준 이가 왕이 되자 그의 지위는 그대로 머물 수 없습니다.
내가 낳는 이의 본성이 왕이면 자신도 그와 대등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한도 제자들을 새로운 본성으로 태어나게 만들기에 그 본성에 합당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한 거지에게서 그리스도를 봅니다.
이태석 신부는 돌아가셔서도 아이들을 의사로 키워냅니다.
내가 그리스도가 아니면 한 거지를 그리스도로 볼 수 없고 믿어줄 수 없습니다.
내가 의사가 아니면 의사로 키워낼 수 없습니다.
그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본성을 바꿔주는 일입니다.
만약 나를 통해 하느님의 본성으로 새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하느님의 본성을 지녔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역할을 사제직이라고 하고 그래서 하느님 나라는 사제들의 나라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낳을 수 있는 성모 마리아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실까요?
당신과 같은 비천한 종도 하느님을 낳으셨다면 우리도 모두 그러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실까요?
내가 사람을 어느 정도까지 들어 높일 수 있는지에 따라 나의 존재가 드러납니다.
하지만 우리 안의 뱀은 우리가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 본성에 머물러 있게 만들기 위해 세상 것에 집착하게 합니다.
우리는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까요?
뱀과 그 말을 따르는 이들의 말을 들어야 할까요, 아니면 “말씀을 받아들인 이는 모두 신이 된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는 마치 난자처럼 정자를 받아들이면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자녀들에게, 주위 사람들에게 어떠한 믿음을 전하고 있느냐에 따라 어떤 존재인지가 결정되고, 내세에 어디에 살지, 어떤 위치에서 살지가 결정됩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사제는 누구입니까) 가장 위대한 점을 감히 말하자면, 하느님이 될 것이고 다른 이를 하느님이 되게 할 것입니다.”
(CCC, 1589)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 안에는 하느님 아버지의 신성이 그대로 자리 잡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선구자이자 예언자 세례자 요한의 입장에서 정말 궁금해서 미칠 지경인 것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요즘 갑자기 등장해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는 인물, 예수님이 과연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아일까, 아닐까?
긴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정말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부여하신 사명 가운데 가장 막중한 것은 아무래도 메시아께서 오실 길을 미리 닦는 일, 구약시대와 신약시대 사이에 튼튼한 다리를 놓는 일, 결국 백성들에게 저분이 바로 메시아임을 확인시키는 이정표로서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예수님이란 인물이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행동거지가 조금은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인류 구원 사업이란 중차대한 사명을 완수하러 오실 메시아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에 함께 할 제자들을 뽑는데, 그 면면을 살펴보니 한심하기까지 합니다.
뿐만 아니라 당대 지도층 인사들과 사사건건 대립하며 의견 충돌을 빚습니다.
목숨처럼 소중한 율법 규정들을 하나하나 깨트립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의 말씀은 종래 다른 지도자들과는 명백히 달라 생명력과 에너지로 넘쳐흐릅니다.
시원한 샘물 같은 그의 가르침에 백성들은 환호하고 박수를 칩니다.
그의 모습은 한없이 겸손하고 소박하지만 때로 당당하고 강력한 포스가 느껴집니다.
세례자 요한은 더이상 갈등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직접 확인해보기로 마음먹습니다.
옥에 갇혀있던 그는 자신의 두 제자를 예수님께 보내어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마태오 복음 11장 3절)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참으로 명쾌합니다.
말이 필요 없습니다.
구구절절 설명이 따로 필요치 않습니다.
그저 행동으로 보여주십니다.
그 자리에서 즉시, 세례자 요한이 보낸 두 제자가 보는 앞에서 메시아로서 당신의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질병과 병고와 악령이 시달리는 사람들을 고쳐주십니다.
눈먼 이들을 보게 해주십니다.
자신들의 스승 세례자 요한을 훨씬 능가하는 메시아로서의 예수님, 세상만사를 자유자재로 마음껏 주관하시는 우주의 지배자 예수님의 모습에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깜짝 놀랍니다.
말로서가 아니라, 이론과 설명으로서가 아니라 지금 당장 자신들의 눈앞에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주시는 예수님 앞에 입을 닫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유다 지도층 인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완고한 마음, 지나친 오만, 단단히 닫힌 폐쇄성은 끝끝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사람들 눈에 가장 하느님 가까이 있다고 여겨진 사람들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가장 하느님과 멀리 있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진리와 계명 복잡한 것 같지만 사실 너무나도 단순명료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이 세상에 구세주로 보내셨는데, 그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안에는 하느님 아버지의 신성이 그대로 자리 잡고 계십니다.
