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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민수기의 말씀 24,2-7.15-17>
그 무렵
2 발라암은 눈을 들어 지파별로 자리 잡은 이스라엘을 보았다.
그때에 하느님의 영이 그에게 내렸다.
3 그리하여 그는 신탁을 선포하였다.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의 말이다.
열린 눈을 가진 사람의 말이며
4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의 말이다.
전능하신 분의 환시를 보고 쓰러지지만 눈은 뜨이게 된다.
5 야곱아, 너의 천막들이, 이스라엘아, 너의 거처가 어찌 그리 좋으냐!
6 골짜기처럼 뻗어 있고 강가의 동산 같구나.
주님께서 심으신 침향나무 같고 물가의 향백나무 같구나.
7 그의 물통에서는 물이 넘치고 그의 씨는 물을 흠뻑 먹으리라.
그들의 임금은 아각보다 뛰어나고 그들의 왕국은 위세를 떨치리라.”
15 그러고 나서 그는 신탁을 선포하였다.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의 말이다.
열린 눈을 가진 사람의 말이며
16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지식을 아는 이의 말이다.
전능하신 분의 환시를 보고 쓰러지지만 눈은 뜨이게 된다.
17 나는 한 모습을 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가깝지는 않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그는 모압의 관자놀이를, 셋의 모든 자손의 정수리를 부수리라.”
✠ 복음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21,23-27>
23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24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25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26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27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성탄이 곧 다가옵니다.
이제 열흘 남짓 남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발라암은 신탁을 통해 선포합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민수 24,17)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논쟁을 전해줍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을 합니다.
곧 예수님의 성전정화에 대한 권한을 따집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요?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마태 21,23)
원래 ‘권한’ 혹은 ‘권위’를 말할 때, '권'은 저울을 말한다고 합니다.
저울의 눈금은 어느 것이 딱 들어맞고 어느 것이 딱 들어맞지 않는 것인지를 판가름해 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저울은 ‘하늘’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저울은 사람의 저울과는 사뭇 다릅니다.
사람의 저울은 물건의 경중을 가려서 판가름해 내지만, 하늘의 저울은 '하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를 판가름해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마태 21,25)
그들은 자신들의 대답이 가져올 위험을 생각하며 망설였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모르겠소.” 하고 대답합니다.
“모르겠소.”라는 이 말마디가 가슴을 쿵 내리칩니다.
이는 진실하지도 솔직하지도 못하고, 비겁하고 위선적이고, 눈치 보며 회피하는 계산적인 평소의 나의 말마디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에 가린 제 마음을 질책하십니다.
가려진 거짓을 들추시고, 제 오만함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죄를 일깨워주십니다.
제가 저 자신의 저울로 예수님을 저울질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는 오늘도 제 자신의 저울로 다른 이들을 저울질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게 합니다.
사실 타인을 저울질 하다가 제 자신이 저울질 당하게 됩니다.
은밀히 감추어진 속내가 드러나게 됩니다.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속셈이 들통나게 됩니다.
결국 타인을 저울질 하다가 자신이 저울질 당하게 됩니다.
사실 저울질하는 바로 그 순간, 막상 저울에 올려진 이는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가려진 제 자신의 위선의 무게 뿐일 것입니다.
그러니 오만함과 자신의 속셈과 거짓과 위선으로 치장하고 있는 자신을 들여다보고, 이제는 저울 위에 타인을 올려놓기보다 자기 자신을 올려놓아야 할 일입니다.
이제는 남을 저울질하기보다 자신이 주님의 저울인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게 처신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할 일입니다.
오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타인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을 따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그에게 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지 볼 수 있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마태 21,23)
주님!
타인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내 사랑의 무게를 따지게 하소서!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가리게 하소서.
저울질하는 바로 그 순간 막상 저울에 올려진 이는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가려진 제 자신의 위선의 무게임을 알게 하소서.
저울 위에 타인을 올려놓기보다 저 자신을 올려놓고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제 속셈과 거짓과 위선을 들여다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도구들>
오늘 민수기의 발라암은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이민족의 예언자인 그가 이스라엘을 저주해달라는 부탁이랄까 요구를 모압 왕에게 받지만 오히려 이스라엘에게서 메시아가 나올 것이라는 축복을 해주는 인물입니다.
