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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자료 스크랩 조선 왕릉 2. 동구릉.건원릉 [이종호의 과학유산답사기 제4부]
이장희 추천 0 조회 41 14.05.31 13:5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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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개 왕릉이 모인 대규모 가족묘, ‘동구릉’

 

[이종호의 과학유산답사기 제4부] 조선 왕릉 2-1 동구릉

 

 

9개의 왕릉이 있는 동구릉 배치도. 이종호 제공

 

 

500년이라는 조선의 긴 역사 동안 왕릉이 42개나 되는 만큼 왕릉을 둘러싼 사건도 수많았다. 서울시 강남구에 있는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처럼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파헤쳐 다시 만든 곳도 있고, 천장(遷葬) 또는 후일 왕으로 추숭(追崇)되면서 본 모습이 바뀐 경우도 있다. 그래도 조선 왕릉은 조성될 때의 모습을 간직한 채 오늘날까지 전해지므로 각각의 능이 만들어지던 시대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달리 높은 가치를 지닌다.

제1구역은 대체로 서울시 동북쪽에 있는 동구릉(東九陵), 홍유릉, 사릉, 광릉을 포함한 13개의 능이 있다. 이중 동구릉에는 9개의 능이 있어 조선 왕릉의 약 20%가 될 정도로 비중이 남다르다.

왕릉에 대한 기본 사항을 숙지하고 동구릉부터 조선 왕릉 과학유산답사기의 대장정에 들어간다.


●제1구역 동구릉… 태조부터 조선 전기에 걸쳐 조성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동구릉 입구. 이종호 제공

 

 

동구릉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검암산(儉岩山)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9개의 능에 17위에 달하는 조선의 왕과 왕비 유택이 있는 조선 왕조의 가장 큰 가족묘다. 총 면적은 57만9557평이나 된다.

1408년 조선을 창건한 태조 이성계가 사망하자 태종의 명으로 정해진 능지가 동구릉이다. 이후 16명이나 되는 유택이 추가됐으므로 조선 왕조 전 시기에 걸쳐 조성됐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왕조 500년의 부침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인데다 교통이 편리해 가족 단위의 소풍은 물론 수학여행지로서 더 할 나위없는 장소다.

동구릉 자리에는 한 가지 설이 있다. 태조가 생전에 무학대사를 시켜 자신과 후손이 함께 묻힐 장소를 골라서 정해달라고 했다는 것. 그런데 이 이야기는 무학대사의 신통함을 강조하기 위해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사료를 보면 9개의 능들이 각각 여러 곳으로 길지를 물색하다가 이곳에 정착하게 됐다고 적혔기 때문이다. 동구릉이라는 이름 또한 문조(文祖)의 수릉이 아홉 번째로 들어앉은 이후에 정해졌고 이전에는 ‘동오릉’, ‘동칠릉’으로 불렸다.

동구릉 정문에 들어가면 이곳이 다른 왕릉과는 다르다는 걸 곧바로 알 수 있다. 몇 걸음 걷지 않아도 홍살문(紅箭門)이 보이기 때문이다. 홍살문은 왕릉의 들머리임을 알려주는 건축적 장치로, 이곳을 지날 때 몸과 마음가짐을 엄숙히 하고 여기 모셔진 분들에게 경건한 예를 갖추라는 뜻으로 세워졌다. 그런데 동구릉에는 9개의 왕릉마다 있는 홍살문과 별도로 더 큰 홍살문을 설치해뒀다.

 

동구릉에는 각 왕릉마다 있는 홍살문과 별도로 설치된 커다란 홍살문이 있다. 이곳을 지나면서 몸가짐, 마음가짐을 엄숙히 하고 예의를 갖추라는 뜻으로 세워졌다. 이종호 제공

 

 

아홉 개의 왕릉 중 어디부터 답사해야 할지 정하기는 쉽다. 홍살문을 지나 좌우로 두 길이 있는데 우측 길은 재실을 거쳐 수릉, 현릉, 건원릉, 목릉을 거쳐 휘릉, 원릉, 경릉, 혜릉, 숭릉을 거쳐 출구로 나오고, 좌측 길은 이와 반대 코스다.

이 글에서는 우측 길을 차례로 답사하는 코스를 따르는데, 왕릉 설명은 답사 순서와 달리 동구릉에 매장된 연대순으로 한다. 참고로 일반 왕릉은 9시부터 개장하지만, 동구릉은 여름에는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 30분, 겨울에는 6시 30부터 5시 30분까지 개장한다.

