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산악인 고(故) 고미영씨가 영원히 세상을 떠난 날, 이용대(77) 코오롱등산학교
교장은 두 번 울었다. 2009년 7월 21일 서울 을지로 국립중앙의료원 장례식장에서 한때 동료였던 등산학교 강사들이 고씨의 관을 운구차에 싣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누구보다 아꼈던 후배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분노마저 치밀었다. 열흘 전 고씨는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8126m)를 등정하고 내려오다 실족사 했다.
그날
오후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편지함에서 작은 엽서 한장을 발견했다. 고씨가 두 달 전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높은 마칼루(해발 8463m)를
등정하기 직전 베이스캠프로 가는 길에 쓴 엽서였다.
"인생이
선사하는 최고의 상은 가치 있는 일을 열심히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주어진 기회에 감사드리며 용감하게 오르고 안전하게 하산하여 출발
시점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희(古稀)를 넘긴 산악인의 몸은 벼락에 맞은 듯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이어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키 167㎝, 몸무게 50㎏의 깡마른 체구 어디에서 그렇게 눈물이 솟아나는지 폭포수 같은 눈물은 그치질
않았다.
"정상을 정복하는 건 등산의 백미(白眉)이다. 하지만
등산의 완성이 뭔지 아는가. 바로 출발한 그곳에 무사히 돌아오는 것이다. 가족과 소중한 사람들이 기다리는 그곳 말이다. 살아 돌아오는 게
자랑이어야 한다. 정상은 반환점에 불과할 뿐이다."
이용대는
1985년 코오롱등산학교가 처음 생겼을 때 강사로 출강하기 시작했다. 1997년부터 교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가 몸담은 30년 동안 이
등산학교를 거쳐 간 사람은 1만5000명. 서울 우이동 계곡 등산로 입구에 있는 코오롱등산학교에서 만난 그의 목소리에선 힘이 느껴졌다. 걷는
뒷모습은 청춘 그대로였다.
- 이용대 코오롱등산학교 교장
―산에 오르는 사람이 갖춰야 할 첫 번째 마음가짐은 어떤 것인가.
"자기 자신을, 자기 능력을 알아야 한다. 산을 우습게 보면 안 된다. 자만하거나 방심하면 정말 큰일 난다. 프로도 아마추어도 마찬가지다. 작년에 국내 산악인들이 해수면에서 에베레스트 정상까지, 제로(0)에서 8848m까지 무산소 등반을 했다. 그중 후배 산악인이 고산 등반 능력이 탁월한 선배를 따라 산소마스크 쓰지 않고 올라가다 마지막 캠프에서 사망했다. 남을 따라 하면 절대 안 된다. 일반인도 마찬가지다."
―국내 등산 인구가 1800만명을 넘는다. 외국에 비해 유난히 많은 것 같은데.
"주변을 둘러봐라. 우리나라만큼 쉽게 산에 갈 수 있는 나라도 없다. 서울만 해도 북한산·도봉산 등은 전철로 가서 바로 등산을 할 수 있다. 프로와 아마추어 경계 구분도 없다. 외국에선 설선(雪線)이 기준이다. 만년설이 있는 높은 곳은 프로, 그 이하는 아마추어 영역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산은 높이가 모두 2000m 이하이고 대부분 800m도 안 된다. 먹고살 만해지니까 건강에 신경 쓰게 된 것도 등산 인구 증가의 주 요인이다. 전국에 산악회만 10만개가 넘는다."
―사람들이 산에 갈 수밖에 없도록 등을 떠미는 사회문제와 사회 분위기도 있는 것 아닌가.
"맞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산을 찾는 사람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갑자기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뒷주머니에 신문 꽂고 와서 읽다 가는 모습을 참 많이도 봤다. 그들은 산에서 위로받았고 다시 살아야겠다는 힘을 얻었다. 영국 산악인 조지 핀치는 '등산은 스포츠가 아니라 삶의 한 방법'이라고 했다. 이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 우리나라다."
