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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산문학>, 2025년 봄호
새들도 날아오는 세상의 길
― 황지우론
맹문재
1.
황지우 시인은 1952년 1월 25일 전남 해남군 북일면 신월리 배다리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황길주(黃吉周, 1917∼1975)와 어머니 선귀례(宣貴禮, 1920∼) 사이의 4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해남은 고산 윤선도를 비롯해 김남주, 고정희, 김준태 시인 등이 배출된 곳이어서 그의 고향이 특별히 다가온다. 그는 1956년 광주시(현 광주광역시)로 이주했고, 광주중앙국민학교, 광주서중학교, 광주제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72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철학과에 입학해 미학을 전공했다. 1973년 박정희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투옥되었고, 강제로 입대했다. 1976년 제대한 뒤 복학해 1979년 졸업했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그는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연혁(沿革)」입선되고, 계간 《문학과지성》에 「대답 없는 날들을 위하여」 등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시작 활동을 했다. 본명은 재우였는데, 한글 타자기의 오타에 의해 지우라는 필명이 결정되었다. 그는 1980년 5․18 민주화운동에 가담한 것이 문제되어 대학원에서 제적당했다. 1981년 서강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 입학했고, 4월 1일 아놀드 하우저의 『예술사의 철학』(돌베개)을 번역했다.
2.
황지우 시인은 1983년 10월 20일 첫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문학과지성사)를 출간했다. 이 시집으로 계간 《세계의문학》이 제정한 제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은 시집의 자서에서 “나는 내가 쓴 시를 두 번 다시 보기 싫다. 혐오감이 난다.”고 토로했다. 시를 위해 순교하려는 자세도 갖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시인으로서의 자부심이나 긍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시인은 왜 부정적이고 패배적인 인식을 내보인 것일까? 그것은 시인으로서의 갈망이 부족하거나 불성실한 데서 연유한 것이 아니라 “갈 봄 여름 없이, 처형받은 세월이었지/축제도 화환도 없는 세월이었지”(「대답 없는 날들을 위하여 2」)라고 토로한 데서 볼 수 있듯이 개인적인 차원을 넘는다. “이름을 대고 나이와 직업을 대고/꽝 내리치는 주먹/떨어지는 국화꽃잎”(「대답 없는 날들을 위하여 3」) 같은 상황에서도 볼 수 있다. 정치적인 억압으로 인해 한 개인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는 초토입니다//그 우에서 무얼 하겠습니까//파리는 파리 목숨입니다”(「에프킬라를 뿌리며」)라고 절망한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을 억압한 시대적인 상황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시집에 수록된 「에서·묘지·안개꽃·5월·시외버스·하얀」, 「몬테비데오 1980년 겨울」, 「흔적 Ⅲ․1980(5.18×5.27㎝)·李映浩作」, 「5월 그 하루 무덥던 날」 등의 제목에서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시집에 수록된 시작품 중에서 1980년대나 5월을 제외한 시기는 나오지 않는다.
주지하다시피 1980년 5월에 일어난 광주항쟁은 민중의 주체성과 역사성을 갖는 것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민중들이 겪어야 했던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광주광역시가 2009년 5·18광주민주화운동에 가담한 피해를 조사한 결과 “사망자가 163명, 행방불명자가 166명, 부상 뒤 숨진 사람이 101명, 부상자가 3,139명, 구속 및 구금 등의 기타 피해자 1,589명, 아직 연고가 확인되지 않아 묘비명도 없이 묻혀 있는 희생자 5명 등 총 5,189명”이었다는 사실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1997년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 이후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계엄 해제와 유신 세력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했고, 학생운동의 지휘부와 주요 정치인을 불법적으로 검거했다. 신군부의 불법적인 탄압에 맞서 광주 지역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민주화를 요구하고 나서자 신군부는 병력으로 그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총으로 목숨을 빼앗았다. “마지막 가두방송마저 끊긴 그 막막한 심야라는 듯이,/칠흑의 아스팔트”(「흔적 Ⅲ․1980(5.18×5.27㎝)·李映浩作」) 상황이 도래된 것이다.
