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42uCwQYOwws
1차 【 『금강경』이 왜 조계종 소의경전이 되었는가?! 】
1. 『금강경』은 어떤 경전인가?
기원전 1세기 전후 보살사상이 대두되면서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났다. 대승불교가 발생한 이후 경전이 결집되었는데, 처음으로 반야부 경전이 결집된다. 『금강경』은 대반야부 경전 600권 분량 중 577권에 해당한다.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 3세기 사이에 이루어진 경전으로 사위성 기수급고독원에서 부처님과 해공解空 제일인 수보리 존자의 문답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금강반야바라밀다경』은
범어 『바즈라체디카 프라즈냐파라미타 수트라(Vajracchedikā prajñā-pāramitā sūtra)』
바즈라체디카[金剛石, Vajracchedika]는 가장 견고하며, 어떠한 번뇌일지라도 깨뜨릴 수 있는 지혜를 상징.
프라즈냐[[般若 prajnā]는 깨달음의 지혜.
파라미타[波羅蜜, pāramitā]는 ‘저 언덕에 이른다[到彼岸]’는 뜻으로 지혜의 완성.
수트라[sūtra]는 경전.
따라서 『금강반야바라밀다경』은 ‘다이아몬드처럼 견고하며 빛나는 깨달음의 지혜로서 번뇌와 고통이 사라져 평화와 행복만이 있는 저 언덕에 도달하게 해줌’을 설하는 경전이다.
2. 『금강경』의 전체 주제
『금강경』의 전체 구성은 보리심을 발한 보살의 대승적 실천행을 골자로 한다.
그 방법에는 중생을 제도하려는 발원이 담겨 있으며,
작불作佛의 서원을 세우고, 6바라밀 실천 등이다.
또한 부처로부터 부처가 될 것이라는 예언[授記]을 받는 대승 사상이 등장한다.
실천 체계이자,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하는 무주심無住心ㆍ청정심淸淨心을 중시한다.
3. 『금강경』 역경자인 구마라집
❶ 구마라집 행적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은 귀자국龜玆國 사람이다[현재는 귀자국이 중국 땅에 편입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중국 땅에 영입되지 않았음]. 아버지는 인도 바라문 종족이며, 어머니는 귀자국 왕의 딸이다.
구마라집은 귀자국에서 출생하였고, 라집이 어렸을 때, 어머니를 따라 7세에 출가하였다. 라집은 10대 타림분지와 파미르고원을둘러싼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불학을 배워 초기불교 및 대승불교 경전에 해박해 인도 및 서역에 명성이 자자했다.
그런데 남북조 시대 때,도안스님이 전진왕前秦王 부견에게 구마라집을 추천함으로서 라집이 중국으로 오게 된다. 이 도안(道安, 312∼385)과 혜원(慧遠, 334∼416)에 의해 중국불교의 기초가 이루어졌다. 라집이 중국으로 오게 된 사연을 소개한다.
전진 부견왕의 명령으로 라집을 데리러 갔던 신하 여광呂光이 라집을 데리고 오는 중에 전진이 망하고, 부견이 죽었다는 전갈을 받았다. 여광은 감숙성甘肅省양주凉州[현 武威]에다 후량국後凉國을 세우고 황제를 자칭하며 라집을 17년간 유폐하였다. 후에 후진後秦의 요흥姚興 왕이 후량국을 쳐서 401년 구마라집을 장안長安[현 西安]으로 모시고 와 국사로 책봉하였다. 이때부터 라집은 소요원逍遙園에 머물면서 경전을 역경하였다. 제자에는 3천여 명의 제자가 있는데, 대표제자는 四哲은 도생道生ㆍ도융道融ㆍ승조僧肇ㆍ승예僧叡이다. 역경은 『개원석교록』에 따르면, 74부 384권 번역하였다.
❷라집의 업적
중국에서 번역된 경전은 현장玄奘(602∼664)법사를 기준으로 구역과 신역으로 나뉜다. 즉 현장 이전의 대표적인 번역가인 구마라집은 구역舊譯에 해당되고, 현장 이후의 경전을 신역新譯이라고 한다. 구마라집은 서역 사람이고 현장은 중국인인데, 현재 유통되고 있는 대승불교 경전은 대부분이 구마라집본이다. 학자들의 보편적인 설에 의하면, 불교가 중국에 유입된 이래 도교적인 성향에 비추어 한역되었는데, 구마라집 이후 격의불교가 사라졌다고 본다. 또한 다른 역경자들 번역보다 라집의 문장이 문장상 매끄럽고, 번역이 훨씬 뛰어나다.
구마라집은 범어본에 없는 것을 의역했다. 즉, 극락極樂[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ㆍ지옥ㆍ공명조共命鳥ㆍ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ㆍ번뇌즉도량煩惱是道場ㆍ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ㆍ제법실상諸法實相 등이다.
