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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1972년 6월 20일(민주수호국민협의회 주최) 대성빌딩에서 열렸던 강연회에서 행한 강연 내용임-
민족 통합의 길1
신천 함석헌
만나야 한다.
민족통합의 길이라고 제목을 걸었습니다마는 우리의 본의 아니게도 불의한 외세에 몰려 민족이 남북으로 갈라져 30년을 내려오는 이 부끄럽고 분한 비극을 해결할 무슨 묘한 방안이라도 있어서 나선 것은 아닙니다. 묘한 방법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방법의 문제가 아닙니다. 적어도 저는 그 방안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언제나 말을 하면 “원리원칙 소리만하지 구체적 방안이 없는 사람이다” “남더러 잘못한다는 소리만 말고 대안을 내놔라” 하는 비평을 듣지만, 저 자신 그것을 그대로 인정합니다. 공부한 것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공부를 아무리 했다면, 머리가 아무리 비상하다면, 누구는 별 재주가 있습니까? 30년을 두고 세계의 모든 제도라는 정치가란 것들이 밤낮 입씨름을 하면서도, 저희도 안된 일인 줄 알면서도 어떻게 못하는 그 사실이 재주의 문제 아닌 것을 증거합니다.
세계역사는 세계 심판이라는 셸리의 말은 천고의 명언입니다. 남북한의 갈라짐, 동·서 독일의 대립, 두 월남의 싸움은 인류에 대한, 특히 그 정치에 대한 심판입니다. 천벌입니다. 천벌이라면 그것은 심정(心情)의 문제요 정신의 문제지 결코 재주나 기술의 문제가 아닙니다. 같은 홍수나 화산의 재난을 당하고도 히브리의 어진 마음들은 정신 도덕의 문제로 해석했고 그 밖의 다른 민족들은 재주 기술 문제로 대했습니다. 그 누가 옳았던가는 이미 역사 위에 환합니다. 재주의 문제로 하는 한 역사는 언제나 바벨탑 곧 ‘혼란’의 되풀이일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선 것은 여러분을 뵙기 위한 것입니다. 무엇을 지꺼렸던 간 목적은 우리가 서로 만나는데 있습니다. 이미 두 분 강사가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셔서 여러분은 그것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저도 이 강연회를 열자고 의견을 냈던 사람의 하나입니다마는 목적은 무엇을 서로 알려드리거나 토론하자는 데 있는 것 아니라, 한번 서로 만나자는 데 있습니다. 자꾸 만나야 합니다. 우리의 대적이 우리가 서로 만나지 못하도록 갖은 수단을 다 쓰는 것이, 그 서로 만남이 어떻게 중요하단 것을 증명해 줍니다.
민족통합의 길이라지만 길이 어디 따로 있어서 그것을 가는 것이 아니라, 가는 것이 바로 길입니다. 우리끼리 서로 만나지 못하는데 남·북의 만남이 있을 수 없고, 남·북이 서로 만나지 못하는데 통합이 어떻게 있을 수 있습니까? 만나야 합니다. 관리나 정치인끼리 만나는 것은 만남 아닙니다. 씨알들이 만나야 참 만남이요, 하나됨입니다.
“씨알은 외롭지 않다” 하지만 씨알이야말로 외롭습니다. 공자(孔子)도 덕불고(德不孤)라 했습니다마는 정말 외롭지 않다면 그 말 아니했을 것입니다. 속뜻으로는 외롭지 않겠지, 마침내는 전체 안에 하나되는 때가 오겠지, 그러나 지금은, 적어도 겉으로는 외롭습니다. 외로워서는 아니되고 외로울 리가 없는 것인데 외롭습니다. 거기에 우리 할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덕불고(德不孤)라, 씨알은 외롭지 않다 하는 말은 하나의 사실 설명이 아닙니다. 명령입니다. 숨겨진 명령입니다. 바로 말한다면 “외롭지 않도록 해라!” “외로워 말라!”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장준하 선생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셨으면 장선생이 어떻게 외로운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내 나라 내 강산이라지만 갈 곳이 없고 설 자리가 없습니다. 강연을 할 수 없지, 글을 쓸 수 없지, 누구를 만날 수조차 없습니다. 만나면 그 사람이 곧 고통을 당하고 악당이나 되는 양 의심을 받게 되는데 어떻게 누구를 만납니까? 또 그저 외롭기나 해도 좋겠는데, 이 나라에 있지도 말라고 졸라댑니다. “선생님 좀 쉬시지요. 어디 외유(外遊)라도 하시면 어떻습니까?” 하는데, 그 말에 씌워져 있는 점잖음을 벗겨 버리면 그것은 곧 “이 자식아 이 땅에는 못 있는다. 어디로 꺼져버려라!”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분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죄로 이 외로움, 이 학대, 이 업신여김, 이 미워하고 싫어함을 당합니까? 다른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씨알 노릇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외로움은 곧 씨알 전체의 외로움입니다.