 

 

태조 이성계는 묏자리도 좋다

 

[이종호의 과학유산답사기 제4부] 조선 왕릉 2-2 건원릉

 

 

조선 왕릉에서 가장 중요한 왕릉인 ‘건원릉‘의 모습. 이 왕릉은 태조 이성계를 모셨으며 조선 왕릉의 기준이 됐다. 이종호 제공

 

 

조선 왕릉에서 가장 중요한 왕릉은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창건하지 않았다면 조선 왕조가 탄생하지 않았고, 조선 왕릉 자체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건원릉이 동구릉의 여러 왕릉 중에서 가장 묏자리가 좋다. 조선 왕릉 동부지구관리소 조인제 소장은 “조선을 세운 태조가 좋은 묏자리에 있기 때문에 왕조가 500년이나 지속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며 웃었다.

●조선 창건한 이성계는 누구?… 동북면 실력자, ‘신궁’이라 불려

 

 

전북 전주에 있는 ‘경기전‘에 모셔진 이성계의 어진(초상화). 위키백과 제공

 

 

태조 이성계는 고려 충숙왕 4년(1335)에 태어나 태종 8년(1408)에 74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재위 기간은 다소 짧아 1392년부터 1398년까지로 햇수로는 7년, 만으로는 6년 남짓이다.

이성계의 선대는 원나라가 지배하던 여진족 지역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해, 두만강 또는 덕원지방의 천호(千戶)로서 원나라 벼슬을 했다. 그의 집안이 고려왕조와 인연을 맺은 것은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李自春)때부터다.

이자춘은 원나라의 총관부(摠管府)가 있던 쌍성(雙城)의 천호였는데, 공민왕 5년(1356) 고려군이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도와 원나라 세력을 몰아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때 이성계도 아버지를 도와 공을 세웠다.
그는 아버지의 직위를 이어받으며 동북면의 실력자로 부상했다. 무예에 출중했으며 특히 활솜씨는 가히 신궁(神弓)으로 불렸다. 신기에 가까운 태조의 활솜씨를 소개하는 기사가 실록 곳곳에서 발견된다.

고려 말 이성계의 활약은 익히 알려진 것처럼 화려하다. 홍건적이 개경을 함락시키자 자신의 사병 2000명으로 수도를 탈환한 후 제일 먼저 입성했다. 또한 전국 각지를 노략질하던 왜구를 격퇴하고, 황산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등 불패의 신화를 만들면서 차츰 백성으로부터 신망을 얻게 된다.

●‘위화도 회군’으로 왕조 개창의 기반 마련

이성계가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수 있는 직접적 기반을 만든 것은 우왕 14년(1388) ‘위화도 회군’이었다. 당시 명나라의 철령위(鐵嶺衛) 설치 문제로 고려와 명의 외교관계가 극도로 악화됐다. 이때 고려는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임명하고,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정벌군을 거느리고 위화도(威化島)를 거쳐 명나라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마침 압록강의 물이 불어나 강을 건너기 어렵게 됐다. 이성계는 이를 계기로 진군을 중단하고 14일간 머물면서 조민수와 상의해 아래와 같은 ‘4불가론(四不可論)’을 제기했다. 요동 정벌을 중단하고 철병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옳지 않음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옳지 않음
?온 나라의 병사를 동원해 원정하면 왜적이 허술한 틈을 타서 침범할 염려가 있음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풀어지고, 병사도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음

 

중국 단둥에서 바라본 ‘위화도‘의 모습. 이곳에서 회군이 조선 창건의 결정적 계기였다. 이종호 제공

 

 

고려 정부의 우왕과 최영 장군은 이성계의 철군 요청을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속히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이성계와 조민수는 회군을 결행한 후 개경을 함락시키고 우왕과 최영을 사로잡았다.

이후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위한 후, 창왕을 옹립해 정치적·군사적 실권자가 됐다. 이후 1392년에는 새로운 왕조를 개창했다.

신흥 조선왕조가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비결은 유력한 개혁세력인 신흥사대부에 대한 후원자가 됨으로써 이들의 개혁 구상을 자신의 통치기반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전(私田)을 개혁하고 과전법(科田法)을 시행했다. 또 국가를 개창하자마자 군사제도, 권력기구, 지방통치제제 전반에 대한 개혁을 단행했고 한양으로 천도했다.

그런데 이방원이 1, 2차에 걸친 ‘왕자의 난’을 벌여 태조의 정치적 생명은 중지된다. 이처럼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에도 불구하고 고려 왕조로 복귀하지 않고 조선 왕조로 안정화될 수 있었던 것도 신흥사대부 세력과 결합 때문이다. 조선은 신흥사대부의 이념인 성리학을 새로운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표방해 계속 발전했다.

