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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세는 폭군인가?
모세는 신화속의 인물로 추측되지만, 출애굽 과정에서 모세에게 거역하는 반란의 사건이 자주
언급된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지위가 확고히 자리잡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수 있겠
다. 굶주림과 목마름과 함께 모세의 배타적인 여호와 숭배에 유대민족의 반감은 커져만 갔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반란자들을 대적했으며 그 과정은 끔찍하고 처참하기 까지 하다. 모세가 십계
명 돌판을 받을 때, 그사이 유대인들이 금송아지(아피스 신상으로 추정)를 조각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 광경을 본 모세는 진노하여 돌판을 깨뜨리고 모세의 명령에 따라 레위족 사제
들이 검으로 무장하고 닥치는 대로 찔러 죽였다. 이런 대학살로 3천명이 죽었다고 출애굽기는
전하고 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
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명 가량이 죽인바 된지라 " [출애굽기 32장 27~28절]
십계가 공표되고 그렇게 빨리 성직제도가 조직 되었는지도 문제지만, 3천명이나 죽일수 있었
는지 의문이 든다. 그런 대량학살이 자행 되었다면 곧바로 반란이 일어났을 것이고 모세는 그
자리에서 쫓겨 났을 것이다. 또한 황금송아지를 숭배한 것은 거의 모든 유대인들인데 레위인
들은 어떤 기준을 가지고 그들중에서 3천명을 가려내 속죄용으로 죽였을까? 그리고 이 무시무
시한 광신적 행위가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을까?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른다. 모세가 자리를 비운사이 백성들이 금송
아지를 숭배했다는 것만 목사들이 설교하지 그 다음 대목에 모세가 3천명을 죽였다는 것은 쉬
쉬하고 있다. 유명한 영화 십계에서는 모세가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마지막 경고를 내리지만
(그런대목이 성경에 없다!), 끝까지 말을 듣지않자 지진이 일어나면서 우상숭배를 했던 사람들
이 땅속으로 꺼진다. 성경 내용과 영화 내용이 완전히 딴판이다!
모세에 대한 반역은 또 있다. 이번에는 모세에 대한 레위족의 거역사건이다.
민수기 16장에는 모세는 레위인들에게 향로를 가져오라고 명한뒤, 만일 신이 그들의 공물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지옥으로 데려가기 위해 발아래의 땅이 열리지 않을 경우 그들은 무죄가
될것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다단과 아비람의 발아래 땅이 열리면서 그들 일족이 땅으로 꺼져
버렸고, 그들의 추종자 250명도 여호와의 불로 죽임을 당한다.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 그 주
위에 있는 온 이스라엘이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도망하며 가로되 땅이 우리도 삼킬까 두렵
다 하였고, 여호와께로서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 오십인을 소멸하였더라." [민수기 16장
32~35절]
그러나 그런 기적과 같은 벌이 내려졌음에도, 유대인들은 모세와 아론이 동족을 죽였다고 원
망한다. 그러자 민수기16장에는 여호와가 전염병 페스트를 퍼트려 1만4천7백명이나되는 유
대인들이 떼죽음을 당한다.
"이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향로를 취하고 단의 불을 그것에 담고 그 위에 향을 두어
가지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 여호와께서 진노하셨으므로 염병이 시
작되었음이니라. 아론이 모세의 명을 좇아 향로를 가지고 회중에게로 달려 간즉 백성 중에 염
병이 시작되었는지라. 이에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에 염병
이 그치니라. 고라의 일로 죽은 자 외에 염병에 죽은 자가 일만 사천 칠백명이었더라." [민수
기 16장 46~49절]
사실상 몸서리가 쳐지게 끔찍한 구절들이다.
성경속의 그러한 사실들은 모세의 지위가 확실하지 않았음을 증거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모세는 자신의 지휘아래 사막을 유랑하는 유대민족을 통제하기 위해 반란자들에 대한
잔혹한 처형과 배타적인 유일신 사상을 도입했던 것이 아닐까?
물론, 이것은 모세가 실존했다는 사실위에 세운 가설들이다. 그가 실존했건 하지 않았던 간에
그에게 거역한 반역자들에 대한 모세의 행동과 여호와의 재앙은 너무도 잔혹하다.