신군부의 만행은 광주항쟁에 그친 것이 아니라 1980년대 내내 이어졌다. 언론을 통제했고 반대 세력을 갖가지 수단으로 탄압해 시민들은 공포와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다. “김종수 80년 5월 이후 가출/소식 두절 11월 3일 입대 영장 나왔음/귀가 요 아는 분 연락 바람 누나”(「심인」)와 같은 안타까운 사연에서 보듯이 개인의 삶은 상처받고 피폐해진 것이다.
어서 가라
이 쑥밭의 땅에서
괴로워하는 쑥굴헝 가시덩굴 헤치고
그대의 어린 가족들 데리고
어서 가라
저 만수산 上上峰으로
世世孫孫 짙푸른 넝쿨을 잡아당겨
그대의 幻聽 속에
수천의 弔鐘을 울리는
저 만수산 어서 가라
이 쑥밭의 땅에서
가시덩굴 쑥굴헝 헤치고
어린 것들 아내와 노모를 데리고
어서 가라
이곳에 더 이상 씨 뿌리지 말고
이곳에 더 이상 아이 낳지 말고
이곳에 더 이상 사람 묻지 말고
더 이상 노래하지 말라 오 殺菌된 땅에
더 이상 벌레 울음소리 들리지 않으므로
더 이상 울지 말라 울지 말고
어서 가라 焦土를 버리고
이곳의 온갖 이름과 언약을 버리고
납세고지서를 주민등록증을 버리고
오 화해할 수 없는 이 지상을
벗어나거라
밤마다 그대 도려낸 흉곽의 응달에
世世孫孫 푸른 넝쿨 내리고
世世孫孫 맑은 물줄기 타고
그대의 幻聽 속에 수천의 弔鐘으로
떠내려오는 저 만수산으로
어서 가라
어서 가라
―「만수산 드렁칡 2」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현재 살아가는 삶의 터전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떠나가자고 말한다. 이곳이 “쑥밭의 땅”이자 “괴로워하는 쑥굴헝 가시덩굴”이라고 비유했듯이 사람이 살 만한 장소가 못 된다. 그리하여 “이곳에 더 이상 씨 뿌리지 말고/이곳에 더 이상 아이 낳지 말고/이곳에 더 이상 사람 묻지 말고”, “어린 것들 아내와 노모를 데리고/어서 가”고자 한다. 화자에게 이곳은 “殺菌된 땅”이어서 “더 이상 벌레 울음소리 들리지 않”는다.
화자가 이곳을 떠나 도달하고자 하는 장소는 “만수산 上上峰”이다. 다시 말해 “世世孫孫 짙푸른 넝쿨을 잡아당겨/그대의 幻聽 속에/수천의 弔鐘을 울리는” 곳이다. “만수산”은 차령산맥 끝자락인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과 부여군 외산면 사이에 있는 실제의 산이라기보다는 이방원(조선 태종)의 시조에 등장하는 장소에 가깝다. 고려 말기 공민왕 때의 신하 중에는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일으키자 두 주군을 모실 수 없다고 만수산 두문동에 들어가 충절을 지킨 이들이 있었다. 그 만수산은 개성의 송악산 서쪽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위의 작품에서는 구체적인 지명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인 장소로 볼 수 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세상을 탈출하여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일종의 유토피아인 것이다.