씨알이 전체인데 외롭다는 것은 말이 아니된 소리입니다. 그러니 거기 장난이 들어 있습니다. 며칠 전이 외로운 씨알 몇이서 외로움을 못 이겨 같이 모여서 저녁을 먹은 일이 있습니다. 그중 어느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정권이 참 놀라운 일을 하나 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국민을 왼통 모래알을 만든 것이다.” 과연 옳은 말입니다. 이북은 가보지 못해 모르겠습니다마는 이 3천 5백만은 제각기 따로 도는 모래알 밖에 되는 것 없습니다. 그러니 그 민중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무력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바위가 굳은 바위대로 있을 때 산을 이룰 수 있고 바다를 막을 수 있고 집을 지을 수 있지 한번 부서져 모래알이 될 때 물결에 밀려 들어왔다 나갔다 밀려다닐 뿐이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전체가 살아 있을 때 민중은 무섭습니다. 3.1운동 아니 보고 4.19 아니 보았습니까? 총칼이 소용없습니다. 그러나 전체가 깨지고 알알이 저만 아는 모래가 됐을 때 사람은 그 사람대로 있어도 아무 힘이 없어, 미끼에 끌리고 채찍에 몰리는 짐승 마냥 천대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으로 그들이 그 전체를 부쉈습니까? 폭력과 매수로 입니다. 망치로 바위를 때리면 금이 가고 그 금난 틈으로 빗물이 스며들면 분해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모래가 모래인 이상 걱정 없습니다. 바위는 본래 뜨거운 지열 속의 용암이 식어서 된 것인데 풍우에 썩어 몇 번을 모래로 부서졌다가도 그 모래가 쌓여 긴 세월을 하나로 모여 있으면 제 무게로 다시 바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지배자 압박자가 아무리 전체를 깨치고 썩혀도 씨알의 본성을 변질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씨알이 끈질긴 의지로 서로 만날 때 그 본래의 하나됨은 다시 찾아지고야 맙니다.
우리가 서로 만나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외롭고 바닷가의 모래같이 무력한 것 같지만, 또 그런 중에도 동지가 있습니다.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면 불역낙호(不亦樂乎)아, 이 강연회를 보려고 몇 백 리 밖에서 오는 이도 있는데 어떻게 합니까? 정치업자들은 겉껍데기밖에 모릅니다. 씨알은 헤져 있어도 그 속에 전체가 알갱이로 살아 있습니다. 외롭다는 느낌은 그 숨어 있는 전체의 더듬는 손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찾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만나기만 하면 서로 손을 잡게 마련이고 하나 둘이 손을 잡으면 그것이 속고갱이가 됩니다. 아무리 작아도 속 핵심체가 한번 생기기만 하면 천하는 여반장(如反掌)입니다. 눈덩이가 산꼭대기에서 구르기 시작할 때 겨자씨 크기에 지나지 않지만 한번 운동을 시작하면 점점 커져 마침내 집을 무너뜨리고 성을 밀어버립니다. 시대의 비탈길을 내리닫는 씨알의 눈사태를 막으려는 자는 화 있을진저!
에스칼레이션
사람은 사람에 의해서만 사람이 됩니다. 사람은 서로 감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아, 자아 하지만 자아는 결코 홀로가 아닙니다. 나는 수없는 나가 모여서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 속에는 내가 벌써 들어 있고 나 속에는 네가 미리 와 있습니다. 억억 만만의 전생(前生) 차생(此生) 피생(彼生)의 모든 나들이 서로 그렇습니다. 아무리 잘났다는 나도 혼자의 나는 없고, 아무리 못났다는 너도 혼자의 너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들은 서로 알아보는 것이고 알아봄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산다는 것은 가만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만날 때 나는 한 치 높아지고 네가 그 나를 볼 때 너는 또 한 치 더 높아집니다. 자아는 서로 주는 것이요, 서로 경쟁하는 것입니다. 생명, 더구나 인격적인 생명은 결국 에스칼레이션(escalation)입니다. 계단적으로 높아감입니다. 서로 에스칼레이션을 일으키지 못하는 나나 너는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만나자는 것입니다. 만나면 산다, 여의면 죽는다.
얼마 전 씨알의 소리 기념 강연을 했더니 정부의 한분이 찾아와서 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말기를 권하면서 “선생님은 말씀만 시작하면 점점 에스칼레이션을 일으켜서 안됐습니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르는 말입니다. 서로서로 자극해서 점점 더 높은데 가자는 것이 사람이지, 돈닢, 고깃점, 감투 깨를 얻어 쓰고 먹고는 잠이나 자든지 서로 장승처럼 바라보고 있잔 것이 사람 아닙니다. 그래서는 사람이 못됩니다. 에스칼레이션을 못 일으키게 하잔 것은 이 민중을 사람이 아니고 소나 말로 만들자는 생각입니다. 우리 서로 만나자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만나서 서로 봅시다. 우리 시선이 서로 오고 갈 때 정신의 에스칼레이션이 일어나 이 잘못된 정치로 인해 생긴 공해의 장벽을 대번에 뚫고 하늘로 올라갈 것이요, 그러면 또 38선 건너에 에스칼레이션을 일으켜 둘이 서로 파도처럼 얼싸안고 용울음을 할 것입니다.
세상에는 참 괴상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만나는 가운데 자라고 발전하는 것을 싫어해서 될수록 만나지 못하게 하고 서로 말도 못하고 글도 쓰지 못하게 하고는, 자기 혼자 갇힌 속에서 한 망상을 전체 위에 씌워 독재를 하는 데서 쾌감을 누리려고 합니다. 아주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사람 중에 나폴레옹보다 더한 것은 없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하면 “불능(不能)은 바보의 사전에만 있는 말”이라고 뽐냈겠습니까? 그러나 그 말로(末路)는 센트 헬레나에서 쪽쪽 울다 죽었습니다. 불쌍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리석은 대중의 행렬 속에서 같이 먹고 같이 자다가 권력자에게 짓밟혀 죽은 예수는 역사와 더불어 길이 살았습니다. 그는 시대에서 시대로 영광의 재림을 하는데 잘났노라 영웅이라 하던 것들은 민중의 가슴 속에 영원히 저주받은 자로 갇혀 있어 나올 길이 없습니다. 귀담아 들을지어다. 너는 겸손히 씨알의 대열 속에 서서 이 역사의 법궤를 멜 터인가? 아니면 강아지처럼 충성하는 비인족(非人族)에 둘러싸여 임금인양 취하다가 허망의 바다에 빠질 터인가?
