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오늘은 하늘 나라의 모든 성인을 기리는 대축일로,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고자 다짐하는 날이다. 특히 전례력에 축일이 따로 지정되지 않은 성인들을 기억하고 기린다. 이 축일은 동방 교회에서 먼저 시작되어 609년 성 보니파시오 4세 교황 때부터 서방 교회에서도 지내게 되었다. 처음에는 5월 13일이었는데, 9세기 중엽에 11월 1일로 바뀌었다. 교회는 이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 뒤의 새로운 삶을 바라며 살아가도록 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고, 우리와 천국의 모든 성인 사이의 연대성도 일깨워 준다.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이 성대한 축제로 모든 성인의 공덕을 기리게 하셨으니
성인들의 전구를 들으시고
저희가 바라던 하느님의 자비를 풍성히 베풀어 주소서.
제1독서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7,2-4.9-14
나 요한은 2 다른 한 천사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인장을 가지고
해 돋는 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땅과 바다를 해칠 권한을 받은 네 천사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3 “우리가 우리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장을 찍을 때까지
땅도 바다도 나무도 해치지 마라.”
4 나는 인장을 받은 이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들었습니다.
인장을 받은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지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9 그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그들은,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손에는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어좌 앞에 또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10 그들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구원은 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양의 것입니다.”
11 그러자 모든 천사가 어좌와 원로들과 네 생물 둘레에 서 있다가,
어좌 앞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하느님께 경배하며 12 말하였습니다.
“아멘. 우리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영예와 권능과 힘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13 그때에 원로 가운데 하나가,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저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느냐?” 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14 “원로님, 원로님께서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내가 대답하였더니,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제2독서
<우리는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입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3,1-3
사랑하는 여러분,
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복음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1-12ㄴ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정체성이라니까, 이 멍청아!
오늘은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이고 오늘 복음은 행복 선언입니다. 우선 제목을 보고 상처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는 빌 클린턴이 선거 때 사용한 "경제라니까, 이 멍청아!"를 패러디한 것입니다. 성인이 되거나 참 행복을 원하는 이에게 저는 '정체성'을 강조하고 싶을 뿐입니다.
참 행복을 아는 존재가 바로 성인들입니다. 조던 피터슨은 행복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행복은 짧은 쾌락을 의미합니다. 오히려 그런 행복을 추구하면 참 행복에서는 멀어집니다. 그는 인생의 고통을 이겨나갈 수 있는 삶의 의미를 찾으라고 말합니다. 결국 이것도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행복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부모가 자녀를 낳을 때 자녀가 고생만 하며 살기를 바랍니까? 창조자는 자기 피조물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피를 흘리며 창조합니다. 때문에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피조물이 창조자에 대한 합당한 예의입니다. 자기를 망치는 사람은 부모에게도 하느님에게도 불효하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려 합니다. 자살하는 사람도 행복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지금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 덜 고통스러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죽음으로 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려 하는데 어떤 이들은 고통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할까요?
참 행복과 참 고통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진돗개 호순이 이야기가 있습니다. 진돗개가 첫 주인을 찾아 먼 길을 달려온 이야기는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진돗개는 더 편안할 수도 있는 곳을 마다하고 주인을 찾아오는 것일까요? 호순이는 용인시에 위치한 한 사설 유기견 보호소에서 키워지고 있었습니다. 많은 유기견 중 제일 착하고 인기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보호소 소장이 장기간 병원에 입원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나머지 유기견들은 봉사자들에게 맡겨졌고 호순이는 수원에 있는 소장의 여동생 집에 맡겨졌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호순이가 사라졌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1년 동안 찾았지만, 찾지 못하였습니다. 나이가 많아 길에서 죽었겠거니 생각하고 있을 무렵 호순이의 짖는 소리를 듣습니다. 소장은 밖으로 나가봤고 호순이가 맞았습니다. 호순이는 1년 넘게 수원에서 용인까지 자기 냄새를 추적하며 찾아온 것입니다. 호순이는 마지막 몇 년을 주인과 함께 살다 하늘로 갔습니다.