 

 

 

‘함흥차사’가 사실이 아니라고?

[이종호의 과학유산답사기 제4부] 조선 왕릉 2-3 건원릉

 

 

조선 왕릉의 기준이 되는 ‘건원릉‘의 모습. 자연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걸 알 수 있다.

동아일보DB 제공

 

태종이 정종에 이어 왕위에 오르자 태상왕(太上王)이 된 태조는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즉위한 태종에 대한 증오심을 갖게 됐다. 이 때문에 그는 서울을 떠나 소요산, 함흥 등지에 머물러 있기도 하였다. 태조는 만년에 불도(佛道)에 정진하다가 태종 8년(1408) 창덕궁 광연루(廣延樓) 아래 별전(別殿)에서 사망했다.

제1대 태조의 능인 건원릉은 기본적으로 조선왕릉 제도의 정례(定例)가 된다. 건원릉은 동구릉에서 가장 중앙 깊숙한 곳에 위치한다. 조선왕의 능호는 모두 외자인데 반해 견원능만 두 자이다.

태조의 비는 신의왕후 한씨, 계비는 신덕황후 강씨(1899년 신덕왕후에서 신덕황후로 추존)다. 신의왕후의 묘는 북한에 있고 신덕황후의 묘는 석관동 정릉에 있다.

원래 태조는 계비 신덕왕후 강씨와 함께 묻히고자 여러 차례 수릉(壽陵·생전에 미리 정해놓는 무덤) 자리를 물색했다. 신덕왕후가 승하하자 한양 도성 안 경복궁 서남방인 정릉에 자신의 묏자리를 축조해 놓기도 했다. 그러나 태종은 부왕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신덕황후의 정릉을 도성 밖으로 이장하고, 태조의 능을 현재 자리에 조성했다.

●조선 초기 왕들의 전쟁, 태조VS태종

태종이 태조의 유언을 지키지 않은 것은 둘 사이의 골이 매우 깊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조선 왕릉을 포함해 조선 왕조의 전체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므로 좀 더 설명한다.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하는 데 큰 공헌을 한 태종이지만 이성계는 방원 대신 계비인 신덕왕후의 둘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또 ‘개국공신책록’에서도 이방원을 제외했다. 이에 발끈한 이방원이 1차 왕자의 난을 통해 신덕황후 소생의 두 아들을 모두 살해했다.

이에 대단히 분노한 태조는 곧바로 방과(芳菓·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됐다. 그러나 방원이 넷째 형 방간이 일으킨 2차 왕자의 난도 진압하자 정종은 이방원의 위세에 겁을 내 왕위를 태종에게 물려줬다.

태상왕이 된 이성계는 한을 품으며 서울을 떠나 자신의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갔다. 태종이 문안을 위해 차사를 보냈는데 그때마다 돌아오지 않아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긴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말은 태조가 차사를 모두 죽였기 때문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헌은 이와 달리 판승추부사 ‘박순’만 희생됐다고 적었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박순 역시 조사의(趙思義)의 난이 일어나자 함주의 군중(軍中)에서 피살됐다고 적혀 있다. 함흥차사에 관한 일화가 사실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야사를 정사로 볼 수 없다’는 증거로 자주 거론된다.

여하튼 태종은 부친이 잡아놓은 수릉 대신 도성 밖 동북방에 있는 양주의 검암산 아래에 태조릉을 조영했다. 도성 안의 수릉을 옮긴다는 명분을 앞세워 계모 신덕왕후의 능도 옮기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후 태종은 도성 안에는 왕실이나 사가의 무덤을 쓰지 못하게 하고, 도성 10리 밖에 능역을 조성하도록 했다. 이 제도는 후에 ‘경국대전’에 법문화됐다. 그래서 지금도 도성 안, 즉 서울의 사대문 안에는 왕릉이나 무덤이 한 개도 없다.

 

 

 

조선 최초의 왕릉은 왕릉의 ‘교과서’

[이종호의 과학유산답사기 제4부] 조선 왕릉 2-4 건원릉

 

 

보물 1741호인 정자각의 모습. 조선 1대 왕의 왕릉이라는 상징적인 의미와 향후 다른 왕릉의 표준이 된 건물이다. 이종호 제공

 

 

건원릉은 사실상 조선 왕릉의 교과서다. 조선 왕릉의 기본은 고려 왕릉 가운데 가장 잘 정비된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헌정릉 제도에서 따왔다.