사람은 아무리 행운(幸運)을 탄다 해도 그 키에 한정이 있듯이 그 생각과 재주에도 한정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 더구나 내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을 보면 원수같이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원수가 있어야 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존경하는 우찌무라(內村) 선생이 “사람은 될수록 강하고 큰 대적을 가져야 쓴 다”고 말씀해 주셨던 것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대적은 미운 것 같지만 대적이 없으면 사람은 썩어지고 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만이 핵무기를 독점하고 소련이나 중공의 맞섬이 없었던들 그 횡포가 얼마나 했겠나? 그들의 견제가 있었으니 미국이 그만큼이라도 조심하고 세계를 마음대로 주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 옳지 못한 것을 가지고 맞서는 대적도 그와 같이 나와 저를 위해 도움이 되거늘 하물며 그런 욕심의 생각이 아니고 일을 바로 하자는 생각에 하는 비판이나 투쟁이라면 나와 나라를 위해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아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정권이 성립된 이래 오늘까지 쉬지 않고 그 잘못을 지적하고 싸워옵니다마는 결코 정권을 뺏자는 야심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정부도 그것쯤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다고 우리의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빼앗아 거의 설 자리가 없이 됐으니 참 답답한 일입니다. 나는 그들의 마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인으로서도 불취하문(不恥下問)이라 했는데,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정말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렇게까지 좁고 치우치게 자기주장만 해서,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말하는 것을 미워해서 이렇게 학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옳은 것을 확신합니다. 우리 동기에 더러운 것이 섞이지 않은 것을 우리 양심이 스스로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죽기를 무릅쓰고라도 씨알을 모래알로 만드는 이 죄악을 규탄할 것입니다. 죽어도 좋습니다. 사람답지 못하게 사는 것보다는 사람답게 죽는 것이 차라리 사람입니다.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죽으면 억억 만만의 새 씨알이 또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네 잘못을 책망한다 해서 우리를 학대하는 그들은 참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어찌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께는 이 말을 하지 않아도 좋을 것입니다. 이 정치한다는 그 사람들이 제발 이 말을 좀 와서 들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정부에서는 몇 분이 오셨을 줄 압니다. 인간된 심정과 민족의 의리를 가지고 호소합니다. 이미 오셨으니 보고가 갈 줄은 압니다마는 제발 충실한 관리가 되어 들은 것은 바로 이해하여 위에 있는 책임자에게 자세히 알려 드리기 바랍니다. 반대하거나 비평하는 말을 듣기 싫어하면 사람이 될 수 없고 불쌍한 동물의 지경에 떨어진다 할 때, 말하는 이 나의 마음은 좋아서 아니면 감정 풀이로나 하는 말이겠습니까? 내 앞에 섰는 너를 감동시켜 동물의 지경에 떨어짐을 면케 할 만한 정성이 없을 때 그 나인 들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은 사람 없이는 못 사는 것이고, 사람이 서로 만나면 적대하는 관계에서까지도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은 사람을 그리워합니다. 여러분이 오늘 저녁 여기 나오신 것이 그것을 힘 있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모든 씨알을 모래알로 만들려는 이 가혹한 정치 밑에서도 여러분은 여기 아니 나오고 못 견디었습니다. 위험하고 유혹하는 칼과 돈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여러분 속에 있습니다. 모래알 같지만 절대로 모래알이 아닙니다.
이 우주를 성립시키는 것은 물질 속에 있는 서로 끄는 힘입니다. 이른바 만유인력입니다. 살아 있는 물건에 오면 더합니다. 나비는 꽃을 찾고 꽃은 나비를 부릅니다. 정신에 이르면 더욱 더 심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짓는 죄악 중에 사회에 분열작용을 일으키는 것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분열은 곧 죽음입니다. 머리와 몸이 떨어지면 죽습니다. 피가 몸에서 빠져버리면 죽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회를 이루는 인정, 의리, 믿음의 줄을 끊어버리면 사회는 망해버립니다.
나 이제 고백하는 말을 하나 하겠습니다. 이 강연이 시작되려 할 때 내 마음은 초조와 불안 때문에 견딜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다 됐는데 연사의 한 사람인 장준하 선생이 아니 왔기 때문입니다. 내 머리 속에 번개같이 “이 사람들이 또 무슨 장난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번쩍였습니다. 이 강연회 여는 것을 당국이, 신경이 곤두서서 싫어하는 것을 우리도 잘 알고 있고, 세상의 눈에는 아니 뵈는 별별 유령의 장난이 있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좀 늦기는 했으나 들어오시는 것을 볼 때나는 비로소 한숨을 훌 내쉬었습니다.
이제 와서 보면 내가 쓸데없는 의심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당국에 대해 속으로 사과합니다. 그러나 노상 근거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선거 때에 보면 그런 일을 일쑤로 잘 합니다. 그러니 속담에 “삼밭에 똥 한 번 싼 개가 늘 쌌다는 말 듣는다”고, 의심받게 돼 있습니다. 하나하나의 그런 일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하지도 않았는데도 그런 의심을 하리만큼 신용을 잃고 있다는 그 사실이 더 큰일입니다. 이 정치가 전적으로 민중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이 다 결코 미워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 밉기도 밉습니다. 국민을 모래알로 만들었는데 어떻게 미운 생각이 아니 나겠습니까? 그러나 미울수록 미워하지 말라고 내 속의 스승은 가르쳐줍니다. 나는 될수록 미워하지 않으려고 참습니다. 나는 정말 노력합니다. 말 한마디도 절대로 감정 내키는 대로는 하지 않습니다. 내 마음의 한길 위에도 ‘일단정지’의 패쪽을 세웠습니다. 미워해서는 아니되지, 반성하고 반성합니다. “하나님 제발 미운 마음으로 하지 않게 해줍시사!” 기도하고 기도합니다. 부끄러운 고백입니다. 내딴으로는 이제라도 바른 길에 들어섰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입니다.