▶ 기독교인이 모르는 두번째 십계명
기독교인이 일반적으로 알고있는 십계명은 출애굽기 20장에 처음 나오며 신명기 5장에서도
나온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개신교, 카톨릭, 유대교에서 주장하는 십계명이 약간씩 미묘
하게 다르다. 그 이유는 "제1계명은 무엇이고, 제2계명은 무엇이다....."라는식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명은 분류하기에 따라서 10개도 되고, 11개도 되며, 12개도 될
수 있다. (성경의 장과 절의 구분은 편의에 따라 중세시대에 만든 것임을 숙지하라)
그러나 3개의 종교가 10계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출애굽기 34장에서 10개의 계명이 주어졌
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십계명을 전해준 다음, 모세에게 율법을 전해주기 시작한다.
그런데 문제는 출애굽기 32장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고 있을 때 유대인들은 황금 송아지 숭
배를 행했다. 그 모습을 목격한 모세는 격분한 나머지 손에 들었던 십계명 돌판을 산 밑에 내
던져 깨뜨리고 유대인 3천명을 학살한다. 그리고 모세는 여호와에게 십계를 다시 받게 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것과 같이 깎아 만들라. 네가 깨뜨린바 처
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출애굽기 34장1절]
그런데 문제는 두 번째로 받은 십계명은 우리들이 알고 있는 십계명이 아니라는 점이다!
모세가 두 번째로 받은 십계명을 필자가 요약하니 다음과 같다.
① 아모리족, 가나안족, 헷족, 브리즈족, 히위족, 여부스족과 계약도 맺지말고, 혼인도 하지 말
것이며, 그들의 제단을 헐고 석상을 깨뜨리고 목상을 찍어 버려라.
②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③ 우상숭배를 하지말라
④ 아빕월에 누룩 안 든 빵을 먹는 무교절을 지켜라.
⑤ 처음난 것은 다 내게 바쳐라. (첫 새끼 수컷은 다 여호와의 것으로, 처음 난 나귀 새끼는 양
을 대신 바치고 싫으면 목을 부러뜨려 죽여라. 맏아들은 제물을 대신 바쳐라. 아무도 빈손으로
는 여호와의 앞에 나타나지 못한다.)
⑥ 안식일을 지켜라.
⑦ 추수절과 초막절을 지켜라.
⑧ 모든 남자는 한 해에 세 번씩 여호와 앞에 나타나라.
⑨ 동물제물을 바칠 때 누룩 든 빵을 함께 바치지 말고, 과월절의 제물은 이튿날 아침까지 묵
히지 말라.
⑩ 농토에서 난 햇곡식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여호와에게 바치고, 숫염소 새끼를 제 어미의
젖으로 삶지말라.
이것이 출애굽기 34장에 나와있는 모세가 두 번째로 받은 십계명이다!
그리고 이러한 계명들이 십계명 돌판에 새겨졌다.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일 사십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
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를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출애굽기 34장 2
8절]
분명 여호와는 출애굽기 34장1절에는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다시 써준다고 말했지만 첫 번째
계명과는 아주 다르다. 똑같은 출애굽기안에서도 말이다!
첫번째 십계명은 모세가 깨뜨려 버렸으니, 기독교인들이 지켜야할 진짜 십계명은 두 번째 것이
아니겠는가?
▶ 에로틱 경전 아가서
구약성경중의 아가서는 권위주의적인 종교경전의 모습이 아니라 대중적인 연애서적(戀愛書
籍)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아가서는 목사들이 설교할 때 거의 손도대지 않는 부분으로
도 유명하다. 혹자는 아가서의 관능적 표현이 심오한 비유적 표현이라고 주장하는 일도 있는
데, 이는 꿈보다 해몽이 더 좋은 궤변(詭辯)이라고 할수 있겠다.
구약성서새번역4권에 실린 아가서에 대한 설명을 옮겨보겠다.
"여덟 개 장으로 이루어진 이 작은 책은 구약성서에서 가장 큰 논란을 일으키는 문제들 중의
하나를 안고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아가가 구약성서 안에서 갖는 의미와 관련이 있다. 이 사
랑의 시(또는 연애시집)는 도대체 구약성서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무슨 역할을 담당하고 있
는가? 아가는 매우 관능적인 표현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하느님이나 어떤 신앙 조목, 또는 사랑
의 윤리적 의미라든가 사랑의 결과로서의 출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이 오로지 육체적인 아
름다움에만 전념한다. 그 안에는 타민족들의 연애시에 가까운 내용과 형태뿐만이 아니라, 이
교(異敎)와 신화의 잔재들도 들어 있다. 게다가 해석을 위한 명백한 열쇠는 하나도 제공되지 않는다."