화자는 현재의 처지에서 “더 이상 울지 말라”고 다짐한다. 울기보다는 “焦土를 버리고/이곳의 온갖 이름과 언약을 버리고”고 떠나가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납세고지서를 주민등록증을 버리”자고 언급한다. 그만큼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이곳은 “화해할 수 없는” 대상이다. “밤마다 그대 도려낸 흉곽의 응달에” 시달리는 곳이다. 그리하여 “世世孫孫 푸른 넝쿨 내리고/世世孫孫 맑은 물줄기 타고/그대의 幻聽 속에 수천의 弔鐘으로/떠내려오는 저 만수산으로” 가려고 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황지우 시인은 “여보, 우리 꺼지자, 南美로, 南極으로, 우리의 對蹠地로, 어디든!”(「그대의 표정 앞에」)이라고 제안한다. “오 亡國은 아름답습니다 人間世 뒤뜰 가득히 풀과 꽃이 찾아오는데 우리는 세상을 버리고 야유회 갔습니다”(「만수산 드렁칡 1」)라고 밝혔듯이 삶의 터전을 떠난 적도 있다. 그리하여 새 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가듯이 “우리도 우리들끼리/낄낄대면서/깔쭉대면서/우리의 대열을 이루며/한 세상 떼어 메고/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가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그런데 황지우 시인은 시집의 자서 끝에서 “죄송합니다”라고 독자들에게 사죄를 표한다. 그것은 “나는 시를 불신했고 모독했다”고 고백했듯이 시에 대한 사과이다. 시인은 자기가 살아가는 삶의 근거지에서 탈출하려는 모습을 통해 모순되고 불합리한 시대 상황을 고발했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시의 가치가 될 수 없기에 사과한 것이다. 시인은 시를 신뢰하고 숭상하는 자세로 독자들에게 다가가고자 한다.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려는 것이었다.
3.
황지우 시인은 1985년 10월 15일 두 번째 시집 『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민음사)를 간행했다. 서강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뒤 한신대학교 등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계간 《세계의문학》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986년에는 산문집 『사람과 사람 사인의 신호』(한마당)을 출간했다.
시인은 두 번째 시집의 서문에서 “이 길은 어디로 향해 있는가./이 길은 외로운가./위험한가./내 발목을 거는 세찬 물살, 이제 시가 나의 운명이라고/말해야 하나.”라고 묻는다. 자신의 시 쓰기에 대한 겸손한 자세를 보이며 외롭고 위험하고 어디로 향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 길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보인 것이다. 그리하여 1980년대의 사회적 · 정치적 · 경제적 모순을 구체적으로 반영했다.
8617번 차원옥은 동생을 찾씀니다.
동생은 차원실 륙십칠세(67) 별면은 세채
고향은 평북 영변군 팔원면 석성동
해방 전에 고향을 떠낮씀
형은 차원목 칠십삼세(73)
소림면에 출가하였씀
현재는 서울에 거주함
형에 저화열락처는 714-1258
어머님 : 김학실(76) 언니 : 이금란(54) 동생 : 필녀(44) 정자(졸찌 42)
1·4후퇴시 개성서 만나기로 함(옥순이는 군인차로 서울로 보냄)
고향 :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 하유리
※ 찾는 이 : 옥단, 옥분, 옥순(먹식이)
603-2981
―「벽 3」 부분
위의 작품의 도입 부분에서 화자가 “간신히 국어 선생이나 하면서 간신히 출판사 나가면서 간신히 시 쓰고 사는 친구들과 어느 날 어느 곳에서 저녁 대신 소주를 마시다가, 그럼 우리 모두 지금 여의도로 가자 해서 여의도동 1번지 KBS로 갔다.”고 밝힐 정도로 이산가족 찾기 행사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대단했다. “차원옥은 동생을 찾씀니다”라는 한 가족의 안타까운 사연은 곧 민족의 아픔이 되어 “이산가족의 얼굴들을 이탈해서는 한국인으로서 존재할 수 없음을,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질 수 없음을 자각”했다.