씨알이 서로 만나는 길을 절대로 막아서 아니됩니다. 씨알을 돌려놓고 순전히 정치나 군사로 통일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곧 잘못입니다. 정치한다는 사람들의 이 잘못된 생각을 돌이키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할일입니다. 사회적 통합 없이 정치적 통일 없습니다. 설혹 된다 해도 무의미합니다. 무의미할 뿐 아니라 해됨이 큽니다.
숨을 쉬어야 한다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라 또 숨을 쉬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서로 말을 하는 것은 말하는 그 내용도 필요합니다마는 그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 말함을 통하여 우리가 숨을 쉬게 되는 일입니다.
생물은 숨을 쉬는 것입니다. 생명은 기(氣)에 있습니다. 우선 가장 알기 쉬운 것은 대기 혹은 공기입니다. 아메바에서부터 가장 고등생물이라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대기를 호흡하지 않고 사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대기만이 기의 전부는 아닙니다. 식물이나 동물은 공기만 호흡하면 살지만 사람은 그것만으로는 아니됩니다. 사람은 생물이지만 단순한 생물만은 아닙니다. 더 높은 층에 올라갔습니다. 그것을 정신계라 합니다. 정신계에서는 공기만 아니라 그보다 더 높은 기(氣)를 호흡해야 합니다. 그 가장 높은 신비로운 기(氣)를 보통 넓은 의미로 정신이라, 영(靈)이라 하기도 하고, 원기(元氣), 호연지기(浩然之氣) 하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민족이니 사회니 나라니 교회니 하는 것은 단순히 개인이 모여서 된 것만이 아니라, 저대로 독특한 생명을 가지는 하나의 보다 높은 생명체라 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살고 자라기 위해서는 신령한 정신적 호흡이 있어야 합니다.
생물적 생명에 있어서나 정신적 생명에 있어서나 숨 쉼의 원리는 토고납신(吐故納新), 곧 낡은 것을 뱉고 새 것을 마시는데 있습니다. 이리 해서 시시각각으로 새롭는 것이 곧 삶이요, 자람입니다. 개인의 몸이 숨을 내불고 드려마심이 없이는 살수 없는 것은 누구나 알기가 쉽지만 민족이나 나라나 교회가 그러한 것은 조금 알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그 쉬는 숨이 물질적인 기가 아니고 영적인 기(氣)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보다 높은 생명체일수록 토고납신(吐故納新)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공자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원리를 가르치는 대학의 도를 세 가지로 말할 때에 그중 하나로 신민(新民), 곧 씨알 새롭게 함을 넣은 것입니다. 본래 고본(古本)에 친민(親民)으로 돼있는 것을 주자(朱子)가 전체의 뜻으로 미루어보아 신(新)자가 잘못 된 것일 것이라고 고쳤습니다마는, 친(親)이거나 신(新)이거나 그 근본 뜻에 있어서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신민(新民)을 하지 않고는 치국이 아닐 것이고 친민(親民)하지 않고는 신민(新民)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대로 씨알이 서로 만나면 에스칼레이션을 일으켜 스스로 새로워지게 되고 반대로 씨알을 새롭게 하려면 서로 따로 돌게 하고는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만나서 서로 하는 대화 혹은 에스칼레이션이 곧 숨 쉼입니다. 대화를 통해 낡은 것은 청산되고 새 기운이 들어옵니다.
숨 쉼은 나갈 숨과 들어올 숨의 둘로 돼 있습니다. 나갈 숨은 살고 난 찌꺼기입니다. 찌꺼기기 때문에 내보내지 않으면 아니됩니다. 내보내지 않으면 독소가 되어 생명을 해합니다. 들어올 숨은 본래 우주에 그득 들어차 있는 숨 혹은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살리는 힘이 거기 있습니다. 나갈 숨을 기운껏 내보내면 자연 새 숨을 들이마시지 않을 수 없고, 들어올 숨을 기운껏 들여 마시면 자연 속에 생긴 찌꺼기를 내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 이래서『바가바드 기타』에 요가를 가르칠 때에 정신 통일의 첫걸음으로 “들어올 숨을 나갈 숨에 바치고 나갈 숨을 들어올 숨에 바치라”고 한 것입니다. 기운껏 해서 바쳐버리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새 숨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기도일 것입니다. 기도(祈禱)는 기도(氣導)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숨 쉼은 건강한 평시에는 하는 줄 모르고 하게 됩니다. 그러나 잘못되어 기운이 부족하게 됐을 때는 의식적으로 큰 숨을 쉬어야 합니다. 그것을 한문으로는 흠신(欠伸)이라 합니다. 흠(欠)은 하품이요, 신(伸)은 기지개인데 홈(欠)은 사람에게서 숨이 나가는 형상을 그린 것이요, 신(伸)은 사람 옆에 신(申) 곧 편다는 글자를 붙인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는 우선 속에 담겨 있는 독 있는 가스를 내보내란 말이요, 하나는 사지를 죽 펴서 새 기운이 마음껏 속에 들어오게 하란 말입니다.『장자』에 보통사람은 목구멍으로 숨을 쉬지만 참사람은 발꿈치로 숨을 쉰다는 말이 있습니다. 숨을 깊이 쉬어야만 몸과 마음이 건강하단 말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질식되고 마비된 상태입니다. 우선 38선으로 남북이 막혔으니 허리를 졸리어 아래 위로 피가 통하지 못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온몸이 시커멓게 죽은피가 지고 전신의 신경이 마비가 되어 아픈 줄을 알 수 없고 맥이 통하지 않습니다. 거기다가 언론을 극도로 압박하니 코 입 눈 귀를 다 틀어 막히운 셈입니다. 볼 수도 들을 수도 말을 할 수도 사람 살려라 외칠 수도 없습니다. 이대로 더 오래 가면 아주 죽어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크게 위험한 두 가지 현상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산소의 부족이고 또 하나는 독가스의 들어참입니다.