홍살문에서 직선으로 보물 1741호인 정자각이 보인다. 정자각은 태종 8년(1408)에 건원릉과 같이 건립됐다. 몇 차례의 중수가 있었지만 ‘국조오례의’ 길례 단묘도설과 비교해 볼 때 건립 시의 기본적 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게다가 조선 1대 태조의 능인 건원릉의 정자각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고, 조선 왕릉 조성에서 정자각의 표준이 된 건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됐다.

정자각 뒤에 있는 능침의 봉분은 12각의 화강암 병풍석이 싸고 있다. 병풍석의 양쪽 가장자리 우석에는 중심에 태극이 그려진 방울, 방패 무늬가 새겨졌다. 중앙에 구름무늬 속에 서 있는 십이지신상의 모습이 보인다.

 

정자각에서 바라본 건원릉의 모습(왼쪽)과 정자각 어계(왕의 게단) 위에 있는 배위(절하는 자리)의 모습(오른쪽). 이종호 제공

 

 

●제삿상 아니라 영혼이 노닐다 가는 자리

병풍석 밖으로 난간석이 돌고 난간석 밖으로 석호와 석양이 네 마리씩 교대로 밖을 향해 배치됐다. 봉분 앞에 석상이 있는데, 석상 밑으로 귀신 얼굴이 새겨진 고석 5개가 보인다. 그 양 옆에 망주석이 서 있다.

봉분 앞에 놓여 있는 커다란 돌상 같은 것을 혼유석, 석상 또는 상석이라고 한다. 이는 묘제(墓祭)를 지낼 때 제물을 올려놓는 상이다. 산소 주인의 영혼께 올리는 진짓상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엄밀하게 보면 석상과 혼유석은 다르다. 석상이 밥상이라면 혼유석은 깔고 앉는 방석이다.

 

 

왕릉 앞 석상은 제사 음식을 차리는 자리가 아니라 영혼이 노니는 ‘혼유석‘이다. 혼유석 아래에 5개의 고석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종호 제공

 

 

혼유석은 영혼이 노니는 돌이라는 뜻인데 얼핏 제사 지내는 상처럼 보이지만 그런 용도는 아니다. 이 아래 석실로 연결되는 통로가 숨어 있으므로 혼유석은 ‘지하의 밀실’을 봉인한 문이라고 볼 수 있고, 위치도 봉분과 석상 사이다. 고석에 새겨진 귀면(鬼面·귀신 얼굴)이 문고리를 물고 있는 것은 이런 연유다.

왕릉의 석상을 혼유석이라 부르는 것은 왕릉 앞에 정자각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 무덤에서는 석상에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올리지만, 왕릉에서는 정자각이라는 건물에서 제사를 올린다. 결국 왕릉 석상에는 음식을 올리지 않기 때문에 혼유석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참고로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선전기에는 석상(石床)이라는 표현을 주로 쓰다가 선조 때부터 혼유석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왕릉 봉분에 ‘억새풀’이 자란다고?

[이종호의 과학유산답사기 제4부] 조선 왕릉 2-5 건원릉

 

 

태조 이성계가 묻혀 있는 건원릉의 모습. 고려 시대 왕릉을 기반으로 새로운 양식을 추가했다. 이종호 제공

 

 

건원릉은 병풍석 문양이나 문인석, 무인석 등의 양식에서 고려 헌정릉의 영향이 보인다. 하지만 석호·석양의 배치, 장명등, 난간석주는 새 양식이다. 일정한 변화를 줘 새 왕조가 시작됐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봉분 주위로 곡장을 두르는 양식은 조선시대의 능제에 새롭게 추가된 것이며, 석물의 조형은 중국 남송 말기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건원릉에는 축문을 태우는 소전대가 있다. 소전대는 태종까지만 있고 이후 예감으로 대치된다. 또 정자각 남쪽에 비각과 수복방이 있다. 비각 안에는 능상 측에 신도비, 정자각 측에 능표(비문)이 있다.

 

건원릉을 지키고 있는 무인석과 문인석, 석마 등의 모습. 아랫줄 사진은 문인석(왼쪽)과 무인석(가운데), 병풍석과 난간석(오른쪽)의 모습이다. 이종호 제공

 

 

●죽은 자의 업적 기리는 ‘신도비’

신도비는 1409년에 세웠다. 비의 형식은 귀부와 비신, 이수를 갖췄는데 당대 최고의 조각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런 형식은 통일신라 이후에 계승된 전통이다. 비문 상부의 전액은 문신 정구(鄭矩)가 썼다.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 권근(權近)이 글을 짓고, 음기의 글은 변계량(卞季良)이 지었다. 글씨는 고려 말·조선 초의 서예가인 성석린(成石璘)이 썼다.

