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공용화 문제있다(상)-영어는 교통어일뿐
국어홀대 온나라 확산 불보듯 막연한 '세계어' 인식 언어패권주의 특구 종주국 중국도 특별대우 없어
지난 4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통령·국민경제자문회의·경제정책조정회의에서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국가 실현방안'을 확정하였다. 그 방안 가운데 영어교육 강화와 `경제특구' 영어 공용화 구축 내용이 나온다.
또한 최근의 비정상적 영어 열풍을 꼬집는 비웃음이 나라 밖에서까지 들려온다.
이 참에 가장 신중해야 할 정부 정책 당국에서까지 영어 공용화론이 왜 무시로 불거져 나오는지 근본적으로 따져 봐야 할 필요가 절실해졌다. 무엇이 문제인지 세 차례에 걸쳐 다른 나라 사정과 아울러 짚어 본다. 편집자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국가 실현방안'은 한마디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우리나라가 동북아에서 경제·문화 발전의 중심구실을 하여 잘살아 보자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기 위해서 특히 영종도·송도·김포지역을 경제특구로 만들어 외국기업을 유치하며, 그들에게 각종 혜택을 주어 사업을 하게 하는 한편, 여러 항구와 철도를 얽어 물자유통 중심이 되게 한다는 것을 구체적인 방편으로 삼았다.
이런 내용은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바람에 이어, 1998년 2월 대통령직인수위위원회 경제1분과위원회에서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에게 인천국제공항 주변지역에 `세계 자유도시'를 건설하고 영어를 공용어로 지정하자는 구상을 보고한 바와 맥락을 같이한다.
영어 공용 채택까지는 가지 않았으나, 민주당과 건설교통부, 제주도 등이 제주도 국제자유도시 특별법을 추진하던 과정에서도 비슷한 구상을 하여 논란이 된 적도 있다.
◇ 공용어란 무엇인가?=이번에 재정경제부와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국가 발전기획단' 이름으로 낸 보고서 `동북아 비즈니스 실현방안'(이하 `실현방안')에 실제로 `영어 공용어'라는 말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신문·방송·통신에서는 `영어 공용어 채택'으로 제목을 뽑아 내보냈다. 여기서 `공용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짚어볼 필요가 생긴다. 사전에서는 ⑴한 나라 안에서 공식적으로 쓰는 말 ⑵국제회의나 기구에서 공식적으로 쓰는 언어로 풀이한다. `실현방안'에 나온 “경제특구 내에서 모든 대외문서는 한국어와 함께 영어로 발간하고, 각종 민원서류를 영어로 접수하는 등 국어·영어의 동시 사용을 추진한다”는 말이나 `영종도·송도·김포 경제특구에서 국어와 영어를 같이 쓴다'는 말은 곧, 사전풀이 ⑴에서 일컫는 `공용어' 뜻으로 쓴 말이다. 국립국어연구원 김세중 학예연구관은 최근 나온 <새국어 생활>(11권 4호)에서 이를 “공용어는 한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다. `공식적으로' 사용된다는 것은 행정·입법·사법 등의 절차에서 쓰이는 언어를 말한다”고 베풀어 정의한 바 있다. 유엔의 공용어는 현재 `영어, 중국어, 프랑스어, 아랍어, 러시아어, 에스파냐어' 여섯이다. 올림픽에서 쓰는 공용어는 `영어, 프랑스말'이다. 이번 한-일 월드컵대회는 일본과 우리나라에서 열리니까 실로 오랜만에 영어와 프랑스어와 함께 한국어와 일본어가 들어갈 만하다.
이 때 쓴 `공용어'란 사전풀이 ⑵의 뜻이다. `실현방안'에 적힌 내용을 두고 언론에서 `영어 공용어 채택'이라고 표현한 것은 ⑴의 뜻에서 적절하다.
이처럼 공용어의 정의에 비추어 볼 때 우리나라의 정치인이나 지식인, 공무원, 일반인을 막론하고 영어를 막연한 `세계의 공용어' 또는 `세계어' 등 유일신으로 대우하여 오늘날과 같은 심각한 영어 열풍을 불렀다는 얘기다.
◇ 경제특구에 철조망을?=“제주에서 출발한 영어바람이 육지를 뒤덮고 급기야 전국토에 `원어민 수준'의 미국말이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그 끔찍한 날만은 오지 않기를 기도할 따름이다.”(윤혜준 외국어대교수·영어학, 2001.5.26 문화일보) 불과 한 해 전에 불던 이런 바람이 마침내 서울까지 미친 셈이다.