물론 이민족인 그가 이스라엘을 축복해주고 싶어서 축복한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입을 빌리신 것 뿐이고, 하느님께서 그의 눈을 열어주셔서 환시를 봤기 때문에 본 것을 어쩔 수 없이, 그러니까 싫어도 얘기한 것뿐입니다.
그러니 그의 축복은 진심이 아니고 그래서 그의 축복은 역설적으로 하느님의 강복입니다.
제가 마호멧에 대해 얘기를 듣고 참으로 놀라고 감동한 것은 마호멧은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건데 이슬람 신자들은 그런 그를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래서 그가 참된 예언자라고 믿고 자랑스러워한다는 겁니다.
그가 문맹자이기에 그가 쓴 코란이 그의 창작품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말씀이라는 증거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많은 유식한 사람이 하느님 말씀을 한다면서도 실은 하느님 말씀을 빌려 자기 말을 하곤 하지요.
저처럼.
그렇습니다.
저도 하느님 말씀을 전하면서 제 말을 빼려고 하지만 저라는 존재가 매우 육적이기에 제 말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도 제가 발라암을 보면서 위안 삼는 것은 발라암도 저도 불의하지만 하느님의 도구들이라는 점이고, 하느님께서 발라암처럼 저를 도구 삼아 당신 말씀을 하실 거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를 본받지 말아야 하지만 그들의 말은 들어야 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저에게서 제 말을 듣지 말고 하느님 말씀만 들으시는 여러분이 되면 좋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소명에 응답해야 한다>
이스라엘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기적을 베풀고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하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반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한 후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대답은 ‘눈 가리고 아웅’한 것입니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때로는 우리도 진실을 외면할 때가 있습니다.
아닌 줄을 알면서도 나의 이기심과 어리석음에 지배당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고 하면서도 나의 뜻을 굽히지 않을 때가 있고, 때로는 내 뜻을 주님의 뜻 인양 내세우기도 합니다.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내가 그분에게 맞춰야 하지만, 합리화거리를 찾습니다.
주님을 나의 들러리로 세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생각도 그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분 앞에는 말 한마디도 숨길 수 없습니다.”(집회 42,20)
하늘의 그물은 그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이현주 목사는 “세상에서 사람이 하는 일에는 두 가지가 있을 뿐인데, 하나는 주님의 일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사람의 일이 앞서는 것을 보면 아직도 믿음의 길이 멀기만 합니다.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면서 사람의 일을 줄이고 하느님의 일을 늘리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께서 주신 소명과 권한에 모두를 걸었듯이,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 사명에 충실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신자들의 유형이 여러 가지인데 ‘백설공주형'이 있답니다.
‘백방으로 설치고 다니는 공포의 주둥이’랍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에 바빠야 하는데 오히려 남을 흉보고 헐뜯고 욕하는 사람이지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원망하고, 불평불만하며, 교만한 '원불교'신자도 있지요.
그런가 하면, ‘우거지’형도 있습니다.
‘우아하고, 거룩하고, 지성적인’ 신자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기왕이면 '우거지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측량할 수 없고,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의 육화 강생의 신비 앞에 그저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릴 뿐입니다>
외국의 한 신경정신병원 원목과에서 열정적으로 사목하시는 수녀님의 고백을 잊을 수 없습니다.
마음이 아픈 환자들을 향한 수녀님의 따뜻한 미소와 친절, 사랑과 열정은 병원 전체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에서도 유명했습니다.
그런 수녀님에게도 가슴 아픈 사연과 혹독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젊은 수도자 시절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는데, 그로 인한 트라우마로 수녀님 역시 꽤 오랜 세월 정신병동 신세를 지셨답니다.
가장 심각한 증세는 자신을 지나치게 비하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수녀님은 스스로를 하느님께 합당하지 않은 큰 죄인, 그를 넘어 벌레처럼 여겼습니다.
그래서인지 수도복은 물론이고 평복도 절대 입지 않았습니다.
억지로라도 입히면 즉시 몸부림을 쳤고, 그 자리에서 갈기갈기 찢어버렸습니다.
수녀님을 진료한 전문의들은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포기했습니다.
담당 의사 선생님께서는 수도회 총장 수녀님에게 저 수녀님은 평생토록 정신병동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소견을 전했습니다.
어느 날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연세 지긋한 자원봉사자 자매님께서 분홍색 잠옷 한 벌을 사 들고 수녀님 병실을 찾았습니다.
