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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분 정도 앉아 있으면 허리가 콕콕 쑤셔서 더 못 앉아 있겠습니다
수행자 : 저는 집에서 아나파나사띠를 할 때 의자에 앉아서 하는데요. 40분 정도 앉아 있으면 허리 밑이 콕콕 쑤시고 너무 아픕니다. 콕콕 쑤셔 더 이상 앉아서 할 수가 없을 정도인데, 그럴 때는 제가 그냥 일어서서 해야 할까요?
스님: 네, 그래서 40분만 의자에 앉아서 하고, 아래에 40분 다시 앉으면 합해서 한 시간 반을 하는 거야. 그래서 의자에 40분만 하고 다시 아래에 40분 하시면 괜찮을 것 같아요.
법문
1. 80세에 출가한 인물의 이야기
이 이야기는 다시 우리 불법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지속되어 왔는지를 설명해 주는 부분입니다. 어떤 인물이 있었는데, 이 분은 몇 살 때 출가했을까요?
80세가 넘은 나이에 출가했습니다.
자기가 출가한 후에만 머무른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다시 출가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들을 보호하며 이끌어 주었습니다. 위사카(과거 부처님 당시의 대표적인 여성 재가 신자)처럼 집에서 편안하게 지내면서 수행을 하면 되지, 왜 그렇게 피곤하고 괴로운 길을 스스로 선택해서 지내고 싶어 했을까요?
2. 공덕을 쌓는 기쁨
그것이 욕심 때문이었을까요? 그렇다면 위사카는 욕심 때문에 집에서 지낸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공덕을 쌓고 싶어서, 그렇게 원해서 쌓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덕을 쌓는 행동은 일반적인 중생들이 원하는 세속적인 방식이 아닙니다.
이 분은 처음에 너무 피곤하다고 하면서 부처님 처소로 가려고 할 때, 사람들이 마차를 준비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마차를 타지 않고 본인이 직접 걸어서 가겠다고 정하고 걸어갔습니다.
이렇게 걸어가는 것이 좋을까요, 안 좋을까요? 피곤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피곤하지 않고 기쁩니다. 진짜로 기뻐합니다.
3. 124세의 마지막과 '하고 싶어서 한 일'
그래서 나중에 반열반(완전한 해탈)에 들기 전, 이 분의 나이가 120세 이상이었을 때 부처님 앞에 가서 반열반에 들겠다고 허락을 구했습니다. 그렇게 나이 들어 힘들게 행했던 자신의 일들을 후회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전혀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지나온 삶을 다시 생각하고 이야기할 때 후회가 아니라 기쁨에 차서 이야기했습니다.
나이 들어 출가하여 대중들이 많고 시끄러운데 그들을 가르치며 124세까지 비구니들을 이끌고 복잡하게 살았습니다. 이것을 세상 사람들의 관점으로 보면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자기 왕궁에서 편안하게 문을 열어두고, 좋은 자리에서 그냥 개인 수행만 하고 있으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4. 지금 우리의 수행은 어떠한가
지금 우리 수행자들은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하고 있습니까?
자신이 정말 하고 싶어서 하고 있다면 마음이 기쁘고, 더 하고 싶어지며 후회가 남지 않습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발원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정확히 알고 해야지, 그것을 모르고 그냥 하고 있으면 삶이 너무나 피곤해집니다.
5. 10만 겁 전의 약속과 서원
그렇다면 이 분은 언제부터 이 일을 하고 싶어 했을까요? 무려 10만 겁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과거 파두무따라 부처님께서 여러 중생들을 가르치고 계실 때, 이 분은 장자의 딸(보살)로서 부처님을 찾아갔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보살을 보고 "신심이 훌륭하다"라며 첫 번째로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부처님이 보살 시절일 때부터 키워주고, 부처님이 가르치시는 불법을 다시 다른 이들에게 가르치며 법을 보호하는 으뜸가는 비구니라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본 그 장자의 딸은 마음속으로 강한 염원이 생겼습니다.
6. 기꺼이 기다린 10만 겁의 세월
그 서원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기다려야 했을까요? 10만 겁입니다. 그냥 멍하니 기다린 것이 아니라, 그 오랜 시간 동안 끊임없이 바라밀(공덕)을 채워야 했습니다. 우리 수행자들은 이렇게 오랜 세월을 기꺼이 기다리고 싶어 합니까?
