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변의 고향 1부 *
" 엄마~, 내일이 무슨 날인지 알아? "
" 뭔 날인데... "
" 내일이 엄마 생일이야. 엄마가 세상에 태어난 날이라구. "
" 내일이 며칠인데... "
" 음력 오월 스무 사흘 "
" 생일이면 닭이나 한 마리 잡아 줄세 말이지... ㅎㅎㅎ "
" 닭 잡아 놨어! 낮에 큰누나가 삼계탕 닭으로... "
" 어이구 고마워라~ "
" 엄마~ 생일인데 몸에 때를 씻어야지. 그래야 생일상을 받지. 때도 안 씻고 생일상을 어떻게 받아. "
" 에이~ 뭘~ 귀찮은데, 안 하면 어때... (잠시 망설이다) 할라면 하고... "
그렇게 시작된 대화로 엄니는 이내 옷을 벗고 욕실로 향하신다. 다행히 엄니가 쓰는 안방엔 욕실이 따로 있어 편리하다. 변기 뚜껑을 덮고 그 위에 앉은 엄닌 두루마리 휴지를 한 마디 뜯어 양쪽 귓구멍을 막은 뒤 목욕이 시작된다. 먼저 미지근한 물로 하반신을 적응시킨 뒤 차츰 물 온도를 높여 가슴으로 올라오며 물을 뿌린 뒤 욕실 온도가 따라 오르면 머리를 감겨드린다. 노인들은 뜨거운 물에 갑자기 노출되면 혈관이 팽창해 몸은 온도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혈압이 급격히 낮아져 어지러움을 호소하거나 뇌로 흘러가는 혈류량을 늘리려고 심장은 더 빠르게 박동수를 늘리기 때문에 자칫 심장에 부담을 주거나 뇌혈관에 지나친 압력이 가해질 수도 있어 아주 조심스럽다.
다시 물 온도를 미지근하게 맞추고 엄니 머리를 일차 충분히 씻어냈다. 땀에서 분비한 염분을 씻어내야 비누 거품이 잘 일기 때문이다. 고작 일주일에 한두 번, 땀이 많이 나는 여름에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 가볍게 씻겨드리면 잠을 잘 들이신다. 샴푸는 세정력이 강해 오늘도 비누로 거품을 낸 뒤 두피 마사지하듯 손끝으로 가볍게 문지르고 미온수로 씻어 내리는데...
" 야야! 귀에 물 들어간다. 살살 잘해. 귀에 물이 들어가면 귀가 곪느라고 쑤시고... "
" 아이구~ 걱정도 팔자여~. 물 안 들어가게 잘하고 있응게 걱정을 붙들어 매시오, 잉~! 맨날 목욕할 때마다 엄살이야. ㅎㅎㅎ "
엄닌 머리를 감을 때마다 귓구멍에 물 들어간다고 늘 경고성 엄살을 피운다. 오늘은 비누에 더해 특별히 지인이 선물로 준 이탈리안 고급 샴푸로 두피 마사지를 한 뒤 물을 뿌려 막 끝내려는데, 엄닌 머리카락을 만져 보시더니 왠지 느낌이 만족스럽지 않은지
" 한 번 더 감아야지. 머리가 뻣뻣한데... "
" 아이구~ 귀에 물 들어간다고 잔소리하면서 뭘 더 하라고 난리여~. 알았슈! "
오늘은 특별서비스를 해 드림에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한 번 더 감으라고 하신다. 엄닌 뇌출혈로 쓰러지신 뒤 어린아이가 다 되셨다. 고집을 피우며 떼쓰기 시작하면 달랠 방법이 없다. 할 수 없이 이번에는 화장품 전문회사에서 나온 HERA ZEAL 비누로 가볍게 씻어냈다. 비누 향이 얼마나 향긋한지 머리를 감겨드릴 때마다 꼭 마무리용으로 사용하는데, 엄닌 이미 생략한 과정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제야 흡족해하신다. ㅎㅎ
마른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대충 닦아드리곤 이번에는 몸을 씻겨드리는 과정이다. 머리를 감겨드릴 때보단 좀 더 따스한 물을 온몸에 뿌려 땀을 씻어낸 다음 엄니가 손수 만든 부드러운 목욕 수건에 비누 거품을 내어 등허리부터 엉덩이 부위까지 둥글게 원을 그리며 비누칠하자...
