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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百濟]의 사비[泗沘]는 대륙[大陸]의 장강[長江]을 굽어보며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으로 전[傳]오는 환국[桓國], 고조선[古朝鮮], 숙신[肅愼],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 발해[渤海], 고려[高麗], 그리고 조선[朝鮮]으로 이어지는 장구[長久]한 세월의 일 만년[一萬年] 우리의 역사[歷史]는, 광활[廣闊]한 대륙[大陸]의 역사[歷史]였다. 이러한 우리의 역사[歷史]가 반도[半島]에서 전개 되었는가 ?
우리의 역사[歷史]를 폄하[貶下]하고 비하[卑下]하며, 대륙[大陸]의 역사[歷史]인 우리의 역사[歷史]를 반도[半島]에 맞추기 위하여,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모순[矛盾]으로 얼룩진 괴설[怪說]을 늘어놓는 자들이 활개를 치는 우리의 조국[祖國]인 대한민국[大韓民國]의 모습은, 국가[國家]의 정도[正道]와 국가[國家]의 대의[大義]가 사라진지 이미 오래 되었고, 국가[國家]의 정체성[正體性]은 존재[存在]하고 있는지 의문[疑問]이 아닐 수 없다.
반도사관[半島史觀]인 식민사학[植民史學]은, 선대[先代]와 자신의 조상[祖上]님들이 기록[記錄]하고 남겨놓은 수[數] 천년[千年]동안 전해오는 귀중[貴重]한 우리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을 왜곡[歪曲] 시키고 있으며, 우리의 당당[堂堂]한 일만년[一萬年]의 역사[歷史]를 말살[抹殺]하기 위하여, 사악[邪惡]한 음모[陰謀]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가공[加工]의 역사[歷史]를, 우리의 역사[歷史]라고 주장[主張]하며 가르쳐 오고 있다.
만천하[滿天下]에 당당[堂堂]하고 밝게 빛나던 역사[歷史]의 맥[脈]은 끊어져 버린지 이미 오래 되었다. 그 빈자리에는, 식민[植民]의 잔재[殘在]인 망국적[亡國的]인 사이비[似而非]의 역사[歷史]가 자리를 잡고, 국가[國家]의 근본[根本]이 되는 국사[國史]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그러한 현실[現實]속에서 어찌 나라의 근본[根本]을 바로 세울 수 있겠는가 ?
천하[天下]의 정도[正道]와 천하[天下]의 대의[大義]가 흐려진 한국[韓國]의 현실[現實]속에서, 천하[天下]의 학문[學文]이 흐려짐을 탄식[歎息]해서 무엇하랴 !
어지러운 세월 속에, 천하[天下]를 밝게 비추던 선대[先代]의 대도[大道]와, 인간[人間]의 근본[根本]을 깨우치는 학문[學文]의 정수[精髓]는 그 자취를 감추고 소멸[消滅]되어 이제는 그 자취만이 희미[稀微]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리의 역사[歷史]는 세계사[世界史]의 역사[歷史]속에서 인류[人類] 문명[文明]의 근원[根源]이요. 근본[根本]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미개[未開]했던 세계사[世界史]의 역사[歷史]에서, 문명[文明]과 학문[學文] 그리고 인간[人間]의 근본[根本]이 되는 인간[人間]의 밝은 길을 닦는 위대[偉大]하고 훌륭한 문화[文化]와 전통[傳統]을, 반만년[半萬年]을 뛰어 넘어 근세[近世]의 조선[朝鮮]까지 이어 왔다.
서양[西洋]의 제국사라는 것을 살펴보면, 침략[侵略]과 살육[殺戮], 수탈[收奪]로 점철된 물욕[物慾]만이 판을 치는 강탈[强奪]의 역사[歷史]일 뿐이었다.
새로운 무기[武器]를 만들어 세계[世界]을 돌아다니며 자신들의 사욕[私慾]을 채우기 위하여 살육[殺戮]과 수탈[收奪]만을 일삼은 자들의 문명[文明]이 무엇이 그리 위대[偉大]하고 훌륭할 것인가 ? 이러한 야욕[野慾]의 행태[行態]는 지금도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우리 역사[歷史]의 선조[先祖]들이 천하[天下]의 중심[中心]에서 아름답고 천란[燦爛]한 문명[文明]을 발전시키고, 인본[人本]의 길을 닦을 때, 양이[洋夷]들의 역사[歷史]는 일천[溢賤]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의 역사[歷史]는, 세상[世上]에서 그 무엇 하고도 견줄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소중[所重]한 문화[文化]와 전통[傳統], 그리고 학문[學文]과 아름다운 풍속[風習]이 역사[歷史]의 맥[脈]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근세[近世]의 조선[朝鮮]이 무너지고 나서, 양이[洋夷]와 야합[野合]한 왜적[倭賊]의 역사[歷史]에 대한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으로, 천하[天下]를 웅위[雄威]하던 우리 역사[歷史]의 위대[偉大]한 맥[脈]은, 한 줄기 희미한 빛만을 간직하고, 거짓된 사이비[似而非]의 역사[歷史]가 가득한 어둠의 저편에서, 조선사[朝鮮史]의 후예[後裔]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현실[現實]속에서, 우리의 역사[歷史]는, 그 역사[歷史]의 후예[後裔]들인 오늘날의 한국[韓國]이 바로 세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침략[侵略]과 식민[植民]의 잔재[殘在]를, 신학문[新學問]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한 자들이, 국가[國家]와 국민[國民]들을 속이며, 날이 갈수록 그 도[道]를 넘어서, 우리 역사[歷史]의 사실[史實]과 진실[眞實]을 왜곡[歪曲] 시키며 변조[變造]하고 있다.
근원[根源]이 없는 만물[萬物]이 천하[天下]에 어디에 있을 것이며, 시초[始初]가 없는 말단[末端]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 근본[根本]이 없는 말단[末端]은 어지러울 뿐이다.
이제 무엇을 가지고 국가[國家]의 정도[正道]와 국가[國家]의 대의[大義]를 바로 세우고, 학문[學文]의 근본[根本]을 바로 세워, 천하[天下]를 정도[正道]로 이끌고, 숭고[崇古]한 선대[先代]의 위업[偉業]을 높이며, 천하[天下]에 인간[人間]의 길을 밝게 닦을 수 있을 것인가 ?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과는 전혀 다른 거짓과 변조[變造]와 왜곡[歪曲]과 악의적[惡意的]으로 조작[造作]된 식민지[植民地] 치욕[恥辱]의 허구적[虛構的]인 창작물[創作物]을, 우리의 역사[歷史]라고 주장[主張]하는 한국[韓國]의 사학계[史學界]는, 우리의 역사[歷史]를 말할 자격[資格]이 없다. 이러한 일들은 실로 천하[天下]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으며, 미래[未來]의 후세[後世]들을 위해서도, 우리의 역사[歷史]는, 반드시 바로 세워져야 할 것이다.
한반도[韓半島]에 조선[朝鮮]이 있었고, 우리의 역사[歷史]가 반도[半島]에서 전개 되었으며, 근세[近世]의 조선[朝鮮] 말엽[末葉]에, 조선[朝鮮]은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나라 이름을 바꾸고, 그 조선[朝鮮]은, 한일병합[韓日倂合]으로 일제에게 나라를 들어 바치며, 조선[朝鮮]은 멸망[滅亡] 했다. 이러한 반도사관[半島史觀]의 주장[主張]은, 왜적[倭賊]들의 음모[陰謀]와 술수[術數]를 간파[看破]하지 못하고,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허무맹랑[虛無孟浪]한 거짓이며, 일제가 우리 역사[歷史]에 대하여 저지른 사악[邪惡]한 잔재[殘在]에 지나지 않는다.
천하[天下]의 흥망성쇠[興亡盛衰]가 그러하듯이, 조선[朝鮮]은 내부적[內部的]인 자중지란[自中之亂]으로 부강[富强]을 이루지 못하고, 스스로 왕조[王朝]의 명운[命運]이 끝났을 뿐이다. 왜적[倭賊]들이 오백년[五百年] 왕업[王業]의 조선[朝鮮]을 강점 했다고 하는 것은, 전혀 사실[事實]이 아니며, 그러한 주장[主張]을 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고조선[古朝鮮]으로부터,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역사[歷史] 강역[疆域]은, 대륙[大陸]의 일만리[一萬里] 영역[領域]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반만년[半萬年]의 근세[近世] 조선[朝鮮]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었다. 이러한 사실[史實]들은, 근세[近世]의 조선[朝鮮]까지 이어져 내려온 역사서[歷史書]가 한 결 같이 이를 증명[證明]하고 있다.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일제에게 나라를 들어 바치고, 한일합방[韓日合邦]이라는 비운[悲運]의 치욕적[恥辱的] 국권[國權] 말살[抹殺]의 국치[國恥]를 겪으며 멸망[滅亡] 했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경술국치[庚戌國恥]는, 정통[正統]의 조선왕조[朝鮮王朝]와는 관계가 없는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고 하는 반도[半島]에 세워진 국가[國家]와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으로 일제에 의하여 망[亡]한 것일 뿐이다.
한반도[韓半島]는 근세[近世]의 조선[朝鮮]까지, 조선[朝鮮]의 동[東]쪽에 있는 영동[嶺東]에 속하는 지역[地域]이었다. 또한, 한반도[韓半島]는, 조선[朝鮮] 팔도[八道]의 수[數] 많은 지방의 군현[郡縣] 중에서, 목[牧]에 해당하는 한 지역[地域]의 군현[郡縣]일 뿐이었다. 이러한 조선팔도[朝鮮八道]의 한 지역[地域]에 세워진 것이 삼한[三韓]을 아울렀다고 하는 대한제국[大韓帝國]이다.
우리의 역사[歷史]에서 말하는 삼한[三韓]의 지역[地域]은, 장강[長江]이 도도히 흐르는 대륙[大陸]의 땅에 중심[中心]을 두고 있었고, 이 지역[地域]에서 삼국[三國]이 천년[千年]의 장구[長久]한 세월을 보내며, 역사[歷史]를 이었으며, 이어 고려[高麗]가 일어났고, 고려[高麗]의 뒤를 이어 조선[朝鮮]이 일어났다. 왜적[倭賊]의 잔재[殘在]인 식민사관[植民史觀]이, 반도[半島]에서 조선[朝鮮]의 역사[歷史]가 전개되었다고 하는 것은, 황당[荒唐]하고 괴이[怪異]하며, 가당치도 않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일 뿐이다.
거짓과 사악[邪惡]한 음모[陰謀]와 간악[奸惡]한 흉계[凶計]가 만들어 놓은 반도사관[半島史觀]은, 우리의 높은 기상[氣像]과, 우리의 자아[自我]와, 우리의 민족혼[民族魂]과, 우리의 위대[偉大]한 역사[歷史]의 맥[脈]을, 철저히 부셔놓고, 우리 민족[民族]의 정신[精神]과 혼[魂]을 내부적[內部的]으로 그 싹부터 무너트렸으며, 국가[國家]와 국민[國民]의 존엄[尊嚴]한 주관[主觀]과 자존심[自尊心]을 무참히 짓밟았다.
환국[桓國]으로부터, 고조선[古朝鮮],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 발해[渤海], 고려[高麗], 조선[朝鮮]에 이르기까지, 동서[東西]로 2만리[二萬里]를 아우르던 우리의 웅대[雄大]한 대륙[大陸]의 역사[歷史]가, 한반도[韓半島]의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는 나라와, 일제의 합병[合倂]으로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고, 대륙[大陸]의 우리 역사[歷史]가 반도[半島]의 역사[歷史]로 둔갑[遁甲]해 버렸다.
반도[半島]에 세워진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삼한[三韓]을 아우르고, 한반도[韓半島]를 부속도서[附屬島嶼]로 한다고 하는 그 자체[自體]가, 이미 오백년[五百年]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정통[正統]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조선[朝鮮]이 반도[半島]에 있었다고 하는 것 자체[自體]가 새빨간 거짓말이다. 근세[近世]의 조선[朝鮮]까지 조선[朝鮮]의 문신[文臣]과 대신[大臣]들은, 수많은 당시[當時]의 기록[記錄]들을 남기고 있다.
우리의 역사[歷史]가 반도[半島]의 역사[歷史]라고 하는 거짓을 증명[證明] 할 수 있는 역사[歷史]의 고적[古蹟]과 사료[史料]들은, 수 없이 많다. 하나의 실예[實例]를 들어, 조선[朝鮮]의 함경도[咸鏡道]와 평안도[平安道] 사이에 있는 본래의 백두산[白頭山]은, 어느 지역[地域]에 있었을까 ? 고대[古代]의 숙신[肅愼]으로부터, 요동[遼東]을 서남[西南]쪽으로 내려다보고 있던 태고[太古]의 백두산[白頭山]인 불함산[不咸山]이, 반도[半島]의 북[北]쪽에 있었다고 반도사관[半島史觀]은, 국민[國民]들을 속여 왔다.
조선[朝鮮] 중기의 문신[文臣]이며, 대신[大臣]이었던 동명집[東溟集]의 함경도 절도사 김준룡과 이별하다[別金節度俊龍]에서,
별김절도준룡[別金節度俊龍]
오랑캐 땅 하늘 밖에 높이 우뚝 솟은 突兀胡天外
그 산[山]이 바로 백두산[白頭山]이니 其山鎭白頭
쌓인 눈은 개벽[開闢]하던 때부터 있었고 雪從開闢有
강[江]은 터져 북[北]쪽 동[東]쪽으로 흐른다. 江拆北東流
정히 방추[防秋] 급한 때를 만났거니와 正屬防秋急
변경[邊境] 가는 시름 어느 누가 논하랴! 誰論出塞愁
장군[將軍]께서 말을 타고 떠나가니 將軍上馬去
일천[一千]의 기병[騎兵] 갖옷 입고 옹위[擁衛] 하도다. 千騎擁貂裘
이렇게 함경도[咸鏡道]의 백두산[白頭山]에 대하여 시[詩]를 통하여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것이 한반도[韓半島]의 백두산[白頭山]을 말하는 것인가 ?
백두산[白頭山]은 사계절[四季節]내내 빙설[氷雪]이 녹지 않는 산[山]이다. 그리고, 또, 백두산[白頭山]에서 발원[發源]하는 강[江]들은, 모두 북[北]쪽]과 동[東]쪽으로 흘러갔다. 이러한 산[山]이 바로 우리의 백두산[白頭山]이다.
우리의 조선[朝鮮]은 일제에 의하여 망[亡]한 적이 없다.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는 것은, 허구적[虛構的]인 조선[朝鮮] 왕조[王朝]를 반도[半島]에 세우고, 역사[歷史]를 그렇게 보이도록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한, 하나의 일면[一面]일 뿐이다.
왕조실록[王朝實錄]과 당시[當時]를 살던 선대[先代]들이 남긴 일부 문집[文集]들 속에는, 당시[當時]의 상황들이 생생[生生]하고 분명[分明]하게 기록[記錄]되어 있다.
1900년대[千九百年代]를 전후[前後]하여, 조선[朝鮮]의 조정[朝廷]에서 벼슬을 하며, 당시[當時]를 살던 조선[朝鮮]의 유학자[儒學者]이며, 대신[大臣] 들이었던 분들의 문집[文集]을 살펴보면, 전라도[全羅道]와 제주도[濟州道]에 대하여 남긴 생생[生生]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이 셀 수 없이 많다.
이분들이 그 지역[地域]에 살면서, 몸소 겪은 일들과 당시[當時] 조선[朝鮮]의 현실[現實]에 대하여 남긴 기록[記錄]들은, 반도[半島]의 제주도[濟州道]와 전라도[全羅道]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중국[中國] 대륙[大陸]의 남방[南方] 지역[地域]과, 그 서[西]쪽 지역[地域]인 운남성[雲南省]을 말하고 있다.