[주교회의성서위원회편찬,임승필번역/구약성서새번역4-룻기,아가,코헬렛<전도서>,
애가,에스델(축제오경)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아가서에 대한 입문 中]
그렇다면 8장으로 구성된 아가서의 내용을 보도록 하자.
살펴보면 알겠지만 아가서에서는 유방, 허벅지, 배꼽, 입술, 머리카락등의 여성의 신체에 대한
찬가로 가득하다. 지면관계상 아주 선정적인 부분만을 추려보겠다.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 [아가 4장 5절]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아가
5장 3절]
윗구절의 공동번역판은 "나는 속옷까지 벗었는데, 옷을 다시 입어야 할까요?" 라고 확실하게
번역했다. 정말 선정적이지 않은가!
"귀한 자의 딸아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넓적다리는 둥글어서 공교한 장
색의 만든 구슬 꿰미 같구나.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허리는 백합화
로 두른 밀단 같구나. 두 유방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고." [아가 7장 1~3절]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유방은 그 열매 송이 같구나. 내가 말하기를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하였나니 네 유방은 포도 송이 같고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아가 7장
7~8절]
놀랍게도 아가서에서는 여성의 육체에 대해 탐미적인 표현이 가득하다.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우리의 문 앞에는 각양 귀한 실과가 새것, 묵은 것이 구비하였구나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둔 것이로구나." [아가 7장 13절]
7장 13절에는 합환채라는 식물이 등장하는데, 공동번역판에는 자귀나무, 새번역성서에는 '만
드라고라'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식물에 대해 구약성서새번역4권은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아놓았다.
"22. 학명은 Mandragora officinarum(영어로는 mandrake). 지중해변에서 자라는 이 풀은 줄
기가 없고 넓은 잎에서는 냄새가 나며 누런 열매를 맺는다. 그 뿌리가 사람 모습을 하고 있어
통속적으로는 임신 촉진제로 쓰여졌다(창세 30,14-16). 그러나 히브리 낱말이 가리키는 것이
이 식물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마약제와 최음제의 집합명사일 수도 있다." [주교회의성서위
원회편찬,임승필번역/ 구약성서새번역4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아가서에 대한 주석 中]
놀랍게도 그 식물이 임신촉매제, 혹은 마약이나 최음제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석을 달아놓고
있다!
"네가 내 어미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었더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
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 [아가 8장 1절]
윗구절의 공동번역판 동구절에는 "아, 임이여, 우리가 한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누이라면, 밖
에서 만나 거리낌없이 입을 맞추어 드리련만"이라고 번역 되어 있다.
친남매 사이는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껏 키스를 할수 있다는 것은 유교적 가치관을 가
진 한국의 독자들에게 다소 충격을 줄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함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
하여 무엇을 할꼬." [아가 8장 8절]
"나는 성벽이요 나의 유방은 망대 같으니 그러므로 나는 그의 보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구나."
[아가 8장 10절]
이상으로 아가서에 대한 분석을 마친다. 이처럼 목사들이 펼치기를 두려워하는 구약에는 재미
있는 내용이 많다. 권위주의에 빠진 한국 개신교 신자들에겐 충격이겠지만 말이다.
▶ 쓰레기 더미(율법)속에서 발견한 왕거니(십일조)
이제 말많고 탈많은 십일조(tithe)에 대해서 살펴보자.
십일조라는 것은 현재 미국의 일부 오순절교회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찾아볼 수 없는 헌금
제도로, 전세계적으로 한국에서만 판을 치고 있는 헌금제도이다.
특이한 점은 수많은 개신교 교파가 서로 이단이라면서 헐뜯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십일조 제도
만큼은 이단시 되는 그 교파의 것을 너도나도 앞다투어 채택했다는 점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목숨걸고 구약의 율법을 준수하려는 것을 보고 여러분들은 손가락질을 하
지만, 다른 율법은 전부 제쳐두고 십일조 조항만을 꺼낸 일반적인 한국의 개신교 자체가 가증
스러움의 극치라고할수 있겠다.
앞서 누누히 설명했지만, 구약의 율법이라는 것은 쓰레기 더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쓰
레기 더미를 뒤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쓰레기속에서 뭔가 재활용(?) 할만한 것들이 있는
지 뒤지는 목사가 있고, 쓰레기를 보물로 착각하고 남김없이 전부 주워담는 광신자도 있다.
목사들은 쓰레기 더미(율법)속 에서 기가막힌 왕거니 하나를 발견해서 끄집어 냈다. 그것이 바
로 십일조 이다.