한국방송공사(KBS) 텔레비전은 1983년 6월 30일 밤 10시 15분부터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생방송으로 진행했다. 한국전쟁 33주년 및 휴전 30주년을 맞이해 남한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이산가족을 찾아보자는 의도로 기획된 프로그램이었다. 그런데 신청 접수를 한 1천 명이나 되는 이산가족이 방송국으로 찾아와 방청석은 순식간에 채워졌다. 그뿐만 아니라 방송이 진행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스튜디오에 설치된 전화기들에 불이 났고, 생방송을 시청하던 이산가족들이 헤어진 혈육을 찾겠다고 방송국으로 몰려와 방송은 새벽 2시 30분 즈음에야 마무리되었다. 다음날에도 전날 방송에 출연하지 못했거나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진 이산가족들이 방송국으로 몰려들었다. 방송국 중앙홀을 꽉 채운 인파는 본관을 거쳐 여의도 광장까지 이어졌다.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의 출연에 대한 문의 전화가 빗발쳐 방송국의 업무가 마비되었다. 이산가족의 인적 사항을 적은 광고지가 방송국의 본관, 계단, 분수대, 가로등, 가로수, 아스팔트, 광장 주변 등에 붙기 시작했다. 한국방송공사는 이산가족의 간절함을 수용해 7월 1일부터 이산가족 찾기 추진본부를 설치해 방송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었다. 정규 방송 편성을 취소하는 대신 밤 10시 15분부터 다음 날 아침 7시까지 생방송을 진행했다. 광복절, 추석 연휴, 국군의 날, 개천절, 한글날 등에는 특별방송으로 기획해 진행했다. 한국방송공사 제1라디오 역시 7월 6일부터 텔레비전과 동시에 방송을 진행했다. 7월 6일부터는 미국, 일본, 서독 등 세계 각국에도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전파했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1983년 11월 14일 새벽 4시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10만 952건의 신청접수 중 5만 3,536가족이 출연해 1만 189가족이 만나 19.03%의 상봉률을 나타내었다. 생방송 시간은 453시간 45분, 날짜로는 138일을 기록해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되었다.
위의 「벽 3」에서 이산가족 찾기 방송의 한 모습을 여실하게 볼 수 있다. 그 행사는 오랫동안 헤어진 혈육을 상봉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남북분단의 문제를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접근한 한계점을 보였다. 한국전쟁의 상흔을 극복하고 남북통일을 진지하게 추진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념적 갈등을 심화시킨 것이다. 또한 마치 국민들에게 시혜를 베풀 듯이 운영한 행사는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 신군부의 또 다른 전술이었다.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국민들의 눈물은 결국 독재정권에 맞서는 비판을 약화시킨 것이었다.
한편 1980년대는 산업화가 본격적이고 전면적으로 대두되어 도시 공장의 생산직 노동자 수가 전체 노동자 수의 반을 넘어섰고, 종업원 300인 이상의 공장에 취업한 노동자 수가 전체 노동자 수의 절반에 이르렀으며, 연 10%의 경제성장을 이룩할 정도로 외형적인 성장을 이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으로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국민소득 중 노동소득분배율이 낮았고, 노동 시간은 세계에서 가장 길었으며, 그에 비해 임금은 매우 낮았다. 산업사회의 생산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온 노동자들이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섰는데, 정치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과 맞물려 상당한 위력을 띠었다. 이전 시대처럼 절대적인 차원에서 ‘잘살아 보자’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계층 간의 박탈감을 인식한 것이었다.
아내는 티비를 켠 채로 잠들어 있다.
마지막 뉴스 보도, 24시
오늘은 아무 일도 없었다. (중략)
김숙희, 십여 년 전 영치금을 넣어주고 간 중산층의 딸,
나는, 내가 부르주아가 되는 것을 한사코 두려워했다.
잘못 내려온 선녀. 철없는 부르주아.
