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 21 장
향유할 무한한 능력(2)
「나는 고통 받는 사람을 도울 때 내 손을 씻고, 내 영혼도 깨끗이 씻는다.
나는 고통 받는 자가 고통을 받는 것을 보았고, 그의 부끄러움으로 인해 내가 부끄러워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그를 도울 때 나는 그저 자긍심에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그의 통찰력은 늘 독창적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똑같은 것을 보았겠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본다.
그는 말한다.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도울 때마다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그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낀다는 점을 나는 알고 있다.
그의 수치심으로 인해 나도 수치심을 느끼고, 내가 그를 도왔기 때문에 나는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다.
내가 고통에 빠진 사람을 도왔기 때문에 천국에서 타인의 미덕에 의존하여 거래를 시작하는 즐거움을 기대하기보다,
나는 내가 타인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나는 내 손을 씻는다.
나는 그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 벌거벗은 모습, 그가 숨기고 있던 상처를 보았기 때문이다.
비록 내가 그를 도왔지만, 과연 내 도움이란 무엇인가?
그의 자존심이 상처를 받았기에 나는 손을 씻어야 한다.
나는 그가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자존심이 상처를 받았다고 느끼지 않으며, 나에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느끼고, 형제를 도울 수 있는 기회를 나에게 주었다고 느낄 수 있도록 뭔가를 해야 한다.
내가 그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니라 그가 나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다.”
「”받기를 미루어라. 그로부터 받음으로써 그를 명예롭게 하라!”」
받기를 미루고, 받는 데 있어 조심하고 유의하라.
‘그로부터 받음으로써 그 사람을 명예롭게 만들어주어라!’
그것은 장미꽃 한 송이, 상쾌한 아침, 악수처럼 소소한 것에 불과하지만, 크나큰 사랑과 감사로 그것을 받으라.
그는 그대를 명예롭게 해준 것이다.
그가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어라.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아무도 그들을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가 그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까?”
아무도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는다.
사실 모두가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
그의 잘못이 아니라 그것은 존재계가 그를 필요로 하는 방식이다.
그는 그대가 알지 못하는 특정한 필요를 충족시키고 있다.
그대는 삶의 수많은 신비를 알지 못한다.
삶이 어느 사람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그를 거부하는 그대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그러나 세상에는 아무것도 줄 수 없고,
아무도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모든 사람이 그들에게 다른 누군가가 되기를 바라고,
그래야 그들이 받아들여진다는 이유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다른 누군가가 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절름발이가 되고, 왜곡되고, 본래의 품위와 운명을 잃어버리고, 길을 잃게 된다.
이것은 불행을 만든다.
「나는 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그러나 나는 베푸는 사람이다.
나는 벗으로서 벗들에게 기꺼이 베푼다.
그러나 이방인과 가난한 자는 스스로 나의 나무에게서 열매를 따간다.
그 방식으로 부끄러움이 덜 느끼게 된다.」
차라투스트라의 통찰력을 간파했는가?
그는 말한다.
“나는 나의 벗들에게 베풀겠다.
그것이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와 함께 기뻐할 것이다.
나는 그들로부터 받았다.
나는 그들을 받아들였고, 그들은 나를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가난하고 낯선 이들에게 나는 더 나은 방법을 제안한다.
스스로 나의 나무에게서 열매를 따간다.
그 방식으로 부끄러움이 덜 느끼게 한다.”
그들의 자존심은 상처받지 않을 것이고, 그들은 나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심리에 대해 차라투스트라보다 더 깊은 통찰력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전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느끼는 사람들에 대해서 가장 부당한 사람들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미워할 수도 있지만, 중립을 지키거나 무관심하지는 말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특정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라고 말하지는 말라.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순간, ‘그 사람이 존재하거나 죽거나 그대와 상관없는 일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타인에게 끼칠 수 있는 최고의 해악이다.
증오는 그다지 큰 상처가 되지 못한다.
증오하는 한 관계는 지속된다.
증오는 언제든지 사랑으로 변할 수 있다.
사랑도 증오로 바뀌기 때문이다.
사랑과 증오는 서로 전환이 가능하다.
오늘 좋아 하던 것이 내일 싫어질 수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
그러나 무관심은 무관심으로 남고 만다.
《무관심은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최악의 행동방식이다.》
그대 자신을 보라.
그대가 얼마나 무관심한가?
그대가 사랑하거나 증오하는 사람의 수는 얼마나 되는가?
그대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되는가?
그 수는 손에 꼽을 정도로 아주 적을 것이다.
그런데 그대가 무관심한 사람들의 수는 얼마나 되는가?
사실상 그대는 세상 전체를 돌볼 수도 없다.
그것은 돌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그대가 가진 의식의 확장에 관한 문제이다.
《삶이 기쁨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른 생명체가 자신과 동일한 범주에 속한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들은 살고 싶고, 즐기고 싶을 것이다.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들을 위한 것이거나, 봉사가 아니라 나 자신을 나누고자 하는 나의 기쁨이자 나의 즐거움이 된다.
「그러나 그대가 고통 받는 벗이 있다면, 그의 고통을 위해 편안히 쉴 곳이 되어라.
그러나 야전침상처럼 딱딱한 침상이 되도록 하라.
이것이 그대가 그에게 최선으로 봉사하는 방법이다.
만약 그대의 벗이 그대에게 잘못을 한다면, ‘나는 그대가 나에게 한 것을 용서하지만, 그대는 그것을 그대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것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라.」
나는 그것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나에게 무엇을 하는 것이 그대가 그대 자신에게 하는 것이 된다.
나는 그대가 나에게 했던 일에 대해 그대를 용서할 수 있지만, 그대가 그대 자신에게 했던 것에 대해서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대가 남을 해치면 그대 자신을 해치는 것과 같다.
다른 사람에게 추악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대 자신에게도 추악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된다.
타인을 모욕하는 것은 그대 자신을 모욕하는 것과 같다.
「위대한 사랑은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용서와 동정마저 극복한다.」
그대가 ‘나는 동정한다’ 라고 말할 때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대가 동정을 보이는 사람이 누구건 간에, 그대는 그로 하여금 열등감을 느끼게 만든다.
사랑은 그 누구도 열등감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사랑은 상대방이 우월감을 느끼도록 한다.
사랑은 타인으로부터 가장 최선의 것을 이끌어낸다.
‘가난한 자에 대한 동정과 봉사’라는 말은 추한 말이다.
의무감은 사랑의 언어가 아니다.
이것들은 불행한 사회가 만들어낸 편리함이다.
이것들은 지복으로 가득 찬 세상의 나눔이 아니다. 끝.
오쇼의 차라투스트라 1
오쇼 강의/박형진 옮김. 젠토피아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