어디를 가도 누구를 만나도 시원한 일 시원한 말을 보고 들을 수는 없고 그저 답답한 심정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옳은 것이 없고 바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닷가에 가고 숲속에 가면 왜 시원합니까? 산소가 많기 때문 아닙니까? 시원이 무엇입니까? 산소를 마셔서 피가 잘 돌아감으로 정신이 맑고 활발하단 말입니다. 마음도 그렇습니다. 의를 보고 자유를 누려야 그 활동이 활발하고 따라서 정신이 씩씩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시원합니다. 남강(南岡)선생이 왜 짐승의 우리 같은 감옥에 갇혀 손으로 똥을 만지면서도 감방 안에서 일어서 춤을 덩실 덩실 추었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에 따랐고” “내가 의를 행했다” 확신했기 때문이며, 옆에 있는 사람들이 다 겉으로는 짐승 대접을 받고 있지만 목숨을 내놓고 자유를 위해 싸우자던 동지들이었기 때문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어디를 봐도 정의의 이기는 것을 볼 수 없고 누구를 만나도 자유의 정신으로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혼이 무엇을 마시고 살아날 수 있으며 시원함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그와는 반대로 사회에 꽉 들어찬 것이 독한 가스뿐입니다. 눈에 뵈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는데 답답한 기분과 나른한 느낌입니다. 이것이 어디서 왔습니까? 우리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람을 졸도시키는 탄산가스는 사람의 속에서 뱉아낸 것입니다. 살고 난 찌꺼기인데 그것을 빼버리지 않고 그냥 두었기 때문에 독이 생긴 것입니다. 사람의 몸이 귀한 것이지만 죽어 썩으면 그보다 더 더러운 것이 없고, 지식과 재간과 기술이 묘한 것이지만 그것을 잘못 쓰고 나면 그에서 더 독한 것이 없습니다. 6·25 직후 나는「전쟁과 똥」이란 글을 써서 군인들이 하는 잡지에 내려다가 못 내고 만 일이 있습니다마는 똥과 전쟁은 다 같이 살고 난 찌꺼기를 잘 치우지 않는 데서 나오는 더러운 것입니다. 지식, 재간, 기술을 잘못 쓴 것이 전쟁이요, 그것이 썩으면서 인간의 혼을 먹어 들어가는 독기가 이른바 전시 기분이란 것입니다.
그런 독가스는 중독이 되면 중독이 된 줄 모르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첨에는 답답하고 머리 아픈 것을 좀 느끼기 때문에 그 때에 문을 활짝 열어놓으면 살 수 있지만, 그때를 놓쳐버리면 죽는 줄 모르면 죽습니다. 삼불(三不)의 사회니 부정, 부패의 제도화니 하는 것은 이 상태에 거의 가까운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숨은 전체가 같이 쉬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위험한 독가스가 찼을 때는 혁명을 하거나 그 사회를 탈출하지 않는 한 누구나 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생기의 부족과 독가스의 중독은 서로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됩니다. 생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독소가 들이차게 되고 독소가 나오기 때문에 생기가 쫓기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의인은 담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견의불위무용(見義不爲無勇)입니다. 문천상(文天祥)은 이일적칠오유하환(以一敵七吾有何患)이라고 했습니다. 하나 가지고 일곱을 대적하면 못 견딜 것 같지만, 그것은 물질계의 일입니다. 일(一)은 참이요, 다(多)는 거짓입니다. 일(一)은 도(道)요 다(多)는 물(物)입니다. 그러므로 하나야 말로 굳셉니다. 옳은 사람이 그것을 믿고 담대히 외치면 불의의 사기(邪氣)는 아침 안개처럼 물러갑니다.
그러나 또 반대의 현상도 있습니다. 의인이 부르짖어도 민중이 호응하지 않는 것을 보면 남아 있는 의인들은 숨어버립니다. 반드시 비겁해서만 아닙니다. 의의 씨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레샴의 법칙은 돈에만 아니라 정신계에도 있습니다. 시대가 틀렸다 보면 의인은 입을 닫습니다. 옳은 사람이 죽으면서도 외치는 시대는 아무리 어지러워도 그래도 오히려 소망이 있습니다. 옳은 사람이 미치거나 입을 닫아버리는 시대 그것은 정말 비참한 시대입니다.
벌써 우리 사회에서는 지성인이 말을 하는 사람이 적기도 하지만, 하는 사람조차도 과연 말을 계속할 것이냐 말 것이냐 스스로 묻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참 떨리는 시대입니다. 어리석은 지배자들은 귀찮은 존재 없어지면 좋다 할는지 모르지만 그것이 천벌 받은 마음의 상태입니다. 폭력은 죽음을 심부름꾼으로 알지만 죽음은 폭력보다도 더 위대합니다. 빙생우수이한어수(永生于水而寒於水)라, 죽음은 폭력 그 자체도 삼켜버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제 우리, 우리 씨알의 할일은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크게 켜는 일입니다. 못하면 죽습니다. 지금이 그때입니다. 늦으면 문을 열어젖힐 힘조차 잃은 중독자의 운명입니다.