반도[半島]의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조선[朝鮮]의 정통[正統]을 이어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에서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바꾸었다고 하는 것은, 조선[朝鮮]의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고 기만[欺瞞]하는 것이다.
조선[朝鮮]의 정조대왕[正祖大王]이 지은 홍재전서[弘齋全書]의 숙묘어제찬무후악왕문산도상이봉우영유삼충사시치제문[肅廟御製贊武侯岳王文山圖像移奉于永柔三忠祠時致祭文]중에, 모든 물이 동[東]쪽으로 흘러 바다를 이루니 有海東流,......... 노중련[魯仲連]이 밟으려 했던 바이고 魯連所蹈,......... 땅은 소중화[小中華]라고 일컬어지니 地稱小華,......... 사당을 깨끗한 땅에 세웠다네 祠建淨土,.......... 길일을 가려서 옮겨 봉안하매 選穀移奉,........... 공[公]의 유상이 당[堂]에 있도다. 公像在堂 라고, 삼충사[三忠祠]의 치제문[致祭文]을 올리고 있다.
소중화[小中華]라고 하는 것은, 반도[半島]]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요[堯], 순[舜], 우[禹], 탕[湯], 문무[文武], 주공[周公], 공자[孔子], 맹자[孟子]의 본향[本鄕]인 그 동[東]쪽 지역[地域]의 요동[遼東]과, 그 동[東]쪽에 있는, 조선사[朝鮮史] 일만년[一萬年] 역사[歷史]의 천부지지[天府之地]의 땅인 대륙[大陸]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조선왕조[朝鮮王朝]가 어찌 반도[半島]에 있었으랴! 고대[古代]의 삼한[三韓]으로부터, 조선[朝鮮]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은 동[東]쪽으로 흘러 바다를 이뤘다. 왜적[倭賊]의 잔재[殘在]인 반도사관[半島史觀]은, 반도[半島]에 조선[朝鮮]이 있었고, 소중화[小中華]는 반도[半島]를 말한다고 하는데, 어느 역사서[歷史書]에 반도[半島]땅이 소중화[小中華]라고 했는가 ?
조선[朝鮮]은 조선조[朝鮮朝]가 나라의 명운[命運]이 다 할 때까지, 대륙[大陸]의 광활[廣闊]한 영토[領土]와, 반만년[半萬年]을 이어 내려온 고조선[古朝鮮]과 옛 삼한[三韓] 강역[疆域]의 고유[固有]한 일만리[一萬里]에 이르는 영역[領域]을 다스린 대[大] 제국[帝國] 이었다.
우리는 일제가 조선[朝鮮]을 병합[倂合]했다고 배워왔고 지금도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역사[歷史]의 진실[眞實]과, 우리 역사[歷史]의 사실[史實]들이 하나하나 밝게 들어 나면서, 이러한 역사[歷史]의 내면[內面]을 살펴보면, 이러한 것들이 얼마나 역사[歷史]를 기만[欺瞞]하고 있는지 그 음흉[陰凶]한 저의[底意]가 그대로 들어난다.
식민사관[植民史觀]의 아류[亞流]인 반도사관[半島史觀]이 말하는 대로, 오백년[五百年] 정통[正統]의 조선왕조[朝鮮王朝]가, 왜국[倭國]과 한일합방[韓日合邦]을 했다고 하는 것이 역사[歷史]의 사실[史實]이라고 한다면, 조선왕조[朝鮮王朝] 고유[固有]의 영토[領土]인 대륙[大陸]의 동서[東西] 일만리[一萬里]에 이르는 강역[疆域]이, 반드시 그 속에 포함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치욕[恥辱]의 한일합방[韓日合邦]에 포함된 강역[疆域]은, 지금의 반도[半島]땅에 국한 되었으며, 일제는 그 후[後]에 오늘날의 동북삼성[東北三省]에 청[淸]나라의 마지막 왕조[王朝]라고 하는 만주국[滿洲國]을 세웠다. 일제가 오늘날의 동북삼성[東北三省]에 세웠던 이 만주국[滿洲國]은 알려진 대로 일제의 하수[下手]인 허수아비의 괴뢰[傀儡] 국가[國家]였다.
반도[半島]의 조선[朝鮮]이라고 하는 것은, 일만년[一萬年]을 이어 내려오면서, 대륙[大陸]을 호령[號令]하며 천하[天下]를 치달리던 우리의 웅혼[雄渾]한 역사[歷史]를 말살[抹殺]시켜, 초라한 식민[植民]의 속국[屬國]으로 만들기 위한 일제의 간악[奸惡]하고도 치밀[緻密]한 음모[陰謀]와 모략[謀略]의 결과물[結果物]일 뿐이다.
한일병합[韓日倂合]이라고 하는 것은, 왜적[倭賊]들이 대륙[大陸] 조선[朝鮮]의 일부[一部]를 침략[侵略]으로 유린[蹂躪]하고, 조선[朝鮮]이 망[亡]한 빈자리의 혼란[混亂]기에, 마치 조선[朝鮮]의 관동[關東] 지역[地域]이, 청[淸]나라의 만주[滿洲] 지역[地域]인 것처럼 위장[僞裝]하고, 만주국[滿洲國]을 세워 역사[歷史]를 짓밟고 왜곡[歪曲]하듯이, 그러한 예[例]의 사악[邪惡]하고도 간교[奸巧]한 모략[謀略]의 일환일 뿐이다.
오백년[五百年] 조선왕조[朝鮮王朝]의 명운[命運]이 대륙[大陸]에서 끝나는 것을 기회[機會]로, 양이[洋夷]와 야합[野合]하여 왜적[倭賊]들은, 조선[朝鮮]의 관동[關東]에 속한 영동[嶺東] 지역에, 정통[正統]의 조선황조[朝鮮皇朝]와는 관계가 없는 반도[半島]의 조선[朝鮮]을 세우고, 우리의 일만년[一萬年] 대륙[大陸]의 역사[歷史]를 반도[半島]에 몰아넣기 위하여, 혈안[血眼]이 되었다.
우리의 역사[歷史]를 찾아서 끊임없이 길을 가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반도[半島]의 조선[朝鮮]에 대하여 수많은 온갖 설[說]들이 설왕설래[說往說來]하고 있다. 그러나 반도[半島] 조선[朝鮮]의 허구[虛構]는, 근세조선[近世朝鮮]의 강역[疆域] 이었던 대륙[大陸]의 땅에서, 그 역사[歷史]의 거짓이 확연[確然]히 들어나며 산산[散散]이 부서지고 있다.
반도[半島]에 조선[朝鮮]이 있었다고 한다면,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조정[朝廷]에서 높은 관직[官職]에 있었던 대신[大臣]들의 수[數] 백년[百年]된 종가[宗家]들이, 왜 무엇 때문에, 무슨 연고[緣故]로, 대륙[大陸]의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을까 ? 그리고 그들은 무엇 때문에, 대륙[大陸]의 동[東]쪽을 신라[新羅]로 부르고, 서[西]쪽에는 나주[羅州]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을까 ?
한일합방[韓日合邦]이라고 하는 것은,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이 반도[半島]의 역사[歷史]라고 할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은, 반도[半島]에 중심[中心]을 두고 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반도[半島]는 당시[當時]에 조선[朝鮮]의 팔도[八道]중에서, 관동[關東]에 속하는 영동[嶺東] 지역[地域]이었다.
당시[當時]를 살았던 조정[朝廷] 대신[大臣]들의 문집[文集]을 살펴보면, 조선[朝鮮]의 영동[嶺東] 지역[地域]은, 팔도[八道] 중에서, 왜국[倭國]과 가장 가끼운 지역[地域]에 위치[位置]하고 있다고 기록[記錄]하고 있다.
반도사관[半島史觀]이 주장[主張]하는 대로 예[例]를 들어 반도[半島]에서 우리의 역사[歷史]가 이어져 내려왔다고 한다면, 조선[朝鮮]의 팔도[八道]중에서, 영남[嶺南] 지역인 경상도[慶尙道]가 왜국[倭國]과 가장 가까운 지역이 된다. 강원도[江原道]의 영동[嶺東] 지역[地域]이 어떻게 왜국[倭國]과 가장 가까운 지역[地域]이 될 수 있을 것인가 ?
당시[當時]에 왜국[倭國]에 사신[使臣]으로 다녀오고, 왜국[倭國]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자세히 알고 있던 분들의 이러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은, 반도사관[半島史觀]과 한일합방[韓日合邦]의 허구[虛構]를 여실히 들어내고 있다. 왜적[倭賊]들은 지금의 동북삼성[東北三省]에 만주국[滿洲國]을 세우고, 그곳에 주둔한 부대 이름을 관동군사령부[關東軍司令部]라고 불렀다. 참으로 교활[狡猾]한 자들이 아닌가 ? 조선[朝鮮]의 관동[關東] 지역[地域]에 만주국[滿洲國]을 세우고, 관동군[關東軍]이라는 명칭[名稱]을 붙였으니 말이다.
고명[高名]한 역사학자[歷史學者]라는 사람들이, 역사[歷史]의 허[虛]와 실[實]을 살피지 않고, 실증사학[實證史學]을 주장[主張]하는 것은, 학자[學者]로서 그 본분[本分]을 저버린, 언어도단[言語道斷]이며, 파렴치[破廉恥]하고 티끌만큼의 양심[良心]도 없는 자들이다. 실증사학[實證史學]이라고 하는 것이 역사[歷史]의 사실[史實]과 진실[眞實]을 찾아가는 문헌고증[文獻考證]의 사학[史學]이라고 하였는가 ?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를 악랄[惡辣]하게 짓밟으며 거짓으로 무너트리고, 왜곡[歪曲]과 조작[造作]과 변조[變造]을 일삼은 왜[倭]놈들의 실증사학[實證史學]을 충실히 받아들이고, 그러한 자들의 뒤를 이어 허울 좋은 실증사학[實證史學]을 소리 높여 외치고 내세우며, 간악[奸惡]한 식민[植民]의 주구[走狗]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韓國] 사학계[史學界]의 실상[實相]이다.
일제는 반도[半島]에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이었다고 하는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세워놓고, 대륙[大陸]의 일만년[一萬年]역사[歷史]를, 반도[半島]의 역사[歷史]로 만들기 위하여, 조선사[朝鮮史] 역사[歷史]의 사료[史料]들에 대하여, 영원[永遠]히 용서 할 수 없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사악[邪惡]한 악행[惡行]를 저질렀다.
일제는 반도[半島]의 대한제국[大韓帝國]이, 마치 대륙[大陸]의 오백년[五百年] 전통[傳統]의 조선황조[朝鮮皇朝]을 이은 것처럼 위장[僞裝]하고, 조선왕조[朝鮮王朝]가 반도[半島]에 있었던 것으로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여 고착 시켰다. 그리고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으로 나라를 들어 일제에게 바친 것으로 역사[歷史]를 조작[造作]했다.
대한제국[大韓帝國]은, 한반도[韓半島]를 부속도서[附屬島嶼]로 규정하는 명목상[名目上]의 국가[國家]였다. 알려진 대로 대한제국[大韓帝國]은 아무런 힘도 없는 국가[國家]였으며, 일제에 의하여 조종[操縱] 당하는 그러한 국가[國家]일 뿐이었다.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시해[弑害] 사건은, 반도[半島]의 대한제국[大韓帝國]에 대한 실상[實相]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비극[悲劇]중의 비극[悲劇]으로, 참혹[慘酷]하고 잔인[殘忍]한 악행[惡行]중의 악행[惡行]이었다.
수많은 모순[矛盾]으로 가득한 우리의 사서[史書]들은, 그러한 역사서[歷史書]의 화란[禍亂]을 겪은 실체[實體]를 지금의 우리에게 말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조선사[朝鮮史] 역사서[歷史書]의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대륙[大陸]의 기록[記錄]들은, 모두가 역사[歷史]의 사실[史實]로 들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는 지금의 동북삼성[東北三省]에 만주국[滿洲國]을 세웠는데, 이 동북삼성[東北三省]의 지역이, 만주[滿洲]라고 하는 것 자체가 역사[歷史]를 기만[欺瞞]하고 왜곡[歪曲]하고 있는 것이다.
만주국[滿洲國]과 반도[半島]의 조선[朝鮮] 왕조[王朝]라고 하는 것은, 조선사[朝鮮史] 오천년[五千年]의 위대[偉大]한 대륙[大陸]의 역사[歷史]에 대한 맥[脈]을 끊기 위하여, 치밀[緻密]하게 짜여진 각본[脚本]에 의한, 사악[邪惡]하고도 교활[狡猾]한 무서운 음모[陰謀]의 산물[産物]일 뿐이다.
반도[半島]의 한국[韓國]에는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의 황성[皇城]이 건설[建設]된 적이 없었다. 그리고 황도[皇都]라고 불릴만한 흔적[痕迹] 조차 없다. 조선[朝鮮] 왕조[王朝]의 황도[皇都]에는, 천리[千里]의 기전[畿甸]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반도사관[半島史觀]의 주장[主張]대로 반도[半島]에 조선[朝鮮]의 왕도[王都]가 있었다고 한다면, 황도[皇都]의 기전[畿甸] 천리[千里]는 어디에 자리 잡고 있을 것인가 ?
왕도[王都]를 기준[基準]으로 하여 지금의 백두산[白頭山]에서부터, 반도[半島]땅 전체를 아우른다고 하더라도 황도[皇都]의 기전[畿甸]에 미치는 면적[面積]이 되지 못한다. 식민사학[植民史學]인 반도사관[半島史觀]의 주장[主張]대로 반도[半島]에서 조선[朝鮮]의 역사[歷史]가 전개[展開]되었다고 한다면, 각[各] 도[道]마다 수[數] 천리[千里]에 이르는 지역[地域]을 차지하고 아우르는 광활[廣闊]한 조선[朝鮮]의 팔도[八道]는 어디에 있었을까 ?
동해[東海]바다와 서해[西海]바다, 그리고 남해[南海]바다 속에, 조선[朝鮮]의 칠도[七道]가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조선[朝鮮]의 성군[聖君]으로 추앙[推仰]받는 정조[正祖] 대왕[大王]의 기록[記錄]만을 보더라도, 조선[朝鮮]은 대륙[大陸]의 중심[中心]에 황도[皇都]를 두고, 천하[天下]를 나누어 각[各] 지역에 제후[諸侯]를 두고 다스렸던 천자[天子]의 나라이며, 황제[皇帝]의 나라였다.
그러한 조선[朝鮮]이 어떻게 반도[半島]에서 망[亡]할 수 있을 것인가 ?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에 대한 진실[眞實]을 찾으면서, 하나하나 밝혀지고 있는 우리의 역사[歷史]에 대한 진실[眞實]들은, 동서[東西]로 일만리[一萬里]에 이르는 강역[疆域]을 차지하고, 그 강역[疆域]은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조선[朝鮮] 말엽[末葉]까지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천하[天下]에, 찬란[燦爛]하며 웅혼[雄渾]하게 빛나는 당당[堂堂]한 일만년[一萬年]의 역사[歷史]였다.
이러한 일만년[一萬年]의 조선사[朝鮮史]를 지구상[地球上]에서 흔적[痕迹]도 없이 지우고 말살[抹殺] 시키려는 양이[洋夷]와 왜적[倭賊]의 음흉[陰凶]하고도 사악[邪惡]한 음모[陰謀]는, 깊고도 치밀[緻密]하게 진행 되었다.