" 아이구 시원~하다. 끈끈하고 가렵더니, 누가 이렇게 해줘. 내 새끼니 해 주지. "
" 엄마, 앞가슴 씻어야지. 아직 쭈쭈가 탱탱하네. ㅎㅎㅎ "
" 그러게 말이다. 너희들 클 때는 먹을 게 없어 젖도 마음대로 못 줬는데.
여기 물 좀 더 뿌려. 비누칠도 한 번 더 하고. 여기, 여기도... "
" 아따~ 오늘은 생신을 맞이하는 목욕이라 잔소리가 심하시네 ㅎㅎㅎ "
엄니의 축 늘어진 젖무덤을 들어 올려 앞가슴에 마사지하듯이 비누칠하고 물로 씻어내자, 엄닌 연신 주문이 이어진다. 이어 허벅지와 장딴지를 거쳐 하반신을 비누칠하자, 엄니는 체모가 듬성듬성 남은 아랫배를 손으로 툭툭 치더니 검지를 펼쳐 가리키며...
" 이게 뭐야, 애들한테 고향을 다 보이고. 여기가 네 고향이야! "
"ㅎㅎㅎ 엄마 내 고향이 거기야? 어디 고향이 잘 있나 볼까~ ㅎㅎㅎ"
" 열 달 동안 에미가 너를 차(달)고 다녔으니 고향이지.ㅎㅎㅎ "
엄닌 특유의 메타포(metaphor)를 터트린다. 한마디로 문학의 정수( 精髓)인 시문학적 표현으로서 그것도 고급 은유(隱喩)에 속하니 가히 시를 쓰면서 다룰 수 있는 멘트다. 세상에 어느 시인이 잉태한 씨앗이 자라는 자궁으로 향하는 그 신비의 길을 가리키며 '고향'이라는 상상력을 끌어낼 수 있을까.
엄닌 처음엔 부끄러운지 아래 속옷을 입고 목욕하셨다. 아무리 허물없는 어미와 자식 사이라도 아들에게 알몸을 내보이는 것이 못내 쑥스러우셨나 보다. 벌써 십수 년 전 일이다. 혼자 목욕하는 엄니가 힘들어하실 것 같아 용기 내어 몸을 씻겨드리는데, 처음엔 속옷을 입고 목욕하며 내심 불편하셨던지 어느 날 편하게 옷을 모두 벗으라고 하자, 그때부터 아래 속옷도 벗으셨다. 그땐 주로 거실에 달린 욕실에서 씻어드렸는데, 불행하게도 목욕하시다가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불편한 몸이 되어 좀 더 세심하게 살펴서 씻어드리지 못한 죄스러움에 늘 마음이 무겁고 안쓰러운 마음이다.
엄니가 아랫배 산도(産道) 부위를 가리키며 그곳이 내 고향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정규학교에서 국어교육도 받지 않은 엄니의 탁월한 언어 감각에 감탄하여 손뼉을 치며 웃고 말았다. 밤이면 마을 어른들을 모아 놓고 우리 큰형이 가르치는 농한기 야학 문해교실에서 겨우 초등학교 1. 2학년 수준의 한글 공부를 하셨다던 엄니가 어떻게 시적인 은유(metaphor)로 자궁으로 향하는 산도 부위를 '고향'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맞다! 그곳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기까지 어미가 베풀어 준 가장 아늑한 궁전이자, 인류가 지구촌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수만 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불변의 진리가 살아 숨 쉬는 성스러운 곳이다. 엄니의 자궁(子宮)과 산도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눈을 감아 한 줌 재로 돌아가는 그날까지 영원히 변하지 않을 '불변의 고향'이다.
다시 엄니 온몸에 따스한 물을 뿌려드리며 때를 밀자, 그동안 땀만 씻어드린 탓인지 때가 제법 밀린다.