요즘 등산학교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른다. 봄·가을 학생을 뽑는 '정규반'은 정원에 미달하는 법이 없고, 암벽반도 인터넷 접수 시작 30분 만에 마감되기 일쑤다. 이용대는 "정규 과정을 마친 사람들 중에는 최종 학력이 등산학교라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산에 가기 위해 돈 내고 등산학교를 다녀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프로는 산에 오르기 위해 건강을 챙기지만 아마추어는 건강하기 위해 산에 오른다. 동기가 무엇이든 누구에게나 등산과 관련된 기술과 이론, 철학은 무척 중요하다. 등산을 하는 건 내 몸을 살리기 위해서라고들 한다. 그런데 잘못된 방식으로 산에 올랐다가 오히려 몸을 해치는 경우가 많다. 등산학교에선 등산복과 등산 장비를 올바르게 입고 착용하는 방법, 독도법, 힘들지 않게 오르는 스텝, 안전수칙 등은 물론이고 문학과 등산의 역사, 생태도 가르친다. 전문 암벽등반과 히말라야 등반 코스도 있다. 산에 대한 모든 것이 있다고 보면 된다."
―등산학교 교장으로서 일반인들에게 꼭 알려주고 싶은 안전수칙이 있다면.
"정상에 갔느냐, 몇 시간 만에 주파했느냐 등을 따지면 절대 안 된다. 자칫 체력이 과다 소모되면 사고로 연결된다. 저체온증에 대한 이해는 특히 중요하다. 봄·가을 날씨 따뜻하다고 산도 그런 줄 알았다가는 큰코다친다. 산은 100m 올라갈 때마다 기온이 0.6~1도씩 떨어진다. 1000m라면 6~10도가 내려가는 것이다. 땀이 난 상황에서 바람 부는 곳에서 쉬다간 체감온도가 더욱 급격하게 떨어진다. 평소보다 240배나 빨리 체온을 빼앗긴다. 두뇌 활동이 저하돼 균형·평형감각도 떨어진다."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옷을 더 입는다고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옷은 체온을 유지해주는 역할을 하지 체온을 올려주진 못한다. 빨리 건과일이나 따뜻한 꿀물 등을 먹어야 한다. 체온이 35도 이하로 내려가면 죽을 수도 있다."
―등산이란 수평의 세계에 살던 사람이 수직의 삶을 경험하는 것이다.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무엇보다 사람들이 순수해진다. 산에는 출세도 없고 돈도 없다. 등산은 무상의 행위이다. 수평 세계에 있을 때 얽매여 있던 모든 굴레와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다. 등산은 종교이자 탈출이다."
―등산을 배우는 사람들이 마주치는 첫 감동의 순간이 있을 것 같다.
"정규반 졸업 때 북한산 인수봉 암벽 등반을 한다. 100m 높이 암벽을 죽을 힘 다해 기어오른 뒤 정상에 서서 세상을 바라볼 때 그들의 얼굴에 배어 나오는 웃음은 억만금을 줘도 못사는 것이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엉엉 우는 사람도 있다. 바로 이런 거 아닐까. 한번은 '비박(야외에서 잠자는 것)'을 하는데 한 출판사 사장이 '예순 살 평생 이런 아름다운 광경은 처음 본다'고 하더라. 그 이후 그는 완전히 산에 미친 사람이 됐다."
- 사람들은 오늘도 산에 오른다.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무엇을 얻으려고. 영국인 등산가 조지 맬러리는 “그곳에 산이 있기 때문에(Because it is there)”라고 했다. 사진은 산악인들이 북한산 백운대 암벽 루트 ‘시인 신동엽 길’을 오르는 모습. / 염동우 C영상미디어 기자
중앙대 법대를 졸업한 이용대는 판·검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 꿈과 거리가 너무 멀었다. 고등고시(지금의 사법시험)만 7번 떨어졌다. 외국어가 필수 과목으로 추가되자 합격 가능성은 거의 사라졌다. 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산을 만났다.
