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에 봉사하는 사제 양성 못자리로 우뚝 1962년 대건신학교로 출발한 광주가톨릭대(총장 노성기 신부)는 지난 50년간 사제 900여 명을 배출하며 한국교회 사제 못자리 역할에 충실해왔다. 또한 국내 유일의 관구신학교로서 광주관구 소속 광주대교구ㆍ전주교구ㆍ제주교구 신학생을 '진리에 봉사'하는 사목자로 길러내고 있다. 친교ㆍ소통ㆍ사회참여를 자랑하는 광주가톨릭대 50년 발자취를 짚어봤다. 학교는 7~9일 개교 50주년을 맞아 음악제와 미사, 학술대회 등 다양한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1957년 주한 교황대사로 임명된 람베르티니 신부는 당시 서울에 있는 신학대학만으로는 한국교회가 필요로 하는 성직자 수요를 맞추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광주교구장 하롤드 헨리 주교 역시 이에 공감하며 교구 대신학교 설립에 적극 나섰다. 헨리 주교는 1959년 교황청에서 신학대 설립 허가를 받은 뒤, 본당 신자들은 물론 미국 가톨릭교회와 교황청에 신학교 설립을 위한 지원을 호소하며 학교 부지와 건설 비용을 마련하는 데 힘썼다.
1962~1969년 미국 예수회가 운영
이후 광주가톨릭대는 1962년 광주시 쌍촌동에 대건신학교라는 이름으로 정부 인가를 받고 철학과 21명, 라틴어과 22명으로 문을 열었다. 초창기 학생들은 광주ㆍ전주ㆍ대구ㆍ부산ㆍ청주교구와 예수회ㆍ살레시오회ㆍ프란치스코회 소속이었다. 미국 예수회가 위탁 운영하던 광주가톨릭대는 1969년 관구 주교단이 학교 운영권을 이양 받았고, 같은 해에 신학교 출신 첫 사제(4명)를 배출했다. 1970년 제4대 학장으로 이경우(부산교구) 신부가 취임하면서 국내 사제들을 중심으로 한 교수진이 구성됐다. 이전까지는 외국 선교사 사제들이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1972년 까리따스 수녀회 수녀가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입학해 화제가 됐다. 1973년 대학원을 설립했고, 1980년에는 입학정원이 40명에서 70명으로 늘어났다. 1982년 대구대교구가 선목신학대학을 개교하면서 부산교구를 제외한 대구관구 소속 신학생이 대구 신학대로 옮겨갔다. 1991년에는 부산교구가 부산가톨릭대를 설립, 광주가톨릭대 지원자는 광주관구와 살레시오회, 예수고난회 소속으로 줄어들었다.
1970~80년대 사회참여 활동 활발
사회참여에 활발했던 학교는 1970~80년대 격변기에 불의와 독재에 침묵하지 않고 역사 현장에서 정의와 평화의 목소리를 높였다. 1973년 신학생들은 유신독재에 항거하며 정의구현을 위한 철야기도회를 가졌다. 민주화운동에 적극 동참했던 학교는 1987년 교수신부단이 성명 '현 시국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발표한 데 이어 신학생들도 '우리의 기도와 선언'을 발표하며 단식투쟁을 했다. 이 밖에도 야학 개설과 교도소 방문 등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위한 봉사에도 앞장섰다. 학교는 1994년 교육부 지침에 따라 교명을 광주가톨릭대학교로 변경했다. 초대 총장으로는 당시 학장이던 김민수 신부가 추대됐다. 1998년에는 광주시에 있던 학교를 전남 나주시 남평으로 옮겨 지금에 이르고 있다.
교수 신부와 신학생 생활공동체
2001년 한국사제양성지침에 따라 7년제 교과목으로 새롭게 개편한 광주가대는 2007년 자체적으로 '광주관구신학교 사제양성지침'을 제정, 사제양성 쇄신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광주관구신학교 사제양성지침은 교수 신부들이 2003년부터 3년간 머리를 맞댄 결과물이다. 신학교 설립 취지와 목적, 목표 등 사제양성의 근원을 돌아보며 사제양성과정을 재정비하고 영성 생활과 공동체 생활을 강화했다. 세계 최고 신학대로 꼽히는 프랑스 파리신학대학과 리옹 프라도신학대학을 벤치마킹해 한국교회 현실에 맞게 적용했다. 학교가 자랑하는 친교와 소통 역시 2007년을 기점으로 더욱 활발해졌다. 교수 1명과 신학생 6~7명으로 이뤄진 생활공동체 중심의 교육은 성소를 식별하고 영성을 강화하는 광주가대만의 독특한 학풍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 광주가대 재학생은 131명, 교수는 18명이다. 광주가대 출신 주교로는 우간다 주재 교황대사 장인남 대주교, 광주대교구장 김희중 대주교,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대주교를 비롯해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 마산교구장 안명옥 주교, 안동교구장 권혁주 주교, 부산교구장 황철수 주교 등이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