그를 보는 것이 곧 하느님을 뵙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메시아=그리스도=하느님이란 등식을 굳게 믿는 일 그것이 구원과 새로운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만 바라보아라.>
12월 11일의 복음 말씀의 주제는 “세례자 요한은 어떤 인물인가?”가 아니라,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또 예수님께 가라고 예수님을 가리키는데, 보라는 예수님은 안 보고 세례자 요한만 바라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실 구원받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세례자 요한은 중요하지 않고 예수님만이 중요합니다.
요한 사도는 복음서의 머리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요한 1,6-8)
우리는 ‘빛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하고, 예수님의 뒤만 잘 따라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냈을 때에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다.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한때 그 빛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요한 5,33-36)
예수님은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 분, 즉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먼저 보내서 예수님을 증언하라고 시키신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위해서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직접 드러내시는 것보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하는 과정을 먼저 거치는 것이 사람들 쪽에서 메시아를 믿고 받아들이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의 증언과 상관없이, 또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들은 적 없이 곧바로 예수님을 믿고 신앙인이 된 사람들의 경우에는,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와 예수님 증언을 모르는 채로 산다고 해도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예수님만 잘 바라보고, 예수님만 잘 따라가면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임무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 3,29-30)
이 말은 세례자 요한의 겸손을 나타내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나의 역할은 끝났다. 나는 이제 물러나야 한다.” 라는 선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아직도 여전히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읽고 묵상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회개와 구원이 아직도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임무를 마치고 떠났지만, 그의 회개 선포는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메시아인지 의심한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 아니라 요한의 제자들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하는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면서, “너희가 가서 직접 보고 믿어라.” 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요한 5,36) 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고운 옷을 걸친 자들은 왕궁에 있다.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세례자 요한은 어떤 인물인가?”를 설명하는 말씀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설명하신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의 일을 미리 준비한 사람이고, 사람들에게 “메시아는 예수님”이라고 증언한 사람이기 때문에,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인데,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증언한 바로 그분이기 때문에 요한보다 더 중요한 분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의 앞에서 미리 일한 ‘사자’일 뿐이지만, 예수님은 그 ‘사자’가 섬긴 주님이시고 메시아이신 분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시대가 끝났고 신약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준 ‘구약시대의 마지막 예언자’이면서 동시에 ‘신약시대의 첫 번째 예언자’이기 때문에 구약시대의 ‘가장 큰 인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위대한) 분’입니다.
신약시대의 주인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을 깎아내리는 말씀이 아니라, 신약시대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구약시대는 구원받기를 기다리기만 한 시대였지만, 신약시대는 구원이 본격적으로 실행되는 시대이기 때문에 구약시대보다 훨씬 더 위대한 시대입니다.
그런 신약시대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고운 옷’을(세속의 부귀영화를) 얻기만을 바라면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대림 시기는 우리가 지금 찾고 있는 것들, 또 갖기를 원하는 것들이 정말로 중요한 것이고 필요한 것인지를 반성하는 시기입니다.
하늘나라에 가지고 갈 수 없는 것들은 그것들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들은 전부 다 쓸모없는 것들이고, 버려야 할 것들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들 - 기뻐하라, 두려워하지 마라, 기다려라, 만나라>
우리는 방금 화답송 후렴을 간절한 마음으로 노래했습니다.
“주여, 오소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주님 오실 날이 하루하루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대림 촛불 셋이 영롱하게 빛을 발하며 주님께서 가까이 오심을 알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대림 제3주일입니다.
일명 ‘라우다테Laudate’ ‘기뻐하여라’ 주일이자 기쁨의 장미 색깔 제의를 입기에 장미주일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또 오늘은 제39차 자선주일이기도 합니다.
자선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매우 구체적이면서도 적극적인 신앙 실천 행위입니다.
막연히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힘닿는 대로 자선을 실천하며 기다릴 때 기다림의 기쁨도 클 것입니다.
기다림의 기쁨입니다.
참으로 언제나 영원히 기다릴 대상인 주님이 계시다는 것은 참 기쁘고 행복한 일입니다.
살아갈수록 기다릴 것도 사라지고 이제 믿는 이들에게는 기다릴 대상은 주님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광야인생, 기다릴 궁극의 희망이신 주님이 없다면 삶은 얼마나 고달프고 힘들겠는지요!
이런 주님을 기다림이 없이 무슨 희망으로 기쁨으로 살아낼 수 있을런지요.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으로 산다면 정말 순수하고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시기를 살고 있습니다.
도대체 희망의 주님을 기다리지 않으면 누구를 기다리겠습니까?
