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31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주일)
숨을 불어넣으시고
행2:1~13; 고전12:4~13; 요20:19~23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창조의 영이며 생명의 영이신, 그리고 진리의 영이며 위로의 영이신 성령님의 활동과 임재가 여러분의 삶 구석구석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또 다툼과 경쟁, 대립과 불화로 찢겨지고 갈라진 이 세상 속에, 특별히 2020년 코로나 팬데믹으로 고통 받는 우리 인간가족에게 성령이 오셔서, 우리 모두를 치유하시고 새롭게 창조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로마 카타콤 내부의 벽에 벽화가 그려져 있는 곳이 많은데, 기도하는 여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벽화가 있습니다. 두 손을 펴서 하늘을 향해 들고 눈은 하늘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두 손을 들고 기도하는 자세를 Orans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성화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들 중 하나라고 합니다. 이 여인이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성모 마리아를 그린 것인지, 아니면 교회를 상징하는 여인(신부)인지, 아니면 어떤 기도하는 영혼을 그린 것인지? 이 세 가지 전부를 나타내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이 성화는 초대 그리스도교의 가장 기본 태도를 묘사하고 있는데, 즉 성령의 강림을 청원하는 기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이런 성령 청원 기도를 “에피클레시스”라고 합니다)
우리가 두 손으로 취할 수 있는 주요한 자세는 세 가지 있습니다. 아마 각각의 자세는 나름대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닐 것입니다. 우선, 우리는 도전하는 몸짓으로, 또는 호전성이나 두려움 때문에 주먹을 불끈 쥘 수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이 “열린 손으로”라는 책에서 예를 들었던 정신병원에 수용된 할머니의 꽉 움켜쥔 주먹이죠. 그 할머니는 작은 동전 하나를 손에 뒤고 끝내 놓지 않으려고 했다지요. 마치 그 동전이 자기 존재 자체인 것처럼. 분명히 어떤 삶의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두 손을 옆으로 기운 없이 내려뜨리는 경우, 이것은 도전적인 것도 아니고 수용적인 것도 아닌, 포기나 체념을 나타냅니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세상은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두 손을 늘어뜨린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세 번째는 조금 아까 말한 카타콤의 벽화처럼, 두 손은 움켜쥐지 않고 펼쳐놓고, 불안해하지 않으면서 고요하게 성령의 은사를 받을 준비를 갖추고 하늘을 향해 펼친 손을 들어 올리는 자세가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하는 자세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길을 걸어가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교훈은, 주먹을 풀고 두 손을 펴는 방법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도록 동의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우리는 성령의 도구/담지자(spirit-bearer)가 되어 하나님의 영 안에서 살아가며 하나님의 영을 호흡할 수 있습니다.
바로 카타콤에서 발견된 벽화 안에 기도하는 여인이 취한 태도가 두 손을 펴서 하늘을 향해 들고 성령의 강림을 구하는 자세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강림주일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태도는, 바로 이런 자세로 성령을 구하는 기도(에피클레시스)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소서, 성령이여! Veni Sancte Spiritus! 오소서, 창조주 성령이여! Veni Creator Spiritus!
여러분, 여러분도 성령의 오심을 이렇게 간절히 구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성령은 여러분에게 어떤 분이며 무엇을 하시는 분입니까? 여러분은 성령에 얼마나 의존되어 있으며, 성령을 통해서 여러분의 삶은 어떻게 달라지는 것입니까?
오늘 시편 말씀 시편 104편은 창조시편(지혜시)으로 알려진 시편입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창조시편이지요.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하시고 돌보신다는 소박한 창조 신앙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창조 이야기 하면 창세기 1,2장만 있는 줄 아는 데, 실은 시편에는 몇 편의 창조시편이 있어서,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편들이 있습니다.
여기 보면, 하나님은 빛을 옷처럼 걸치시고, 하늘을 천막처럼 펼치신 분, 구름으로 병거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를 타고 다니시는 분, 바람을 심부름꾼으로 삼고, 번갯불을 시종으로 삼으시는 분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하나님은 땅의 기초를 정하시고 물의 경계를 정하신 분입니다. 골짜기 마다 샘이 솟게 하시고 산과 산 사이로 흐르게 하셔서 들짐승들이 모두 마시고, 하늘의 새들도 샘 곁에 깃들며, 우거진 나뭇잎 사이에서 지저귑니다. 사람들에게는 땅에서 먹거리를 먹게 하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는 포도주를 주시고 사람들의 힘을 북돋는 먹거리를 주셨습니다. 레바논의 백향목, 거기 깃든 새들, 높은 산의 산양, 바위틈에 피난처를 만든 오소리.... 주님,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 어찌 이리도 많습니까? 이 모든 것을 주님께서 지혜로 만드셨으니, 땅에는 주님이 지은 것으로 가득합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주님만 바라보며 때를 따라 먹이를 주시기를 기다리다가 먹이를 주시면 받아먹고, 손을 펴 주시면 만족해합니다. 그러다 주님께서 얼굴을 숨기시면 떨면서 두려워하다가 주님께서 호흡을 거두시면 그들은 죽어서 본래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영(주님의 숨)을 불어넣으시면 그들이 다시 창조됩니다. 주님께서는 땅의 모습을 다시 새롭게 하십니다.
