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축(安軸)은 자가 당지(當之)이며 복주(福州) 흥녕현(興寧縣) 사람이다. 아버지 안석(安碩)은 현리(縣吏)로서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은거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안축은 태어나면서부터 매우 영리하여 학문에 힘썼으며 문장을 잘 지었는데 과거에 급제하여 금주사록(金州司錄)으로 임명되었다가 사한(史翰)으로 뽑히어 보임되었으며, 사헌규정(司憲糾正)에 제수되었다.
충숙왕(忠肅王) 11년(1324)에 원(元)의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요양로 개주판관(遼陽路 盖州判官)에 임명되었다. 당시 충숙왕이 원에 억류되어 있었는데, 안축이 동지들에게 말하기를, “임금에게 근심이 생기면 신하는 곤욕을 당하는 것이고, 임금이 곤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 법이다.”라고 하고, 이에 〈원 조정에〉 상서하여 왕에게 다른 죄가 없다고 호소하였으므로 왕이 가상하게 여겨 특별히 성균악정(成均樂正)으로 승진 임명하였는데, 〈원의〉 개주(盖州) 수령이 사람을 보내 예를 갖추어 그를 초청하였지만 왕이 마침 임용하기로 하였으므로 갈 수 없었으며, 〈그 후〉 여러 번 자리를 옮겨서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가 되었다.
충혜왕(忠惠王)이 즉위하자, 〈안축을〉 강릉도존무사(江陵道存撫使)로 임명하였는데, 그 때 『관동와주(關東瓦注)』라는 문집을 지었다. 〈내직으로〉 들어와서 판전교 지전법사(判典校 知典法事)가 되었다. 충숙왕이 복위(復位)하자 충혜왕에게 총애를 받은 자들을 모두 쫓아냈는데, 어떤 사람이 안축이 쫓겨난 사람들과 친하다고 하였으므로 파직되었다. 얼마 뒤에 다시 기용되어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었으나 세력을 잡고 있던 환관(宦官)의 뜻에 거슬러 다시 파직되었다. 충혜왕이 복위하여 다시 전법판서(典法判書)로 임명하였다가 감찰대부(監察大夫)로 옮겼다. 〈안축은〉 악정(樂正)에서 감찰대부(監察大夫)에 이르기까지 관각(館閣)의 직위를 겸하였으므로 많은 표문(表文)과 전문(箋文), 명령문[詞命]들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이후〉 검교평리(檢校評理)로서 상주목사(尙州牧使)로 나가게 되었는데, 그때 그의 어머니가 흥녕(興寧)에 있었으므로 안축은 왕래하면서 효성을 다하였다.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자 그를 불러서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삼았으며, 여러 번 승진하여 첨의찬성사 감춘추관사(僉議贊成事 監春秋館事)가 되어 이제현(李齊賢) 등과 함께 민지(閔漬)가 편찬한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증수(增修)하였으며, 충렬왕(忠烈王)·충선왕(忠宣王)·충숙왕 3대의 실록을 편수하였다. 〈그러나〉 집권자가 유자(儒者)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파직되어 흥녕군(興寧君)으로 봉하였다가 얼마 뒤에 복직되었다. 〈충목왕〉 4년(1348)에 병이 나서 치사(致仕)할 것을 간청하자 다시 흥녕군으로 봉하였다. 죽으니 62살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안축은〉 마음가짐이 공정하였고 근검으로 집안을 다스렸다.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평소에 칭송받을 만한 일이 없지만 네 번 법관[士師]이 되어 민 중에서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는 반드시 조사해서 양민(良民)으로 되돌려 주었다.”라고 하였다. 〈아버지〉 안석(安碩)이 일찍 죽었는데 안축은 두 동생인 안보(安輔)와 안집(安輯)을 가르쳐서 모두 과거에 급제시켰으므로 안보와 안집은 안축을 아버지처럼 섬겼다. 아들은 안종기(安宗基)와 안종원(安宗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