이러한 역사[歷史]의 사실[史實]들이 그 베일을 하나하나 벗을 때마다 이를 보는 사람의 마음을 전율[戰慄]시키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지나온 역사[歷史]를 똑바로 보고 올바로 알고 있으면, 이러한 사악[邪惡]한 자들의 음모[陰謀]와 모략[謀略]을 사전[事前]에 부셔 버릴 수 있는 지혜[智慧]와 책략[策略]를 지닐 수 있을 것이며, 만전[萬戰]의 대비[對備] 태세[態勢]를 갖추어 이를 굳건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지나온 역사[歷史]를 알지 못한다면, 그러한 자들의 더러운 술수[術數]에 넘어가, 그러한 자들의 주구[走狗] 노릇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국제정세[國際情勢]의 냉혹[冷酷]한 현실[現實]을 바라보면, 그러한 자들의 과거[過去]와 오늘의 행태[行態]는 조금도 다르지 않으며 변[變]한 것이 하나도 없다. 조선[朝鮮]을 멸망[滅亡]으로 몰아넣고 조선사[朝鮮史]를 말살[抹殺]시키려는 그러한 자들의 음모[陰謀]와 모략[謀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가 진실[眞實]로 조선사[朝鮮史]의 후예[後裔]들이라고 한다면, 명심[銘心]하고, 또 명심[銘心]해야 할 것이다.
칠백년[七百年]의 장구[長久]한 세월을 이어온 백제[百濟]의 왕업[王業]은, 세계사[世界史]의 역사[歷史]속에서, 그 유래[由來]를 찾아보기조차 드문 장수[長壽]의 왕조[王朝]이며, 당시[當時]에 천하[天下]를 뒤흔들던 대륙[大陸]의 왕조[王朝]였다.
역사서[歷史書]의 화란[禍亂]을 피하여 현재[現在]까지 남아서 전[傳]해지고 있는 대륙[大陸]과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에서, 당시[當時]의 역사[歷史]에 대한 기록[記錄]들을 따라, 백제[百濟]의 지역[地域]들을 찾아서 이를 살펴보면, 지금도 수[數] 천년[千年] 전[前], 당시[當時]의, 우리 역사[歷史]에 대한 생생[生生]한 모습들을 완연[宛然]하게 바라 볼 수 있다.
반도사관[半島史觀]은 지금 한국[韓國]의 반도[半島] 부여[扶餘]에 백제[百濟]의 사비성[泗沘城]이 있었다.고 주장[主張]한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왜[倭]놈들의 파렴치[破廉恥]하고도 간교[奸巧]한 음모[陰謀]의 부차적[副次的] 산물[産物]이며, 그 일환[一環] 일 뿐이다. 우리의 당당[堂堂]한 선조[先祖]들이 당시[唐詩]에 현지[現地]에 살면서 남겨놓은 역사[歷史]의 소중[所重]한 기록[記錄]들이, 우리의 역사[歷史]가 아니겠는가 ?
우리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들과 정면[正面]으로 위배[違背]되며, 우리 조상[祖上]님들이 남겨 놓은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을 철저히 외면하고, 간악[奸惡]한 왜[倭]놈들이 거짓으로 만들어 심어놓은 음흉[陰凶]하고도 사악[邪惡]한 반도사관[半島史觀]인 식민사관[植民史觀]의 추잡[醜雜]하고 악랄[惡辣]한 부차적[副次的] 산물[産物]들인 그러한 것들을, 역사[歷史]라고 주장[主張]하며 가르치는 그 저의[底意]와, 그러한 행태[行態]를 계속하고 있는 그 목적[目的]의 그 뜻은 무엇일까 ?
그러한 더러운 거짓과 사악[邪惡]한 계략[計略]으로 점철[點綴]된 식민통치[植民統治]의 음모[陰謀]와 모략[謀略], 그리고 조선사[朝鮮史] 말살[抹殺]의 창작물[創作物]을 역사[歷史]라고 한다면, 그러한 것들은 이미 인도[人道]와 정도[正道], 대도[大道]와 천도[天道]를 저버리고, 대순[大順]을 거스리는 한갓 창해[蒼海]의 진애[塵埃]만도 못한 천하[天下]의 사이비[似而非]일 뿐이다.
구당서[舊唐書]
백제열전[百濟列傳]
本亦扶余之別種,嘗為馬韓故地,在京師東六千二百裡,處大海之北,小海之南。東北至新羅,西渡海至越州,南渡海至倭國,北渡海至高麗 [중략]
백제[百濟]는 본래 부여[扶餘]의 별종[別種]이다. 백제국[百濟國]은 일찍이 마한[馬韓]의 옛 지역이었으며, 경사[京師]에서 동[東]쪽으로 620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대해[大海]의 북[北]쪽, 소해[小海]의 남[南]쪽에 처해 있다. 동[東]쪽과 북[北]쪽으로는 신라[新羅]에 이르고, 서[西]쪽으로는 바다를 건너서 월주[越州]에 이르고, 남[南]쪽으로는 바다를 건너서 왜국[倭國]에 이르고, 북[北]쪽으로는 바다를 건너서 고구려[高句麗]에 이른다. [중략]
其國舊分為五部,統郡三十七,城二百,戶七十六萬 [중략]
백제국[百濟國]은 예전에는 5부[部]로 나누었는데, 통할하는 군[郡]이 37개[三十七個], 성[城]이 200개[二百個], 호구[戶口]가 76만[七十六萬] 호[戶]였다. [중략]
위서[魏書] 백제열전[百濟列傳]
其國北去高句麗千餘里,處小海之南。其民土著,地 多下濕,率皆山居 [중략]
백제국[百濟國]은 북[北]쪽으로 고구려[高句麗]까지의 거리가 1000여 리로, 소해[小海]의 남[南]쪽에 있다. 그곳 백성[百姓]들은 토착민[土着民]들이며, 지역이 대부분 낮고 습[濕]하여 모두 산에 산다. [중략]
양서[梁書] 백제열전[百濟列傳]
謂邑曰簷魯,如中國之言郡縣也。其國有二十二簷魯,皆以 子弟宗族分據之 [중략]
백제[百濟]에서는 읍[邑]을 담로[檐魯]라고 하는데, 이는 중국[中國]의 군현[郡縣]이란 말과 같은 말이다. 백제[百濟]에는 22개의 담로[檐魯]가 있는데, 모두 왕[王]의 자제[子弟]와 종족[宗族]이 나누어 차지하였다.[중략]
홍재전서[弘齋全書]
봉서[封書]
사호서우심지차읍진위유사홍대협봉서[賜湖西尤甚之次邑鎭慰諭使洪大協封書]
湖西一路。接千里之周甸。勤九重之殷憂。雖在豐年樂歲。其所顧恤而軫念。有倍於他道 [중략]
호서[湖西]의 한 도[道]는 천리[千里]의 기전[畿甸]과 접해 있는 까닭에 궁중[宮中]에서 많이 걱정을 하는 곳이다. 비록 풍년[豐年]이 들어 즐거운 해에도 보살피고 염려[念慮]하는 바가 타도[他道]의 두 배나 된다. [중략]
백제[百濟]가 위치[位置]하고 있었던 지역[地域]은 반도[半島]가 아니었음이 사서[史書]의 기록[記錄]으로 분명[分明]하게 들어나고 있다. 구당서[舊唐書]에서는, 소해[小海]의 남[南]쪽, 대해[大海]의 북[北]쪽에 백제[百濟]가 있다고 하였다. [處大海之北,小海之南], 신라[新羅]와 연합하여 백제[百濟]를 멸망[滅亡]시켰다는 구당서[舊唐書]의 기록[記錄]은, 백제[百濟]의 왕성[王城]은 반도[半島]에 없었음을 분명[分明]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위서[魏書]의 백제열전[百濟列傳]에서는, 백제[百濟]의 기후[氣候]와 풍토[風土]에 대하여, 그곳 백성[百姓]들은 모두 토착민[土着民]들이며, 지역[地域]이 대부분 낮고 습[濕]하여 산[山]에 산다. [其民土著,地多下濕,率皆山居], 고 하였다. 그리고 근세[近世]의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서는, 옛 백제국[百濟國]은, 지금 조선[朝鮮]의 전라도[全羅道]땅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한국[韓國]의 반도[半島]땅에, 소해[小海]가 어디에 있었는가 ? 또한, 지역[地域]이 대부분 낮고 습[濕]하여 산[山]에 살았다고 하는데, 반도[半島]땅 어디에 그런 지역[地域]이 있었을까 ? 이러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은, 근세[近世] 조선[朝鮮]의 대신[大臣]들이 남방[南方]의 전라도[全羅道] 지역으로 부임[赴任]할 때, 날씨가 고온다습[高溫多濕]한 풍토[風土]로 인하여 생기는 장기[瘴氣]의 독[毒]에 대하여 말하는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과 그 맥[脈]을 같이하고 있다.
백제[百濟]의 당시[當時]에, 신라[新羅]와 연합하여 백제[百濟]를 침입[侵入]했던 당[唐]나라의 역사[歷史] 기록[記錄]이 말하고 있는 백제[百濟]의 현황[現況]을 보면, 통할하는 군[郡]이 37개[三十七個], 성[城]이 200개[二百個], 호구[戶口]가 76만[七十六萬] 호[戶], [統郡三十七,城二百,戶七十六萬]라고 말하고 있다.
해동역사[海東繹史]의 예문지[藝文志], 소정방[蘇定方]의 평백제탑비명[平百濟塔碑銘]에서는, 모두 5도독[都督], 37주[州], 250현[縣]을 두었으며, 호구[戶口] 수[數]는 24만 호이고, 인구[人口]는 620만[六百二十萬]명인데, 이들을 각각 편호[編戶]로 가지런하게 하고 모두 오랑캐의 풍습[風習]을 바꾸게 하였다. 라는 기록[記錄]을 남기고 있다. 이것은 백제[百濟]를 평정하고 임시로 백제[百濟]의 강역[疆域]에 둔 군현[郡縣]을 말하고 있는데, 백제[百濟]의 멸망[滅亡] 당시[當時]에, 인구[人口]가 620만[六百二十萬]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는, 백제[百濟]가 융성할 적에는 도성[都城]의 민호[民戶]가 15만 2천 3백[十五萬二千三百]명에 이르렀으며, 나라에는 5부[部], 37군[郡], 2백[二百]개의 성[城]에, 76만호[七十六萬戶]가 있었다. 라고 기록[記錄]하고 있다. 비록 기록[記錄]의 차이는 있으나, 백제[百濟]에 대하여 모두 같은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을 남기고 있다.
대륙[大陸]의 사서[史書]들이 말하고 있는 기록[記錄]들을 보면, 백제[百濟]는, 대륙[大陸]의 남방[南方] 지역[地域]에 위치[位置]하고 있었다, 소정방[蘇定方]의 평백제탑비명[平百濟塔碑銘]이 말하고 있는 백제[百濟]의 군현[郡縣]과, 백제[百濟]의 인구수[人口數]를 보더라도, 백제[百濟]는 반도[半島]에 없었다는 것을 분명[分明]하게 증명[證明]하고 있는 것이다.
백제[百濟]의 당시[當時]에, 백제[百濟]의 인구[人口]가 620만[六百二十萬]명이라고 한다면, 반도사관[半島史觀]이 주장[主張]하는, 반도[半島]의 백제[百濟] 강역[疆域]에, 과연 이렇게 많은 인구[人口]가 당시[當時]에 살고 있었을까 ? 그렇다면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 신라[新羅]의 삼국[三國] 당시[當時]에, 반도[半島]의 인구[人口]는 얼마나 되었을까 ?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가 강성[强盛]할 때, 100만[百萬]의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남[南]으로 오월[吳], 월[越], 북[北]쪽으로는 유[幽], 연[燕], 제[齊], 노[魯]를 침략[侵略]하여, 중국[中國]에 큰 해[害]를 끼쳤다.[高句麗l,百濟全盛之時。强兵百萬。南侵吳越。北撓幽燕齊魯。爲中國巨蠹]라고, 고운[孤雲] 선생은 말하고 있는데, 이러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은, 모두 역사[歷史]의 사실[史實]로 들어나고 또한, 입증[立證]되고 있다.
역사서[歷史書]가 말하고 있는 백제[百濟]는, 백만대군[百萬大軍]을 거느리고, 관할[管轄]하는 성곽[城郭]이 200개[二百個], 도성[都城]의 민호[民戶]가 15만[十五萬]에 이르는 왕성[王城]과, 남경[南京]과 북경[北京]을 두고 있었으며, 동서[東西]에 두 개의 도성[都城]이 있었다. 그리고 백제[百濟]는 수많은 제부족[諸部族]를 거느리고 다스렸다. 백제[百濟]는 이렇게 큰 나라였다. 이것이 바로 역사서[歷史書]가 말하는 백제[百濟]의 모습이다.
반도[半島]의 부여[扶餘]에 백제[百濟]의 왕성[王城]이 있었다고 주장[主張]하는 한국[韓國]의 사학계[史學界]는, 우리의 역사[歷史]와는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다. 역사서[歷史書]를 외면[外面]하고 거짓의 역사[歷史]를 말하는 자들을, 어찌 역사[歷史] 학자[學者]라고 말할 수 있을까 ?
홍재전서[弘齋全書]의 봉서[封書], 사호서우심지차읍진위유사홍대협봉서[賜湖西尤甚之次邑鎭慰諭使洪大協封書]에서, 호서[湖西]의 한 도[道]는 천리[千里]의 기전[畿甸]과 접해 있는 까닭에 궁중[宮中]에서 많이 걱정을 하는 곳이다. [湖西一路。接千里之周甸。勤九重之殷憂]라고, 말하고 있는데, 호서[湖西]는 조선[朝鮮] 충청도[忠淸道]의 서[西]쪽 지역[地域]이었다.
이러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이 사실[史實]임을 증명[證明]하는 당시[當時]의 유적[遺跡]과 유물[遺物], 당시[當時]의 지명[地名]등이 대륙[大陸]의 땅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와 더불어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지역[地域]에 살고 있는 조선사[朝鮮史] 역사[歷史]의 자손[子孫]들이 이를 분명[分明]하게 말하고, 증언[證言]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중국[中國]의 호남성[湖南省] 장사[長沙]에서 서남[西南]쪽으로 내려가면, 북[北]쪽으로 큰 산[山]을 등지고 서남[西南]쪽을 향하여 세 줄기의 산맥[山脈]이 길게 뻗어 내린 곳이 있다. 이 산[山]은 호남성[湖南省]의 형양[衡阳]과 소양[[邵阳]의 중간지역[中間地域]에 위치[位置]하고 있다. 이 세 줄기의 산맥[山脈]중에, 형양[衡阳]에서 소양[[邵阳]으로 넘어가는 첫째 산맥[山脈]의 깊숙한 곳에 탄현[炭峴]이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의 중국[中國] 행정구역[行政區域]의 이름은. 형양[衡阳], 현산[岘山], 탄현[弹弦]이다. 현재[現在]는 탄알 탄[弹]자와 활시위 현[弦]자를 써서 탄현[弹弦]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곳은, 백제[百濟]의 성충[成忠]이, 적군[敵軍]이 만일 쳐들어오면 육로[陸路]로는 탄현(炭峴)을 넘지 못하게 하라. [敵兵若來。使陸不過炭峴]고, 간언[諫言]을 올렸던, 바로 그 백제[百濟]의 탄현[炭峴] 지역[地域]이다.
이곳의 산[山]과 지형[地形], 지세[地勢]는, 점필재집[佔畢齋集]에서 말하는 내용과 정확[正確]히 일치[一致]하고 있다. 그리고 백제[百濟]의 충신[忠臣] 성충[成忠]과 흥수[興首]가 간언[諫言]을 올리면서 말한 대로, 험한 지형[地形]과 지세[地勢]을 지니고 있는 곳이다. 또한 수[數] 백년[百年]된 종가[宗家]에서 살고 있는 그 자손[子孫]들이, 우리의 역사[歷史]를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事實]이다.