이 보살은 부처님께 7일 동안 정성껏 공양을 올리고 대중 공양 행사를 한 후에, 미래 부처님 처소에서 첫 번째 비구니가 되고 싶다고 발원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사두, 사두, 사두(훌륭합니다)"라며 수기를 주시고 허락하셨습니다.
만약 부처님께서 "너는 안 된다. 태어나고 죽는 생사윤회가 얼마나 괴로운데 10만 겁이나 그렇게 고생을 하려고 하느냐"라며 야단을 치셨을까요? 아닙니다. 야단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10만 겁 동안 그렇게 공덕을 쌓은 후의 목적이 결국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해탈)'을 향하고 있음을 부처님께서는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들께서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 보살이 언제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지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마무리 질의응답
윤회와 집착,그리고 보시의 성품
질문자. 10만 겁 전에 서원을 한 그 여자는 10만 겁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계속 여자의 몸으로만 태어나게 됩니까? 아니면 중간에 남자의 몸을 받기도 합니까?
스님. 중간에 남자의 몸을 받기도 하고 여자의 몸을 받기도 하며 변하면서 윤회합니다. 어떤 분들은 쭉 남자의 몸으로만 가거나, 쭉 여자의 몸으로만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마음속의 '무명'과 '갈애'로 인해 흘러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특별하게 여자분들은 마음속에 고유한 집착과 관심사가 있습니다. 아무리 입으로는 "아, 나는 여자 몸으로 살고 싶지 않다"라고 말을 해도, 미용실에 갈 때 남자 미용실로 갑니까, 여자 미용실로 갑니까? 무조건 본능적으로 향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무명이 마음을 부추겨 보내고 있는 증거입니다.
부처님과 야소다라 비의 경우를 보면, 전생에 수많은 생 동안 부부 인연이었다고 합니다. 그때 부처님은 계속 남자였고 야소다라는 계속 여자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가 화장실에 갈 때 남자는 남자 화장실, 여자는 여자 화장실에 가듯이, 다시 태어날 때도 스스로 '나는 여자다'라는 고정관념을 강하게 인정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진실로 그 길로만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명과 갈애의 집착 때문입니다. 무명 때문에 갈애가 생겨 집착하게 되고, 그 갈애의 집착 때문에 다시 무명에 갇히게 되는 순환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수기를 받고 태어나며, 지구상에 부처님이 출현하시지 않은 시대에도 태어났습니다. 그때도 여자의 몸이었기에 물을 길어오는 등의 일상적인 일을 하다가, 근처 숲에서 머무시는 벽지불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벽지불들이 머물 거처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벽지불들을 초청하여 "저희가 머물 거처를 마련해 드릴 테니 이곳에 들어오십시오"라고 청했습니다.
그리고 하루 만에 숲속에 나무와 대나무를 엮어서 벽지불들이 안착할 수 있는 거처를 뚝딱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고는 "저희가 아침과 점심으로 공양을 올리고 포살을 받으며 정성껏 모시고 살아가겠습니다"라고 추천하며 벽지불들을 모셨습니다.
또한, 자기가 입을 옷을 직접 손으로 만들었습니다. 손으로 손수 만든 옷이니 좋은 옷이겠습니까, 안 좋은 옷이겠습니까? 스스로 직접 짠 옷이라 천이 조금 거칠고 비싼 옷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거친 옷을 그냥 벽지불들께 보시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벽지불들이 "아, 천이 너무 거칠어서 우리는 안 받겠다"라고 (저 우실라 사야도처럼) 거절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지혜를 발휘했습니다. 이 거친 옷을 들고 가게에 가서 돈으로 판 다음, 그 돈으로 스님들이 입기에 적당하고 질이 좋은 가사 5개를 사서 보시했습니다. 이것이 훨씬 더 지혜롭고 좋은 보시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인내하는 마음이 참 좋습니다. 왜냐하면 스님들은 갈애(집착) 없이 살아야 하고, 자신이 쓰는 물건에 대해서도 담박하게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시를 할 때는 상대방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 핵심입니다. 내가 최고가 되기 위해서나, 사람들이 나를 존경하고 공경하게 만들려는 의도로 지내는 것보다, 순수한 존경의 마음으로 가사 보시를 거듭 행해야 합니다. 가사 보시를 정성껏 행하면 나중에 그 공덕의 결과(과보)가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나중에 부처님 당시에 나이가 많은 할머니 비구니(마하빠자빠띠 고따미)로 태어났을 때, 부처님께서 아무런 차별 없이 대하셨고, 대중들도 그 분을 너무나 공경하고 좋아해 주는 결과가 생겼습니다. 이것은 과거 전생에 자신이 남들에게 그렇게 조건 없이 베풀고 대접해주고 싶어 했던 마음들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이러한 선한 행동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강한 '습관(성품)'이 됩니다. 그래서 이번 생의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나중에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을 때도 자기가 가진 것을 아낌없이 보시하고 싶은 마음이 본능적으로 다시 생겨납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위사카처럼 엄청난 부자들이 부처님과 상가를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살던 시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은 남이 해주는 것에 기대지 않고, 자기가 직접 해주고 싶어서 보시를 실천했습니다.