―처음 산에 가게 된 계기는.
"어느 날 친구 손에 끌려 북한산 노적봉에 올랐다.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왜 그렇게 느리게 가는지. 많은 사람을 추월해 올라갔다. 문득 희한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산 타는데 천부적인 자질이 있구나' 하는…. 정상에 올라 붉게 타오르는 노을과 도도히 흐르는 한강을 봤다. 한바탕 함성을 지르고 내려오니 모든 체증이 다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 이후 틈나는 대로 산에 올랐다."
―고시도 포기했는데 먹고사는 문제가 큰 고민이었겠다.
"당시 체신부 공무원으로 취직했다. 한국통신이 생기면서 그쪽으로 옮겨갔고 1995년 6월 정년퇴직했다."
그가 한창나이 땐 해외 등반이 쉽지 않았다. 해외여행 자체가 매우 까다로웠다. 비용 마련도 어려웠다. 그래도 기회 날 때마다 해외 원정을 떠났다. 미국 요세미티 거벽, 유럽 알프스 몽블랑·마터호른, 이탈리아 돌로미테 산군, 카라코람 히말라야 드리피카 등에 올랐다. 한중 수교 직전인 1992년 2월엔 국내에선 처음으로 백두산 장백폭포 빙벽을 등반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그 정도 강도로 등산을 하는 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언제나 산에 목말라 있었다. 토요일 출근할 때 배낭을 싸서 갔다. 퇴근하면 그대로 설악산이나 지리산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주말 1박 2일을 보내고 오면 집사람과 하늘을 두 쪽 낼 듯 싸우곤 했다. 어머니가 든든하게 지원해 주신 덕에 산에도 가고 그럭저럭 위기도 넘긴 것 같다. 하지만 회사에선 진급할 기회를 여러 번 놓쳤다."
그는 3남1녀 중 장남이다. 산은 그에게 축복인 동시에 재앙이기도 했다. 열한 살 아래인 막냇동생은 1973년 스물일곱 살 때 도봉산 선인봉에서 떨어져 세상을 떠났다. 2000년 여름엔 북한산 만경대 암릉(岩陵)을 오르던 셋째 동생마저 추락사했다.
―혹시 산 좋아하는 큰아들 때문이라는 부모님 원망은 없었나.
"그렇지 않았다. 막냇동생 죽고 한 달 정도 집에다 산에 간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 어머니가 '사람은 원하는 걸 해야 한다'며 현관에 등산배낭을 갖다 놓으셨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도 산에 대한 열정은 도무지 식지 않고 오히려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그렇게 위험한데도 왜 사람들은 산에 오를까. 그 대답이 궁금하다.
"등산이 시작된 이후 계속되는 철학적 질문이다. 마약보다 더 강한 중독성 때문이라고 할까.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도달하는 신세계, 다른 데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엄청난 성취감. 1920년대 1·2차 에베레스트 등정에 참여했던 조지 맬러리가 말했다. '그곳에 산이 있기 때문에(Because it is there)'라고."
―보통 사람들의 눈에 산악인은 마치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 같다.
"히말라야 첫 도전자이자 희생자인 프레더릭 머메리는 '등산가는 자신이 숙명적인 희생자가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산에 대한 숭앙을 버리지 못한다'고 했다. 그 말을 하고 한 달 후 낭가파르바트에서 행방불명됐다. 인간은 꿈과 목숨을 맞바꿀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다. 설사 그것이 목숨이라는 너무나 값비싼 대가를 요구할지라도 꿈을 버리지 못하는 존재 말이다."