(1) 성경속에서의 십일조
십일조의 기원에 대해 살펴보자면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나누어준 십일조에서 그 기원을
찾을수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십일조는 여호와에게 바친 것이 아니라 멜기세덱에게 준것이
었다. 십일조에 대해서 구약은 두가지로 약간 어긋나는 언급을 한다.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
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
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명기 14장 28
~29절]
"고아와 과부와 이방인으로서 유다교로 개종하고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는
재산의 십분의 일을 나누어주었다. 삼 년마다 나는 그 선물을 그들에게 가지고 가서 모세의 율
법서에 제정된 법대로, 또 우리 할아버지 하난니엘의 어머니 드보라가 명령한 대로 그들과 함
께 먹었다." [ 토비트 1장 8절]
위에서 언급한 신명기와 외경인 토비트(천주교에서는 경전으로 인정함)에서 십일조는 3년에
한번 내는 것으로, 레위인들뿐만 아니라 고아, 과부, 나그네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기록되어 있
다. 반면, 제사장 법전에는 십일조가 세금처럼 되어 있어 특별한 수입이 없는 레위인을 위한
'십분의 일 세'로 나온다.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의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내가 이스라엘의 십
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이
후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회막에 가까이 말 것이라 죄를 당하여 죽을까 하노라. 오직 레위인은
회막에서 봉사하며 자기들의 죄를 담당할 것이요 이스라엘 자손 중에는 기업이 없을 것이니
이는 너희의 대대에 영원한 율례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
인에게 기업으로 준 고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
라 하였노라." [민수기 18장 20~24절]
신명기 법전에서는 십일조가 빈곤한 사회의 약자들을 위한 나눔의 잔치'를 강조하고 있다면,
위에서 언급한 제사장 법전에는 십일조가 일종의 세금으로 성전의 봉사자들의 몫으로 규정되
어 있는 것이다.
당시에 제사장들과 레위족들은 성전의 제사의식만 책임졌던것이 아니라, 국민교육을 책임지
고 국가의 행정 사무를 담당하며 사법, 재판 등과 의료 사업까지 담당하는 국가 공무원의 역할
을 했다. 따라서 제정일치 사회였던 이스라엘에서 십일조는 '세금'의 성격이 강했음이 분명하
다.
"성경은 일점일획의 오류도 없으므로 십일조를 지켜야한다!"라고 주장한다 하더라도 위에서
언급한 신명기 14장에는 3년에 한번씩 십일조를 하라고 언급되어 있는데, 1년 365일 십일조
를 강요하는 한국의 교회는 무슨 베짱인가? 돈에 눈이 먼 목사들이 애써 말하려 하지 않고 숨
기는 구절이 아닌가?
(2) 십일조의 역사
십일조에 대해서 두산세계대백과의 설명을 따르면 아래와 같다.
"구약시대의 제사의식에 참예하는 유대인들은 형편에 따라 빵과 포도주를 들고 와서 나누어
먹는 정도였다. 서유럽에서 십일조가 처음에는 이를 그리스도교도가 하느님에게 자의(自意)로
즐겨 바치는 경건한 신앙행위로 받아들여졌으나, 6세기 이후의 교회는 점차 신자에게 이를
강요하다가, 8세기에 이르러 카롤링거왕조의 피핀과 카를대제 등은 이를 아예 의무화하였다. 특
히 10세기에 성행한 사유교회제(私有敎會制)를 이용하여 세속 영주(世俗領主)들은 자신들의
영민(領民)들이 바치는 십일조를 사유화하여 갔다.
교회는 라테란 공의회(公議會, 1078) 및 1179년 그레고리우스의 교회제도개혁을 통하여 영주
로부터 십일조를 환수하려 하였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그 대부분은 세속 영주의 수중으
로 들어갔다. 소교구(小敎區)의 사제(司祭)는 그의 생활과 교회의 관리·유지를 명분으로 곡물·
포도주·가축·사료(이상 대십일조), 아마(亞麻)·가금(家禽)·채소(이상 소십일조), 개간지(開墾
地:신십일조) 등에 십일조를 부과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실제로 수입의 1/14 또는 1/15
밖에 되지 않았다. 이것도 앙시앵 레짐의 말기에 이르러서는 민중의 불평과 비난의 대상이 되
어 1789∼1790년 대혁명의 과정에서 폐지되었으며, 영국에서는 1648년과 1688년에, 독일에
서는 1807년에 각각 폐지되었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십일조 항목]
성경에서도 십일조는 세금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중세유럽에서도 십일조를 거두기는 했
지만 영주들에게 내는 세금의 형식이 강했다. 그리고 그나마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역사 저편
으로 사라져 버렸던 십일조제도가 미국의 청교도들에 의해서 다시 부활하게 된다.