그리고 비구니들에게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를 자상하게 가르쳐 주었으며, 대중들 앞에 항상 섰습니다. 이렇게 평생을 바쁘고 피곤하게 수행하다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반열반에 들 때는 어떻게 가셨을까요? 가부좌를 단정히 틀고 수행에 들어 그 자리에서 반열반에 드셨습니다. 이렇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부처님께 올릴 가사를 손수 실로 짜서 직접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과거에 깊이 새겨진 습관과 성품의 힘입니다. 과거에 그렇게 베풀고 싶어 했던 강한 마음 때문에, 다음 생과 그 다음 생에도 계속해서 남을 도와주고 피곤한 일을 사서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스스로를 괴롭히고 피곤하게 만드는 습관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이번 생에도 피곤하게 살고 다음 생에도 또 피곤하게 살고 싶어 하니, 이 습관이 없어져야 편안해지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없어져야 맞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분은 본인이 정말 '하고 싶어서' 기쁜 마음으로 하기 때문에, 아무리 몸이 힘들어도 내면으로는 하나도 피곤해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피곤함의 의미는 세속의 피곤함과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이 분은 부처님 당시뿐만 아니라, 과거 갓사파 부처님 당시나 벽지불들이 계시던 시절에도 자신을 온전히 보시하며 상가를 도왔습니다. 때로는 수행하는 부부와 함께 동참하여 공덕을 짓기도 했습니다.
가사를 보시한 선공덕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가 따를까요? 첫째, 외모가 아주 예뻐집니다. 둘째, 좋은 옷과 가사가 여기저기서 저절로 생겨납니다. 남자의 경우에는 과거에 가사 보시 공덕을 많이 지으면, 출가할 때 부처님께서 "에히 비쿠(어서 오세요, 비구여)"라고 부르시는 순간 신통력으로 머리가 깎이고 가사가 입혀진 완벽한 비구의 모습으로 찰나에 변합니다.
하지만 여자의 몸으로는 부처님께서 그렇게 신통으로 출가시키지 못하십니다. 대신 여자에게는 위사카처럼 세상에서 최고로 비싸고 좋은 옷들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과보가 따릅니다. 갓사파 부처님 당시, 이 분은 왕궁에서 주는 좋은 옷도 거칠다며 입기 싫어했고, 오직 천신들이 가져다주는 신비롭고 고운 옷만 입고 살고 싶어 했습니다. 왜 그렇게 좋은 옷만 고집했을까요?
자기가 과거에 가장 좋은 옷을 아낌없이 보시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내면에 강한 자신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보시를 많이 했으니 나에게는 당연히 좋은 옷이 생길 것이다'라는 믿음이 무의식에 깔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라에서 최고로 귀한 옷을 준비해 주어도 "나 이 옷 입고는 부끄러워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겠다"라고 버텼고, 결국 천신이 내려와 옷을 입혀주어야 비로소 원하던 행차 자리에 가곤 했습니다.
이처럼 자기가 직접 쓰고 싶은 마음도 있고,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고 싶은 마음도 있는 법입니다. 이것을 무조건 세속적인 의미의 '욕심'이라고 단정 짓기보다는, 세상에는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을 위해서 쓰지도 못하고 썩혀두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점을 보아야 합니다.
내가 가진 좋은 것을 남에게 주지도 않고 나를 위해 쓰지도 못하는 상태는, 욕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지독하게 '인색'한 것입니다. 왜 이렇게 인색하게 굴게 될까요? 과거에 선업과 공덕을 지을 때, 진심으로 즐겁고 행복하게 좋아해서 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보시를 했기 때문에, 그 공덕의 결과가 현생에 나타나 부를 쥐게 되어도 스스로 즐겁게 쓰지 못하고 쩔쩔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결코 탐욕이 없는 훌륭한 상태가 아닙니다.