점필재집[佔畢齋集]
고산탄현유회성충[高山炭峴。有懷成忠
고산[高山]의 탄현[炭峴]에서 성충[成忠]을 생각하며
대둔산[大芚山] 아래 세겹의 준령[峻嶺]이 있는데 大芚山下三重嶺
탄현[炭峴]이 중간에 서려 있어 적의 요충 이뤘으나 炭峴中蟠作敵衝
신라[新羅]의 오만 군대가 용이하게 통과하니 五萬東兵容易過
부여[扶餘]의 왕업이 이내 헛일이 되어 버렸네 扶餘王業旋成空
梨嶺 在炭峴東 加岾 在炭峴西
이령[梨嶺]은 탄현[炭峴]의 동[東]쪽에 있고, 가재[加岾]는 탄현[炭峴]의 서[西]쪽에 있다.
용계는 오열하고 초목은 무성한데 龍溪嗚咽樹扶疎
옛 진루가 탄현 서쪽에 아직도 남아 있네 故壘猶存炭峴西
여기에서 황산[黃山]까지 삼십 리 거리인데 此去黃山三十里
옥중에서 글 올린 성자[成子]가 가련하구나 可憐成子獄中書
대둔산[大芚山] 아래 세 개의 준령[峻嶺]이 있는데 大芚山下三重嶺,....... 탄현[炭峴]이 중간에 서려 있어 적의 요충 이뤘으나 炭峴中蟠作敵衝,........ 백제[百濟]의 탄현[炭峴]이라고 부르는 이 지역[地域]에, 탄현[炭峴]이라는 이름은 왜 생기게 되었을까 ? 한국[韓國]의 탄현[炭峴]에 대한 역사[歷史]의 설명에서는, 숯을 구웠던 곳이라, 숯 고개의 탄현[炭峴]이라는 이름이 생기게 되었다고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어떠한 역사적[歷史的] 사료[史料]를 근거[根據]로 그러한 설명[說明]을 사실[史實]처럼 말하고 있을까 ?
한국[韓國]의 사학계[史學界]는, 그저 추정[推定]과 가설[假說]로 이름만 가져다 붙이면 되는 사학[史學]이다. 대륙[大陸]에 있는 탄현[[炭峴]에는, 노천[露天] 탄광[炭鑛]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석탄광[石炭鑛]이 자리를 잡고 있다. 대나무와 일반 수목[樹木]이 우거진 지표면[地表面]에 석탄[石炭]이 나무뿌리를 바치고 수 없이 쌓여 있다. 고대[古代]의 백제시대[百濟時代]에 탄현[炭峴]이라는 지명[地名]이 붙여진 이면[裏面]에는, 그럴만한 역사[歷史]의 연유[緣由]가 반드시 존재[存在]하고 있는 것이다.
백제[百濟] 부여[扶餘]의 사비성[泗沘城]은, 대륙[大陸]의 강남[江南] 지역[地域]에 자리 잡고 있었다. 추강집[秋江集]의 부여회고십수[扶餘懷古十首] 중에서, 천고의 도읍 부여[扶餘]땅 작은 고을 되었으니 千古扶餘爲小縣,......... 강남[江南]의 봄 언덕에는 푸른 이끼 빽빽하다. 江南春岸簇莓苔,........... 성충[成忠]이 옥중에서 글 한 번 올렸으나. 成忠一上獄中書,........... 탄현[炭峴]으로 정기[旌旗]들은 순식간에 지나왔네 炭峴旌旗瞥眼過,............. 천고의 암벽에는 물결만이 일렁이는데 千古斷巖波浪裏 라고, 이렇게 부여[扶餘]의 산천[山川]과, 백제[百濟]의 역사[歷史]를 시[詩]를 통하여 노래하고 있다.
추강집[秋江集]
부여회고십수[扶餘懷古十首]
기[其] 삼[三]
소정방이 백제 멸하여 큰 재주 자랑했으나 定方滅濟誇天才
끊긴 세대 이어준 음공은 지금 어디 있던가 ? 繼絶陰功安在哉
천고의 도읍 부여[ 扶餘]땅 작은 고을 되었으니 千古扶餘爲小縣
성난 물결만이 조룡대에 부딪쳐 오르네 怒濤衝上釣龍臺
기[其] 사[四]
옥수가 노래 애잔하여 듣는 이 슬퍼하니 玉樹歌殘聽者哀
강남[江南]의 봄 언덕에는 푸른 이끼 빽빽하네 江南春岸簇莓苔
광왕은 나라 버리고 천리 밖에 돌아가니 狂王棄國歸千里
옛 사당 한 칸만이 강물 향해 열렸구나 古祠一間向水開
기[其] 오[五]
성충[成忠]이 옥중에서 글 한 번 올렸으니 成忠一上獄中書
백발의 일편단심은 늙어서도 넉넉했네 白首丹心老有餘
동문에 눈 매달아 끝내 감지 못하더니 眼掛東門終不瞑
마침내 가무 즐기던 이들 도륙 당함을 보았구나 會看歌舞化爲魚
기[其] 육[六]
삼천 궁녀 온갖 장식 누구 향해 자랑할까 粧成百寶向誰誇
탄현[炭峴]으로 정기[旌旗]들은 순식간에 지나왔네 炭峴旌旗瞥眼過
천고의 암벽에는 물결만이 일렁이는데 千古斷巖波浪裏
아리땁던 모습 이제 두견화로 피어났구나 餘姸今入杜鵑花 [중략]
대둔산[大芚山]은 반도[半島l의 전라북도[全羅北道]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륙[大陸]의 강남[江南] 지역[地域]에 있었다. 백제[百濟]의 탄현[炭峴]은 반도[半島]의 충청도[忠淸道]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朝鮮]의 호서[湖西] 지역[地域]인 대둔산[大芚山] 기슭에 있었다. 백제[百濟]의 탄현[炭峴]은, 대둔산[大芚山]에서 뻗어 내린 칼날 같은 산맥[山脈]의 주 능선[稜線]이, 수[數] 백리[百里]를 감돌며 흐르는 그 중심[中心]에 위치[位置]하고 있다.
탄현[炭峴]이 백제[百濟]의 요해지[要害地]라고 하는 것은, 백제[百濟]의 사비성[泗沘城]과 동[東]쪽에 있는 신라[新羅]와의 사이에 위치[位置] 하고 있으면서, 험한 지형[地形]과 지리적[地理的]으로 중요[重要]한 길목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칼날 같은 높은 산맥[山脈]이 가로 뻗은 중간 지역에 탄현[炭峴]이 위치[位置]하고 있어서, 이곳을 통과해야 안심하고 부여[扶餘]로 진입[進入]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지역[地域]의 이점을 지니고 있다.
성호전집[星湖全集]의 성충탄[成忠歎]에서, 좌평[佐平] 흥수[興首]가 아뢰기를, 백강[白江]은, 혹은 기벌포[伎伐浦]라고도 한다. 탄현[炭峴]은, 혹은 침현[沈峴]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우리나라의 요충지[要衝地]입니다. 병사 한사람이 창을 잡고 서서 지키면, 만[萬]명의 군사가 대적[對敵]하지 못합니다. [白江 或云伎伐浦。炭峴 或云沈峴 我國之要路也。一夫單槍。萬人莫當]라고, 말한 그러한 험한 지형[地形]과 지세[地勢]를 지니고 있는 곳이 바로 탄현[炭峴]이다.
또한, 이 지역[地域]에는, 조선[朝鮮]의 사대부[士大夫]들이 역사[歷史]의 많은 기록[記錄]들을 남겼는데, 그 기록[記錄]대로, 울창한 대나무 숲이 하늘을 가리도록 우거진 곳이 많으며, 야생[野生]의 귤[橘]나무들이 가지가 늘어지게 귤[橘]을 주렁주렁 매달고, 그 싱그러운 향기[香氣]를 뿜어내고 있다.
백제[百濟]의 고도[古都] 부여[扶餘]에는 석탄[石灘]이 있고, 의열사[義烈祠]가 있었다. 반도[半島]의 한국[韓國]에서 부여[扶餘]의 석탄[石灘]에 대해서 설명[說明]하는 것은 이렇다. 한국지명유래집 충청편, 지명, 국토지리정보원, 충청남도 부여군의 부여읍 저석리[楮石里]에 있는 나루터이다. 한글 지명으로 돌여울이라고도 한다. 석탄 또는 돌여울이라는 이름은 큰 돌이 강가에 많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이러한 해설[解說]은, 당시[當時] 그 지역[地域]에 살았던 분들이 남긴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과는 전혀 다른 설명[說明]을 하고 있다.
지금 중국[中國]의 호남성[湖南省] 소양[邵阳]에서, 북[北]쪽으로 15리[十五里]를 올라가면 부여[扶餘]의 석탄[石灘]을 만나게 된다. 백강[白江]은 부여[扶餘]를 감돌아 낙화암[落花巖]을 지나 돌아 장강[長江]으로 흘러 들어가는데, 부여[扶餘]의 바로 북[北]쪽에 석탄[石灘]이 백강[白江]과 함께 길게 늘어서 자리를 잡고 있다.
석탄[石灘]은, 푸른 물이 넘실대는 백강[白江]의 강[江]물을 옆으로 않고, 암석[巖石]으로 된 절벽[絶壁]이 길게 이어져 있어서, 지금도 석탄[石灘]의 암벽[巖壁] 아래로 나룻배들이 백강[白江]의 물을 따라 오르내리고 있다.
석탄집[石灘集]
석탄행[石灘行]
이존오[李存吾]
백제[百濟] 옛 나라 장강[長江] 구비에 百濟古國長江曲
석탄[石灘] 풍월[風月]이 주인 없는 지 몇 해이던가 ? 石灘風月閑幾年
들불이 지나간 후 벌판은 손바닥처럼 반듯한데 野火燎原平如掌
때로 누른 소 있어 묵은 밭을 가네 時有觳觫耕菑田
내가 와 정자 짓고 승경 더듬으니 我來構亭探勝景
온갖 경치 아름답게도 앞으로 몰려드네 萬景媚嫵爭來前
구름과 연기는 이무기 굴에 가물거리고 雲煙明滅蛟蛇窟
산 아지랑이는 아물아물 먼 하늘에 떴다. 山翠涳濛浮遠天
흰모래 언덕이 뚝 끊기자 거기는 갯가이더라. 白沙岸斷浦溆入
우뚝한 암석[巖石]이 줄지어 강변[江邊]에 누웠구나. 傑石邐迤橫江邊
쪽배 저어 남[南]으로 돌면 더욱 그윽하고 扁舟南轉尤裊窕
돌 난간 계수나무 기둥이 맑은 소를 굽어본다. 石欄桂柱臨澄淵
돌 부처여, 넌 의자시대[義慈時代]를 치루었으리라. 石佛應見義慈代
오직 들 두루미가 와서 참선할 뿐이로구나 唯有野鶴來參禪
생각하니, 옛날 당장이 항해해 왔을 때 憶昔唐將航海至
웅병 십 만에 북소리 둥둥 雄兵十萬鼓淵淵
도문 밖 한바탕 싸움에 나라 힘을 다 썼으나 都門一戰謾傾國
임금이 두 손 들고 묶임을 당했었다. 君王拱手被拘攣
신물[神物]도 넋이 빠져서 제자리 못 지킨 듯 神物慘淡亦不守
석면에 남은 발자취 아직도 완연하다. 石上遺蹤猶蜿蜒
낙화봉[落花峯] 아래 물결만 출렁출렁 落花峯下波浩蕩
흰 구름 천년[千年] 동안 속절없이 유연하구나. 白雲千載空悠然
삼봉집[三峯集]
석탄石灘]
정도전[鄭道傳]
석면[石面]은 쇠를 깍아 세운 듯하고 石面立削銕
여울의 흐름은 긴 무지개가 달아나는 것 같다. 灘流奔長虹
여울 머리에는 고기잡이 배가 비껴 있고 灘頭橫漁艇
여울 위에는 초가집이 서 있다 灘上寄茅宮
고인[高人]이 깨끗하고 청초[淸楚]한 병[疾]을 안고 高人抱淸疾
돌아와 그 속에 누워 있구나. 歸來臥其中 [중략]
석탄안[石灘按]
正言李存吾上書論辛旽。貶監長沙務。後居扶餘之石灘。構亭灘上。優游嘯詠。以終其身。公作此詩
정언[正言]이존오[李存吾]가 상소[上疏]하여 신돈[辛旽]을 논하다가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左遷]되었다. 그 뒤에 부여[扶餘 석탄[石灘]에 살면서, 여울 위에 정자[亭子]를 짓고 우유소영[優遊嘯咏]하여 일생을 마쳤으므로 공[公]은 이 시[詩]를 지었다.
명재유고[明齋遺稿]
오로정기[五老亭記]
扶蘇。故百濟之墟也。多名勝處。當其北注子峯下。有石灘焉。以李長沙之舊居也。至今人指點之不能忘 [중략]
부소산[扶蘇山]은 옛 백제[百濟]의 유허[遺墟]이다. 이곳에 명승지[名勝地]가 많이 있지만 그 북[北]쪽 주자봉[注子峰] 아래에 석탄[石灘]이란 곳이 유명하다. 장사감무[長沙監務] 이존오[李存吾]가 옛날에 거처했던 곳이라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잊지 않고 그 때의 일을 말한다. [중략]
注子一峯。臨江斗斷。前挹蒼巖。後顧皐蘭。而東西大野。眼界最闊。我叔父靑林翁。得之。爲亭於其上。見之者以爲沿江上下數十里。此可爲甲乙焉
깎아지른 듯한 주자봉[注子峰]이 백마강[白馬江]에 임해 있는데, 그 앞으로는 창암[蒼巖]이 멀리 보이고 뒤를 돌아보면 고란사[臯蘭寺]가 있다. 그리고 동서[東西]로는 너른 들이 펼쳐져 있어 시야가 탁 트였다. 우리 숙부[叔父]이신 청림옹[靑林翁]이 이곳에 땅을 구해서 그 위에 정자[亭子]를 지으려 하자, 이를 본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강안[江岸]을 따라 수[數] 십리[十里]를 오르내려 보아도 이만한 곳이 드물다. 하였다. [중략]
백제[百濟]로부터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에 이르기까지, 부여[扶餘]의 석탄[石 灘]은, 본래의 그 자리에서, 본래의 그 자연[自然]의 경관[景觀]을 지닌 채,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명재유고[明齋遺稿]의 오로정기[五老亭記]에서는, 그 북[北]쪽 주자봉[注子峰] 아래에 석탄[石灘]이란 곳이 유명하다........... 장사감무[長沙監務] 이존오[李存吾]가 옛날에 거처했던 곳이라.......... 깎아지른 듯한 주자봉[注子峰]이 백마강[白馬江]에 임해 있는데, 라고, 부여[扶餘] 석탄[石灘]의 승경[勝景]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삼봉집[三峯集]의 석탄石灘]에 대한 시[詩]에서, 정도전[鄭道傳]선생은, 부여[扶餘]의 석탄[石灘]에 대하여, 직접 보고 말하는 것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백제[百濟] 부여[扶餘]의 석탄[石灘]은, 일반적인 설명[說明]대로 강상[江上]에 큰 돌들이 많아 석탄[石灘] 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부여[扶餘]를 지나는 백강[白江]의 연안[沿岸]에 깍아지른 절벽[絶壁]의 암석[巖石]이 하나로 길게 이어져 있는 곳이 있고, 백마강[白馬江]의 물결이 그 절벽[絶壁]으로 된 암석[巖石]을 감돌고 치며 굽어 장강[長江]으로 흘러 들어간다.
