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두 손, 바위와 보자기 [1번째]
레오나르도 다 빈치 걸잘 "최후의
만찬"에는 식탁에 올려놓은 예수님
의두 손이 그려져 있습니다. 한 손은
주먹을 쥐고 있고 또 한 손은 손바
닥을 펴 보이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장난하는 가위바위보로 치자면 예수
는 제자들을 향해 주먹과 보자기를
동시에 내민 셈입니다.
주먹은 바위와 같습니다. 손가락은
성문의 빗장처럼 굳게 안으로 잠겨
있어 이미 외부의 아무것도 받아들
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주
먹은 거부이며 도전이며 징벌의 의
지를 나타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응고해 버린 분노를 봅니다.
그러나 유다의 배신에 대해서 예수
는 오직 주먹만을 쥐었던 것은 아
닙니다. 반대로 한 손은 부드럽게
열려 있습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
이고 키우는 5월의 대지처럼 그 손
은 펼쳐져 있습니다. 텅 빈 하늘이
거나 경계선이 없는 바다입니다.
눈물을 받아들이고 아픔을 받아
들이고.....증오나 악까지도 그 손
바닥 위에서는 용해되어 버립니다.
빈뜨락과도 같은 손바닥 같은 손바
닥에서 우리는 너그러운 사랑을 봅
니다.
예수는 두 주먹을 쥐지도 않았고
펴지도 않았습니다.주먹과 보자기,
그러기에 주님은 생의 가위바위보
에서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주먹의
언어와 보자기의 언어를 동시에 가
질 수 있는 시인은 예수님처럼 슬프
고도 행복합니다. 그리고 비로소 우
리는 그 끔찍한 가위를 이길 수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분활하고 토막
내고 갈가리 찢어버리는 가위의 언
어를 막을 수 있습니다. 단지 방어
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주와도 같은
보자기의 품 안에 자신이 내민 주먹
까지도 감싸버립니다.
주먹처럼 단단한 언어로써 벽을 무
너뜨려야 합니다. 그 의지로, 그 분
노로 유다의 악을 징벌해야 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치 어
린것들의 머리를 쓰다듬듯이 페허에
에 새 종자를 뿌리듯이 한 손은 부드
럽게 펴야만 합니다. 넓고 텅 빈 손바
닥의 그 언어가 있을 때만이 딱딱한
주먹의 언어 폭력의 벼랑으로 떨어
지지 않습니다.
예수의 마지막 구제도 그러할 것입니
다. 주먹과 보자기를 내미는 가위바
위보. 그렇게 해서 운명의 놀이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한쪽은 받아들이는 손이고, 한쪽은
악을 징벌하는 손입니다.정의의 손
과 사랑의 손, 이 두 개의 손이 있는
것이죠. 이것을 결합한 것이그 위에
후광에 퍼져 나가는 예수님의 얼굴
이십니다.
그런데 한 손은 주먹을 쥐고 한 손
은 벌리는 이 모순되는 것을 합치
고 있는 문화가 한국문화입니다.
왜 그럴까요? 서양 사람은 엘리베
터라고 하지요 위로 올라간다는 뜻
만 담고 있을 뿐 내려간다는 뜻은
없습니다. "나 엘리베이터 타고 내
려갈게" 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예
요 "나 올라가는 거 타고 내려갈게"
라는 이야기가 되어버리거든요.
그러나 한국말로는 엘리베이터를
승강기[昇降機]라고 했지요. 올라
가고 내려간다는 뜻이죠 엘리베이
터만이 아닙니다. 서랍을 뜻하는
영어'drawer'는 '빼다' '끌어내다'
의 뜻에서 온 말입니다. 말대로 하
자면 서양 서랍은 빼기만 하고 닫
지는 못하는 것이 되지요 같은 아
시아의 문화권이면서도 일본 역시
서랍을 '히키다시"라고 하여 빼낸
다는 뜻입니다. 중국의 '슈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한국 사람
만이 서랍을 '빼닫이라고 합니다
빼고 닫고 하는 양면성을 동시에
나타내는 말입니다.
첫댓글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졌습니다.환절기에 감기조심하시고, 건강하세요.
여유있는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감사합니다.
첫댓글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졌습니다.
환절기에 감기조심하시고, 건강하세요.
여유있는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