세상 자상하고 따뜻한 성품의 자매님께서는 환한 엄마 미소를 지으며 수녀님 침대 옆에 앉았습니다.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며 말을 건넸습니다.
“수녀님, 얼마나 힘드세요?
제가 수녀님을 위해 매일 하루에 세 시간씩 기도하고 있답니다.
제가 오늘 수녀님을 위해 예쁜 잠옷을 한 벌 사왔답니다.
이걸 한번 입어보시겠어요? 정말 예쁠거예요.”
자매님은 마치 엄마가 아픈 딸에게 하듯이 수녀님 뺨을 어루만지셨는데, 그 순간 수녀님의 눈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굵은 눈물방울이 쉼 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누군가가 자신의 뺨에 따뜻한 손을 댄 것입니다.
수녀님은 자매님의 따뜻한 손을 자신의 뺨에 꼭 대고 대성통곡을 터트렸답니다.
자매님의 따뜻한 손길이 자신의 뺨에 닿는 순간, 수녀님은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그 오랜 깊은 병고의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고 회상하셨습니다.
따뜻한 한 인간 존재의 따뜻한 손길은 그 어떤 깊은 병도 치유할 수 있다는 확신을 지니게 되었답니다.
결국 사랑만이 인간을 치유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답니다.
그 뒤 수녀님은 기적적으로 병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따뜻한 자매님을 통해서 자신에게 다가온 하느님의 사랑에 깊이 감사하고 보답하는 마음으로 정신병동 원목을 자원하게 되었답니다.
지금은 수녀님 자신이 겪었던 똑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동료 환자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봉사하고 계신답니다.
또다시 성탄입니다.
성탄이란 그 따뜻한 자원봉사자께서 가련한 한 수도자를 향해 허리를 굽혀 다가간 것처럼, 세상 자상하신 하느님께서 허리를 굽혀 가련한 우리 인간에게 따뜻한 손길을 펼치신 은혜로운 대사건입니다.
측량할 수 없고,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의 육화 강생의 신비 앞에 그저 감사하고 찬미하고 영광을 드리는 것, 우리 인간 측에서 가장 필요한 노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믿음>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마태 21,23)
여기서 ‘이런 일’은 일차적으로는 ‘성전 정화’를 가리키고, 넓은 뜻으로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가리킵니다.
사제들과 원로들의 질문은 “당신은 권한을 가지고 있는가?” 라는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당신은 메시아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믿음과 예수님께서 메시아의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믿음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믿음을 따로 구분할 이유가 없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예수님께 “당신은 메시아인가?” 라고 물은 일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한 일과 같습니다(루카 11,14-16).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했다는 말은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어떤 놀라운 기적”을 보이라고 요구했다는 뜻입니다.
‘권한을 물은 자들’과 ‘표징을 요구한 자들’의 의도는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싶어서’가 아니라 ‘믿기 싫어서’ 그랬던 것이고, 예수님을 죽일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적인 답변을 하지 않고 세례자 요한을 언급하신 것은 ‘당신을 죽일 명분’을 그들에게 주지 않기 위해서이고, 또 세례자 요한이 이미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 말씀은 “세례자 요한은 이미 내가 메시아라는 것을 증언했다. 너희가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 라고 믿는다면 그의 증언도 믿을 것이고, 그러면 내가 메시아라는 것도 믿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를 너희가 받아들여서 진실하게 회개한다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알아볼 것이고, 내가 메시아라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 1,29)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요한 1,33-34)
예수님께 와서 권한을 물은 자들은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은 자들이고, 회개하기를 거부한 자들이고, 요한의 증언을 안 믿은 자들입니다.
그자들은 이미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다.” 라는 생각에 단단히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아마도 거의 ‘확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자들은 예수님을 ‘사기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마태 27,63).
예수님께서 그런 자들에게 “나는 메시아다.” 라고 말씀하시거나, 어떤 표징을 보여 주시거나, 당신의 권한을 증명해 보이시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자들은 어떻게든 예수님의 말씀을 반박했을 것이고, 표징이나 증거들을 부정했을 것입니다.
그자들은 “하느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군중의 여론만 두려워한 자들”입니다.
여론을 두려워했다는 말은 ‘민심’을 두려워했다는 뜻이 아니라, 군중이 폭동을 일으켜서 자기들이 ‘기득권’을 잃게 되는 일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뜻입니다.