바라밀의 깊이와 정진의 차이
Q. 부처님께서는 전생에 서원(발원)을 하시기 전에도 이미 아라한이 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바라밀 공덕을 쌓아 놓으신 상태였다고 들었습니다. 서원을 세우고 난 후에 다시 처음부터 부처가 되기 위한 바라밀을 또 쌓아야 했다면, 서원을 세우기 전에 쌓아두었던 그 많은 바라밀은 부처님이 되는 과정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것인가요?
A. 보통의 수행자가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십바라밀 안에서 깊은 마음으로만 바라밀을 닦으시면 됩니다. 예를 들어 '보시바라밀'을 한다고 하면, 내가 가진 재산이나 재물만 기쁜 마음으로 보시하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수준을 뛰어넘어 완전히 구별되는 '최상의 바라밀'을 성취해야 합니다. 이 최상의 바라밀이란, 남을 위해 나의 피를 보시하고, 내 살을 베어주고, 내 눈을 빼어 보시하는 물리적이고 처절한 희생을 포함합니다. 이것도 모자라 나라를 통째로 버려야 할 때는 미련 없이 버리고, 다른 생명을 위해 내 목숨까지 내놓아야 할 때는 기꺼이 목숨을 버리는 수준까지 철저하게 보시를 행하는 것입니다.
'계율(지계바라밀)'을 지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적인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는 오계 팔계만 지키거나, 기쁜 마음으로 계율을 수호하면 됩니다. 하지만 부처가 되기 위한 보살의 지계는 다릅니다. 이 계율을 철저히 지키다가 몸에 큰 병이 생길 수도 있고, 눈이 멀어 시력을 상실할 수도 있습니다. 그 순간에도 보살은 "눈이 사라져도 괜찮다. 나는 눈을 잃을지언정 이 계율을 끝까지 지키고 살아가겠다"라고 다짐합니다. 누군가 칼을 들이밀며 목숨을 위협해도 "죽이려면 죽여라. 나는 죽을지언정 계율을 깨뜨리지 않겠다"라며 목숨을 걸고 계를 지킵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가 되기 위한 최상의 바라밀입니다. 차이를 이해하시겠습니까?
Q. 바라밀을 쌓는다는 것과 보살행을 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가요? 더 깊은 바라밀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보살행과 차이가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A. 십바라밀이라는 덕목의 틀 자체는 아라한이 되려는 수행자나 부처가 되려는 보살이나 똑같습니다. 다만 우리 보살이 이 바라밀을 최종적으로 성취할 때까지는 '지혜'를 완성해 나가는 정진의 깊이가 다릅니다.
보살들은 수행 과정에서 신통력까지 완벽하게 배우고, 삼장과 같은 최고 높은 수준의 지혜를 갖추며 정진하는 차이가 매우 큽니다.
아비담마의 물질(깔라빠)과 생명 기능
Q. 아비담마의 가르침을 보면 '생명 기능'이 같은 깔라빠(물질의 최소 단위) 안에 있는 다른 물질들을 지탱해 준다고 배웁니다. 생명 9원소 깔라빠 내에서 생명 기능이 다른 물질들을 지탱해 준다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 이 '생명 9원소 깔라빠'는 우리 몸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특별한 기능이나 역할을 수행하나요?
A. 생명 9원소 깔라빠는 쉽게 말해 업에서 생긴 물질입니다. 이 업에서 생긴 물질이 우리 몸속에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몸이 살아있는 동안 썩지 않고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 물질의 지탱이 없다면 우리 몸은 곧바로 썩어버릴 것입니다.
이 업생 물질의 힘 덕분에 우리 몸에서 땀도 나고, 정상적인 온도도 유지됩니다. 이 온도는 단순히 차갑고 뜨거운 물리적 온도가 아니라, 생명력을 가진 온도 원소로서 한정된 역할을 합니다. 우리 몸 안에서 음식을 소화해 주는 물질 등, 물질로서의 제 기능을 다하도록 돕는 바탕이 바로 이 업에서 생긴 물질입니다.
반면에, 우리 몸을 단순히 따뜻하게 데워주거나 소화를 직접 돕는 물질이 있는가 하면, 우리 몸을 계속 노화시키고 변하게 만들어 결국 죽음으로 이끄는 물질도 존재합니다. 이것은 '온도 생명 물질'입니다. 이 온도 생명 물질의 작용 때문에 어떤 인간이든 때가 되면 예외 없이 늙고 쇠약해지는 것입니다.