우리가 이 어려움 속에서도 글을 쓰자, 강연회를 열자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속에 들어온 독을 뱉아야 합니다. 그래야 생기가 들어올 수 있습니다. 육신에서는 남이 뱉은 숨을 마시면 해가 되지만 정신에는 산소 따로 가스 따로가 있지 않기 때문에 내가 뱉는 불평이 곧 저 사람의 힘이 되고 저 사람의 하는 죄악의 비판이 곧 내가 마시기만 하면 영감이 될 수 있습니다. 잘나고 못나고 선하고 악하고를 걱정할 것 없습니다. 오직 열어젖힐 뿐입니다. 창자의 마지막 고비까지를 뱉아야 합니다. 이것이 민족 소생의 비결이요 사회 혁명의 묘안입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오늘의 지옥사자 사울이 내일의 하늘나라 사도 바울이 됐습니다. 반대로 유다는 마음을 닫고 숨을 막았기 때문에 저녁에 그리스도의 친구가 아침에 사탄의 제물이 됐습니다. 민중을 압박하고 빨아먹던 독재자가 한숨을 크게 쉬어 제 죄악을 다 겸손히 민중 앞에 고백한다면 그야말로 민족의 영웅이 될 것입니다.
못한단 말인가? 그것을 못한단 말인가? 하늘 법이 무섭긴 합니다! 차디찬 뺨에 마지막 키스를 받고 잿빛 같은 얼굴로 돌아서 가는 유다의 뒷모습을 보는 예수의 가슴은 어떠했겠습니까?
때의 소리는 언제나 애끊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그 소리가 끝나고 은은히 들리는 울림(餘韻)속에 에밀레종 마냥 둔한 인간의 영대(靈臺)를 흔드는 호소가 들어 있습니다. 유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은 그래서야만 그 울림을 울려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저들이 굳어지는 것도 그 때문입니까? 그럼 어서 굳어질 대로 굳어지라 하십시오. 그래서 이 수난의 여왕의 짓밟히다 남은 심장을 때려서, 때려서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울부짖게 하라 하십시오. 우리가 그것까지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와 만물의 죄를 씻는 슬픔의 호소를 하늘가로 보낼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는 것은 보기 좋은 꼴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래도 하지 않으면 아니됩니다. 죽게 된 자에겐 체면 없습니다. 아닙니다. 사실은 중독이 되어 뻗어지는 것이 더 흉한 꼴입니다. 이 시국에 기어이 비판을 하고 토론을 하고 질문하는 것을 부끄러이 아는 신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신사(神土)가 아니라 신사(呻死)입니다. 이것을 부끄럽게 혹은 불온(不穩)하게 아는 것은 압박자의 뒤집힌 논리요 붙어먹은 기생(寄生) 지성인의 현상유지주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조금도 부끄러워 할 것 없이 입을 찢어지게 벌리고, 고함을 목 조르던 놈이 기겁을 하게 지르며, 주먹을 불끈 쥐어 푸른 하늘에 휘두르고 발을 땅이 꺼지도록 뻗디디며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처럼 으젓 버젓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죽으려던 것이 살아나는데! 음흉한 정치 썩어진 도덕에 속아서는 아니됩니다. 섭섭이가 썩었으면 씩은 냄새를 토합시다. 간장이 곪았으면 고름을 뱉읍시다. 손가락이 떨어졌으면 그 손가락으로 시늉을 하고 발이 비꼬였으면 그 발로 춤을 춥시다. 그러면 너와 나의 속에서 생명의 역사극이 폭발이 돼 나올 것입니다.
나는 하품하고 기지개 켜려고 왔습니다. 웃지 않으실 줄 압니다.
그리고 하품 기지개는 반드시 전염되는 법입니다. 이쪽이 하면 저쪽도 저도 모르게 합니다. 그것이 진리인 증거입니다. 내가 내 속의 흥분과 나의 못생긴 꼴을 보일 터이니 여러분도 여러분의 아픈 곳 부끄러운 곳을 드러내십시오. 정말 흉하게 하면 저 점잖은 양반들이 다 도망을 할 것입니다.
정신의 바늘 구멍
나는『씨알의 소리』라는 잡지를 냅니다. 내자니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 어떻게 어려운 것을 여러분은 장준하 선생의 말씀에서 잘 아셨을 줄 압니다. 아마 그렇게까지 어려운 줄은 이날껏 모르셨을 것입니다.
그럼 그렇게 어려운 것을 싸워가며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른 것 없습니다. 구멍 하나 뚫자는 것입니다. 바늘구멍만 해도 좋으니 구멍을 하나 뚫어 숨이 통하게 해야겠다는 것입니다. 요새 길거리에 영화 광고를 보니「벽 속의 사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보고 좀 이상한 제목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사나이는 어째 벽 속에 들어갔는지 그 속에서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하여간 사람이 벽 속에 든 다음에는 자유가 있을 리 없고, 자유가 없는 다음에는 그 속에서 무엇을 했거나 산 인간으로서의 보람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자유가 제일입니다. 지나가다가 그 제목을 보고 저 사나이야말로 우리 같은 신세로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벽 속에 갇힌 사람입니다. 인간으로서 가장 낮은 살림을 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먹을 것 입을 것이 없어서 하는 말 아닙니다. 자유가 없단 말입니다. 지금 우리의 사는 일은 남의 지배욕을 만족시켜주는 것밖에 없습니다. 남의 종노릇을 하는 놈은 종노릇을 하는 한 먹을 것 입을 것은 최소한도로나마 보장이 돼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찌 인간의 살림이라 하겠습니까? 하다가 죽더라도 제 뜻대로 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일을 우리 스스로 택할 자유가 없습니다. 세계가 어떻게 돼가는지 그 진상을 알 수 없고 우리의 고통스러운 심정을 서로 이야기하고 싶어도 도저히 할 길이 없습니다. 아무리 식욕, 성욕이 강한 사나이라도 벽 속에 갇혀 그 짓만을 하라면 아마 하겠다 할 놈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정치는 우리더러 그것밖에 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이것이 정치입니까?