기득권을 잃는 것만 두려워하고 하느님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자들의 주 관심사는 “예수는 정말로 메시아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지킬 수 있을까?”였습니다.
그자들은 ‘메시아 강생’ 자체에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모르겠소.’ 라는 말은 ‘대답하기 싫다.’, 또는 ‘대답할 필요가 없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믿으려고 하지는 않고 죽일 생각만 하는 자들에게는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예수님께서 답변을 거절하신 일이지만, 실제로는 그자들이 ‘말씀이신 예수님’을 거부한 일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예수님께서 주님으로서 모든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주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내 기도를 안 들어 주시는가? 혹시 나를 사랑 안 하시는가? 나에게 무관심하신 것은 아닐까?” 라고...'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사랑도 믿어야 합니다.
사실 ‘사랑에 대한 믿음’이 믿음의 ‘거의 전부’입니다.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어떤 고난을 겪을 때, 그럴 때에 흔히 사랑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게 되는데, 바로 그런 때일수록 더 많이 기도하고, 더욱더 믿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에 대한 믿음에서부터 올바른 신앙생활과 진실한 회개가 시작됩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참 좋은 은총의 선물 - 분별력의 지혜>
“주님, 당신의 길을 가르쳐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옵니다.”
(시편 25,4-5ㄱㄴ)
한밤중 일어나 조심조심 하루를 시작하면서 문득 떠오른 말마디 둘입니다.
하나는 ‘조고각하(照顧脚下)’, “자신의 다리 아래를 살펴보라”는 뜻으로, 지금 그 자리에서 자신을 잘 돌아다보고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수행의 과정이나 신자의 길도 어두운 길을 걷는 것과 다르지 않으므로, 끊임없이 자신을 살펴 수행자로 참답게 살고 있는지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이 또한 분별력의 지혜에 속합니다.
또 하나는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돼라. 지금 있는 그곳이 진리의 자리이다.”라는 뜻으로, 언제 어디서나 진실하고 주체적이며 창의적인 주인공으로 살아가면, 그 자리가 바로 행복의 자리, 진리의 자리가 된다는 말입니다.
역시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깨어 살 것을 촉구하는 말씀이니, 이 또한 분별력의 지혜에 속합니다.
오늘 마음에 담고 살아가고 싶은 말씀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영혼에게 선사되는 모든 덕의 어머니인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온갖 지식과 정보가 범람하는 시절에 분별력의 지혜는 갈수록 중요해집니다.
특히 공동체를 섬기는 자들에게 분별력의 지혜는 필수입니다.
베네딕도 역시 아빠스는 분별력을 지녀야 함을 특히 강조합니다.
“자기의 명령에 용의주도하고 깊이 생각할 것이다.
그 명령이 하느님께 관계되는 일이든 세속에 관계되는 일이든 분별있고 절도있어야 할 것이니, ‘만일 내가 내 양의 무리를 심하게 몰아 지치게 하면 모두 하루에 죽어 버릴 것이다’하신 성조 야곱의 분별력을 생각할 것이다.
이 밖에도, 모든 덕행들의 어머니인 분별력의 다른 증언들을 거울 삼아, 모든 것을 절도있게 하여 강한 사람은 갈구하는 바를 행하게 하고, 약한 사람은 물러나지 않게 할 것이다.”
(성규 64,17-19)
어제 깊이 묵상한 한자 둘, “원圓”과 “덕德”자입니다.
성철 스님은 '자신은 모나게 살았지만 제자들은 둥글게 살라'고 법명에 둥글 “원圓”자를 넣었다는데, 수행에 남달리 날카롭고 엄격했던 법정 스님은 제자들은 덕스럽게 살라고 법명에 “덕德”자를 넣어 주었다는 일화입니다.
둥글고 덕스런 “원圓과 덕德의 삶”, 역시 분별력의 지혜에 속합니다.
오늘 제1독서 민수기의 발라암이나 복음의 예수님은 분별력의 지혜를 선사받은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간절히 청할 천상적 지혜,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하느님의 영이 그에게 내리자 신탁을 선포하는 발라암입니다.
야곱의 천막이, 이스라엘의 거처가 그대로 먼 훗날 실현될 교회의 모습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발라암의 말이다.