『금강경』과 관련해서 보자. 10품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을 삽입하였다. 또한 『금강경』 범어본에는 “應云何住 云何修行 云何攝伏其心” 3가지 질문인데, 구마라집은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 2가지 질문으로 의역하였다.
구마라집은 입적에 앞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번역하여 전한 경전은 모두 충실하다. 여러분과 함께 번역한 경전이 후세까지 널리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전해져 읽히길 바랄 뿐이다. 지금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고하노니 만일 나의 번역에 오류가 없다면 내 시신을 화장한 뒤에도 혀가 타지 않을 것이다.” - <고승전>
다비식 때 장작이 다 타고 시신이 형체를 잃었지만 오직 그의 혀만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4. 『금강경』 32품과 소명태자
구마라집 역의 『금강경』이 32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원래 이 경전은 이런 나눔이 없었다. 양나라 무제[502∼549 재위] 아들인 소명태자[昭明太子, 501∼531]가 32분으로 나눈 뒤 각 분과마다 분목分目[제목]을 붙인 것이다. 중국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연구하는 필독서가 『소명문선昭明文選』인데, 이 또한 소명태자가 편집한 것이다. 소명태자의 지적 능력을 엿볼 수 있다.
『전등록』 기록에 의하면, “보리 달마가 열반에 든 뒤에 하남성河南省 웅이산熊耳山에서 장사를 지냈으며 양무제 아들 소명태자가 제문을 지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5. 『금강경』이 왜 선종의 소의경전이 되었는가?
67년 중국에 불교가 유입된 이래 당나라 중기까지 여러 종파가 발달했다. 이 가운데 선종은 처음 소의경전이 『능가경』이었으나 6조 혜능[六祖慧能, 638∼713] 이후부터 『금강경』으로 소의경전이 바뀌었다.
‘조계종’은 여러 종파 가운데 선禪을 표방하는 종파이다. 선종은 달마가 520년에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면서부터 종파로서 성립되었다. 선종의 초조初祖인 달마로부터 시작되어 2조 혜가 이후 법맥이 6조 혜능까지 전승된다. 우리나라 조계종은 6조 혜능의 법손인 제자들로부터 나말여초에 법맥을 받아왔으며, 현 즉금에 이르고 있다. 또한 ‘대한불교조계종’ 할 때, 조계종이라는 명칭은 6조 혜능이 광동성 조계산曹溪山에 상주했던 산 이름을 그대로 딴 것이다.
『육조단경』에 의하면, 혜능이 태어난 곳은 옛날부터 유배지로 유명한 영남 신주 사람이다. 오랑캐 땅이라 불리는 고장에서 태어난 혜능은 속성이 ‘노盧’씨로서 권세 있는 집안의 후예라고 한다. 그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나무를 해서 파는 나무꾼이었다. 어느 날 그가 나무를 해 집으로 돌아가는 중 잠깐 쉬어가기 위해 주막집에 들어갔다가, 방에서 한 승려의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 승려가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이라는 구절을 읽었는데, 그 소리를 듣고 출가를 결심한다. 마침내 혜능은 호북성 기주 쌍봉산에 주석하고 있는 5조 홍인에게 출가하였다. 훗날, 스승 5조 홍인이 혜능에게 『금강경』을 설해주었는데, 이때도 혜능이 ‘응무소주 이생기심’ 구절 끝에 깨달았다고 한다. 이런 데서 연유해 『금강경』을 조계종의 소의경전으로 하기 시작했다.
당나라 말기 안사의 난(755년) 이후부터는 선과 정토종만이 번성했고, 기타 교종은 거의 사장死藏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연히 선과 정토 관련 경전이나 실천법이 유통되고, 발전되었다. 선종이 발달하면서 당연히 소의경전 『금강경』 또한 함께 발전하였다.
6. 한국불교와 『금강경』
조계종[=선종]은 우리나라 불교 종단 가운데 장자 격에 해당하는데,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한다. 종헌종법 제 3조“본종本宗의 소의경전은 금강경과 전등법어傳燈法語로 한다.”
이 경전은 우리나라 삼국시대 때 유입되었고, 고려 중기 보조 지눌[(普照知訥, 1158∼1210년] 국사에 의해 유통되기 시작했다.
「보조비」에도 이런 언급이 있다.
“송지頌持를 권함에는 『금강경』으로 하고, 입법연의立法演義로 『육조단경』을 본의本意로 하며, 이통현의 『화엄론』과 대혜의 『대혜어록』을 양 날개로 삼았다.”
첫댓글 佛法僧 三寶님께 歸依합니다.
거룩하시고 慈悲하신 부처님의 加被와 慈悲光明이 비춰주시길 至極한 마음으로 祈禱드립니다. 感謝합니다.
成佛하십시요.
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