정도전[鄭道傳]의 삼봉집[三峯集]에서, 석면[石面]은 쇠를 깍아 세운 듯하고 石面立削銕,......... 여울의 흐름은 긴 무지개가 달아나는 것 같다. 灘流奔長虹,......... 여울 머리에는 고기잡이 배가 비껴 있고 灘頭橫漁艇 라고, 부여[扶餘] 석탄[石灘]의 풍경[風景]에 대하여 시[詩]를 통하여 말하고 있는데, 석탄[石灘]의 자연[自然]과 풍경[風景]을 그림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지금도 석탄[石灘]을 오르내리며 물고기를 잡으려고 작은 배들이 백강[白江]위에 떠 있는 풍경[風景]은, 당시[當時]의 역사[歷史]에서 말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고려[高麗] 말엽[末葉]의 충절[忠節]인 정언[正言] 이존오[李存吾]가,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左遷]되어, 백제[百濟] 사비[泗沘]의 석탄[石灘]에 거주 하면서 지은 석탄행[石灘行]은, 백제[百濟]의 부여[扶餘]는 대륙[大陸]의 강남[江南] 지역[地域]에 있었음을 다시 한 번 증명[證明]하고 있다.
백제[百濟] 옛 나라 장강[長江] 구비에 百濟古國長江曲,.......... 석탄[石灘] 풍월[風月]이 주인 없는 지 몇 해이던가 ? 石灘風月閑幾年,.......... 우뚝한 암석[巖石]이 줄지어 강변[江邊]에 누웠구나. 傑石邐迤橫江邊,.......... 쪽배 저어 남[南]으로 돌면 더욱 그윽하고 扁舟南轉尤裊窕........... 돌 난간 계수나무 기둥이 맑은 소를 굽어본다. 石欄桂柱臨澄淵,......... 돌 부처여, 넌 의자시대[義慈時代]를 치루었으리라. 石佛應見義慈代,......... 이러한 곳에 백제[百濟] 부여[扶餘]의 석탄[石灘]은, 백제[百濟]로부터, 고려[高麗], 조선[朝鮮]을 거치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본래의 그 자리에서 조선사[朝鮮史] 역사[歷史]의 흐름을 지켜보고 있다.
이곳 석탄[石灘]이 있는 곳에서 남[南]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左遷]되어, 그 곳에서 생애[生涯]를 마친 정언[正言] 이존오[李存吾]의 정문[㫌門]이 지금도 원형[原形]을 유지하고 남아 있다. 그 정문[旌門]에 대한 유래[由來]를 물어보니, 먼 옛날 선조[先祖]에 선조[先祖]의 아버지 때의 정문[旌門]이라고 한다.
현지[現地] 사람들은 이 정문[旌門]을 이가[李家]의 정문[旌門]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수[數] 백년[百年]전에 나라에서 내린 문[門]이라고 한다. 이 정문[旌門]은 붉은색과 검은색을 사용하여 단청[丹靑]을 했고, 기둥과 문틀, 지붕과 처마의 형태[形態]는, 조선[朝鮮] 전통[傳統]의 고건축[古建築] 사당[祠堂]의 양식이다. 지금은 시대[時代]가 변하고, 나라가 바뀌어 있어서, 이 정문[旌門]에 대한 설명[說明]도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분명[分明]한 것은, 그 전하는 말들이 비록 차이는 있으나, 역사[歷史]의 맥락[脈絡]은 다르지 않다. 훗날 이 정문[旌門]에 대하여 소상히 아는 분이 있어, 그 정문[旌門]의 내력을 적은 서신[書信]을 보내왔다. 그 서신[書信]의 말미에, 현지[現地]에서 이가[李家]의 문[門]이라고 하는 그 홍문[紅門]은, 고려[高麗] 충신[忠臣]의 정문[旌門]이 맞으며, 부여[扶餘]의 의열사[義烈祠]에 봉안[奉安] 되었던 분이 그 홍문[紅門]이 있는 집에서 세상[世上]을 떠났다고 했다.
서애집[西厓集]의 의열사기[義烈祠記]에서, 부여[扶餘]는 옛 백제[百濟]가 도읍[都邑]한 터이다. [扶餘 古百濟氏之墟也], 고려[高麗] 말엽에 정언[正言] 이존오[李存吾]가 글을 올려 간사한 무리를 배척하자 장사감무[長沙監務]로 폄직되었다. [高麗氏之季。李正言存吾奮章斥姧。貶爲長沙監務], 현[縣]의 북[北]쪽 10리[十里]에 있는 석탄[石灘]은 실로 이씨[李氏]가 예전에 살던 곳으로 정문[旌門]이 남아 있다. [縣北十里石灘。實李氏舊居有㫌門在焉]라고 하였다.
고려[高麗] 말엽[末葉]의 청고[淸高]한 정언[正言] 이존오[李存吾]의 정문[旌門]은, 대륙[大陸]의 남방[南方] 지역[地域]인 강남[江南]의 시골 농촌에 있는 농가[農家]의 대문[大門]으로 남아서, 그 지역[地域] 사람들의 고사[古史]가 되고 있다.
석탄[石灘] 풍월[風月]에, 정언[正言]의 주인[主人]이 간지는 몇해 이던가 ? 반도[半島]의 역사[歷史] 왜곡[歪曲]을, 석탄[石灘] 풍월[風月]의 정언[正言]이 지켜 보고 있다면, 청사[淸士]에 길이 빛나는 충절[忠節]의 드높은 그 절의[節義]는, 청천[靑天]의 백일[白日]을 가르고 후세[後世]들에게 내리는 호령[號令]은, 천하[天下]를 뒤흔들고 진동[震動] 시킬 것이다.
서애집[西厓集]
의열사기[義烈祠記]
扶餘。古百濟氏之墟也。其臣有以直諫死者曰佐平成忠。有阨竆無怨。臨危獻忠者曰佐平興首。有捐生抗節。以死衛國者曰將軍階伯 [중략]
부여[扶餘]는 옛 백제[百濟]가 도읍[都邑]한 터이다. 그 신하[臣下]들 중에 죽음으로써 직간한 사람은 좌평[佐平] 성충[成忠]이요, 재앙[災殃]을 치르면서도 원망[怨望]함이 없이 위험[危險]을 무릅쓰며 충성[忠誠]을 다한 사람은 좌평[佐平] 흥수[興首]요, 생명[生命]을 버리고 충절[忠節]로써 나라를 지킨 사람은 장군[將軍] 계백[階伯]이었다. [중략]
其後七百餘年高麗氏之季。李正言存吾奮章斥姧。貶爲長沙監務。縣北十里石灘。實李氏舊居。有㫌門在焉 [중략]
그 뒤로 7백여년[七百餘年]이 흐른 뒤 고려[高麗] 말엽에 정언[正言] 이존오[李存吾]가 글을 올려 간사한 무리를 배척하자 장사감무[長沙監務]로 폄직되었다. 현[縣]의 북[北]쪽 10리[十里]에 있는 석탄[石灘]은 실로 이씨[李氏]가 예전에 살던 곳으로 정문[旌門]이 남아 있다. [중략]
至今遺民故老。往往道其風烈。而俎豆尸祝之典。闕焉莫之擧。甚爲一縣民吏之羞 [중략]
지금도 유민[遺民]과 고로[故老]들이 종종 그 풍채[風采]와 덕업[德業]을 일러 오면서 제사[祭祀]는 빠뜨리고 거행하지 않아 현[縣]의 백성[百姓]들과 관리[官吏]들이 크게 수치[羞恥]로 여겨 오던 터였다. [중략]
萬曆乙亥 余友洪侯興道。受命分符于玆邑。旣至。於簿領文案之暇。考圖披牒。得四人者。慨然發歎曰。此寧非爲守者責也。乃謀於一縣父老。圖爲祠▣▣地 [중략]
만력[萬曆] 을해년[乙亥年]에 나의 벗이며, 후[侯]인 홍흥도[洪興道]가 명[命]을 받아 이 읍[邑]에 부임하게 되었다. 얼마 지나서 부서[簿書]와 문안[文案]을 정리하는 여가에 지도[地圖]를 참고하고 역사[歷史]를 열람하다가 네[四] 사람에 대한 기록[記錄]을 발견하고는 길이 탄식[歎息]하면서 “아, 이것이 어찌 수령[守令]된 사람의 책임[責任]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이에 현[縣의 부로[父老]들과 상의한 결과 사당[祠堂] 건립[建立]을 도모하게 되었다. [중략]
得望月山,敬龍山之北。山盤水抱。境高勢豁。允宜妥靈之所。於是。興道捐俸節廩。召募游手。役不煩民。數月訖功 [중략]
망월산[望月山], 경룡산[敬龍山] 북[北]쪽에 자리 잡은 사당[祠堂]은 산[山]에 서리었고 강[江]물이 둘러 안았다. 그 경계[境界]가 높아 형세[形勢]가 활짝 틔었으니, 참으로 신령[神靈]을 모시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에 홍흥도[洪興道]는 자기 봉록에서 덜어 내고 물자를 절약하여 일 없는 사람을 불러 모아 일을 시키니 농민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도 수개월 만에 일을 마치게 되었다. [중략]
廟成。率吏民享之。旣而事聞于朝。上嘉之。命賜額曰義烈祠。所以樹風聲而垂後範也 [중략]
사묘[祠廟]가 완성되자 관리[官吏]들과 고을 백성[百姓]들을 거느리고 제사[祭祀]를 모셨다. 얼마 후에 이 일이 조정[朝廷]에까지 알려져 상[上]께서 가상히 여기고 명[命]하여 의열사[義烈祠]라는 편액[扁額]을 하사하시니, 나라 안에 좋은 풍속[風俗]을 심어서 후대[後代]에 길이 모범[模範]을 드리우고자 함이었다. [중략]
廟凡三間。齋廚俱備。又作觀善堂於其側。爲士子藏修之地。分官田以供祀事。募居民以守之。董其役者。邑人徐龜壽云 [중략]
사묘[祠廟]의 구조는 3간[三間]인데, 재실[齋室]과 부엌이 함께 갖추어졌다. 또한 그 옆에 관선당[觀善堂]을 지어 선비들이 학문[學文]갈고 닦으며 수신[修身]하는 곳으로 삼았고, 관전[官田]을 나누어 제사[祭祀]를 받들게 하였으며, 주민을 모집하여 지키게 하였다. 그 공역[工役]맡은 사람은, 읍인[邑人] 서귀수[徐龜壽]라고 한다. [중략]
萬曆辛巳孟夏。通政大夫弘文館副提學。知製敎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柳成龍記
만력[萬曆] 신사년[辛巳年] 초여름에 통정대부[通政大夫] 홍문관부제학지제교겸경연참찬관[弘文館副提學知製敎兼經筵參贊官] 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 유성룡[柳成龍]은 기록[記錄] 한다. [중략]
갈암집[葛庵集]
시장[諡狀]
奮忠出氣合謀迪毅淸難功臣,崇政大夫。行刑曹判書,五衛都摠府都摠管,寧原君。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世子傅,寧原府院君晩全洪公諡狀
분충출기합모적의청난 공신[奮忠出氣合謀迪毅淸難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행형조판서 오위도총부도총관[行刑曹判書五衛都摠府都摠管] 영원군[寧原君] 증[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사 세자부(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世子傅] 영원부원군[寧原府院君] 만전[晩全] 홍공[洪公] 시장
辛未。有薦者。除康陵參奉。甲戌。以才行卓異。超授禮賓主簿。俄薦刑曹佐郞 [중략]
신미년[辛未年에 추천해 주는 자가 있어서 강릉 참봉[康陵參奉]에 제수되었다. 갑술년[甲戌年]에는, 재행[才行]이 탁이[卓異]하다고 하여 예빈시 주부[禮賓寺主簿]에 초수[超授]되었다가 곧 형조좌랑[刑曹佐郞]에 추천되었다. [중략]
是年秋。出知扶餘縣事。治邑。以淸簡愛民爲主。餘暇讀書。奬勵邑中子弟。旁邑士子有欲來學者。受而舍之。親爲講畫。多所成就 [중략]
이해 가을에 부여현감[扶餘縣監]으로 나갔는데, 고을을 다스림에 청간[淸簡]과 애민[愛民]을 우선하였다. 여가에는 독서[讀書]를 하면서 읍중[邑中]의 자제[子弟]들을 장려하였는데, 이웃 고을의 선비들이라도 와서 배우고자 하는 경우가 있으면 받아들여 거처하게 하면서 친히 강독[講讀]을 해 주니, 성취한 자가 많았다. [중략]
縣百濟舊都也。爲立百濟忠臣成忠,興首,階伯祠。高麗正言李存吾斥辛旽。亦嘗謫居於此。因並腏享之。事聞。賜額以義烈 [중략]
부여현[扶餘縣]은 백제[百濟]의 옛 도읍지[都邑地]지였으므로, 백제[百濟]의 충신[忠臣]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의 사당[祠堂]을 세워 주었는데, 고려[高麗]의 정언[正言] 이존오[李存吾]가 신돈[辛旽]을 배척하다가 또한 이곳에 유배[流配]된 적이 있으므로, 그곳에 함께 제향[祭享]하였다. 일이 조정[朝廷]에 알려지자 의열사[義烈祠]라고 사액[賜額]되었다. [중략]
作小屋落花巖畔。榜曰吏隱。時從一二學子。逍遙以自適。瓜將滿。以持平召。邑民相率借寇。旣不得請。則立石鑱歌詩。以美其政 [중략]
낙화암[落花巖]가에 조그만 집을 짓고, 이은[吏隱]이 라고 제[題]하였다. 때로 한두 학생들과 소요[逍遙]하면서 자적[自適]하였는데, 임기[任期]가 만료[滿了]되어 지평[持平]으로 부름을 받았다. 고을 백성[百姓]들이 모두들 유임[留任]을 청[請]하였으나 되지 않자 비[碑]를 세우고 노래를 새겨, 그 정사[政事]를 찬미[讚美]하였다. [중략]
부여[扶餘]의 사비성[泗沘城]은, 지금도 수[數] 천년[千年]의 풍파[風波]를 이겨내고, 백강[白江]의 연안[沿岸]을 따라 길게 남아 있어서, 넘실대는 백강[白江]의 물이 성벽[城壁]을 치는, 그 옛날 백제[百濟] 고도[古都]의 모습을 그려보게 하고 있다. 이 사비성[泗沘城]의 동[東]쪽에는 한 줄기의 산[山]이 길게 뻗어 소양시[邵阳市]를 내려다보며, 감아 돌고 있다. 이 산[山]위에 오르면, 부여[扶餘]의 사비성[泗沘城]과, 사비성[泗沘城]을 감돌며 유유히 흘러가는 백강[白江]의 정경[情景]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산[山] 능선[稜線]의 남[南]쪽 산[山]위에, 부여[扶餘] 역사[歷史]의 의열사[義烈祠]가 자라잡고 있다. 서애집[西厓集]의 의열사기[義烈祠記]에서, 망월산[望月山]과 경룡산[敬龍山] 북[北]쪽에 자리 잡은 사당[祠堂]은, 산[山]에 서리었고, 강[江]물이 둘러 않았다. 그 경계[境界]가 높아 형세[形勢]가 활짝 틔었으니, 참으로 신령[神靈]을 모시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得望月山,敬龍山之北。山盤水抱。境高勢豁。允宜妥靈之所]라고, 기록[記錄]하고 있는데, 지금은 옥청궁[玉清宫]으로 이름이 바뀌어져 있다. 이 옥청궁[玉清宫]에는 비록 이름은 적혀 있지 않으나, 백제[百濟]의 충신[忠臣]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의 영관전[靈官殿]이, 당시[當時]의 원형[原形] 그대로 보존[保存]이 되어 있다.
