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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안교가 품은 건축공학적 지혜
예전에는 달구지도 서로 교차할 수 있었을 듯 해 보이는 만안교. 처음 건축될 당시에는 지금의 위치에서 남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의 작은 물줄기 위에 안양 시내 방향으로 놓여 있던 다리였다. 현 위치는 1970년대 후반에 도로 폭을 넓히면서 옮겨 놓은 것이다. 만안교 한쪽 끝에서 건너편까지 평평하게 이어진 다리의 모습을 보면 여러 개의 교각 위에 귀틀석과 청판석을 걸쳐 만든 보다리처럼 보이지만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서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면 그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곧 깨닫게 된다. 만안교는 관악산에서 흘러나온 물길을 7갈래로 가르는 무지개 모양의 수문 7개를 가진 홍예교이기 때문이다.
다리의 모습을 살펴보면 곳곳에서 조상들의 건축공학적인 지혜를 엿볼 수 있다. 7개의 수문은 각각 육중한 선단석 위로 사다리꼴 모양의 여러 홍예석을 양쪽에서 쌓아 올려, 다리 위에서 가해지는 힘을 분산시킬 수 있도록 만들었다. 아치의 정상 부분에 이맛돌(종석)을 쐐기처럼 끼워 넣어 마무리함으로써 홍예석들이 더 견고하게 맞물리도록 하였다. 각 아치 위에는 부형무사를 얹어 이맛돌이 밀려서 떠오르거나 빠지는 것을 막아 무지개 모양의 홍예가 견고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처럼 선단석, 홍예석, 이맛돌, 청정무사, 부형무사 등의 돌로 쌓아 올린 홍예교는 시간의 무게가 더해질수록 더 견고해진 것이다. 만안교보다 훨씬 오래된 통일 신라의 홍예교가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도 그와 같은 건축공학적 원리 때문이다. 실제 통계상으로 보다리보다 홍예교가 더 많이 남아있다. 이번에는 물줄기를 맞이하는 쪽을 살펴보자. 반대쪽과는 달리 선단석을 뾰족한 쐐기모양으로 깎아 물줄기를 좌우측으로 가름으로써 물살의 저항을 덜 받도록 하였다. 또 선단석 주변의 바닥에는 판 모양의 돌을 넓게 깔아 세찬 물살에 지반의 흙이 깎여나가는 것을 막고 다리가 붕괴될 수 있는 위험을 줄였다. 이처럼 아름다움과 견고함을 모두 갖춘 만안교 위를 220여 년 전에 정조와 그 일행이 건넜던 것이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만나러 가는 길목
만안교와 정조는 어떤 사연으로 얽혀 있을까? 그것은 수원 화성에 있는 사도세자의 묘를 참배하러 가던 여정과 관계있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일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파 간의 치열한 싸움에 휘말려 억울하게 뒤주 속으로 들어갔던 아버지의 모습과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했던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정조는 즉위한 후 아버지의 묘를 양주 배봉산으로부터 수원 화산(오늘날 화성)으로 옮겼다. 동시에 화산에 살던 사람들이 옮겨가서 살 수 있는 터전이자,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높일 수 있는 공간으로서 신도시 화성을 건설하도록 했다. 실학자 정약용이 설계를 맡은 화성 축조 공사는 영의정 채제공의 지휘 하에 시작되어 예상보다 빠른 2년 7개월 만에 완료하였다. 그 후 정조는 그 먼 길을 마다않고 새로 지은 화성과 아버지가 묻혀있는 현륭원을 여러 차례 들렀다. 그 길을 갈 때 이 곳 안양의 만안교를 건넜던 것이다
처음에는 남태령 고개를 넘은 후 과천, 인덕원을 거쳐 수원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즉위 20년이 되던 해인 1795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년이 겹쳐 수많은 사람들과 어머니까지 동행하여 화성으로 행차하게 되었다. 화성에서 성대한 잔치를 열고 백성들을 위한 행사도 가질 계획을 세웠다. 궁궐을 출발해서 다시 돌아올 때까지 이른바 ‘8일간의 축제’를 계획했던 것이다. 하지만 기존에 이용하던 남태령 고갯길은 좁고 험하여 위험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적극 가담했던 김상로 형제의 묘가 근처에 있어 정조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수원으로 가는 다른 길을 모색하였다. 그러던 중 한강을 건넌 후 시흥과 안양을 거쳐 수원으로 들어가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 때 왕이 지나갈 길을 정비하면서 경기관찰사였던 서유방을 책임자로 하여 이 돌다리를 만들었다. 3개월에 걸쳐 다리가 완성되자 정조는 ‘만년동안 백성들이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는 다리’라는 뜻으로 ‘만안교’라는 이름을 친히 지었다. 왕이 행차할 때를 제외하곤 마을 주민들도 편리하게 이용하도록 한 정조의 마음을 담고 있는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수원 화성으로 향한 정조의 여정은 아버지에 대한 효심과 정적들을 향한 정치적 야심을 품은 길이었고 그 여정 한가운데 만안교가 있었던 것이다. 만안교를 설치한 그 해에 화성에서 보여준 정조의 행적에서도 정치적 의도를 알아챌 수 있다. 봄의 푸름이 짙어가는 5월, 빛바랜 돌다리 만안교를 걸어보며 이곳을 거쳐 간 정조의 마음을 되새겨보는 것은 어떨까?
글‧김효중(안양 부흥고) 사진‧안지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