열린 눈을 가지 사람의 말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의 말이다.
야곱아, 너의 천막들이, 이스라엘아, 너의 거처가 어찌 그리 좋으냐!
골짜기처럼 뻗어 있고, 강가의 동산같구나.
주님께서 심으신 침향나무 같고, 물가의 향백나무 같다.
그의 물통에서는 물이 넘치고, 그의 씨는 물을 흠뻑 먹으리라.”
흡사 풍요롭고 충만한 은총 가득한 교회를 상징하는 듯 합니다.
이어 구원자 예수님의 탄생을 내다보는 발라암의 천상 지혜입니다.
“발라암의 말이다.
열린 눈을 가진 사람의 말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지식을 아는 이의 말이다.
나는 한 모습을 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가깝지는 않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별이, 왕홀이 상징하는 바, 미구에 탄생하실 구원자 예수님입니다.
하느님의 현자, 발라암을 통해 계시되는 천상의 지혜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서도 분별력의 지혜가 빛을 발합니다.
수석사제들의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묻는 불순한 질문 자체가 그대로 덫입니다.
어떻게 대답하던 덫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질문으로 대답하며 역공逆攻합니다.
복음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적대자들의 결정적인 덫에서 벗어난 물음, 예수님의 천상적 지혜,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이젠 공수가 바뀌어 예수님의 역공의 질문으로 궁지에 몰린 적대자들입니다.
이들의 의논의 결론이 이미 답을 말해주지만 차마 말은 못합니다.
하늘에서 왔다하면 왜 그를 믿지 않느냐 할 것이고, 사람에게서 왔다하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는 군중이 두려우니 이래저래 참 진퇴양난입니다.
결국 “모르겠소” 대답함으로 자기들의 덫에 자기들이 걸린 꼴입니다.
예수님의 분별력의 천상 지혜가 요약된 다음 말씀이 결정적 한방이 되어 적대자들을 침묵케 했음을 봅니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너희가 스스로 헤아려 깨달으라는 말씀으로 이제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부여된 과제입니다.
답은 나와있지만 완고함에 눈먼 이들은 절대로 하늘로부터 받은 예수님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발라암처럼 열린 눈을 지닌 겸손한 이들에게 위로부터 분별력의 지혜가 선사됨을 깨닫습니다.
바로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분별력의 지혜를 발휘하며 살게 하십니다.
“오소서, 주님, 저희를 찾아오시어, 평화를 베푸소서.
저희가 주님 앞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기뻐하게 하소서.”
(시편 106,4-5)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시는 분이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파견되셨는가?'>
오늘 미사의 말씀들에서 우리는 '오시는 분이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파견되셨는가?' 하는 물음을 대면합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마태 21,23)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다가와 이렇게 묻습니다.
말하자면 '자격' 논쟁이지요.
한낱 떠돌이 설교가인 목수 출신 가난뱅이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중심지인 성전에서 공적 행위를 할 수 있는 자격이 과연 있느냐 하는 물음일 겁니다.
사실 예수님은 레위 지파나 아론 가문이 아니십니다.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파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시지요.
전통적인 교육을 받지도, 어느 계보를 잇거나 소속이 분명하지도 않습니다.
그 흔한 타이틀조차 없으시지요.
이런 예수님은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아마도 무자격자에 가깝겠지요.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마태 21,25)
그들의 의도를 정확히 아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반문하십니다.
요한에게 해당하는 답이 곧 예수님께도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요한이나 예수님 모두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존재들이기에 모든 권한을 하느님에게서 받았습니다.
하지만 "권한"을 인간적인 것으로 끌어내려 제도화한 이들은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세속화하고 권력화해서 거머쥔, 곧 사유화한 "권한"에 줄을 대지 않은 모든 행위는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우매한 민중을 교란시킬 수 있는 도전일 뿐입니다.
"모르겠소."
(마태 21,27)
사실 하느님의 신비 앞에서 "모르겠습니다"라는 인간의 고백은 피조물로서 참으로 솔직하고 진실된 응답이 될 수 있습니다만, 여기서의 종교 지도자들과 원로들은 그만큼 겸허하거나 진솔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답을 모르지 않는 그들이 모른다는 답을 택합니다.
답을 고르다 보니 자기들이 진퇴양난에 빠졌다는 걸 안 거지요.
