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밝아온 동창을 내다보며…
어제 2021년 9월 14일 조용기 목사님이 별세하셨다.
86세의 삶을 마치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셨다.
나는 어린 시절 텔레비전에서 조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다. 그 내용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지만 분명히 나는 설교하시는 조목사님을 흑백 텔레비전으로 보았다.
나는 신학생 때 기도하러 기도원에 들어간 적이 있다. 그때 금식을 하면서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집을 몇 권 읽었다. 그때 내가 읽은 설교집에는 경험담을 들려주는 내용이 많았고 특히 세계 여러 나라를 둘러보고 느낀 견문과 평가가 인상적이었다.
그 후에 나는 교회성장에 대하여 글을 쓸 때 조 목사님의 책을 참고했다. 물론 국외의 저자들도 교회성장에 대하여 소개할 때는 한국의 이 위대한 목회자를 주로 인용하고 심층분석하기도 했다. 교회성장은 한 세대의 키워드였다.
시간이 흘러 어떤 사람들의 글에서 나는 번영신학이라는 단어를 보았다. 그것은 순복음 신학이 이단성이 있다고 동족으로부터 받은 낙인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런 평가를 들을 때 나는 순복음 교단의 목회자로서 마음 한구석에서 움찔 하던 느낌이 있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이지만 그 복음은 청중의 형편에 따라 빛깔을 달리하는 무지개와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난과 빈곤으로 억눌리고 좌절한 사람들에게 조용기 목사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희망을 전하셨다. 무지개 빛깔은 한쪽 끝에는 남색과 보라색처럼 어두운 부분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빨갛고 노란 밝은 부분도 있다.
빈곤의 고통은 사람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낸다. 무지와 미신도 사람들이 사이에서 생채기를 낸다. 물론 탐심과 강포는 가장 직접적으로 인간에게 큰 고통을 준다. 그러나 이 각각은 우리가 벗어나야 할 감옥이며 족쇄다. 그래서 진리는 빛이며 빛은 단색처럼 보이나 그 속에는 다채로운 색깔이 담겨 있다.
사람들이 사는 곳마다 다른 문화와 관습, 그리고 제도가 있다. 그것은 그 사회를 보듬고 있는 울타리와 같다. 한때 우리 조상들은 씨족사회에서 살았고 왕들의 통치를 당연하게 여기는 시대를 살았다. 어쩔 수 없이 독재의 고통을 받아들여야 했을 때도 있었고, 시민들이 권리를 주장하는 시대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던 시대도 있었다.
마치 포도주를 담은 가죽부대처럼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가죽부대를 필요로 한다. 새로운 가죽부대를 만들 때마다 이전의 낡은 가죽부대는 버림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 낡은 가죽부대가 꼭 필요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 새로운 가죽부대는 잠시 후에 낡은 부대가 될 것이다.
조용기 목사님은 처음부터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만들 계획으로 교회성장론을 구상하신 것은 아니었다. 조목사님이 지나온 길에는 한국전쟁 이후의 폐허와 빈곤이 있었고, 폐병이라는 죽음의 골짜기도 있었다. 그 속에서 몸부림치며 길을 찾고 찾다가 그런 족적을 남긴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들의 부모님이 사시던 시절과 우리가 사는 시절은 다르다. 우리들의 자손들은 또 다른 세월을 살 것이다. 고민도 다르고 문제도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 문제 앞에서 우리 모두는 진실되고 최선을 다해 살아내야 한다. 그래야 문제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각 시대에서 파도타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부모 세대는 그렇게 아슬아슬한 파도타기를 수행해 오셨다. 때로는 물 속에 곤두박질하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오늘부터 조용기 목사님의 장례가 시작된다. 조목사님은 2008년에 은퇴하셨다. 그리고 이제 별세하셨다. 그렇게 한 세대가 훌쩍 지나갔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에 유엔 등 국제기구로부터 원조를 받는 나라였다. 빈곤을 극복하고 배고픔을 면해보는 것이 소원이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그리고 2009년부터 우리나라는 원조를 주는 나라들의 모임인 OECD산하 개발원조위원회(DAC)의 24번째 회원국이 되었다.
조용기 목사님의 오중복음과 삼박자 축복 그리고 4차원의 영성은 오늘도 유효하다.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지구촌에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아픔을 치료하고, 우리를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게 가로막는 족쇄를 깨뜨리며, 다양한 우리를 보듬어줄 울타리가 될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 이야기는 이미 우리의 문제를 붙들고 목숨을 걸고 씨름하는 우리들 가운데서 새롭게 발견되고 만들어질 것이다. 마치 불광동 천막교회에서 빈곤과 절망을 상대하며 씨름하던 조용기 목사님이 희망의 복음을 발견하신 것처럼.
나는 오늘 조용기 목사님의 삶과 분투를 생각하면서 이미 훤하게 밝아버린 동창을 내다보며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갈고 가꿀 다짐을 해 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