물질의 생명 기능 물질을 이렇게 정리하여 기억하시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이것을 현대 과학의 이론과 비교해 본다면,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물질들이 복합적으로 섞여서 상호작용하는 현상으로 풀어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Q. 그렇다면 다른 물질들도 오직 업에서 생긴 물질에 의해서만 지탱을 받는 것인가요? 온도나 마음, 혹은 음식에 의해 생겨난 물질들의 경우에는 그 원인이 되는 온도나 음식 자체가 스스로를 지탱하는 주체가 되는 것인가요?
A. 우리가 섭취한 음식에서 생긴 물질이 우리 몸 안에서 올바르게 유지되려면, '업(業)'이 생명력을 보호해 줄 때만 가능합니다.
똑같이 마음에서 생겨난 물질 역시 업이 있을때만 정상적으로 유지될 수 있습니다.
다만, 온도에서 생긴 물질은 스스로 새로운 세대의 물질들을 계속해서 파생시키고 연장해 나갈 수 있는 독특한 힘을 가집니다. 그러나 이 온도생 물질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세대의 재생산 과정이 완전히 멈추는 마지막 순간이 오면, 더 이상 물질은 새로 생겨나지 않고 소멸하게 됩니다.
Q. 물질 중에서 오직 '업에 의해 생긴 물질'만이 생명 기능을 통해 지탱된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온도나 음식으로 인해 생겨난 물질들을 유지하고 지탱하는 핵심 주체는 그냥 그 물질들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온도와 음식 그 자체라고 보아야 합니까?
A. 맞습니다. 그 물질들이 생겨난 직접적인 원인은 온도 그 자체입니다. 물질 내부에 깃들어 있는 온도 요소입니다. 그리고 생명 기능 물질은 궁극적으로 우리 마음의 '식(識, 의식)'의 영역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쉽게 바로 이야기하자면, 우리 몸에 업에 의해 생긴 물질의 근본적인 지탱이 없다면, 우리가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어도 음식에서 생기는 좋은 물질들이 결코 생겨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 마음의 작용으로 물질이 생겨날 때도 마음이 물질을 만들어내는 든든한 토대가 되어주는 업에서 생긴 물질이 없으면 마음물질이 생기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음식에서 생긴 물질은 음식대로, 온도로 인한 물질은 온도대로, 마음으로 인한 물질은 마음대로 각각의 원인에 의해 지탱된다고 아무리 제각각 이야기하더라도, 그 모든 물질들의 뿌리가 되는 '업에 의해 생긴 물질'이 우리 생명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합니다.
5. 인간의 수명과 법을 설하는 시기, 그리고 자비사의 힘 (질의응답)
인간의 수명과 법을 설하는 시기, 그리고 자비사의 힘
Q. 부처님께서는 항상 인간의 수명이 점점 줄어드는 시기에 세상에 출현하셔서 불법을 설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인간들이 삶의 본질이 괴로움 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으려면, 수명이 감소하며 고통이 눈앞에 보이는 시기에 법을 설해야만 비로소 납득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문득 궁금한 것은, 반대로 인간의 수명이 점점 늘어나는 시기에는 부처님이 출현하지 않으시고 법도 전해지지 않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이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스스로 선업을 많이 지어서 수명을 늘리는 방향으로 세상의 흐름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일까요?
A.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특별하게 우리가 닦는 위빳사나의 가장 가깝고도 강력한 원인은 바로 내면의 '절박함'입니다. 위빳사나를 가능하게 하는 가까운 원인이 무엇이라고요? 바로 절박한 마음입니다.
인간의 수명이 너무 길어서 수만 년을 사는 시기에는, 삶이 너무 풍요롭고 영원할 것 같아서 마음속에 생사윤회에 대한 절박함이 도무지 생겨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인간의 수명이 너무 짧아서 고작 10년, 20년밖에 살지 못하는 극한의 시기에는, 당장 살아남기 바빠서 마음속에 탐욕, 분노, 어리석음(탐진치) 같은 거친 불선법만 가득 생겨나기 때문에 역시 진정한 절박함이 자리 잡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부처님들께서는 중생들의 마음에 절박함이 가장 잘 일어날 수 있는 적절한 시기(인간의 수명이 100세 안팎으로 줄어드는 시기)를 선택하여 출현하시는 것입니다.