지금은 지명[地名]이 바뀌어 사호산[佘湖山]으로 부르고 있으나, 이 산[山]은, 망월산[望月山]과 경룡산[敬龍山]이다. 이 옥청궁[玉清宫]의 위치[位置]나 구조, 자연[自然]의 산천[山川]과 지세[地勢]등이, 의열사기[義烈祠記]의 기록[記錄]과 한 치의 차이도 없다. 이와 더불어 조선사[朝鮮史] 역사[歷史]의 여러 문집[文集]에서 설명[說明]하고 있는 의열사[義烈祠]에 대한 기록[記錄]들과 모두 일치[一致]하고 있으며, 영관전[靈官殿]에 모셔져 있는 분들이 이를 증명[證明]하고 있다.
백제[百濟]의 충신[忠臣]과 석탄[石灘] 이존오[李存吾]를 모신 의열사[義烈祠]는, 비록 옥청궁[玉清宫]이 되어 있으나, 제후[諸侯]였던 홍흥도[洪興道]가 건립[建立]한 그 뜻은, 나라가 바뀐 지금도 그 지역[地域]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影響]을 미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옥청궁[玉清宫]의 정전[正殿]은, 성제전[聖帝殿]으로 편액[扁額]이 바뀌어져 있다. 성제전[聖帝殿]의 중앙[中央]에는 태극[太極]을 가슴에 그린, 성제[聖帝]의 상[像]이 모셔져 있다.
부여성[扶餘城]에는, 백제[百濟]의 왕[王]들이 연못을 파고 동산을 만들어 향락[享樂]의 극치를 다했던 역사[歷史]속의 그 연못이, 지금도 사비성[泗沘城]의 남[南]쪽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규모가 대단히 크다. 망국[亡國]의 한[恨]이 서린 이 연못은, 옛 백제[百濟]의 영화[榮華]를 뒤로하고, 부여[扶餘]의 후손[後孫]들인 소양[邵阳] 시민[市民]들의 아름다운 공원[公園]이 되어 있다.
부여[扶餘]의 사비성[泗沘城]은, 붉은 돌과 흰돌을 섞어서 성벽[城壁]을 쌓고, 성벽[城壁]위에는 구운 벽돌로 쌓았다. 현재[現在] 두 개의 성문[城門]과 백강[白江]에 잇닿아 있는 성곽[城郭]은, 원형[原形]을 그대로 보존[保存]하고 있다. 부여[扶餘]의 성곽[城郭]을 보면 그 견고[堅固]함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백제[百濟]의 깊은 역사[歷史]만큼이나, 수[數] 천년[千年]의 풍상[風霜]을 겪어온 고풍[古風]스러운 모습은, 보는 이의 눈과 마음을 저리게 하고 있다.
부여[扶餘]의 사비성[泗沘城]은, 현재[現在] 남아 있는 성곽[城郭]만을 보더라도,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 기록[記錄]과 같이, 백강[白江]의 연안[沿岸]에 세워진 웅장[雄壯]하고 견고[堅固]하며 대단히 규모가 큰 성[城]이었다.
삼탄집三灘集]
백강회고[白江懷古]
장강[長江]은 쉬지 않고 끝없이 흐르나니 長江流衮衮
만고[萬古]의 외로운 성[城] 감싸고 있구나. 萬古抱孤城
성조[聖祖]께서는 힘써 왕업[王業]을 열었는데 聖祖勤開業
못난 후손들 전쟁을 좋아 하였네 孱孫喜黷兵
금성탕지[金城湯池] 믿기 어렵거니와 金湯難可恃
사직[社稷] 먼저 무너졌구나. 社稷最先傾
말 세우고 남은 유적[遺迹] 찾아보거니 立馬訪遺迹
슬픈 바람 나를 위해 울어주누나 悲風爲我鳴 [중략]
우[又]
천추[千秋]토록 남아 있는 조룡석 千秋釣龍石
한 조각의 돌로 남은 낙화암[落花巖] 一片落花巖
변방에선 전란 먼지 일어나는데 塞上兵塵合
궁중[宮中]에선 취한 꿈이 달고 달았다. 宮中醉夢酣
의관은 모두 새와 같이 흩어졌으니 衣冠如鳥散
구슬 비취 물고기와 같이 잠겼도다. 珠翠效魚潛
성충[成忠]의 좋은 계책 쓰지 못했으니 不用成忠計
공연히 만고[萬古]의 수치만을 길이 남겼구나. 空留萬古慙 [중략]
동명집[東溟集]
백마강회고칠수[白馬江懷古七首]
천년[千年] 전[前]의 옛 나라는 강물 동[東]쪽 있거니와 舊國千年江水東
어느 곳에 의자궁이[義慈宮] 있었는지 모르겠구나. 不知何處義慈宮
궁녀들 바위에서 떨어지는 낙화[落花]의 꽃잎 같이 갔거니 宮中紅粉巖花落
강상[江上] 위 푸른 산에는 밝은 달만 뜨는구나 江上靑山明月空 [중략]
푸른 바다 조수 물은 백마진[白馬津]과 통하는데 滄海潮通白馬津
낙화암[落花巖]은 큰 강[江]가에 바짝 붙어 솟아 있네 落花巖枕大江濱 [중략]
이공의 그 높은 이름 해나 별과 다투거니 李公高名爭日星
지금도 사람들은 술 깬 대부 생각한다. 至今人憶大夫醒
장강[長江]의 깊은 물은 동[東]쪽으로 흐르나니 長江湛湛東流去
백강[白江] 위 단풍나무 숲은 저절로 푸르구나 江上楓林空自靑 [중략]
백강[白江]의 상류[上流]에는, 백마산[白馬山]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산[山]에는, 백마산사묘[白马山寺庙]가 있는데, 그 역사[歷史]가 수[數] 천년[千年]은 되었다고 하니, 백제[百濟]의 역사[歷史]와 무관[無關]하지 않을 것이다. 부여[扶餘]의 백강[白江]은, 백강[白江]으로 들어가는 3개의 큰 강[江]줄기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이 백마산[白馬山]에서 발원[發源]하고 있다. 우리 역사[歷史]가 전[傳]해오는 문집[文集]들의 기록[記錄]에서, 부여[扶餘]는 3하수[三河水]가 합쳐지는 곳에, 사비성[泗沘城]이 우뚝하다고 했는데, 바로 이 세 줄기의 강수[江水]를 두고 이른 말이다.
백마강[白馬江]은, 부여[扶餘]를 감아 돌며 흐르다가 장강[長江]으로 흘러 들어간다. 금강[錦江]이 백마강[白馬江]이라고 하는 것은, 반도사관[半島史觀]의 주장[主張]일 뿐이다. 금강[錦江]과 백마강[白馬江]은, 하류[下流]에서 서로 합류[合流]하여 같이 장강[長江]으로 들어가고 있으나, 그 발원[發源]하는 곳과 물줄기가 다른 강[江]이다.
백강[白江]과 금강[錦江]은, 동[東]쪽으로 흐르는 강[江]이다. 모두 장강[長江]의 상류[上流]이며, 금강[錦江]은 계룡산[鷄龍山]]의 서남[西南]쪽과 계룡산[鷄龍山]의 남[南]쪽을 돌아 흐른다.
동명집[東溟集]의 백마강회고칠수[白馬江懷古七首]에서, 장강[長江]의 깊은 물은 동[東]쪽으로 흐르나니 長江湛湛東流去,......... 백강[白江] 위 단풍나무 숲은 저절로 푸르구나 江上楓林空自靑 라고 하였는데, 백제[百濟]의 백강[白江]과 금강[錦江]은, 근세[近世]의 조선[朝鮮]까지 동[東]쪽으로 도도히 흘러갔다.
백강[白江]과 금강[錦江]은, 장강[長江]의 상류[上流]가 된다. 그러므로 삼탄집三灘集]의 백강회고[白江懷古]에서도, 장강[長江]은 쉬지 않고 끝없이 흐르나니 長江流衮衮,............. 만고[萬古]의 외로운 성[城] 감싸고 있구나. 萬古抱孤城 라고, 한 것이다. 백제[百濟] 부여[扶餘]의 사비성[泗沘城]은, 바로 이러한 곳에 위치[位置]하고 있었다.
이 지역[地域] 일대의 중요[重要]한 지명[地名]에는, 백[白]자가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왜 이렇게 백[白]자가 들어간 지명[地名]이 많을까 ? 이러한 것은 그만큼 백[白]자와, 역사[歷史]의 연원[淵源]이 깊은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백강[白江]의 물이, 부여[扶餘] 사비[泗沘]의 철옹성[鐵甕城]을 감싸않고 도는 북[北]쪽 머리에, 백마강[白馬江]의 낙화암[落花巖]이 솟아 있다.
존재집[存齋集]
고란사동각차김삼연운[臯蘭寺東閣次金三淵韻]
위태로운 바위 옆 높은 난간 하늘 반쯤 기댔고 巖畔危欄倚半天
화려한 시절 그 때의 일은 낙화[落花] 전[前]이었구나. 繁華時事落花前
상전벽해 뒤에 나그네가 우두커니 서 있으니 遊人佇立滄桑後
노목[老木]과 한기 가득한 절벽의 강물 달빛만 가득하다. 老木寒崖月一川
존재집(存齋集)
부여회고기묘[扶餘懷古 己卯]
낙화암[落花巖] 위에는 풀들만 우거지고 落花巖上草離離
황폐한 성[城] 버들에는 뒤 늦은 꾀꼬리 소리 踈柳荒城啼晩鸝
천고[千古]의 흥망[興亡]에 한[恨]은 끝도 없구나. 千古興亡無限恨
만강[滿江]에 춘수[春水]만이 질펀하도다. 滿江春水日斜時
사가집[四佳集]
부여회고[扶餘懷古]
사자[泗泚]의 산하는 나라 이미 텅 비었어라. 泗泚山河國已墟
삼한[三韓]의 지난 일 슬픔만이 밀려온다. 三韓往事重唏噓
맑디맑은 웅강[熊江]에 갈매기 소리 없이 졸고 熊江白白鷗眠靜
푸르른 계룡산[鷄龍山]엔 기러기 그림자 듬성 하구나. 鷄岫蒼蒼雁影疎
차가운 달빛 높은 누대는 용[龍]을 낚은 뒤요 冷月高臺釣龍後
쓸쓸한 바람 위태로운 바위는 낙화[落花]의 나머지로다. 凄風危石落花餘
건곤[乾坤]을 우러르며 영웅[英雄]의 한[恨]을 새기면서 乾坤俯仰英雄恨
석양의 외론 배 가는 대로 맡겨두노라 薄暮孤舟信所如
백제[百濟]의 사비성[泗沘城]이 함락될 때, 삼천[三千]의 궁녀[宮女]가 백강[白江]의 암벽[巖壁]에서, 당[唐]나라 군사[軍士]의 치욕[恥辱]을 피하기 위하여, 백강[白江]으로 몸을 던지는 그 모습이 바람에 날리는 꽃잎과 같아서, 낙화암[落花巖]이라는 이름이 생기게 되었다고 하였는가 ?
낙화암[落花巖]은 부소산[扶蘇山]에 있고, 사비성[泗沘城]이 부소산성[扶蘇山城]이라는 반도사관[半島史觀]의 주장[主張]은, 백제[百濟]를 능멸[凌蔑]하고 모독[冒瀆]하는 것이다.
동명집[東溟集]의 백마강회고칠수[白馬江懷古七首]에서, 푸른 바다 조수 물은 백마진[白馬津]과 통하는데 滄海潮通白馬津,.......... 낙화암[落花巖]은 큰 강[江]가에 바짝 붙어 솟아 있구나. 落花巖枕大江濱 라고, 낙화암[落花巖]의 위치[位置]와 경관[景觀]에 대하여 시[詩]를 통하여 노래하고 있다. 현재[現在] 남아 있는 사비성[泗沘城]의 성루[城樓]에서, 낙화암[落花巖]을 바라보면, 시[詩]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백강[白江]이 사비성[泗沘城]을 굽이돌아 흘러가는 강[江]물 옆으로 불쑥 솟아 우뚝하다.
백강[白江]이 사비성[泗沘城]을 돌아 흐르는 바로 북[北]쪽으로, 암석[巖石]이 박힌 작은 산[山]이 솟아 있고, 백강[白江]의 강[江]물을 내려다보며, 동산 같은 암석[巖石]이 절벽[絶壁]을 이루며 솟아 있다. 현재[現在] 이 암벽[巖壁]위에는, 날아 갈 듯한 정자[亭子]를 지어 놓았다. 그리고 작은 산[山]위에는, 관성전[关圣殿]이라는, 고 건축[建築]의 건물이 세워져 있다. 지금 이 곳은, 쌍청공원[双清公园]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쌍청공원[双清公园]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백제[百濟] 부여[扶餘]의 낙화암[落花巖]이다.
사비성[泗沘城]과 낙화암[落花巖]에 대하여,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의 부여회고[扶餘懷古]에서는,.......... 부여[扶餘] 반월성[半月城]의 북[北]쪽에 낙화암[落花岩]이 있다. [扶餘半月城北。有落花岩]고 했다. 반도[半島]에 있는 부여[扶餘]의 낙화암[落花巖]도, 부여[扶餘]의 북[北]쪽에 있다. 그러나 반도[半島]의 낙화암[落花巖]은, 부소산[扶蘇山]의 절벽[絶壁]이다. 이름하여 부소산[扶蘇山]의 낙화암[落花巖]인데,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 기록[記錄]들은, 낙화암[落花巖]은 부소산[扶蘇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비성[泗沘城]과 인접한 백강[白江]에 있는 것이고, 부소산[扶蘇山]은, 부여[扶餘]의 서[西]쪽에 있으며, 대령[大嶺]을 이루고 있는 큰 산[山]이라고 말하고 있다.
부여[扶餘]의 부소산[扶蘇山]에 대하여,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의 부여회고[扶餘懷古]에서, 소산[蘇山]과 궁궐[宮闕]이 어우러져 드높은데 蘇山宮闕鬱嵯峨,........ 꽃같이 고운 궁녀 그 즐거움 어땠으랴 宮女如花奈樂何 라고 하고, 부소산[扶蘇山]은 부여[扶餘]의 서[西]쪽에 있다. [扶蘇山在扶餘西]고 했는데, 조선사[朝鮮史]의 다른 역사[歷史] 기록[記錄]도, 이와 같다. 다산[茶山] 선생은, 당시[當時]에 백제[百濟]의 부여[扶餘]를 여러 번 오고가신 분이다.
가정집[稼亭集]
부여 회고[扶餘懷古]
청구가 수기[秀氣]에 배태해 황하[黃河]에 응하면서 靑丘孕秀應黃河
온왕[溫王]이 동명[東明]의 가문에서 탄생하였나니 溫王生自東明家
부소산[扶蘇山] 아래로 옮겨 와 나라를 세울 적에 扶蘇山下徙立國
상서[祥瑞]로운 기적들이 그 얼마나 많았던가? 奇祥異蹟何其多
인재들이 즐비하고 문물이 성대하여 衣冠濟濟文物盛
틈을 엿봐 신라까지 합치려고 하였는데 潛圖伺隙幷新羅
못난 자손들이 덕을 제대로 잇지 못해 在後孱孫不嗣德
고대광실 아로새기며 사치를 일삼았네 雕墻峻宇紛奢華
하루아침에 견고한 성이 허망하게 무너지자 一旦金城如解瓦
천척[千尺] 푸른 바위에 낙화[落花]의 이름이 붙었나니 千尺翠岩名落花
공후[公侯]의 동산에는 농부가 씨 뿌려 밭을 갈고 野人耕種公侯園
깨어진 비석 곁에는 동타[銅駝]가 파묻혔어라 殘碑側畔埋銅駝
내 와서 고적 찾다 문득 흘리는 눈물이여 我來訪古輒拭淚
옛일은 어부와 초동의 노래 속에 들었는데 古事盡入漁樵歌
천 년의 서기[瑞氣]는 땅을 씻은 듯 없어지고 千年佳氣掃地盡
조룡대[釣龍臺] 아래 강물만 혼자서 출렁이는구나 釣龍臺下江自波
어찌 백제[百濟] 부여[扶餘]의 부소산[扶蘇山]이, 백강[白江]가의 조그마한 야산[野山]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 백제[百濟]는 시조[始祖]부터 대륙[大陸]에서 태어나고, 대륙[大陸]에서 나라를 열었다. 가정집[稼亭集]의 부여 회고[扶餘懷古]는, 청구가 수기[秀氣]에 배태해 황하[黃河]에 응하면서 靑丘孕秀應黃河,.......... 온왕[溫王]이 동명[東明]의 가문에서 탄생하였나니 溫王生自東明家,.......... 부소산[扶蘇山] 아래로 옮겨 와 나라를 세울 적에 扶蘇山下徙立國,......... 상서[祥瑞]로운 기적들이 그 얼마나 많았던가? 奇祥異蹟何其多 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한반도[韓半島]의 백제[百濟]를 가리키는 것인가 ?