주님을 참으로 기다릴 때 기다림의 기쁨입니다.
필립비서 말씀이 반갑게 떠오릅니다.
그대로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 제3주일 자선주일에 맞는 말씀입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필리 4,4)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 서두 말씀도 온통 기뻐하라는 말씀으로 가득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사막이 상징하는 바 우리들입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레바논의 영광과, 카르멜과 사론의 영화가 그곳에 내려,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얼마나 고무적인 말씀입니까?
주님을 기다리는 순수하고 간절한 마음에서 샘솟는 기쁨이요, 주님의 영화와 영광이 빛나는 기쁨입니다.
그러니 기뻐하십시오.
이런 기쁨의 빛 앞에 사라지는 두려움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기뻐하라에 이어지는 두 번째 권고가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대로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 말씀입니다.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기쁨은 힘이자 빛입니다.
기쁨의 빛 앞에 사라지는 두려움의 어둠입니다.
이런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이 끝없는 인내의 기다림을 가능하게 합니다.
기뻐하라, 두려워하지 마라 다음에 “기다려라”입니다.
야고보서 말씀이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에 고맙게도 잘 맞습니다.
재림이란 말마디를 적당히 바꿔 전문을 읽어봅니다.
아마도 기다림의 달인은 충실한 농부일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리는 농부를 보십시오.
그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맞아 곡식이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주님 오실 날이 가까웠습니다.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심판받지 않습니다.
심판자께서 문 앞에 서 계십니다.”
기쁨의 기다림 앞에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원망, 절망, 실망이 사라진 희망과 기쁨 가득한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 인내의 기다림없이 이뤄지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기다림에 이어 만남입니다.
“주님을 만나라”입니다.
대림시기 주님 성탄에 앞서 우리는 날마다 이 미사전례를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 만남의 은총이 참으로 큽니다.
가톨릭 교회 전례도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을 목표로 합니다.
주님을 만날 때 치유와 위로를 받습니다.
주님을 만날 때 전 존재가 정화 은총이고 성화 은총입니다.
영육이 깨끗해지고 거룩해집니다.
주님을 만날 때 참 좋은 기쁨과 평화, 희망과 행복을 선물로 받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아니곤 어디서 이런 선물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을 다 지녔어도 기쁨이 없다면, 평화가 없다면, 희망이 없다면 결코 행복하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거금을 주고도 살 수 없고 억지로 뺏어올 수 있는 기쁨, 평화, 희망이 아니라 주님을 만날 때, 은총의 선물인 것입니다.
바로 참으로 믿는 이들은 주님과 만남의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한 두 번 만남이 아니라 결정적인 성탄의 만남에 앞서 대림시기 날마다 앞당겨 찾아 오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참 고마운 것이 날마다 끊임없이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야 할 자리는 언제나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전 존재가 힐링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을 만난 예수님은 요한에게 가서 보고 듣는 것을 전하라 이르십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일어나는 기적들입니다.
그대로 제1독서 이사야 예언의 실현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서 말씀이 주님을 만났을 때의 기쁨과 즐거움, 온전한 치유를 실감나게 보여줍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 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주님을 만날 때 전 존재의 치유요 기쁨임을 보여줍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할 때 이런저런 것들에 매여 참 자유로움도 행복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전인적 치유임을 깨닫습니다.
주님 성탄에 앞서 이 은총의 대림시기,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을 앞당겨 만나 새롭게 거듭나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1.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2.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3. 주님을 기다리십시오.
4. 주님을 만나십시오.
은총의 대림시기 우리 모두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실천해야할 구체적 과제입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산보를 하면서 가끔 엉뚱한 생각을 하곤 합니다.
‘머리, 허리, 다리’는 우리의 몸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앞의 말은 다른데 끝에 말은 모두 ‘리’로 같습니다.
앞의 말은 우리 몸의 특정 부위를 뜻하는 것 같고 뒤의 말은 그냥 붙이는 접미사 같습니다.
비슷한 말로 예수님, 선생님, 임금님, 사장님의 ‘님’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달란트와 미나의 비유에서 접미사를 사용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도 10배, 2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며 접미사를 사용하셨습니다.
사제는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접미사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 또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접미사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맺지만,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지면 마르고 버려질 것이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이라는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또 하나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을씨년스럽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날이 흐리고, 바람이 불고, 우산이 없는데 비까지 내리는 경우에 ‘을씨년스럽다.’라고 합니다.
문득 그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구글에 물어보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한다는 내용의 을사늑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됐던 날입니다.
당시 온 나라가 비통함과 울분으로 가득 찼었다고 합니다.
그날은 날씨도 흐리고 추웠다고 합니다.