우선 경제특구에 영어를 공용하게 했을 때 득실은 무엇일까? 이는 제주도특별법 추진 때 제기된 바, 외국인들이 누릴 편의와 투자효과에 견줘 한국인들이 치를 폐해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고 말한다. 전문가들은 당장 △민족 정체성 혼란 △언어 혼란 △민족문화 파괴 △국어 천시 △언어 계층 발생 등을 꼽는다. 특히 그 폐해가 특구에 한정되지 않고 곧장 온나라로 번진다는 것이 문제다. 이것이 경제특구에 한해 영어를 공용한다는 것의 허술함으로 지적된다. 특구 안에서 국어와 영어를 공용어로 쓴다는 것을 무엇을 말하는가? 모든 법령, 교과서, 판결문 등 공문서를 두 언어로 작성해야 하며, 거래도, 강의도, 연설도 이중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우선은 그곳만이라도 이런 정도는 준비를 해야 한다. 특구를 독립국가로 따로 세우지 않는 한 이는 가능하지도 않고, 이득도 없다는 이야기다.
◇ 영어는 교통어일 뿐이다=조동일 교수(서울대 국문학)는 지난해 낸 <영어를 공용어하자는 망상>에서 영어가 우리에게 다가 온 모습을 대충 △독본 영어(광복후) △생존·투쟁 영어 △어린아이 본토 유학 영어로 나눈 적이 있다. 그는 현재의 모습을 이렇게 진단한다. “민주화가 진행되고, 경제가 발전되어 나라가 제 모습을 갖춘다고 자부하는 정도에 따라 영어에 대한 종속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그대로 둘 수 없는 파국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 이른바 영어 패권주의 사고방식과 현실을 경계하는 말이다.
그는 영어를 `교통어'로 대접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한다. 교통어란 `어느 곳의 모국어를 모국어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교류하는 데 필요해서 널리 사용되는 언어'라고 정의한다. 시대에 따라 이 교통어는 바뀔 수 있다. 영어가 누리는 독점의 횡포를 두고 볼 수 없으므로 `영어가 교통어의 임무를 충실하게 하고 세계어 노릇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인류 공동의 과제'라고 말한다. 곧 미국에서도 공용어라는 법제적인 지위를 누리지 못한 영어를, 국어가 있는 나라에서 공용어로 받아들이고 세계의 공용어로 삼자는 것은 무리라는 말이다. 다만 영어를 다른 말로 대치하자고 할 수는 없으므로, 현실을 인정하여 필요한 사람은 영어를 잘 배워 능숙하게 쓰려고 힘쓰면서 언어 제국주의의 침해를 받지 말고 패권주의에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다. 김영명 교수(한림대·정치외교학)는 영어 공용론을 일컬어 `비현실적인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본다. 문제는 외국인을 위한 영어병용이 내국인들의 병용으로 변질되어 영어의 부분적인 공용어화로 자리잡아 가는 현실을 걱정하고 있다. 이는 현재 상당수 신문과 방송, 정부 공문서에서 더욱 심각하다. 예컨대 문제의 `실현방안' 보고서도 그 제목이 `東北亞 비즈니스 中心國家 實現方安'이며, 중간 제목들도 `H/W 확충방안' `S/W 확충방안' 식이다.
◇ 경제특구 종주국인 중국에서는 어떤가?=중국은 경제특구를 대외 개방이 되어있지 않았던 1980년 대에 등소평의 개방정책으로 생기기 시작했다. 선전, 주하이, 산터우, 하먼, 하이난 다섯 곳을 경제특구로 운영하고 있다. 주로 항구이거나 섬인 이곳에 각종 사회기반시설을 갖추어 외국기업들에 조세제도를 비롯하여 각종 정책상의 혜택을 주며 끌어들여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 하지만 언어정책과 관련하여 공용어 채택 따위 영어에 어떤 지위를 부여한 경우는 전혀 없다. 물론, 홍콩은 1898년부터 일백년이나 영국의 조차지(식민지)이자 특별한 도시국가 형태로 발전했고, 싱가포르 역시 비슷한 경우로서 우리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최인호 기자/ 2002.4.8 한겨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