알다시피 초기에 미국을 개척했던 사람들은 청교도들이었고, 지금은 근본주의자들이 많이 사
라져버렸지만 얼마전까지 미국은 근본주의자들의 천국이었다. (미국의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
아서 우리나라에는 근본주의가 판을 치는것이다)
1900년대 초에 미국의 캔서스주에서 시작되었던 오순절 운동에서 비롯된 오순절 교회 분파에
서 십일조가 다시 부활했다. 특히 오순절교회는 방언, 안수치료등을 강조하는 미신, 기복신앙
적인 종파로, 철저하게 십일조나 헌금을 강요했고, 어떤 오순절 교회에서는 예배중에 헌금바
구니를 3번 돌리는 곳도 있다.
"십일조를 안내는 것은 하나님의 재물을 약탈하는 것이다!"라는 말라기의 구절을 자주인용하
는 어느 유명 목사님의 교회는 오순절교파에 속한다. 이런종류의 교파는 미신에 가까운 성령
운동을 매우 강조하고, 현세적인 기복신앙(믿음이 신실한 신자는 반드시 부자가 된다!)을 강조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교파가 얼마나 위험천만한 것임을 알면서도 대한민국의 목사들은 돈에 눈이 멀어서 십일
조제도를 너도나도 채용했다. 더 나아가서 사기꾼같은 일부 사이비적인 목사들은 성령운동같
은 것도 받아들여서 신자들의 눈을 멀게 만들었다.
(3) 양심을 팔아먹고 성경을 악용하다
신명기14장에서 십일조는 3년에 한번씩, 그것도 레위인들과 과부,고아,나그네등에게 베풀어
주는 나눔의 잔치같은 것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두산세계대백과 역시 구약시대의 십일조는
"형편에 따라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나누어 먹는 나눔의 잔치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개신교에 만연한 십일조 제도는 어떤가? 3년에 한번씩이 아니라 1년365일
십일조를 강요하고 있으니, 신명기의 구절을 벗어난 비성경적이라고 할수 있다.
더구나 거두어 들인 헌금의 대부분은 사회봉사가 아니라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 건물 건축, 목
회자 및 교회 운영비로 거의 사용되고 사회구제활동으로는 십일조 조차 하지 않는실정이다.
개신교는 10%정도를 사회봉사에 투자한다고 주장 하지만 그것은 선교비까지 포함한 비용이
다. 따라서 순수한 사회봉사에는 코뭍은 돈만 사용한다.
한마디로 소외되는 사람과 함께하는 나눔의 잔치는 뒷전이고, 교세확장, 교회건물 증축에 대
부분의 수입을 쏟아 붓고 있는 것이다.
더욱더 문제되는 것은 위선적인 행태이다. 근본적으로 구약시대의 율법이라는 것은 현대인들
에게 지킬래야 지킬수도 없는 것들뿐이다. 필자는 그러한 율법에 대해서 앞에서 누누이 언급
했다. 그 지킬수도 없는 해괴망측한 율법들을 언급하면 개신교인들은 율법은 폐기 되었는데
왜 그걸가지고 따지냐고 항의하는 분들이 많다.(사실 앞서서 언급했듯이, 율법이 폐기되었는
지 폐기되지 않았는지는 신약의 내용이 서로 어긋난다.) 그렇다면, 그들의 주장대로 율법은 폐
기되었는데 어째서 십일조만큼은 여전히 존속하는가? 기독교인들이 십일조를 옹호하려고 인
용하는 예수의 말이 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
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을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
야 할찌리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마태복음 23장 2
3~24절]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십일조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는 십일조는 하루살이로, 정의와
자비와 신의는 낙타로 비유하고, 하루살이에 불과한 십일조는 걸러내고, 낙타와 같이 거대한
정의와 자비와 신의를 외면하고 있다고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비판하고 있다.
성경구절을 자신들에게 유리한쪽으로 악용하는 자들을 뭐라고 부르는가? 바로 사이비 이단이
아닌가? 사실, 성경구절을 악용하면 십일조가 아니라 전재산을 갖다 바치라고 주장할 수도 있
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
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행전 4장 32절]
위의 개역한글판의 뜻이 모호하므로 공동번역판의 동구절을 올린다.