이런 죄악이 청천백일 아래서 되는 것은 소위 이 발달된 과학과 기술 때문입니다. 이것을 부숴야 합니다. 바늘구멍만 해도 좋으니 구멍을 하나 뚫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못 뚫으면 죽습니다. 정신이 아주 죽어버립니다. 과학이나 기술이 사람을 문명하게도 못하고 사회를 바로 나가게도 못한다는 증거를 우리 잡지의 당하는 수난 하나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인쇄술이 아니었던들, 전화, 전신, 자동차, 비행기로 되는 속도와 매스콤의 세상이 아니었던들, 우편 제도가 없었던들, 이렇게 지독한 피해를 입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를 유혹하는 사탄이 순식간에 천하만국의 영화를 다 보여주며 “내게 절만 하면 이모든 것을 다 네게 주겠다” 했던 것은 이유 없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문명은 완전히 사탄의 것이요, 모든 정치는 사탄의 종입니다.
바늘구멍을 뚫는다니 어디다 뚫습니까? 여러분의 가슴에다 입니다. 지배자들은 내 말을 독설이라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그렇게 들릴 것입니다. 내찌르는 말이 과연 날카로워서 위협과 유혹으로 거진 다 마비가 된 민중의 심장에 바늘 구멍만한 구멍이 정말 뚫린다면 그리로 “황소보다 더 큰 바람이 들어갈” 것입니다. 하늘 바람입니다. 그러면 깨어 일어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면 정신이 깨어 일어나기만 하면, 민족 통합도 그 가운데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우리를 미워하는 이유요, 내가 또 기어이 말을 하고야 말겠다는 이유입니다. 바른 말을 서로 주고 받지 않고 민중의 정신이 살아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악독한가 생각해 보십시오. 잡지를 독자에게 다 부쳤는데 그것도 안심이 아니되어 각 구역으로 나눠 한 우체통도 아니요 여러 곳으로 나눠서 넣었는데 그 모든 우체통을 하나하나. 숨어서 지키고 있다가 넣는 사람을 잡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우체국에 가서 했는지 어디서 했는지 다 도둑 해냈습니다. 내가 잡지에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넣었을 때 그것은 이 정부를 법률을 지키는 정부로 믿는 것이요, 그들을 양심을 가진 인간으로 믿은 것 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도둑해 냈습니다. 사람으로서는 못할 일입니다. 물론 나는 누가 그 짓을 했는지 보지도 못했고 증거도 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누가 도둑질을 했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할 것 아닙니까. 사실입니다. 한 두 책이 우연히 없어진 것 아니고 몇백 책이 다 없어졌으니 개인의 사사로운 범죄가 아닙니다. 정부가 공공연히 한 것 입니다. 법을 자기네 마음대로 주무르니 물론 고소할 놈도 없고 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자기네 양심이 하는 고소를 피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한푼어치 효과도 날 리 없고 난다면 더 손해 밖에 날것 없는 이 말을 여러분 앞에서 하는 것은 여러분 가슴에 구멍을 뚫어 그리로 정의의 하늘 바람이 불어 들어가 여러분의 의분을 일으켜 압력을 그 그릇된 그들의 마음 위에 압력을 더하여 행여 반성하고 고칠까 해서 입니다. 여러분이 의분을 발하기만 하면 틀림없이 정의의 압력은 그들 양심 위에 내립니다. 그리해서도 아니 듣는다면 그것은 스스로 짐승이 되고 망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들이 벽을 굳게 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 속에서도 속된 정욕의 만족에 속지 말고 정신의 심호흡을 해야 합니다. 언론의 자유를 지켜야 한단 말입니다. 속에 쌓이는 울분을 서로 주고받음 없이 정신은 살아나는 일이 절대로 없습니다. 여러분은 죄수의 살림을 아십니까? 그 인간지옥에서도 죽지 않고 그들이 살아남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그것들이 틈만 있으면 서로 이야기를 하기 때문입니다. 간수의 감시가 그렇게 엄한 가운데서도 그들은 그저 소곤소곤 이야기를 합니다. 한댔자 별 신통한 것 없습니다. 자기 취조하던 형사 욕하는 소리, 검사 나무라는 소리, 어느 변호사는 잘하고 어느 변호사는 못한다는 그런 따위 소리입니다. 그 소리 밤낮 한댔자 언제 한번 그 원수의 형사에게 분풀이를 할 기회도, 검사에게 한 번 맞서볼 자리도 없습니다. 쓸데없는 넋두리뿐입니다. 그러나 이 쓸데없는 넋두리가 결코 쓸데없지가 않습니다. 그들의 죽게 된 마음이 그 넋두리를 하는 동안에 살아납니다. 육신으로 결코 만날 길이 없는 그 원수들이지만 그것들을 자기네의 가슴 안에 열린 심판대에서 시원히 한 번 목을 자를 때 땅에 떨어졌던 그들의 혼은 다시 일어나서 앞에 오는 고난을 참으며 뒤에 남은 잘못을 스스로 용서하며 살아갈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장 혹독한 벌은 독방에 가두는 일입니다. 우리도 권력 하나 돈 하나 없는 처지에 비판 비평을 아무리 한대도 실지 결과가 나올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만 우리 정신이 살아납니다. 사람은 결과보다도 보람에 대한 믿음에 삽니다. 최치원(崔致遠)이 황소(黃巢) 때리는 격문(檄文)을 썼을 때 “어찌 천하 사람이 다 네놈의 모가지를 자르고 싶어 할 뿐이냐? 땅속에 귀신들이 벌써 보이지 않는 칼로 다 잘라버렸다” 해도 그 귀절을 보고 황소가 저도 모르게 걸상에서 떨어졌다 하지 않습니까? 그것입니다. 그 의기가 사람을 살립니다. 우리도 천하의 불의를 현실로는 못 때려도 음주(陰誅)는 할 수 있지 않습니까? 현실은 때가 있습니다. 정신의 세계에서 되면 현실에는 반드시 나타나는 날이 오고야 맙니다. 민중의 숨의 중요한 의미는 여기 있습니다. 지금은 혁명의 시기도 아니요 우리에게 그럴 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기 때문에 정신적 숨은 활발히 주고받아야 합니다.