Q. 부처님께서 왜 수명이 줄어드는 시기에 출현하시는지 그 이유는 잘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제 질문의 요지는, 불법의 가르침이 세상에 전혀 설해지지 않은 시기(수명이 극도로 짧아진 암흑기 등)에, 인간들이 부처님의 법을 배우지도 않고 어떻게 스스로 선업을 대대적으로 지어서 수명을 다시 수만 년으로 늘리는 상승 곡선으로 돌아설 수 있었느냐는 원리입니다.
A. 그것은 불교라는 종교적 가르침이 없어도, 인간의 내면에는 본질적으로 '자비희사'의 성품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자비희사의 마음과 평화로운 상태를 싫어하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저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에게 직접 가서 물어보십시오. 그 사람도 속으로는 평화와 편안함을 원할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중생들이 탐진치에 눈이 멀어 서로 싸우고 전쟁을 벌이며 파멸의 길로 가다가도, 결국 그 끝에 마주하는 극심한 고통 때문에 '아, 이 길은 아니구나. 다른 방법이 없을까?' 하며 스스로 괴로워하고 뉘우치는 시점이 오게 됩니다.
지금 인류가 서로 총을 들고 싸우는 본질적인 이유도 결국은 역설적이게도 '내가 더 편안해지고 싶다'는 갈망 때문입니다. 비록 방법이 잘못되어 편안해지려고 노력할수록 결과는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극심한 괴로움만 쌓이지만, 고통이 극에 달하면 중생들은 본능적으로 생명을 존중하고 서로 자비를 베푸는 '자비희사' 외에는 이 지옥 같은 고통을 끝낼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진짜로 사람들이 자비희사 외에는 답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너도나도 자비희사의 선업을 쌓기 시작합니다.
다만, 그 과정에 이르기 전까지는 "이렇게 남을 짓밟으면 내가 더 편해질 거야, 저렇게 권력을 쥐면 더 행복해질 거야"라고 어리석게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탐진치로 행동하여 괴로움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불법이 없어도 극에 달한 고통을 통해 중생들이 스스로 자비라는 인류 보편의 선법을 회복하면서 수명이 다시 늘어나는 시기로 반등하게 되는 것입니다.
Q. 흔히 세상에서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무상(無常)'을 깊이 강조하셨는데, 혹시 부처님께서 음악이나 미술 같은 '예술'에 대해 직접 언급하시거나 관련된 가르침을 설하신 적이 경전에 존재합니까?
A. 부처님께서 출현하신 시기와 예술의 역사적 관계를 보면, 특별히 우리가 아는 현대적 의미의 예술을 장려하신 적은 없습니다. 다만 경전에 예술적 표현과 관련된 흥미로운 일화가 딱 하나 전해집니다.
부처님께서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인 반열반에 드시려고 할 때, 제자들이 슬퍼하며 부처님께 "부처님께서 떠나신 후, 저희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실 탑을 만들고자 합니다. 이 탑을 나중에 어떻게 만들어야 합니까?"라고 제작 방식에 대해 여쭈었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과거의 훌륭한 탑들의 예를 들어주시며 "탑을 조성할 때는 아주 아름답고 예쁘게, 천상의 전륜성왕의 궁전이나 제석천왕의 웅장한 궁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정성스럽고 아름답게 만들어도 좋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탑을 통해 중생들이 신심을 낼 수 있도록 예술적 아름다움을 허용하신 사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의무적으로 화려하게만 만들라고 강요하신 것은 아닙니다.
반면에, 수행자들의 계율적인 측면에서는 예술에 대해 엄격히 선을 그으신 부분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스님들이 경전이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읊조릴 때, 마치 세상의 유행가를 부르듯이 지나치게 감정을 섞어 노래하는조로 아름답게 부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을 듣는 사람이나 부르는 사람의 마음속에 감각적 욕망과 탐진치(탐욕·분노·어리석음)가 자기도 모르게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의 계율 안에서는 대중들 앞에서 노래하듯 법을 읊거나 세속적인 음악·춤 같은 예술 행위를 즐기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셨고, "그런 행동은 수행자로서 하지 마라"고 명확히 규정하셨습니다
질의 응답은 원문을 최대한 살려서 정리했습니다.
제미나이로 요약한 것입니다. 잘못기재된 것이 있으면 불편해하지 마시고 댓글로 부탁드립니다.붓다 사사낭 찌랑 띳따뚜!
첫댓글 사두.사두.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