"그 많은 신도들이 다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행전 4장 32절 / 공동번역판]
여기서 초대교회의 신도들은 전재산을 바쳐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동체적인 삶을 살았던 것
을 알수가 있다. 오늘날에도 전재산을 바치게 한뒤, 기도원이나 교회에서 집단생활을 하는 일
부 이단교파들이 있다. 보통사람들의 눈에 그들은 이단으로 비치겠지만, 성경적으로 보면 이
들의 생활은 초대교회의 공동체적인 생활과 유사하다.
또한, 누가복음 21장 1~4절에서 예수는 전재산을 헌납한 과부의 믿음을 칭찬한다. 마태복음
10장 34~39절,누가복음 12장 51장~53절 에서 예수는 집안식구들이 원수이며 부모자식, 전
재산을 모두 버리고 자신을 따라오도록 권유한다.
오늘날 가끔씩 사회고발 프로그램에 집도 전재산도 교회에 바치고 가족도 버리게 만드는 이단
종파들이 나와서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러나, 정작 이런 이단종파들은 위에서 언급
한 예수의 말에 가장 합당한 종파가 아닌가? 성경을 악용하면 얼마든지 전재산과 가족도 버리
게 만들 수 있다! 정상적인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무리 예수가 그렇게 말을 했더라도 그것
이 옳지 않음을 잘알고 있을 것이다. 예수의 말대로 전재산을 교회에 갖다바치고 가족도 내팽
겨두려는 사람이 여러분의 주변에 있다면 여러분은 그를 말릴 것이다.
이제 십일조에 대한 결론을 내보도록 하자. 십일조는 제정일치의 고대 이스라엘에서 국가에
납부하는 세금의 일종이었을 따름이다. 오늘날의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국민으로서 국가에 세
금을 납부하고 또다시 교회에 십일조를 또 바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건축헌금, 여전도회 헌금, 해외선교 헌금, 일천 번제헌금, 구역헌금....등등의 헌금은
성경적인 근거를 찾을수 없다.(나아만이 엘리사에게 한센병을 치료받기 위해서 예물을 가지고
갔다는 등의 억지적인 끼워맞추기를 할지도 모르지만)
십일조라는 명목의 헌금은 중세시대 이후 사라져 버렸다가 미국의 일부 오순절교파에서 다시
부활해서 그 교파에서만 행해지고, 유럽이나 미국의 다른 기독교 교파에서는 사라진지 오래이
다. 오순절파는 한마디로 현세적인 기복신앙적인 교파로, 방언, 안수치료등의 미신적이고 기
복신앙적인 성령운동을 펼쳐나갔고, 신실한 신자는 반드시 부자가 된다는 현세주의적인 기복
신앙이 강한 종파이다. 이 오순절교파의 교리가 한국에 퍼져서 미신에 가까운 성령체험주의와
십일조, 현세주의적인 기복신앙등이 한국개신교의 여러종파에 깊숙이 침투해 버렸다. 쉽게 말
하자면, 그들의 교리는 돈이 잘 벌리는 군침도는 교리로써 돈에 눈이먼 한국의 목회자, 사기꾼
사이비 목사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그들의 교리를 하나둘씩 수용해간 것이다.
기독교가 십일조를 신앙생활의 필수조건으로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공갈이며, 구약의 다른율
법은 전부 제쳐두고 십일조만을 끄집어 내는 것은 위선 그 자체이다.
16세기 천주교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성 베드로성당을 짓기 위해서 면죄부 판매를 강행하다가
종교개혁이 일어나서 개신교가 등장했다. 그런데 한국땅에서는 천주교의 성당보다 개신교의
교회가 더욱 화려하기 그지없다. 교세확장과 화려하기 그지없는 교회건물짓느라 십일조라는
명목의 헌금을 강요하는 한국의 개신교는 16세기의 부패한 천주교를 닮아가고 있다. 지금의
한국교회 모습은 16세기 종교개혁 이전의 유럽교회 전철을 밟고 있는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십일조를 강조하는 한국의 목사들에게 성경구절 하나를 지목해 보겠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
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
하며 가니라." [마가복음 10장 21~22절] (똑같은 내용이 마태복음 19장 21~22절에도 있음)
성경구절을 끄집어내서 십일조를 정당화 시키는 한국의 목사들은 예수의 말처럼 전재산을 팔
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 목사들은 전재산을 전부 다 내놓고 천막에서 라면이나 끓
여먹으면서 살아라. 그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다!
이것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한국의 목사들은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입맛에 맞는 성경구
절만 골라내서 악용하는 무리들이라고 밖에는 달리 말할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