나는 너의 온몸에 가난의 문신을 그려놓았다
― 「잠든 식구들을 보며」 부분
위의 작품의 화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내는 티비를 켠 채로, 아직도 티비 속에서 잠들어 있”는 모습을 바라본다. 마지막 뉴스 보도에서는 오늘 아무 사건이 없었다고 보도한다. 실제는 “한미 장병 15명을 태운 헬기, 합동군사훈련중 동해에 침몰”했고, “정신대할머니태국서40년만에 나타”났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고 전한 것이다.
국민들은 이와 같은 왜곡 보도의 반복에 의해 점점 정치적인 관심을 잃게 된다. 이 또한 정당성을 갖지 못한 신군부 정권이 내세운 전략이었다. 사용자 계급이 노동자 계급에 대한 전술이기도 했다. 국민들은 이전 시대처럼 절대적인 기준에서 잘살아 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상대적 박탈감에서 잘살아 보려고 했다. 그 결과 계층 간의 갈등과 경쟁으로 말미암아 정치적 이해관계가 갈라지게 되었다. 결국 국민들의 독재정권 대한 투쟁력이 분산된 것이다. 화자는 “부르주아가 되는 것을 한사코 두려워”했지만, 아내는 “철없는 부르주아”의 성향을 띤 것이 그 모습이다.
4.
황지우 시인은 1987년 1월 10일 세 번째 시집 『나는 너다』(풀빛)를 출간했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편들은 “두 번째 시집을 묶을 때 함께 넣을까 말까 망설였던, 메모 같은 시들이다.”라고 시집 후기에 밝혔듯이 앞의 두 권 시집과는 확연히 다르다. 작품 제목을 대신해 숫자를 달고 있는 점이 그렇고, 시집의 목차도 없다. 이 시집에는 시인의 약력으로 ‘시와 경제’ 동인 참여, 《외국문학》 주간 역임 등을 소개했다. 1988년 1월 1일 존 골딩의 『큐비즘』(열화당)을 번역 출간했고,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 박사 과정에 입학했다. 1989년 12월 1일 시선집 『성(聖) 가족』(살림)을 출간했다.
지친 한밤의 100원짜리 삼립빵,
가난한 목수 아들의 살에서 뜯는 빵이여
잔업이 잔업을 낳고
靈魂에 찰싹 달라붙어 안 떨어지는, 李潤이라는 이름의 거머리.
이 피는 포도주가 아니다.
사제 목에 걸린 철십자가에 못박힌 노동자.
나의 安樂이 너를 못박았다.
이 짐승들아,
가슴을 친다고 그게 뽑혀지느냐.
―「102.」 전문
위의 작품에서 화자는 “지친 한밤의 100원짜리 삼립빵”을 먹으면서 한노동자를 떠올린다. 그는 “가난한 목수 아들”인데, “잔업이 잔업을 낳고/靈魂에 찰싹 달라붙어 안 떨어지는, 李潤이라는 이름의 거머리”를 떼어내지 못하고 있다. 화자는 자신이 먹는 빵은 가난한 목수의 “살에서 뜯는” 것이라고 인식한다. 자본주의 체제가 추구하는 이윤이 내놓은 “피는 포도주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가난한 목수의 아들인 노동자는 “사제 목에 걸린 철십자가에 못박”힐 수밖에 없는데, “나의 安樂이 너를 못박았다”고 화자는 사죄한다. 노동자가 이윤에 맞서 대항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고 도리어 자신에게 나무라는 자세를 내보인다. 외부적인 지향보다는 내부적인 성찰을 통해 사회적인 존재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맥도널들 햄버거 집에서 시작하여/카세트와 사쿠라 필름을 파는 레코드 가게에서 끝나는/장장 1킬로미터가 넘은 이 자본주의의 긴 갱도를/우산대로 두들겨 가며, 나는 盲人 先知者 흉내를 내며,/지나”(「138.」)면서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성찰하는 것이다.
5.