그래서 불리한 답을 하느니 차라리 모른다고 하는 편을 선택합니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마태 21,27)
그런데 예수님은 '나도 모른다'고 하시지 않고 "말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이신 그분이 모르실 수 없으니, 혹 모른다고 하시면 거짓말이 될 겁니다.
발설되지 않은 말씀이 웅변적으로 외치고 있습니다.
그분 자신이 말씀이시고, 그분의 가르침과 용서, 치유와 기적 등 모든 것이 "이루어진 말씀, 실행된 말씀"이십니다.
굳이 언명체계를 통해 답하시지 않아도 그 답은 이미 선포되었고 이루어졌으며 완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무언으로 답을 하신 겁니다.
사실 그 답은 묻는 이들의 마음속에 이미 자리한 상태였을 겁니다.
제1독서에는 발라암이라는 이방인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의 수효에 겁을 먹은 모압 임금이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발라암을 불러 요청한 것입니다.
"야곱아, 너의 천막들이, 이스라엘아, 너의 거처가 어찌 그리 좋으냐!"
(민수 24,5)
그런데 그는 저주를 내리라는 모압 임금의 채근(採根)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이스라엘에게 경탄을 보내며 도리어 그들을 축복합니다.
그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민수 24,4)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민수 24,17).
이방 예언자의 입을 통해 하느님께서 당신이 이루실 일을 말씀하십니다.
"별"은 모압을 물리친 다윗 임금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미래에 도래할 메시아까지도 암시합니다.
먼먼 구약시대 초기에 오늘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방인의 입을 통해 언급되신 것이지요.
발라암도 모압 임금도 참 당황스러웠겠지요.
발라암을 부른 모압 임금은 제 목적을 이루기는커녕 되려 적에게 좋은 일만 한 꼴이 되었고, 발라암 역시 부탁받은 바를 이행하지 못했으니까요.
발라암은 후일 이스라엘의 손에 죽임을 당합니다만(민수 31,8) 적어도 그는 제 이익을 위해 하느님의 말씀을 조작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전한 성경 속 인물로 남습니다.
그로써 그의 예언자적 권한이 하느님에게서 왔음을 증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속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도 하느님의 영께서 일러주신 것만을 전하십니다.
그 말씀이 당신께 해가 되어 돌아온다 해도 굽히지 않으시지요.
자기들의 안위를 위해 "모른다"고 발뺌하는 종교 지도자나 원로들과는 완전히 결이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은 하느님에게서 모든 권한을 받으십니다.
예수님의 치유와 용서는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뜻이고 바람입니다.
사실 세상에 마련된 제도와 조직, 소속과 권한은 세상의 편의와 질서를 위한 것이니 존중해야 하고, 그것이 신적 질서와 맞닿아 있다면 더욱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다만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하느님 나라를 목도(目睹)하면서도 그 앞에서 자격부터 따지는 모습은 영역 다툼이나 밥그릇 싸움처럼 치졸해보여 낯뜨겁습니다.
하늘 나라의 질서를 제 식대로 조작할 때, 하느님 말씀에 자기 본위를 섞을 때, 권한은 힘과 빛을 잃습니다.
모르는 것 같지만 대하는 사람들이 다 느끼지요.
그럴수록 인간적인 힘과 제도를 보완하고 치장하며 권한을 강화하려 해도 "하느님의 영"(민수 24,2)이 퇴색된 권한은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결국 그들은 하느님 뜻을 점점 더 모르는 사람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권한을 받은 분이심을 믿고 있습니까?
그분이 선포하고 이루시는 "어질고 바른"(화답송) 하느님 나라의 질서를 받아들이고 있나요?
혹 성당에서나 그 권한과 질서를 믿고 따르다가, 집과 직장과 모임과 관계 안에서는 철저히 세상 이치를 추구하는, 분열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러다가 혹 오시는 주님 앞에서 누구들처럼 "모르겠소" 하고 발뺌하게 되지는 않을런지요...
성탄을 향해 더 깊고 진하게 무르익어가는 이 기다림의 시기에 권한 논쟁이 던지는 화두에 진솔하게 머무르는 하루 되시길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지식을 아는 이"(이사 24,16)는 복되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거꾸로 읽는 세계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세계사는 권력을 중심으로 구성되곤 합니다.
그래서 왕조를 중심으로 배우기도 했습니다.