◇등산은 창조의 행위. 나만의 길 만들어야
젊은 시절, 그는 남이 안 가본 루트를 개척하는 데 재미를 느꼈다. 북한산 인수봉에 '동양길(1969년)' '궁형길(1976년)' 등을 개척 등반했다. 그런 열정은 계속됐다. 2004년엔 설악산 장군봉 남서벽 6개 루트를 개척했다.
"등산이란 산에 나만의 선을 만드는 것이다. 산에 오른다는 건 창조적 행위이다. 등산의 길이란 산에 오르는 사람 수만큼이나 많은 것이다."
―요즘 알피니즘이 순수성을 다소나마 회복해 가고 있다고 했는데.
"228년을 이어온 알피니즘의 역사는 피크 헌팅(정상 정복)을 목표로 한 '등정주의'에서 과정과 수단을 중요시하는 '등로주의'로 변천해 온 발자취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철학의 문제이기도 하다. 등정주의는 8000m 이상 14봉 정복으로 끝이 났다. 이젠 창조적인 등반을 해야 한다. 산에 자기만의 길을 만들라는 것이다. 정상은 하나지만 그곳에 이르는 길은 다양하다. 남이 수십년 전 만들어 놓은 루트로 가지 말고 보다 어렵고 다양한 길로 오르라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등반이다. 아마추어도 나만의 길을 만든다는 느낌으로 산을 찾아가 보라. 산이 달라 보일 것이다."
―산악계에선 '정당한 방법으로'라는 뜻의 '바이 페어 민즈(by fair means)'라는 말이 있다.
"문명이 만들어낸 장비의 도움을 받지 말고 양손과 양다리만을 써서 산에 올라야 한다는 뜻이다. 세계 최초로 14봉을 오른 라인홀트 메스너는 '8000m 고산에 산소를 쓰고 올라가는 것은 6000m를 무산소로 올라가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인공물의 도움을 받으면 그건 산을 작게 만드는 것이다. 난이도가 뚝 떨어져 남이 즐겨야 할 등반성이나 모험성을 감소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떳떳하게 등반을 하다 보니 인간의 등반 기량도 탁월해졌다."
―인류가 개발한 장비를 이용하지 말라는 것은 너무 극단적인 것 아닌가.
"물론 그런 비판은 있을 수 있다. 정말 원초적인 '공정한 수단'이라면 발가벗고 올라가야겠지. 장비는 물론 옷도 신발도 없이. 겨울 빙벽도 손톱으로 긁으면서.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지 않겠나. 한계가 중요하다. 선글라스·조명·취사도구·로프 정도는 용인될 수 있다고 했다."
- 2009년 7월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8126m) 등정에 성공한 뒤 하산하다 추락사한 고(故) 고미영(사진 왼쪽)씨가 이용대 교장에게 보낸 엽서. / 고미영을 사랑하는 모임·이용대씨 제공
"고미영이 왜 죽은지 아나. 하산길에는 지름 9~10㎜ 정도의 고정 로프가 있었는데, 그게 10m 정도 잘려 있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외국 등반팀이 자기들 로프가 부족하다고 그걸 끊어간 것이다. 산악계가 너무 타락했다."
세계 8000m 이상 14개봉 정복에 나섰던 고씨는 11번째로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8126m) 등정에 성공한 뒤 산을 내려오다 해발 6300m 지점에서 발을 헛디뎌 1000m 절벽 아래로 떨어져 사망했다. 그는 캠프1에서 위쪽으로 약 100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됐다.
"미영이는 1991년 봄 등산학교 정규반 13기로 입학했다. 이듬해엔 암벽반 7기를 졸업했다. 그때까지도 몰랐다. 미영이가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강한 근성의 소유자라는 걸. 체력과 기술 보강으로 3박자를 갖추면서 세계에서 손꼽히는 산악인이 됐다. 2년 9개월 만에 8000m 이상 11개 고봉을 점령한 것은 지금도 전설이다."
―산악계의 타락, 무슨 뜻인가.