황지우 시인은 1990년 12월 1일 네 번째 시집 『게 눈 속의 연꽃』(문학과지성사)을 출간했다. 또한 4월 21일부터 6월 24일까지 연우소극장에서 김석만 연출로 시극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을 공연했다. 1991년 시집 『게 눈 속의 연꽃』으로 현대문학사가 제정한 제26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했고, 10월 1일 시선집 『구반포 상가를 걸어가는 낙타』(미래사)를 출간했다. 1993년 문학사상사가 제정한 제8회 소월문학상을 「뼈아픈 후회」 등으로 수상했다. 1994년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취임했다. 또한 7월 8일부터 8월 7일까지 연극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日記)>를 동숭아트센터소극장에서 공연했다. 주인석 연출에, 추상미․박광정․김동범 등이 출연했다. 음악가 이건용, 비디오아티스트 오경화, 사진작가 김중만 등도 가담했다.
『게 눈 속의 연꽃』의 시 세계는 자기 실존에 대한 성찰을 사람 및 자연과의 만남을 통해 추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시집 속에 수록된 「길」, 「백두산 가는 길」, 「끔찍하게 먼 길」, 「인천으로 가는 젊은 성자들」, 「광양길」 등 길을 걸어간 모습에서 확인된다.
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
돌아다녀보면은
조선팔도,
모든 명당은 초소다
한려수도, 內航船이 배때기로 긴 자국
지나가고 나니 길이었구나
거품 같은 길이여
세상에, 할 고민 없어 괴로워하는 자들아
다 이리로 오라
가다보면 길이 거품이 되는 여기
내가 내린 닻, 내 덫이었구나
―「길」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삶이란/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토로한다. 사회적 존재로서 살아가는 삶이란 결코 만만하지 않기에 화자의 말은 특별히 귀를 기울이게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돌아다녀보면은/조선팔도,/모든 명당은 초소다”라는 구절에 이르면 긴장하게 된다. 화자의 체험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보초가 서서 망을 보는 “초소”가 그러하다. “초소”에는 경계나 감시나 통제 등의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가령 ‘경계 초소’는 군인이 경계 임무를 수행하는 곳이고, ‘감시 초소’는 경계하는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춘 곳이다. ‘잠복 초소’는 잠복근무를 하는 곳이고, ‘위생 초소’는 위생 사업을 진행하는 곳이다. ‘대공 초소’는 대공 관측이 용이한 데 위치한 곳이고, ‘경비 초소’는 경비를 위해 설치한 곳이다. 따라서 화자가 우리나라의 모든 명당이 초소라고 말한 데는 감시나 통제와 관련된 체험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자신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 결과 “한려수도, 內航船이 배때기로 긴 자국/지나가고 나니 길이” 난다는 것을 깨닫는다. 화자는 길 앞에서 “거품 같은 길이여”라고 말한다. 언뜻 보면 허무감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는 그것을 넘는다. 모든 삶의 끝이 죽음이듯이 길의 끝은 거품 같은 것이다. 따라서 길을 걷는 목적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거품 같은 길에 다다른다고 길을 포기할 필요는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화자는 “세상에, 할 고민 없어 괴로워하는 자들아/다 이리로 오라”라고 부른다. 고민 없어 괴로워하는 이들은 삶의 밑바닥을 모르는 존재들이다. 삶이 얼마나 아프고 힘든지 모르는 그들에게 함께 배때기로 길을 기어보자고 권유한다. 그렇게 “가다보면 길이 거품이 되는 여기”가 “내가 내린 닻, 내 덫이었구나”라고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내린 닻이 곧 덫이라는 인식은 길이 거품과 같다는 인식과 상통한다.