「민주 수호」니 「씨알의 소리」니 하는 것은 바늘구멍 뚫는 일입니다.
바늘구멍은 우리만 살잔 구멍 아닙니다. 정치는 산 민중이 있어야 됩니다. 원수 같지만 우리도 살고 저희도 살기 위해 뚫으자는 구멍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하게 하니 답답한 사람들이요, 악독한 심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그러더라도 우리를 막지는 못할 것입니다. 몸이 아니라 마음에 뚫는 구멍이기 때문에, 칼이나 총으로 뚫는 것 아니라 이심전심으로 뚫으는 것이기 때문에 못 막습니다. 나는 이 명령을 어느 인간에게서가 아니라 하늘에서 받았습니다. 아무도 그것은 내게서 빼앗지는 못합니다. 나는 그것을 압니다. 설혹 나를 죽인다 해도 그것은 못 막을 것입니다. 죽이면 더 좋습니다. 그러면 대번에 바늘구멍이 아니라 하늘이 갈라지는 폭발이 일어날 것입니다. 나는 하잘것없는 쭉정이 씨알이지만 그래도 그것만은 확신합니다. 겁나는 것은 대적의 강함이 아니고 나 자신의 정성의 모자람입니다. 내가 철저히 겸손해 진리의 법칙에 온전히 복종하기만 하면 모든 악은 우리 앞에서 무너지고야 말 것입니다. 남을 시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가슴에 바늘구멍을 뚫기 위해 이 말을 합니다.
이 자리에 정보기관에서도 와 계신 것을 압니다. 무슨 생각으로 오셨던 간 고맙습니다. 오실 때는 무슨 생각으로 오셨던지 이왕 오신 바에는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나 지금 속에 아무 악의도 없습니다. 적어도 이 순간에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어디에도 얽매인 것이 없습니다. 꺼리는 것도 숨기는 것도 수단을 쓰는 것도 없습니다. 공(公)을 위해 온전히 열린 마음으로 섰습니다. 나를 위해서도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요 나라와 참을 위해 내 딴으로는 호소하는 심정입니다.
직접으로 하면 여러분과 나는 정반대로 서로 대결하는 입장에 섰습니다. 여러분은 이 정부에 전적으로 충성하는 자리에 섰고 나는 잘못을 지적하는 자리에 섰으며, 여러분은 민중을 될수록 단속하고 강력하게 묶자는 방침이요 나는 완전히 자유를 허락하여 자진해 하는 협동을 일으키기 위해 활짝 열자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나를 감시하고 내하는 일을 위험시하고 될수록 방해하려 합니다. 또 나는 나대로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비겁하게 믿는 바를 굽히려고 타협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눈에 뵈는 것만이 일의 전부는 아니요 사람은 결코 현실에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정치가 인생의 전부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인간으로 살게 되는 그 까닭과 목적은 결코 정치로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 맡은 직무에도 충실해야겠지만 또 하나의 인간이란 것을 언제나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과 나는 한때에 이 나라에 태어났습니다. 막막한 우주 유유한 역사에서 이렇게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요, 다시는 있을 수 없는 귀하고 엄숙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 인생을 서로 의심하고 미워하는 악의를 가지고 허비해 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슬프고 어리석고 송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는 우리 자신이 불행 할뿐 아니라 전체 위에 큰 해독을 끼치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은 이 현실에서만 사는 것 아니라 영원히 사는 것이요, 한곳에서만 아니라 무한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만일 스스로 제 양심을 속이고 남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짐으로써 그 혼을 비뚤어지게 만들면 그것이 죽은 후에까지도 궂은 영이 되어 세상을 해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결코 미신이라 웃어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지빠른 과학 지식으로 이것을 미신이라 업신여기고 눈에 뵈는 재주와 힘만을 숭배하는데 떨어진 현대이기 때문에 세상이 이처럼 어지러워졌지만 늘 이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소박하여 아직 욕심의 눈이 발달하기 전에 사람은 천명을 두려워할 줄 알았고 물질적으로는 유치했어도 세상이 이렇게 악독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인생이 오히려 보람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인생이 이만인 줄 알고 옳은 사람을 학대했다가 영원한 자리에서 다시 만날 때에 어떻게 하렵니까? 분명히 또 한 번 말합니다. 권력은 반드시 끝이 있는 것이고 정의는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