금역당집[琴易堂集]
연기현 연자루 중수 기[燕岐縣燕子樓重修記]
遂相與執手而登廳之南樓以眺望焉。其東則西原也。地靈人傑。出將入相。圖形於煙閣雲臺者踵相接 [중략]
마침내 서로 손을 잡고 관청[官廳]의 남[南]쪽 누각[樓閣]에 올라가서 주위를 조망[眺望]하였다. 그 동[東]쪽은 서원[西原]이니 땅은 영험[靈驗]하고 인물은 걸출하여 나가서는 명장[名將]이요 들어와서는 재상[宰相]이 되어 연각[煙閣]과 운대[雲臺]에 그려진 인물들이 줄지어 나온다. [중략]
其西則熊津也。劉,蘇兩將。約羅滅濟。設府鎭民。而山川形勢。爲東方最。其南則扶蘇,落花。培塿於雲外 [중략]
그 서[西]쪽은 웅진[熊津]이니, 유[劉], 소[蘇] 두 장수가 신라[新羅]와 약조하여 백제[百濟]를 멸[滅]하고 관부[官府]를 설치하여 백성[百姓]을 진정[鎭定]시켰는데, 산천[山川]의 형세[形勢]는 동방[東方]에서 제일이다. 그 남[南]쪽은 부소[扶蘇]와 낙화[落花]이니, 운외[雲外]의 작은 언덕이다. [중략]
其北則白岳,木覔。鬱蔥於天末。而興亡之跡。了然於目。所以感遊子之懷而增志士之慨者。不一而足。相目大笑。洗盞更酌。月落參橫而罷。
그 북[北]쪽은 백악[白岳]과 목멱[木覔]이니, 하늘 끝까지 성대하다. 흥망[興亡]의 자취가 한눈에 환히 들어와서 나그네의 감회[感懷]를 느끼게 하고 지사[志士]의 탄식[歎息]을 더하게 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서로 바라보고 크게 웃으며 술잔을 씻고 다시 따르니, 달 지고 별 비끼는 새벽에야 파하였다. [중략]
申侯名景洛。余同年友也。其割鷄餘才。蓋將以建名立功於萬里之外。豈止一官舍之重修而已。厥明。遂第次昨日陳跡而爲之記 [중략]
신후[申侯]의 이름은 경락[景洛]이고, 나와는 동년[同年]의 벗이다. 작은 일을 하기에는 재능[才能]이 넘치는 사람이다. 장차 만리[萬里]밖까지 이름을 알리고 공적[功績]을 세울 것이니, 어찌 관사[官舍] 한 채의 중수[重修]에 그칠 뿐이겠는가 ? 다음날, 그 전일의 일을 순서대로 기록[記錄]한다. [중략]
세 줄기의 큰 강수[江水]가 합쳐지는 백강[白江]의 물은, 부소산[扶蘇山]과 백마산[白馬山]에서 그 두 줄기가 발원[發源]하여 사비성[泗沘城]으로 흘러 들어온다.
금역당집[琴易堂集]의 연기현 연자루 중수 기[燕岐縣燕子樓重修記]에서는, 웅진[熊津]에 있는 산천[山川]의 형세[形勢]는, 동방[東方]에서 제일 이라고 하였다. 부여[扶餘[의 사비성[泗沘城]은, 웅진[熊津]의 남[南]쪽에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산천[山川]의 형세[形勢]는, 계룡산[鷄龍山]과 공주[公州] 지역[地域]에 있는 산천[山川]의 승경[勝景]을 말하는 것인데, 이 지역[地域]에 대하여 말하는 다른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도 모두 이와 같다.
그리고 부소[扶蘇]와 낙화[落花]의 북[北]쪽에 대하여, 그 북[北]쪽은 백악[白岳]과 목멱[木覔]이니, 하늘 끝까지 성대[盛大]하다. 其北則白岳,木覔。鬱蔥於天末 고 하였다. 목멱[木覔]은 바로 조선[朝鮮]의 황도[皇都]인 한양[漢陽]을 말하는 것이니, 부여[扶餘]의 부소[扶蘇]와 낙화[落花]가 분명[分明]해지면, 조선[朝鮮]의 한양[漢陽]도 분명[分明]해지는 것이다.
석주집[石洲集]
송이자인안인부석성임차김자정운이절[送李子仁 安訒 赴石城任次金子定韻二絶]
금강[錦江]은 부소산[扶蘇山]을 베고 흐르나니 扶蘇山枕錦江流
고란사[皐蘭寺] 아래 배에 오르던 때 생각나는구나. 憶上高蘭寺下舟
군[君]이 가거든 망국[亡國]의 자취를 보시라 君去試看亡國處
지금은 봄풀만 우거져 시름에 잠기게 하리 至今春草使人愁 [중략]
백제[百濟]의 부소산[扶蘇山]이 낙화암[落花巖]이 있는 백강[白江]가의 작은 야산[野山]이라고 하는 것은, 백제[百濟]의 역사[歷史]를 비하[卑下]하고 숨기려는 교묘[巧妙]한 계략[計略]의 간사[奸邪]한 술책[術策]에 불과 할 뿐이다. 석주집[石洲集]의 송이자인안인부석성임차김자정운이절[送李子仁安訒 赴石城任次金子定韻二絶]은, 금강[錦江]은 부소산[扶蘇山]을 베고 흐른다. 扶蘇山枕錦江流 고, 하였다. 이것은 시[詩]의 절구[絶句] 하나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과 일치[一致]하는 산천[山川]에 대한 지세[地勢]를, 말 한마디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부소산[扶蘇山]의 준령[峻嶺]은, 백제[百濟] 부여[扶餘]의 서[西]쪽과 그 서북[西北]쪽을 감싸고 있으며, 금강[錦江]은 그 서북[西北]쪽을 굽이굽이 감돌아, 동[東]쪽으로 흘러 공주[公州]의 계룡산[鷄龍山] 남[南]쪽을 지나고, 백강[白江]과 합류[合流]하여, 장강[長江]의 대수[大水]가 된다.
백제[百濟] 백강[白江]의 물은, 낙화암[落花巖]을 감돌아 북[北]쪽으로 흐르다가, 동[東]쪽으로 흘러, 금강[錦江]과 합류[合流]하여 장강[長江]이 된다.
반도사관[半島史觀]이 말하는 백제[百濟]의 역사[歷史]는,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과는 전혀 다른, 식민[植民]의 사악[邪惡]한 잔재[殘在]로 포장[包裝]되어 있으며, 왜곡[歪曲]과 변조[變造]와 조작[造作]으로, 백제[百濟] 역사[歷史]의 사실[史實]을 속이고 있다.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부여회고[扶餘懷古]
천척이라 전선이 바다 어귀 들어올 제 千舳樓船入海門
육궁의 주옥 보석 모두가 눈물 자국 六宮珠翠盡啼痕
청아 물에 떨어지자 풍류가 그치었고 靑蛾落水風流歇
백마 못에 잠겨들자 안개가 캄캄했지 白馬沈淵霧氣昏
그 당시의 공명은 새긴 돌에 남아 있고 異代勳名餘勒石
오늘날도 백제 유민 항복 깃발 통곡하네 至今遺老哭降旛
처량 할사 반월성[半月城] 그곳으로 통하는 길 凄涼半月城頭路
벼 기장 들쭉날쭉 두세 마을 있을 따름 禾黍高低只數村
扶餘半月城北。有落花岩
부여[扶餘] 반월성[半月城] 북[北]쪽에 낙화암[落花岩]이 있다.
소산[蘇山]과 궁궐[宮闕] 어우러져 드높은데 蘇山宮闕鬱嵯峨
꽃같이 고운 궁녀 그 즐거움 어땠으랴 宮女如花奈樂何
扶蘇山在扶餘西
부소산[扶蘇山]은 부여[扶餘]의 서[西]쪽에 있다.
십제[十濟]의 신비로운 맥은 개로에게서 끝나고 十濟神符終蓋鹵
삼한[三韓]의 왕기[王氣] 신라로 모었다. 三韓王氣聚新羅
百濟始祖溫祚王。與十臣濟河而來。號曰十濟。後改百濟
백제시조[百濟始祖] 온조왕[溫祚王]이 신하 열 명과 함께 큰 하[河]을 건너왔다 하여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했다가 뒤에 백제[百濟]로 고쳤다.
百濟始都慰禮。有南北二京。至蓋鹵王
백제[百濟]는 처음에 위례[慰禮]에 도읍[都邑]을 정하였고 남경[南京]과 북경[北京] 두 서울이 있었으며 개로왕[蓋鹵王]에까지 대[代]를 이어왔다
강안[江岸]을 가로막은 철옹성[鐵甕城]만 생각하고 惟看鐵甕橫江岸
바다를 건너오는 구름에 가린 전선들 믿지 않았구나. 不信雲帆度海波
술잔 잡고 계백[階伯]에게 잔을 올리려고 하는데 欲把殘杯酹階伯
안개 낀 낡은 사당[祠堂] 덩굴만이 무성하구나. 荒祠煙雨暗藤蘿
義慈王荒淫。成忠,階伯二人諫之
의자왕[義慈王]이 주색에 빠져 있자 성충[成忠]과 계백[階伯] 두 사람이 간[諫]하였었다.
놀이 누각 쓸쓸히 초목 속에 서 있는데 官閣蕭條草樹中
시골사람 전하는 말 의자궁[義慈宮]이라 하는구나. 野人傳是義慈宮
서리 내린 묵은 정원 무 잎은 새파랗고 輕霜廢苑蕪菁綠
맑은 날 낡은 담장 담쟁이덩굴 붉기도 하다. 澹日荒墻薛荔紅
이제 북부 몇 고을이 복신[福信]을 기억 하겠는가 ? 北部幾州懷福信
높고 낮은 산속 부여풍[扶餘豐]을 찾을 길 없구나. 亂山無處覓扶豐
百濟旣破。宗室福信迎古王子扶餘豐立之。以拒劉仁軌。西北諸部皆應之。其後扶餘豐殺福信。脫身走。不知所往
백제[百濟]가 망한 뒤에 종실[宗室] 복신[福信]이 옛 왕[王]의 아들 부여풍[扶餘豐]을 맞아들여 왕[王]으로 세우고 유인궤[劉仁軌]와 대항하자 서북[西北]의 제부[諸部]가 모두 그에 호응[呼應]하였다. 나중에 부여풍[扶餘豐]은 복신[福信]을 죽이고 도망을 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분명치 않다.
오함[烏含]은 옛 왕조의 절 이미 흔적 없고 烏含已作前朝寺
석양 바람 향하여 나그네 말 슬피 운다. 客馬悲鳴向晩風
義慈王時騎馬。入北嶽烏含寺。鳴匝佛宇數日死
의자왕[義慈王] 때 붉은 말이 북악[北嶽]의 오함사[烏含寺]로 들어가 며칠 동안 울면서 불우[佛宇]을 돌다가 죽었다.
다산[茶山] 선생은 백제[百濟]가 망[亡]할 당시[當時]의 상황에 대하여, 백제[百濟]의 역사[歷史]에 대한 여러 기록[記錄]들을 남겼다. 그 중에서, 백제[百濟]가 망한 뒤에 종실[宗室] 복신[福信]이 옛 왕[王]의 아들 부여풍[扶餘豐]을 맞아들여 왕[王]으로 세우고 유인궤[劉仁軌]와 대항하자, 서북[西北]의 제부[諸部]가 모두 그에 호응[呼應]하였다. 百濟旣破。宗室福信迎古王子扶餘豐立之。以拒劉仁軌。西北諸部皆應之,라고 했다. 반도[半島]의 부여[扶餘]가 사비성[泗沘城]이라고 한다면, 서북[西北]의 제부[諸部]가 모두 그에 호응[呼應]하였다. 西北諸部皆應之,라고 했는데, 그 서북[西北]의 제부[諸部]는 어디에 있었을까 ?
백제[百濟] 부여[扶餘]의 북악[北嶽]에 있던 오함사[烏含寺], 백제[百濟] 부여[扶餘]의 조룡대[釣龍臺], 서해[西海]를 건너 백강[白江]으로 들어 왔다는 당[唐]나라 군의 실체[實體], 백제[百濟] 부여[扶餘]의 낙화암[落花巖], 백제[百濟] 부여[扶餘]의 사비성[泗沘城]등 우리가 지금까지 국사[國史] 교육[敎育]을 통하여 배워온 백제[百濟]의 역사[歷史]는, 거짓으로 왜곡[歪曲]된 백제[百濟] 모독[冒瀆]의 역사[歷史]였다.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의 조룡대기[釣龍臺記]에서, 다산[茶山] 선생은, 부여[扶餘]의 조룡대[[釣龍臺]와 당군[唐軍]이 백제[百濟]를 침략[侵略]하여 사비성[泗沘城]에 들어오는 당시[當時]의 상황에 대하여 , 아, 우리나라 사람들이 황당한 것을 좋아함이 어찌 이다지도 심한가 ? 조룡대[釣龍臺]는 백마강[白馬江] 남[南]쪽에 있으므로, 참으로 소정방[蘇定方]이 이 대[臺]를 올라왔다면 군사는 이미 강[江]을 건넌 것이니, 어찌 눈을 부릅뜨고 안간힘을 써가면서 용[龍]을 낚을 필요가 있었겠는가 ? 嗟乎。東人之好荒唐。何若是之甚也。臺在白馬江之南。苟定方得登此臺。則師已濟矣。又安用瞋目努力以釣龍哉 라고 하였다.
또 이 대[臺]는 백제성[百濟城]의 북[北]쪽에 있으니, 참으로 소정방[蘇定方]이 이 조룡대[釣龍臺]를 올라왔다면, 성[城]은 이미 함락된 것이다. 배를 탄 군사들이 바다 어귀로 들어와서 성남[城南]에 이르렀으면 의당 상륙[上陸]하였을 것인데, 어찌하여 물의 근원[根源]까지 수[數] 십여리[十餘里]를 거슬러 올라와 이 조룡대[釣龍臺] 아래에 이르렀겠는가 ? 臺在百濟城之北。苟定方得登此臺則城已陷矣。舟師入海口抵城南。卽當下陸。何爲㴑流窮源數十餘里。至此臺之下哉라고, 백강[白江]과 사비성[泗沘城]의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에 대하여, 잘못 알려져 전[傳]해오는 역사[歷史]에 대한, 사실[史實]과 다른 잘못된 점들을, 조목조목 비판[批判]하며, 지적[指摘]하고 있다.
