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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입니다.
살아가면서 한두 번 시험이 없는 성도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시험이 찾아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당연히 이겨야 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시험인줄 모를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시험에 든 줄 모를 때도 있습니다. 지나고 보면 ‘그게 시험이었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깨달은 사람은 이긴 분입니다. 주변에 중보기도한 자들이 있었고 하나님의 이끄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이기고 나면 조금이라도 신앙이 자라게 됩니다. 그러니까 시험도 신앙이 자라는 과정일 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시험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약1:2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라고 했습니다. 같은 장 12절에서는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세 번이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시험을 받는 시기도 나옵니다. 40일을 금식하자마자 입니다. 그 이전에 요단강에서 세례 받고 나서 입니다. 즉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세례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출발하는데 기대와 달리 시험도 있을 수 있습니다. 시련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겨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단이 우리가 신앙을 갖지 못하도록 얼마든지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연단시키고 단련하여 성숙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세례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물에서 몸을 씻듯이 죄인이 죄를 씻는 의미입니다. 죄를 씻는다는 의미만 아니라 과거의 나를 물속에서 장사지내고 예수님과 함께 새롭게 산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벧전 3:21입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롬6:3,4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세례 자체가 죄를 씻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라 죄를 씻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의 표현입니다. 세례 받는 것은 죄를 씻는 상징일 뿐입니다. 또한 옛사람을 물속에 장사지내고 물에서 올라오므로 예수님과 함께 새 생명으로 다시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백합니다. 갈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세례는 죄를 씻고 옛사람인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의미입니다. 또한 교회 앞에서 나도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왜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예수님의 세례와 우리의 세례는 다릅니다. 죄인인 우리는 죄를 씻는 의미로 물에 들어갔다 나온 것이라면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가 벗어 놓은 죄 짐을 짊어지고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세례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보라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물에서 죄를 내려놓은 것이나 예수님이 물에 들어가서 우리 죄를 짊어지고 나온 것이나 이것은 다만 상징적인 의미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세례 받으신 후에 광야로 가서 사십일을 금식하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습니다. 성경은 마귀를 사탄이라고도 기록하는데 의미가 다릅니다. 마귀는 ‘디아볼로스’인데 이간자, 쐐기를 박다, 시험하다는 뜻입니다. 본문 1절에서는 마귀가 시험한다고 했고 3절에서는 시험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혹 우리가 만일 사람과 사람을 이간질시켰다면,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시험에 들게 했다면 잠시 마귀짓 한 것입니다. 성도라면 마땅히 하나님께 쓰임 받아야 하지만 마귀도 언제나 틈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기도함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나라를 대적하는 경우입니다. 본문에도 마귀를 시험하는 자라는 명칭을 사용하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경우는 사단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시험인 마귀가 자기에게 경배하라고 할 때는 예수님께서 마귀야, 물러가라고 하지 않고 사탄아, 물러가라고 했습니다. 경배는 하나님만 받으시는데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서 경배 받으려고 했기에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한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이 왜 죽으시려고 하는지 모르고 ‘주여, 죽지 마소서’ 라고 하자 이때도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라고 단호히 책망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 구원을 이루는 일인데 이것을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도 세 가지를 시험했습니다. 이 세 가지 시험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대부분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험도 거의 이러한 범주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시험은 먹는 것으로 시험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능력을 시험한 것이기도 합니다. 40일을 굶주린 예수님에게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했습니다. 이때 주님은 대답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했습니다.
육신은 당연히 떡으로 살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영적 존재입니다. 육신은 음식으로 살지만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의 양식입니다. 영혼을 살립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라고 했습니다(사55:3).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검보다 예리하여 영과 혼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신다고 했습니다.
먹는 방법도 다릅니다. 음식은 입으로 먹고 마시지만 말씀은 아멘 하여 믿음으로 먹습니다. 음식은 몸을 살찌게 하지만 말씀은 영혼을 소생시킵니다. 우리 영혼을 살리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니 마귀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고 들어도 흘러 떠내려 보내게 합니다.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영혼이 생명을 얻고 소생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말씀을 듣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마귀의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영혼을 살리는 생명인줄로 믿고 말씀을 가까이 하시고 사모하시길 축복합니다. 우리는 먹고 마시는 것, 입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금식하여 굶주리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더 옳은 지를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두 번째는 마귀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로 데려가서 뛰어내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받아 주리라고 합니다. 이때 주님이 하신 말씀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가 예수님을 시험하였다면 두 번째 시험은 이제 하나님 아버지를 시험해보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시험이 예수님을 정말 하나님의 아들인지 능력으로 증명하라고 한 것이라면 두 번째 시험은 하나님 아버지가 너를 구해주는지 시험해보라는 것입니다. 즉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시험해보라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아버지를 신뢰하며 아버지에 대해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보냈고 아버지에게서 들은 말씀을 전하고 아버지의 명령대로 순종한다고 했습니다.
마귀는 지금 우리에게도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간질하며 시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하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고 시험해보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받쳐 주실 거라고 한 것처럼 ‘하나님도 나를 이해해주실 거야’, ‘하나님이 이런 것도 이해 못하겠어.’ 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처럼 시험하지 말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담대히 믿고 나가시길 축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광야에서 다 소멸당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음 세대가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고 믿고 순종하는 삶이길 소망합니다.
세 번째 시험은 사단이 예수님께 천하 영광을 보여주며 자기에게 절하면 네게 넘겨주겠다고 유혹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만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경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섬김 받으실 이는 창조주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러나 사단은 자신이 섬김 받고 경배 받으려고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단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입니다. 종말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도 자기를 하나님이라며 경배하게 합니다.
사단은 지금도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접근합니다. 예수님에게도 천하 영광을 보여주면서 자신에게 경배하면 다 주겠다고 했듯이 자기에게 순종하면 높은 자리에 앉혀 줄 수 있다거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고 필요한 것을 다 줄 수 있다는 식으로 접근합니다. 속지 마시길 바랍니다.
사단의 전략은 하와에게도 다가가서 그러했듯이 결국 자기가 경배 받으려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라도 자기의 종으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신앙생활이 얼마나 영적인 싸움인가를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을 섬기느냐, 아니면 사단의 유혹에 빠져 사단의 종이 되느냐, 입니다. 그래서 시험을 물리치고 이기는 것이 너무도 중요합니다. 아무리 달콤한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아야 합니다. 마음조차도 빼앗기지 않아야 합니다.
마귀 사단은 언제나 이러한 세 가지로 우리에게도 시험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시험들은 마귀의 속성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마귀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삽니다. 그리고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지만 언제나 시험할 뿐입니다. 시험하려고만 적용합니다. 또한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경배 받으려 합니다. 이것이 마귀의 속성입니다.
예수님이 세 가지 시험을 이기는 과정에서 공통된 점은 바로 기록된 말씀을 적용하여 이겼다는 것입니다. 늘 기록된 말씀을 통해 우리도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변함이 없는 영원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고린도교회에 편지하기를 고전4:6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고 권면하는데 예수님조차 기록된 말씀을 통해 시험을 이겼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마지막은 이렇습니다. 이러한 시험을 이겼을 때 마귀는 떠나가고 하나님의 천사가 수종들었다고 기록합니다. 즉 천사가 수종들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는 어떤 자녀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살려고 하는 자, 결코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고 순종하는 자,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며 섬기는 자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서라도 수종들게 하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천사를 만든 이유가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히1:14에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어떤 시험을 만나도 말씀을 통해 이기므로 천사가 수종드는 삶이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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