" 엄마, 등허리에 때 좀 봐. 때가 많이 나오네. 아휴~ 국수 공장 사장님이 보면 놀라겠다.ㅎㅎㅎ "
" 그러게. 맨날 물칠만 하니 때가 많겠지. "
" 엄마 난 이다음에 누가 등을 밀어주나. 때 밀어줄 사람도 없고. "
" 그러게 지금이라도 하나 구해. 엄마 죽고 나면 어쩌려고 그래. "
" 엄마 딱 하나만 구하라고? 기왕에 구하는 거 몇 개 구해서 이 방 저 방 하나씩 주고 다 먹여 살릴까? ㅎㅎㅎ "
" 재주 있음 그러던지... ㅎㅎㅎ "
등을 지나 옆구리 안쪽을 거쳐 축 처진 젖가슴 아래 쭈글쭈글한 뱃살에 손이 닿자, 이곳이 그 옛날 내가 열 달 동안 몸담았던 고향이었다. 가난했던 시절이었기에 산모식은커녕 끼니조차 잇기 어려우니 젖이 풍족히 나오지 않아 어미로서 죄스러웠다던 어머니. 그런 어려운 시절에도 엄니의 자궁은 깨알 같은 소중한 생명체를 잉태하여 하늘이 주신 선물이라며 40대 늦둥이로 막내인 나를 낳으셨다. 엄니의 자궁은 산부인과라는 진료과목도 생소했던 첩첩 산골에서 자나 깨나 천지신명께 기도하며 어미의 본능만으로 생명체를 건강하게 키워낸 보배였다. 세상에 이토록 아름답고 거룩한 성지(聖地)가 또 있을까. 그저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만 있다면 더는 바랄 것이 없었다, 는 어미의 간절한 바람은 올곧은 마음으로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어질게 살아내는 일이 어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고. 행여 어미의 부덕( 婦德)으로 업(業)을 받은 아이를 낳을까 봐 늘 노심초사 몸가짐 마음가짐을 조심하셨다는 울 엄니. 그런 어미의 은덕(恩德)으로 건강하게 세상에 태어났기에 나는 늘 엄니에게 '나를 건강하게 낳아 주셔서 감사해요'라고 깊은 은혜의 속마음을 보낸다. 세상에 건강하게 태어나는 것만큼 삶(生)의 축복이 또 있을까. 목욕하시면서 "이곳이 네 고향이야." 하시는 엄니의 시문학적인 표현에 내가 세상에 태어난 그간의 과정이 한 편의 드라마같이 다가온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생명의 씨앗이 엄니의 자궁 속에서 열 달 동안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오로지 어미의 본능에 따라 보호 받으며 탯줄을 끊고, 젖을 먹고, 걸음마를 배우며 이젠 독립된 인격체로 성장했음에도 왠지 어린 시절 주고받았던 어미와 자식 간의 끈끈한 핏줄(유대감)을 한층 더 실감하며 무한 고마움과 사랑을 느낀다._()_
2012.07.11(음 5월22일) 밤 목 흐림 빗방울, 밤에 장맛비 내림
울 엄니 생일 전야에...
※ 불변의 고향 2부로 이어집니다.=> *불변의 고향 2부 - Daum 카페
첫댓글 안방 욕실 앞에서 물걸레로 닦아도 된다,며 작은누나가 갖다 준 울 엄니 전용 소파에 앉아 손거울에 여자의 본능을 채우는 울 엄니. 머리를 빗어 넘기다 가르마 위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막내, 네가 좀 타보렴"하며 빗을 건네주기도 한다. 이날 6장의 사진을 담았는데, 엄니가 하늘로 떠난 뒤에 보니 92세의 연세에 요즘 유행인 바디프로필에 버금가는 기념비적인 사진이 되었다. 늦둥이 막내로 태어나 남들처럼 평범한 모습도 보이지 못한 채 미완으로 남아 어미의 애를 말리며 죄(마음의 짐을 안김)를 지은 것 같아 지난 사진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리다. 엄니,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나면 그때도 자연이 숨 쉬는 산골에서 우리 육 남매 그대로 살아요. 기왕이면 저 멀리 알프스 산맥이 자리한 산골 마을에서 살아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하늘에서 아버지와 재밌게 이야기 나누시며 기다려주세요. 우리 꼭 다시 만나요._()_ (엄니 사진 아래 댓글 옮김)=혹시 이미지 자료 날아갈까 싶어...(25.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