아마 요즘 과학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 시편이 얼마나 깊게 다가올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을 글자를 넘어 시편이 이야기 하려는 바를 읽을 마음이 있다면, 이 시편은 우리에게 생명의 신비를 더 경탄하도록 할 것입니다.
오늘 시편은 우리 피조 세계의 모든 삶이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음을, 특별히 성령의 숨결로 존속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피조물들은 새로운 생명으로 계속 진화해 나가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이렇게 성령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을 이어가게 하시고, 그 생명을 넘어 더 큰 생명으로 진화하게 하시고, 마침내 하나님의 한 부분이 될 때까지 자라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영의 숨결로 다시 창조되고 다시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신비 안에 성령의 활동이 있습니다.
오늘 요한복음20장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두려워 떨고 있던 제자들을 찾아온 이야기입니다. 부활절에 주로 읽는 이 본문은 성령의 숨결을 받은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성령강림절과 관련을 맺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무서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찾아와 평화를 전하고 숨(푸뉴마)을 불어 넣으시며 성령(푸뉴마)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성령을 받을 때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권한과 능력을 갖게 됩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에서 벗어나 진정한 평화를 누리며 용서할 수 있는 사랑의 능력을 갖게 합니다. 꽉 쥔 손에서 열린 손으로 우리 삶을 성장시키는 힘입니다. 우리의 의식을 더 높은 의식으로 초월하도록 추동하는 힘입니다. 두려움에서 평화로 그리고 더 큰 용서로 나아가게 하는 힘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 사건은 성령의 강력한 임재를 경험한 제자들이 각 나라의 말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유대의 명절을 맞아 각 나라에서 몰려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살던 나라의 말(방언)로 “하나님의 큰일”을 듣게 되었습니다. 성령은 갈라져 있던 사람들, 분열되어 있던 사람들을 이어주고 통합시킵니다. 그들을 한 마음으로 모이게 했고, 하나님이 하시는 큰일을 듣게 했습니다. 그래서 시작된 공동체가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 공동체가 이 성령의 활동과 역사에 제대로 반응하고 순종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성령을 통해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서 그분의 큰일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 속에서 성령이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모으시는지 예민하고 민감하게 주시하면서 그에 응답해야 합니다.
오늘 고린도전서에 나온 성령의 은사는 특별히 공동체를 제대로 섬기도록 주어집니다. 여기에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의 능력, 병 고치는 능력, 기적을 행하는 능력, 예언하는 능력, 영을 분별하는 능력, 방언의 은사 등이 열거됩니다. 이 성령의 은사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 특별한 사람임을 증거해 주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덕을 끼치고 공동체가 잘 성장하도록 돕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성령의 은사가 오히려 분열의 빌미가 되지 않기를 권고합니다. 실제로 고린도교회에게 이런 은사들은 분열의 요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은사만을 특별한 하나님의 선물로 여길 때, 성령의 부드러운 활동은 사라진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성령의 강림을 기도해야 할 이유가 생겼습니까? 성령의 오심을 간절히 구할 마음이 생겼습니까? 우리가 성령을 간구하는 것은 치유은사나 방언 같은 특별한 은사를 받는 것과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생명을 붙잡고 계시는 분에게 우리 생명이 얼마나 깊이 의존되어 있는지를 아는 것, 그분께서 얼마나 우리의 생명과 의식을 진화시키기 위해 일하시는지에 대해 눈을 뜨는 것,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과 우리가 얼마나 깊이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지를 아는 것, 성령이 우리의 삶 속에 있는 어둠과 상처, 수치와 두려움을 치료하시고, 우리를 평화와 용서의 장(도구)으로 삼으시려는지를 깊이 깨닫는 것, 그래서 분열과 반목 가운데서 화해와 일치의 장으로 옮겨 가도록 하시는지를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개인적인 것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도 우리를 이렇게 이끌어 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앞으로 인간의 미래 가운데 성령의 임재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깊게 기억할 것은, 우리는 성령에 대하여 전혀 주도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보이지 않는 성령, 우리에게 잡히지 않는 성령, 바람 같고 불같은 성령은 우리의 통제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그분이 오시기를 간구하며 두 손을 펼친 채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자세는 저항하거나 포기하는 자세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자세이고 기도하는 자세입니다. 자신의 나약함을 부끄러워하거나 자신의 그림자를 부정하려는 자세가 아니라, 오늘 요한복음의 예수님처럼 두 손과 옆구리에 자신의 상처를 온전히 드러내려는 자세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말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손을 펴는 것, 손을 열어드리는 것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주먹을 쥐게 하는 그 긴장을 서서히 푸는 것이며, 삶을 방어해야 할 소유물이 아니라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꾸준히 준비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준비가 뭘까요? 기도입니다. 특별히 관상기도입니다. 관상기도는 성령의 선물을 우리 안에서 자리 잡게 하는, 우리 편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준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