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로마 미사 경본』: 943-946면 / 『미사 독서』3: 460-470면 )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은 죽은 모든 이의 영혼, 특히 연옥 영혼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오늘 세 대의 위령 미사를 봉헌하여 왔는데, 이는 15세기 말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성탄과 같이 세 대의 미사를 봉헌하였던 풍습에서 유래한다. 1748년 베네딕토 14세 교황이 이 풍습을 인정하여 특전으로 확대시켰다.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인 11월 1일부터 8일까지 묘지를 방문하여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본기도
믿는 이들의 영광이시며 의로운 이들의 생명이신 하느님,
성자의 죽음과 부활로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세상을 떠난 하느님의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부활의 신비를 믿은 그들이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3,1-9
1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2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3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4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5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6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7 그분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들은 빛을 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밭의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
8 그들은 민족들을 통치하고 백성들을 지배할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
9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제2독서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5,17-21
형제 여러분, 17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
18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20 율법이 들어와 범죄가 많아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21 이는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복음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25-30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죽은 이를 위한 기도가 착각이라도 좋은 이유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오늘만이 아니라 매일, 어쩌면 매 식사 후 기도를 통해서 만이라도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 자신에게도 좋은 일인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연옥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만으로도 비록 그것이 착각일지라도 우리에게 매우 유익합니다.
영화 ‘먼지로 돌아가다’(2022)에서 시골 노총각은 4만 원을 주고 장애가 있는 신부를 데려옵니다. 둘은 진정으로 위해주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아내가 죽자 노총각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습니다. 그 이전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을 견딜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일하는 맛을 알고 난 뒤에는 더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일하는 것이 힘들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어주고 아내를 따라갑니다.
베르테르 효과라고 있습니다. 유명인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자신도 죽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2005년 이은주 씨가 사망한 한 달 후는 하루 평균 23명이 자살하던 것이 41명으로 늘었습니다. 2007년 정다빈 씨가 사망한 후 전달 평균 21명에서 45명으로 늘었고 최진실 씨 동생 최진영 씨가 자살하기 이전 38명에서 이후 51명이 되었습니다. 최진실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 평균 32명에서 59명으로 껑충 뛰었습니다. 이를 한 달, 혹은 그 이후의 파급효과로 따지자면 유명 연예인이 자살하면 수백 명이 뒤따라간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돌아가신 분을 위해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또 연옥을 믿지 않으니 무조건 하늘나라로 간다고 믿고 자기들도 따라가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유일하게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러나 연옥을 믿는다면 이 세상에서도 연옥에 있는 사람을 위해 일을 할 수 있고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살아있는 것처럼 통교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버릴 필요가 없고 따라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연옥이 있다면 지옥도 믿기 때문입니다. 자살도 살인이기에 마지막에 그 대죄를 짓는다면 구원받을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 할 수 있습니다.
긍정적 착각이 있습니다. 버락 오바마는 흑인이었음에도 어렸을 때부터 꿈이 대통령이었습니다. 모두가 비웃었지만, 그는 어렸을 때부터 대통령이 된 세상에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실험에서 한 여성에게 농구 자유투를 해 보라고 했습니다. 여성이 열 번을 던졌지만, 열 번 중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실험 진행자는 믿으면 된다고 말해주고 믿는다는 뜻에서 눈을 가리고 해 보라고 했습니다.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여자가 공을 던지자 환호성을 올립니다. 그 사람들은 처음부터 관중이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교육받은 사람들입니다. 공은 들어가지 않았지만, 눈을 가리고 공을 던지는 여자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그렇게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여자는 진짜 공이 들어간 줄 알고 자신을 믿게 됩니다. 이제 눈가리개를 하지 않고 공을 던집니다. 열 번 던져서 네 번을 성공시켰습니다.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해줄 때도 이런 효과가 있습니다. 내가 지옥에 갈 것이라 여기며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나도 내가 기도해주는 이처럼 연옥이나 천국에 갈 것이라 믿게 됩니다. 그러면 그곳에 가기에 합당하게 자기 삶을 변화시킵니다. 죄를 덜 짓게 되고 하느님을 더 믿게 됩니다.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진짜 연옥이 있다면 가장 좋을 것입니다. 그럴 리는 없지만, 만약 연옥이 없더라도 자녀들과 함께 연옥 영혼을 위해 식후 기도라도 하면 자녀들은 적어도 연옥을 목적지로 여기며 살아가게 됩니다. 천국과 지옥과 연옥의 교리가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자기 안에 완전히 박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착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좋은데도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보석을 알아보지 못하고 돌 버리듯 버리는 어리석음과 같습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매일 게임만 하고 전혀 공부를 하지 않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아이 아빠는 공부하지 않고 게임만 하는 자녀의 모습에 화가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공부 안 하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
그러자 아이도 큰 소리로 말합니다.
“잘 알아. 공부 안 하면 시험 점수가 잘 나오지 않겠지. 그러면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고, 또 제대로 된 직장도 얻지 못할 거야. 연애도 못 하고 내 집을 가질 수 없겠지. 그래도 공부는 재미없어.”
이 아이는 공부 안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 것일까요? 모르는 것일까요?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잘 안다면 공부를 안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공부를 학창 시절에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부가 되고나서 또 신부답게 살기 위해서는 공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부의 무게를 느끼면서 공부를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으면 정말로 아는 게 아니다.”라는 스티븐 코비의 말이 떠올려집니다. 진정한 앎은 행동을 반드시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교리를 통해 또 성경 말씀을 통해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과연 진짜 앎일까요? 행동하지 않으면 입으로만 안다고 할 뿐 진짜 아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의 중요성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행동으로 나의 진짜 앎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갑자기 들이닥친다고 하셨습니다. 그 시간과 그 장소를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늘 깨어 준비하라는 것이 주님의 말씀이지요. 오늘 복음 말씀도 그런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잘 준비한 처녀는 슬기로운 처녀로, 준비하지 않은 다섯 처녀는 어리석다고 이야기하십니다. 그 준비는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우리의 행동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행동을 통해 주님을 제대로 알아갈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은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또 우리 자신의 죽음을 앞당겨 준비하는 위령의 날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 위령의 날에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잘 맞이하려는 우리의 행동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묵상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입으로만 준비해야 한다고 말만 하는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입이 아닌 몸으로 행동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제대로 알 수 있고, 또 그 주님을 잘 맞이하는 지혜로운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은 찾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당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로레타 영).
사진설명: 위령의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