왜 진돗개들은 한 번 주인을 영원한 주인으로 여기는 것일까요? 주인의 여동생 집도 편하기는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개들도 무엇이 가장 큰 고통이고 무엇이 가장 큰 행복인지 잘 압니다. 가장 큰 고통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알아야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호순이는 유기견이었습니다. 주인이 잠깐 있었다가 사라진 고통은 감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기견 보호소 소장이 주인이 되어주었고 호순이는 행복했습니다. 주인에게 충실하고 주인이 원하는 일을 하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먹고 생존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았다면 첫 주인을 그렇게까지 찾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유명한 진돗개 백구는 약 7개월 동안 대전에서 진도까지 300킬로미터를 주인 할머니를 찾아 여행하였습니다. 먹을 음식도 마땅치 않고 숨은 위협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그러한 유혹에 떨어지지 않은 이유는 그의 행복은 내가 누구인지 알게 해 준 할머니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은 갓 태어난 존재가 부모를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으로써 울음을 그치고 부모가 주는 젖을 먹으며 자기가 누구인지 깨닫게 됩니다. 또한 부모가 원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성인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왜 모두가 행복하길 바라는데 어떤 사람은 행복하지 못할까요? 그들이 참 행복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린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어린이에게 참 행복은 게임기도 아니고 자전거도 아니고 스마트폰도 아닙니다. 부모 자신입니다. 부모가 자신을 단순히 먹여주고 보호해주어서가 아닙니다. 보육원에서도 그것은 합니다. 부모를 통해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부모 외에 다른 모든 즐거움들은 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괴로움을 잊기 위한 방책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자녀를 행복하게 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느님을 만나 진정 내가 누구인지 깨닫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러면 저절로 성인의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심리학에 ‘동기이론’이란 것이 있습니다. 인간이 어떤 활동을 할 때, 높은 만족감을 얻고 그 행동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동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동기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외재적 동기’이고, 다른 하나는 ‘내재적 동기’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동기가 중요할까요? 학자들은 ‘외재적 동기’보다 ‘내재적 동기’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외재적 동기는 돈, 물질 혹은 타인의 칭찬과 같이 바깥에서는 오는 동기입니다. 반대로 내재적 동기는 흥미, 호기심, 자발적 바람과 같이 자기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동기입니다. 그런데 외재적 동기만을 쫓다가 자기 안에 내재적 동기를 만들지 못한다면, 만족감이나 지속성이 현저하게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돈을 아무리 많이 번다고 해도 만족하지 못하고, 순간의 만족만을 가져올 뿐 지속성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것도 그러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통해 자기의 외재적 동기가 채워지기를 바라곤 합니다. 그러나 이때는 주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주님은 잊히고, 외재적 동기만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 우리가 어떤 동기를 채워야 할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도 돈 많이 벌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높은 자리에 올라가라고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보다 모든 것을 버리는 겸손한 삶을 살라고 하셨지요. 따라서 우리가 청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외재적 동기보다 먼저 내재적 동기를 채울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청해야 했습니다. 내재적 동기를 채워가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더 큰 ‘기쁨’ 속에서 지금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늘 나라의 모든 성인을 기리는 모든 성인 대축일을 보냅니다.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이 성인들의 삶을 기억하면 세상의 것이 아닌 주님의 것만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참 행복의 삶을 사셨던 분이십니다. 앞서 말씀하신 외재적 동기가 아닌 내재적 동기만을 마음에 담고 계시니 커다란 만족감과 함께 참 행복이 지속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채우는 데 집중해야 할까요?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만을 채우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내재적 동기를 채워가면서 우리도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처럼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진짜 행복은 우리의 시선을 세상에서 주님을 향할 때만 가능합니다.
오늘의 명언: 완벽함은 더는 추구할 게 없을 때가 아니라 더는 뺄 게 없을 때 이루어진다(생텍쥐페리).
사진설명: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