"에베레스트 주변엔 정상 등반을 대행해주는 에이전시가 130여개나 된다. 8000만~1억원을 주면 평생 아이젠 한 번 안 신어 본 사람들을 산 정상까지 모셔간다. 짐을 대신 져주고 산소마스크도 바꿔 끼워주면서. 힘들면 밧줄로 묶어서 데리고 올라간다. 이게 상업 등반대다. 매년 5월이 되면 200여명이 줄지어 산에 오른다. 이게 말이 되나. 전문 산악인 중에서도 상업 등반대를 이용하는 경우가 있다."
―등산이 얼마나 위대하다고 생각하나.
"1996년 에베레스트 첫 등정자인 에드먼드 힐러리를 만났다. 그는 자신의 등정이 달 착륙에 버금가는 20세기 인류 탐험사의 최고 성과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에베레스트 등정을 더 값지게 생각한다. 달 착륙은 과학기술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등산은 인간의 힘으로 그전까지 상상도 하지 못했던 한계를 극복한 것이다."
- 이용대 코오롱등산학교 교장은 자신이 원로가 아닌 현직 알피니스트라고 했다. 사진은 이 교장이 서울 우이동 코오롱등산학교 교육센터에 있는 20m 높이의 세계 최대 실내 인공빙벽을 오르는 모습. / 이덕훈 기자
이용대는 책 읽고 공부하는 산악인으로 소문나 있다. 그는 1970년대 이후 전문지와 신문 등에 칼럼 등을 쓰고 있다. 날카로운 비판도 서슴지 않아 별명이 '산악계의 송곳니'이다. 최근 출판한 '그곳에 산이 있었다(해냄 출판사)'는 그가 쓴 1300여편의 칼럼 중에서 51편을 추려낸 것이다. 그는 "요즘에도 한 달에 200자 원고지 300매 정도 글을 쓴다"고 했다.
―책과 글이 등산에 왜 중요한가.
"산악인은 글쓰기와 책읽기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들을 오르고도 그 체험을 기록으로 남기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우린 행위만 있고 기록이 없다. 공부들을 워낙 안 한다. 메스너는 무려 50권의 책을 썼다. 등반 선진국엔 책을 내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산악인은 자기가 이 산에 왜 오르는지에 대한 철학이 있어야 한다."
―산을 더욱 잘 즐기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했는데.
"책은 산에 오르는 또 하나의 길이다. 산서(山書)를 읽지 않는다면 그것은 반쪽의 산행이다. 산서에 몰입하는 이유는 단 하나. 흥미롭고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이 평생을 살아도 체험할 수 없는 생생하고 드라마틱한 세계가 살아 숨 쉬고 있다. 책을 통해 먼저 접한 산에 실제로 오른다면 그 느낌이 더 풍요로울뿐더러 감격은 몇 배가 된다."
―등산객 옷차림에 대해서 비판적이던데.
"약수터 가는데 히말라야 등반용 옷을 입는 게 우리 현실이다. 옷이 신경 쓰여 제대로 등산이나 하겠나. 산은 패션을 자랑하거나 경쟁하는 곳이 아니다. 옛날엔 누더기 같은 옷을 입었지만 지금보다 더 행복했고 자부심도 높았다."
"경제 규모나 인구에 비춰 볼 때 우리나라 레저 시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시장 규모가 6조원이다. 전국 어딜 가도 세계의 모든 유명 브랜드 옷과 장비를 다 구입할 수 있다. 이런 광경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섭섭한 것이 있다."
―그게 뭔가.
"책방이 없다. 유럽 알프스 주변국엔 항상 장비점과 함께 대형 서점이 있다. 우린 장비점은 있어도 그곳에서 산서를 팔진 않는다. 이게 현실이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당신은 스스로를 훌륭한 산악인이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만족하지 못한다. 내 가슴이 터질 듯 충만한, 극적인 산행을 아직 못해본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원로가 아닌 현직 알피니스트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