몹시 쓸쓸하고 어수선한 날을 맞으면 그 분위기가 마치 을사년과 같다고 해서 '을사년스럽다'라는 표현을 쓰게 됐습니다.
그 말이 변형되어서 1957년 국어사전에 ‘을씨년스럽다.’라고 표기했다고 합니다."
한국교회에도 을씨년스러운 날들이 있었습니다.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입니다.
70년에 걸쳐서 4번의 큰 박해가 있었고 만 명 이상이 순교하였습니다.
살아남은 신자들은 깊은 산골로 들어가서 교우촌을 이루며 살았고, 교회는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 것처럼 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찾았습니다.
순교자들이 묻힌 무덤은 신앙을 증거했던 ‘성지’가 되었습니다.
서울에는 절두산, 새남터, 서소문, 삼성산 성지가 있습니다.
경기도에는 미리내 성지가 있습니다.
충청도에는 해미, 갈매못, 줄무덤 성지가 있습니다.
전라도에는 치명자산 성지가 있습니다.
강원도에는 베론 성지가 있습니다.
경상도에는 한티성지가 있습니다.
그밖에도 많은 성지가 있습니다.
우리 신앙선조들이 목숨을 바쳤던 곳에, 우리 신앙선조들이 신앙을 지켜온 곳들이 성지가 되어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신앙의 못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84년에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여의도에서 103위 성인의 시성식을 집전하였습니다.
30년 후인 2014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광화문에서 124위의 순교자들을 복자품에 올렸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코로나의 여파로 교회에도 을씨년스러운 날들이 있었지만 비가 온 뒤에 땅이 더 단단해지듯이 교회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으로 새로운 활력을 찾을 것입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대림 제 3주일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절망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주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나, 악인의 길은 꺾어 버리시네.”
을씨년스러운 날들은 지나가고 광명의 날들이 올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을 보내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께서 을씨년스러운 날을 광명의 날로 바꾸시는 바로 그분이십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복음이 이사야 예언자의 꿈이 현실이 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복음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우리의 삶에도 을씨년스러운 날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건강하던 몸이 아프기도 하고, 잘 나가던 사업이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선의를 가지고 했던 말들이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내 마음에 시기와 질투의 바람이 불기도 합니다.
이웃의 비난과 비판이 도를 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제2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리는 농부를 보십시오.
그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맞아 곡식이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항상 기도한다면, 언제나 기뻐한다면 그리고 이웃의 아픔을 같이 아파하고, 이웃의 슬픔을 같이 슬퍼할 수 있다면, 을씨년스러운 날들은 지나가고 광명의 날들이 찾아올 것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책을 읽다가 사람 몸에 0.2mg(70kg 사람 기준)의 금이 들어 있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대부분 혈액 속에 함유되어 있다는데 놀라운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몸에 금만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탄소, 산소, 수소, 구리, 아연 등이 몸 안에 함유되어 있었습니다.
혹시 자기 몸에 금이 있다는 사실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요?
구리나 아연은 느끼십니까?
단 한 명도 이를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몸 안에 이런 성분이 들어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삶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삶에 어떤 긍정적 요소가 없다면서 절망하고 좌절합니다.
그런데 앞서 금, 구리, 아연 등도 전혀 느끼지 못하는데, 부정적 요소나 긍정적 요소는 온전하게 느낄 수 있을까요?
그냥 부정적으로 단정 짓는 잘못된 마음에서는 나오는 것뿐입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성분이 자기 몸 안에 있는 것처럼, 자기에게 없다고 생각했던 긍정적 요소도 차고 넘칩니다.
기쁨, 희망, 사랑, 행복 등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주 적은 긍정적 요소라도 발견하게 되면 어둠 속에서 환한 빛이 되어, 올바른 길로 자신을 인도해 줄 것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던 요한이 제자를 보내서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3)라고 묻게 합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세례를 직접 주었으며, 세례받으실 때의 사건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질문은 어떤 의미일까요?
확신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약간의 의심이 생긴 것이 아닐까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거짓 증언으로 세례자 요한도 혼란을 겪게 된 것입니다.
마귀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사람을 고쳐 준다는 이야기, 안식일 법을 비롯해서 율법을 전혀 지키지 않는다는 이야기 등등….
세례자 요한의 감옥 생활이 절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지금처럼 인권이 보장되어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햇빛도 비추지 않는 캄캄한 감옥에서 이런 부정적인 말까지 더해지니 의심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당신이 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해주십니다.
그래서 의심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상태가 아닌, 어렵고 힘들 때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의심을 지우고 굳게 믿는 사람은 행복하게 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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