화자는 초소가 놓인 길을 불안감을 가지고 걷지만, 그 난관에 움츠러들지 않는다. 그만큼 생의 의지가 강하고 역사의식이 견고한 것이다. 화자는 길 끝에 거품만 남는다고 할지라도 기꺼이 온몸으로 밀고 나아간다. 자기 삶의 조건에 대항하는 것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에 맞서는 것이다. 「허수아비 ― 옷걸이」, 「허수아비 ― 쇼윈도」, 「허수아비 ― 모기經」, 「허수아비 ― 똥방석」, 「허수아비 ― 과녁」, 「허수아비 ― 지역 감정」, 「허수아비 ― 우체통」, 「허수아비 ― 남한 이데올로기」 등 자본주의를 허수아비로 바라보고 집중해서 파헤친 것이 그 모습이다.
6.
황지우 시인은 1995년 5월 8일 다섯 번째 시집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학고재)를 출간했다. 조각 시집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는데, 1995년 5월 8일부터 21일까지 서울 인사동 학고재화랑에서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라는 제목으로 작품전을 가진 기념시집이었다. 조각가로 공식 데뷔했는데, 인체를 소재로 한 브론즈, 석고 작품 등 20여 점이 선보였다. 같은 해 11월 20일에는 두 번째 시집 『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민음사)를 개정판으로 출간했다. 1997년에는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물기 남은 바닷가에
긴 다리로 서 있는 물새 그림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서서
멍하니 바라보네
저물면서 더욱 빛나는 저녁 바다를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저물면서 더욱 빛나는 저녁 바다”를 바라보면서 자기의 생을 떠올린다. 그 바닷가에는 “긴 다리로 서 있는 물새 그림자”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서서/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화자는 그 물새가 자신의 모습이고, 물새의 그림자가 자신이 살아온 삶의 여정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모든 것이 상실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자기의 생은 저물면서 빛난다고 긍정한다. 화자에 들어 있는 생의 서사는 물새와 물새의 그림자에 들어 있다. 화자는 그것을 조각 작품으로 담아낸 것이다.
7.
황지우 시인은 1998년 12월 21일 여섯 번째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문학과지성사)를 출간했다. 이 시집으로 1999년 창작과비평사가 주관한 제1회 백석문학상과, 대산문화재단이 선정한 제7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의 분위기는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흐리고 쓸쓸하고 아프다. “슬프다//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모두 폐허다”(「뼈아픈 후회」)라고 후회하고, “이건 삶이 아냐/이렇게 사는 게 아니었어./속으로 울부짖는”(「비닐봉지 속의 금붕어」)다. “삶이 쓸쓸한 여행이라고 생각될 때/터미널에 나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발작」)어하고, “모든 별은 끔찍하다. 어지럽다”(「낮에 나온 별자리」)라고 허무감에 젖는다. 시인이 아파하는 것은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거룩한 식사」)듯이 삶의 몸부림이라고 볼 수 있다.
시인은 그 과정 속에서 부단하게 자기를 바라본다. “목욕탕에서 옷 벗을 때/더 벗고 싶은 무엇인가가 있다”(「나의 연못, 나의 요양원」)라고 느낀다. “돌아보라, 얼마나 많은 잘못 든 길들이 있었는가”(「신 벗고 들어가는 그곳」)라고 가서는 안 되는 길이나, 가고 싶었지만 끝내 가보지 못했던 길들을 떠올린다. “나, 이번 生은 베렸어/다음 세상에선 이렇게 살지 않겠어”(「거울에 비친 괘종시계」)라고 다짐한다. “소비에트가 무너지던 날” “개좇 같은 세기”가 되어버린 것에 분노한다. 그리하여 “누군가 망치로 내 머리를 내리쳐주었으면 좋겠어.”(「석고 두개골」)라고 자학까지 한다.