사건을 중심으로 구성되곤 합니다.
종교가 들어온 연도, 전쟁이 일어난 연도를 배우기도 합니다.
세계사는 승자들의 관점에서 기록되곤 합니다.
그러나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다른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봅니다.
가난한 민중들의 이야기를 전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실이라고 알고 있는 사건들의 진실을 전하기도 합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입장에서 신대륙의 발견을 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바라보면 우리가 모르고 지나갔던 새로운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카이스트 이광형 총장은 텔레비전을 거꾸로 본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자막을 읽기도 어렵고, 어지러웠는데 지금은 거꾸로 보는 것이 익숙하다고 합니다.
바지를 입을 때도 오른쪽 다리부터 넣지 않고 왼쪽 다리부터 넣는다고 합니다.
대학의 조직표도 거꾸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총장이 맨 아래에 있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총장은 맨 아래에서 마치 장작에 불을 붙이듯이 학교와 학생들을 위해서 불쏘시개가 되는 것 같다고 합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를 거꾸로 바라보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동안의 교회는 피라미드와 같은 조직이었습니다.
평신도, 수도자, 사제, 주교는 피라미드처럼 맨 아래에 평신도가 있었고, 중간에 성직자와 수도자가 있었고, 맨 위에 주교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주교를 통해서, 성직자와 수도자를 통해서 평신도에게 전해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2000년 동안 당연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교회의 언어는 ‘라틴어’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의 전례는 라틴어로 진행되었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이고, 세상의 것들이 교회로 들어오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교회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단죄하였고, 다른 종교와 화합하거나 일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성 요한 23세 교황은 기존의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창문을 활짝 열도록 하였습니다.
교회는 위계제도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교회는 조직이기 전에 성사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전례의 언어는 라틴어가 아닌 자국의 언어로 바꾸었습니다.
교회는 항상 쇄신되어야 한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권한은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의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예수님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을 허용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자신들의 권한과 지위를 위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권한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주는 힘이었습니다.
권한은 사람들을 다스리는 힘이었습니다.
권한은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지키는 힘이었습니다.
그래서 권한이 없는 예수님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허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권한은 어디에서 왔는지 물으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권한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권한이 하느님께로부터 왔다고 하면 세례자 요한의 권한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권한이 사람에게서 왔다면 자신들의 권한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권한이 어디에서 왔는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권한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권한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섬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겸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십자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지금 내가 추구하는 권한은 어떤 권한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새벽에 묵상하다가 제게 기적 같은 일이 정말로 많았음을 깨닫습니다.
성직자로 살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제가 20년 넘게 사제로, 또 사람들로부터 “잘 살고 있다”라는 평을 들으며 사는 것이 기적입니다.
형제들 간의 우애에 금이 가서 남보다 못하게 사는 가족도 많은데, 부모님께서 돌아가셨어도 형제간의 우애는 변함이 없는 것도 기적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성지가 힘들다고 하는데, 제가 있는 갑곶성지는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발전하는 것 역시 기적입니다.
이 밖에도 기적 같은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문제는 기적에 감사의 기도를 바쳐야 하는데, 이를 마치 당연한 것으로 또 내가 누려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앙드레 지드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인간이란 항상 있는 기적에는 별로 놀라지 않는다.”
작은 것에 감탄하는 사람은 순간순간을 허투루 살지 않습니다.
작은 것도 주의 깊게 바라보며 자기에게 다가온 놀라운 기적을 체험합니다.
주님의 손길이 반드시 커다랗게만 다가올까요?
돈 많이 벌고, 승진에 성공하고, 앓던 병이 말끔하게 치유되어야만 주님의 손길을 받은 것이라고 할까요?
아닙니다.
길가에 핀 작은 꽃에서도 기적을 느낄 수 있는 사람만이 매 순간 주님과 함께 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눈을 뜨고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근처에 기적에 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무슨 권한으로 가르치고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그 실현을 위해 가르침과 놀라운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불신의 마음이 가득해서, 깜짝 놀라야 정상인 상황에서도 또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이 분명한데도 권한 타령만 하고 있습니다.
만약 믿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예수님의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하느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자기들이 예수님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권한에 관해 묻기만 할 뿐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일상 안의 기적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조금만 천천히 그리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기적의 기쁨을 쉽게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항상 있는 기적에 매 순간 놀라며 기뻐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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