그리고 또, 다산[茶山] 선생은, 조룡대[釣龍臺]의 시[詩]에서,......... 부산[扶山] 아래 흐르는 강물 扶山之下江水流,.......... 거품처럼 떠 있는 주먹만한 바위 하나 蓋有拳石如浮漚,.......... 그 당시[當時] 천 척 전선 남[南]쪽 기슭 닿았거늘 當時千艘泊南岸,............ 어이하여 서북[西北]의 길을 잡아 나왔으며 如何路由西北陬 라며, 구체적으로 당군[唐軍]의 진격로[進擊路]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다산[茶山] 선생은 백제[百濟]를 침략[侵略]한 당[唐]나라 군[軍]의 진로[進路]를 정확[正確]히 알고 있었다. 그 당시[當時]에 천 척 전선이 부여[扶餘]의 남[南]쪽 기슭에 닿았다면, 그 남[南]쪽은, 어디를 말하고 있을까 ?
부여[扶餘]의 사비성[泗沘城]은, 백강[白江]의 동[東]쪽에 있다. 반도[半島]의 부여[扶餘]도, 금강[錦江]의 동[東]쪽에 있다. 그러나 금강[錦江]은 백강[白江]이 아니다. 금강[錦江]은 계룡산[鷄龍山]의 서남[西南]과 남[南]쪽을 돌아 흐르는 강[江]이고, 백강[白江]은 남[南]쪽에서 북[北]쪽으로 길게, 부여[扶餘]의 서[西]쪽을 굽이돌아 흐르는 강[江]이다. 동명집[東溟集]의 백마강회고칠수[白馬江懷古七首]에서, 천년[千年] 전[前]의 옛 나라는 강물 동[東]쪽 있다고 한것은, 舊國千年江水東, 바로 이것을 이르는 것이다.
부여[扶餘] 사비성[泗沘城]의 위치[位置]로 볼 때, 소정방[蘇定方]이 백강[白江]을 건너기 위하여, 사비성[泗沘城]을 지키는 용[龍]을 낚았다면, 당[唐]나라 군[軍]은, 백강[白江]을 건너 부여[扶餘]의 서[西]쪽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조룡대[釣龍臺]는, 백강[白江]을 건너 사비성[泗沘城]과 인접한 동[東]쪽에 있었다.
당[唐]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이 조룡대[釣龍臺]에서 백강[白江]을 건너기 위하여, 부여[扶餘]를 지키는 백강[白江]의 용[龍]을 낚았다고 하는 것은, 황당[荒唐]한 허구[虛構]의 고사[古史]라는 것을, 다산[茶山] 선생은 지적하고 있다.
백제[百濟]의 사비성[泗沘城]은, 대륙[大陸]의 장강[長江] 남[南]쪽인 강남[江南] 지역[地域]에 있다. 부소산[扶蘇山]은 작은 동산이 아니다. 부여[扶餘]의 서[西]쪽에, 태산준령[泰山峻嶺]이 굽이굽이 서리어 있는 천하[天下]의 명산[名山]이다.
지금도 부여[扶餘]의 사비성[泗沘城]은, 천년[千年]의 고풍[古風]을 간직하고, 푸른 물이 출렁이며 넘실대는 백강[白江]의 강변[江邊]을 따라 웅장[雄壯]하게 서 있다.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조룡대기[釣龍臺記]
昔余游京師。見人家壁上。畫一梟將。金盔鐵甲。臂纏鐵索一條。立水中巖石之上以釣龍。龍張口昂首。足據石不肯上。兩相奮力以血戰者
옛날에 내가 경사[京師]에서 노닐 때다. 어떤 사람의 집 벽에서 이런 그림을 보았다. 황금 투구에 무쇠 갑옷을 입은 용맹스러운 장수가 팔에는 무쇠로 된 끈 한 가닥을 감고 물 가운데 있는 바위 위에 서서 용[龍]을 낚으려고 하니, 용은 입을 크게 벌린 채 하늘을 향하여 머리를 들고 발로는 돌을 버티어 위로 끌려 올라가지 않으려고 하여, 그 장수[將帥]와 용[龍]이 서로 안간힘을 쓰면서 혈전[血戰]을 벌이는 것이었다.
曰彼何狀也。曰昔蘇定方伐百濟。至白馬江。有神龍作大霧怪風。舟師不能渡。於是定方大怒。以白馬爲餌。釣其龍而殪之。然後霧卷風息。師得濟焉。此其圖也。余曰異哉。之言也
내가 묻기를, “저것이 무슨 그림이오?” 하니, 대답하기를, “옛날에 소정방[蘇定方]이 백제[百濟]를 정벌[征伐]할 때, 백마강[白馬江]에 이르니 신룡[神龍]이 짙은 안개와 이상한 바람을 일으켜서 배를 탄 군사들이 강을 건널 수 없게 되자, 소정방[蘇定方]이 크게 화가 나서 백마[白馬]로 미끼를 삼아 그 용[龍]을 낚아 죽여버렸습니다. 그런 뒤에야 안개가 걷히고 바람이 자서 군사들이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전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것을 그린 그림이오.”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이 말이 이상하다.” 하였다.
今年秋。余在金井時。韓元禮知扶餘縣。屢貽書勸余觀百濟古跡。遂以九月之望。汎舟臯蘭寺下。登所謂釣龍臺而觀焉。嗟乎。東人之好荒唐。何若是之甚也。臺在白馬江之南。苟定方得登此臺。則師已濟矣。又安用瞋目努力以釣龍哉
올 가을에 내가 금정[金井]에 있었는데, 그때 한원례[韓元禮]가 부여 현령[扶餘縣令]으로 있으면서, 여러 차례 나에게 글을 보내어 백제[百濟]의 고적[古跡]을 구경하자고 하였다. 마침내 9월 보름에 고란사[皐蘭寺] 아래에 배를 띄우고 이른바 조룡대[釣龍臺]위에 올라가서 바라보았다.
아, 우리나라 사람들이 황당한 것을 좋아함이 어찌 이다지도 심한가 ? 조룡대[釣龍臺]는 백마강[白馬江] 남[南]쪽에 있으므로, 참으로 소정방[蘇定方]이 이 대[臺]를 올라왔다면 군사는 이미 강[江]을 건넌 것이니, 어찌 눈을 부릅뜨고 안간힘을 써가면서 용[龍]을 낚을 필요가 있었겠는가 ?
臺在百濟城之北。苟定方得登此臺則城已陷矣。舟師入海口抵城南。卽當下陸。何爲㴑流窮源數十餘里。至此臺之下哉
또 이 대[臺]는 백제성[百濟城] 북[北]쪽에 있으니, 참으로 소정방[蘇定方]이 이 조룡대[釣龍臺]를 올라왔다면, 성[城]은 이미 함락된 것이다. 배를 탄 군사들이 바다 어귀로 들어와서 성남[城南]에 이르렀으면 의당 상륙[上陸]하였을 것인데, 어찌하여 물의 근원[根源]까지 수[數] 십여리[十餘里]를 거슬러 올라와 이 조룡대[釣龍臺] 아래에 이르렀겠는가 ?
新羅始祖之生。當漢宣之時。而所記古蹟。皆鴻荒不經。百濟之亡。當高宗之時。而釣龍之說。謬悠如此。況前乎漢唐哉。東國之事。由高麗以上。皆不可問也
신라[新羅]의 시조[始祖]가 탄생한 시기는 한[漢] 나라 선제[宣帝] 때와 맞먹는데, 기록[記錄]된 고적[古蹟]이 모두 황당하여 정도에 어그러지고, 백제[百濟]가 망한 시기도 당[唐] 나라 고종[高宗] 때인데, 용[龍]을 낚았다는 설[說]이 이처럼 잘못되었으니, 하물며 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 이전의 사실[事實]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 우리나라의 일은 고려[高麗] 이전까지는 모두 물을 것이 없다.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조룡대[釣龍臺]
조룡대[釣龍臺]서 용[龍] 낚은 일 황당[荒唐]하고 괴이[怪異]한데 龍臺釣龍事荒怪
최북[崔北]의 그림에서 내 처음 보았었지 我初見之崔北畫
모양조차 사나운 용맹한 장수 하나 有一猛將貌猙獰
창끝같이 성난 수염 찢어진 눈초리로 怒髥如戟目裂眥
오른팔에 쇠줄 감아 힘차게 끌어올리니 鐵索蜿蜒繞右肘
피 흘리는 백마 먹이 용의 목에 걸리어 白馬流血龍口罣
떡 벌어진 주둥이에 움츠러든 목이로세 龍口呿張龍頸蹙
갈기로 강물 치자 물결 사방에 뿌려져 鬐鬣擊水波四洒
번쩍이는 갑옷빛 황금 비늘 반사되고 甲光炫燿照金鱗
하늘 가득한 먹구름 우주가 비좁았네 黑雲滿天天宇隘
그 그림은 다름 아닌 당 나라 소정방이 道是大唐蘇定方
부산[扶山]의 용[龍]을 잡고 군사 건넨 광경 이구나. 屠龍渡師扶山砦
부산[扶山] 아래 흐르는 강물 扶山之下江水流
거품처럼 떠 있는 주먹만한 바위 하나 蓋有拳石如浮漚
그 당시[當時] 천 척 전선 남[南]쪽 기슭 닿았거늘 當時千艘泊南岸
어이하여 서북[西北]의 길을 잡아 나왔으며 如何路由西北陬
그 용[龍] 이미 구름 불어 신령함을 보였다면 龍旣噓雲顯靈詭
어찌 또 미련하게 낚싯바늘 삼켰는고 詎又冥頑仰呑釣
움푹 파인 돌 표면 발꿈치가 빠질 정도 石面谽谺深沒趾
대장의 신발 자국 지금껏 남아있다니 好說靴痕至今留
오천년[五千年] 전 문헌들 허술하기 그지없어 載籍荒疏五千歲
호해 마란 모두가 잘못된 전설이니 壺孩馬卵都謬悠
선[善]한 일에 향기 없고 악[惡]한 일에 악취 없어 爲善無芳惡無臭
소인[小人]은 방자하고 군자[君子]는 근심 하도다. 小人恣睢君子愁
반도사관[半島史觀]은, 우리의 역사[歷史]를 폄하[貶下]하고, 우리의 역사[歷史]를 무너트리는 식민[植民]의 잔재[殘在]일 뿐이며, 우리 후손[後孫]들의 웅대[雄大]한 기상[氣像]을 내면[內面]으로부터 그 싹을 자르고 무너지게 하는, 사악[邪惡]한 음모[陰謀]로 만들어진 거짓과 왜곡[歪曲]의 부차적[副次的]인 산물[産物]이다. 우리의 역사[歷史]는, 태고[太古]의 시초[始初]부터, 광활[廣闊]한 대륙[大陸]의 땅에서, 장구[長久]한 세월을 이어왔다.
사서[史書]의 기록[記錄]으로 고증[考證]하고 증명[證明] 할 수 없으나, 현재[現在] 발견된 유적[遺跡]과 유물[遺物]을 본다면, 우리의 역사[歷史]는 동서[東西]로 2만리[二萬里]의 강역[疆域]을 넘나들고 있다. 사서[史書]의 고증[考證]으로 증명[證明]되는 최소[最小]의 강역[疆域]은, 동[東]과 서[西]로 1만리[[一萬里]를 넘어서고 있다. 이러한 움직일 수 없는 우리의 역사[歷史]를, 그 누가 감히 반도[半島]의 역사[歷史]라고 주장[主張] 하고 있는가 ?
무심하게 말없이 유유[悠悠]히 흘러가는 장강[長江]은, 백제[百濟]의 그 당시[當時]와 같이 오늘도 변함없이 동[東]쪽으로 흐른다. 웅진[熊津]과 사비[泗沘]의 낙화[落花]가, 천추[千秋]의 한[恨]을 백강[白江]과 웅진 [熊津]에 뿌리고 묻은 지도 어언, 수[數] 천년[千年]의 세월이 흘렀다. 영겁[永劫]의 세월이 흐른다고 해도 역사[歷史]의 맥[脈]과 혼[魂]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 시대[時代]의 후세[後世]들이 그 땅위에서 대[代]를 이어 살고 있기 때문이리라.
우리가 조선사[朝鮮史] 일만년[一萬年] 역사[歷史]의 후예[後裔]들이라고 한다면, 대륙[大陸]을 치달리며, 천하[天下]를 호령[號令]하던 웅대[雄大]한 기상[氣像]을 이어받고, 천하[天下]를 인본[人本]으로 이끌던 학문[學文]의 정수[精髓]를 다시 일으켜, 선대[先代]의 위업[偉業]을 계승[繼承]하고, 천하[天下]에 태평[太平]의 위대[偉大]하고 아름다운 나라를 건설[建設]할 막중[莫重]한 책무[責務]가 우리의 어께위에 내려져 있는 것이다.
지금은 식민[植民]의 잔재[殘在]와 그 산물[産物]들이 세상[世上]을 어지럽히며 혼란[混亂]스럽게 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사[朝鮮史] 역사[歷史]의 후예[後裔]들이 분연[奮然]히 떨치고 일어 설 때, 우리의 정신[精神]과 혼[魂]을 어지럽히는 식민[植民]의 잔재[殘在]는, 이 땅위에서 스스로 자멸[自滅]하여, 소멸[消滅] 될 것이며, 우리 역사[歷史]의 본 모습은, 다시 돌아와 천하[天下]를 밝게 비추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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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백제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아주 감명깊게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백제가 어떻게 반도 서남 모퉁이 손바닥 만한 모퉁이 땅에서 개국을 했겠습니까!
더더구나 부여성의 위치와 주변의 지형지세까지, 정확한 위치까지 밝혀주시니, 더 이상의 의문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수많은 '반도백제'의 의문점이 모두 풀립니다. 반도백제! 반도사관=식민사관 논자들의 허구에 찬 역사해설은 이제 무덤속으로 사라져야 할 때입니다. 대한민국의 일부 국민들은 스스로 조선의 후예임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반도 땅에 옛 조선이 있었던 것처럼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려 별의별 짓을 다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시길 빕니다.
조금 더 지나면 "조선이 뭔 필요있냐? 나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랑스러움을 느낀다."는 풍토가 형성되리라 봅니다.
다들 역사 곧 뿌리에 대한 중요성을 모른체 현실 안주의 물질로 살아갈 것이라 생각됩니다.
인간사 기회는 있되 취득은 자기의 몫인걸요
국가의 초석과 기강의 흐름이 이러하니.......초월적 판단이 필요한 지경이라 여깁니다.
안녕하세요.
사실 요즘처럼 '역사 이야기'가 나오면 냉소적인 분위가는 없었던 같습니다. 무슨 쓰잘데 없는 이야긴가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렇다고 그 분위기에 휩쓸려 허송세월 하기엔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네요.
지도자이하 사회를 이끌고 가는 '리더'들의 발상전환이 간절하게 기다려집니다. 건강하기실 빕니다.
역사를 부정하고 잊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선대를 부정하는 것이며, 수 천년을 이어온 정신과 혼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겠지요. 또한 문화와 전통을 부정하고, 수 천년을 이어오며 갈고 닦고 발전 시켜온 학문을 부정하는 것이며, 이러한 것은 자아와 주관을 부정하는 것이니, 그 뒤에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어지러운 세태는, 심은대로 거두는 자업자득 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옛 성현들이 학문과 수신을 근본으로 했던 것은, 정도에서 어긋나는 인간의 마음을 제어하고, 물욕과 권력이 방종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고, 또 경계 했기 때문 입니다. 공자는 이르기를, 주공도 예를 잃으면 그 나머지는 볼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후대에 성인으로 추앙받은 주공도 그러하였는데, 오늘날의 세태를 돌아보면, 그야말로 탄식이 나올 정도로, 그 정도를 넘어서 너도 나도 방종으로 흐르고 있으니, 세상 어디에서 대도를 찾아 보겠습니까 ?
천하에 뿌리 없는 나무가 없듯이, 역사는 인간의 뿌리이며, 사람의 근본을 일깨우는 학문의 근본 입니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근본이 되는지를 모르는 그러한 나라가 편안한 적은, 역사 이래로 한번도 없었습니다.
문무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단구리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문무 조선사 회원 여러분께 심심한 사의와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