그러면서도 “어디서 올라왔는지 나팔꽃이라니!/어느 善한 이웃이 도르래 밧줄에 달아/별들을 올려보냈나?”(「8월 16일」)라고 새로운 별을 발견한다. “벚꽃이 필 때면” 아팠지만 “견디기 위해/도취”(「수은등 아래 벚꽃」)하고, “반성하는 자세로./눈발 뒤집어쓴 소나무. 그 아래에서/오늘 나는 한 사람을 용서”(「소나무에 대한 예배」)한다. “큰 나무 보면 발가벗고 그 속에 들어가/祭物되어 흡수되고”(「나무 崇拜」) 싶어 한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어머님 문부터 열어”(「안부 1」)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세계가 맨 처음 나에게 닿았을 때
내 피부는 惻隱之心으로 노랗게 변색된다
서울 톨게이트를 빠져나오면 고속도로 비상 활주로;
질주하는 속도들을 가로질러 노랑나비 한 마리.
팔랑팔랑 水原으로 날아간다
맞은편 대한항공 광고탑엔
꿈같은 봄 햇살 바깥으로 나온,
창공에 가서 놀고 있는,
탱탱한 銀날개
―「차 속에서의 사색」 전문
위의 작품은 시집의 제일 마지막 쪽에 수록되어 있다. 화자는 “세계가 맨 처음 나에게 닿았을 때/내 피부는 惻隱之心으로 노랗게 변색된다”라고 진단한다. 자본주의 체제가 추구하는 시장 가치가 몸에 닿았을 때 분노하거나 증오하지 않고 오히려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화자는 “서울 톨게이트를 빠져나오면 고속도로 비상 활주로”가 시작되는 길에 들어서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자본주의가 유혹하는 속도에 함몰되지 않고, “질주하는 속도들을 가로질러 노랑나비 한 마리/팔랑팔랑 水原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응시한다. 자동차의 속도보다 자연의 질서를 추구하는 것이다.
화자는 날고 있는 나비를 바라보다가 그 맞은편에 “대한항공 광고탑”을 발견한다. 나비는 그 주위에서 “꿈같은 봄 햇살 바깥으로 나온,/창공에 가서 놀고 있”다. 화자는 비행기의 엄청난 날개보다 나비의 “탱탱한 銀날개”를 선택한다. 나비의 생명력과 우주적 존재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8.
황지우 시인은 2000년 5월 8일 희곡집 『오월의 신부』(문학과지성사)를 출간했고, 2002년에는 월드컵 문화행사 전문위원으로 활동했다. 2003년 8월 29일부터 9월 7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윤정섭 연출,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단 ‘돌곶이’의 출연으로 <물질적 남자>를 공연했다. 삼풍백화점 붕괴를 소재로 한 이 연극은 8년째 현장에 갇힌 한 남자를 통해 몸과 시간, 삶과 죽음을 다루었다.
또한 그는 ‘2005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한국의 책 100’ 선정위원회 위원장 및 주빈국 조직위원회 총감독을 맡았다. 2006년 3월부터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에 취임했다. 그렇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4년의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2009년 5월 사퇴했다. 이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 교수로 재임하다가 2018년 8월 정년퇴임했다. 현재는 자신의 고향에 내려가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황지우 시인은 1980년대 해체시의 대명사라고 불릴 만큼 실험시를 최대한 확장하고 심화했다. 어느 시대나 실험시가 등장하지만, 황지우가 추구한 해체시는 파급력이 컸다. 그만큼 시인의 시는 뚜렷한 개성을 띠었고, 문단에 끼친 영향이 지대했다. 시인의 해체시는 군부 독재의 정치 상황에 맞선 풍자였고, 소시민들의 삶을 반영해낸 목소리였다. 1980년 5월에 일어난 광주항쟁의 실상을 시인 정신으로 기록하고 전달하면서 새들도 날아오는 세상을, 인간 가치가 실현되는 역사를 추구한 것이었다.
맹문재
1991년 『문학정신』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론 및 비평집으로 『한국 민중시 문학사』『지식인 시의 대상애』 『현대시의 성숙과 지향』 『시학의 변주』 『만인보의 시학』 『여성시의 대문자』 『여성성의 시론』 『시와 정치』 『현대시의 가족애』 등이 있음. mmunja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