 

 

축문을 태우는 소전대와 비각의 모습(왼쪽). 가운데 사진은 비각 안에 있는 신도비이고, 오른쪽은 정자각 안에 있는 능표다. 신도비는 조선 왕릉에서 2개만 남아있다. 이종호 제공

 

 

신도비 앞에는 조선 개국의 업적과 치적을 새기고, 뒤편에는 개국공신들의 이름을 기록했다. 사자의 업적을 기록해 세우는 신도비는 중국 진송 때부터 시작됐다. 현재 남아있는 사대부가의 신도비는 수없이 많지만 왕릉의 신도비는 건원릉의 태조 신도비와 헌릉의 태종 신도비뿐이다. 능표는 500년 후 태조를 황제로 추존하면서 세운 것으로 고종이 친히 썼다.

건원릉은 특이하게도 봉분에 잔디가 아닌 억새풀이 심어져있다. 원래 태조는 고향 함경도 영흥에 묻히기를 원했으나, 태종은 아버지를 먼 이북 땅에 모실 수 없어 고향에서 흙과 억새풀을 갖고 와 봉문을 만들었다고 한다. 봉분 위 억새풀은 자주 깎으면 죽게 되므로 4월 5일 한식 때만 한 차례 벌초한다.

 

 

건원릉의 봉분을 보면 길쭉한 풀이 자라있는데, 이는 잔디가 아닌 억새풀이다. 이성계의 고향에서 구해와 봉분에 심었다고 전한다. 이종호 제공

 

 

●조상 위업 기리고 존경 표하는 절차 가져

각 왕릉의 제례 절차는 태릉에 있는 ‘조선왕릉 전시관’의 산릉 제례에 다음과 같이 설명돼 있다.

‘왕이 소여를 타고와 홍살문 앞에 배위에 서서 능을 한 번 바라보고, 어도를 따라 걸어 미리 설치해둔 소차로 들어가서 손을 씻고, 동입서출의 예에 따라 정자각 동계에 오른다. 신을 맞기 위해 네 번 절한 뒤, 제주 따르는 모습을 살펴본다. 세 번 향을 피우고, 왕이 먼저 첫 잔을 올린 다음 축문을 읽는다. 그 다음 영의정이 두 번째 잔을 올린다. 축문을 읽음으로써 조상의 위업을 다시 한 번 기리고, 향을 피우고 술잔을 바침으로써 조상에 대한 존경을 표현한다. 그 뒤 절을 네 번 하면서 신을 보내고 축문을 태움으로써 제례를 끝낸다.’

산릉 제례는 왕의 존재가 먼 조상의 임금에서 이어졌다는 걸 다시 인식하는 것이다. 조선의 왕은 왕위에 올랐을 때 배릉(拜陵) 의식이라고 해 건원릉의 능, 부왕과 모후의 산릉에 반드시 참배했다.

 

 

동쪽 계단은 신계(神階)와 어계(御階)로 2개다. 왼쪽이 어계, 오른쪽이 신계의 모습이다. 올라갈 때는 참배자가 왕의 영혼과 함께 하지만 내려올 때는 참배자만 내려온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종호 제공

 

 

참고로 건원릉의 배위는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홍살문 옆에 있지 않고 정자각 동계의 어도를 올라가자마자 옆에 있다. 이는 조선의 왕릉 제도가 정비되기 이전의 모습을 보여준다.

건원릉을 만들면서 원찰(願刹)로 개경사(開慶寺)를 축조했다고 알려지나 지금은 건물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능의 관리를 위해 영 1인, 참봉 1인을 두었으며, 참봉은 종친부(宗親府)에서 대군이나 왕자군의 봉사손(奉祀孫, 제사를 받들 수 있는 후손)을 자유로이 임용하도록 하였다. 이후 다른 왕릉도 같은 예를 따랐다.

 

참고문헌 :
「동구릉의 주인과 그 시대」, 연갑수, 2007
「[신의 정원 조선 왕릉③] 수릉 대신 도성 밖 10리에 새 왕조 시작 의미 담아 조성」, 이창환, 주간동아, 2010.04.06
『왕릉』, 이상용, 한국문원, 1997

 

 

 

이종호 박사(사진)는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페르피냥 대학교에서 공학박사를 받았다. 해외 유치 과학자로 귀국해 한국과학기술연구소,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등에서 근무했으며 현재 한국과학저술인협회 부회장을 역임하며 과학저술가로 활동중이다.

저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과학이 있는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노벨상이 만든 세상’ ‘로봇, 인간을 꿈꾸다’ ‘과학으로 보는 삼국지’ 등 다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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