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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어느 날 밤 12시경 대전역 플랫폼.
신세기레코드사(사장 : 강윤수) 사업부 직원이었던 최치수는 지방 레코드 도매상으로부터 수금을 하기 위해 출장길에 나서 수원 천안 등지를 거쳐 경부선 야간열차 편으로 막 대전에 도착했다.
피곤한 몸으로 개찰구로 향하던 최치수의 눈에 들어온 광경, 그것은 젊은 남녀 한 쌍이 못내 헤어지기 아쉬워 두 손을 꼭 잡고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장면이었다.
이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최치수는 피곤함도 잊고 갈 곳 마저 잃은 사람처럼 그냥 플랫폼 나무 벤치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는 그들을 보며 이런 저런 사색에 잠겼다.

그러기를 40여분….
상행 방향에서 밤의 정적을 깨며 기적소리도 요란히 기차 한 대가 힘겹게 플랫폼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 기차가 청춘남녀의 사이를 갈라놓을 바로 그 목포행 대전발 0시50분 완행열차였다.
곧 바로 열차가 도착하고 더더욱 이별의 서러움에 몸부림치는 남녀! 최치수는 남의 일이지만 내 일처럼 같이 마음 아파하고 뭉클한 가슴으로 눈시울도 뜨거워졌다.
0시 50분, 무정한 열차는 두 사람의 아픔을 아랑곳 하지 않고 대전역 뒤로 하고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를 끝까지 지켜본 최치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역을 떠나 여관방 잠자리에 들었으나 쉽게 잠이 오지 않고 아까 본 이별 장면만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끝내 잠을 설친 최치수는 그 정경을 엮어 한 편의 가사를 썼다. 이것이 <대전 부르스>의 초고였고 이때는 미처 제목도 정하지 못한 채였다.

출장 일정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최치수는 이 가사를 전속 작곡가 김부해에게 보였고, 김부해는 이곡의 리듬을 블루스로 정한 뒤 가사를 손질하고 3시간여 만에 곡을 완성했다. 그리고 제목도 <대전 부르스>로 정했다.
가수는 브루스를 잘 부르는 안정애로 정했다.
안정애는 이미 <황혼의 부르스>(고명기 작사 / 김부해 작곡)를 비롯해 <밤비의 부르스>(김부해 / 김부해 / 57년) <여인 부르스>(이성우 / 이성우 / 58년)를 취입해 브루스를 잘 소화시키는 가수로 정평이 나있는 터였다. 이어서 <순정의 부르스>(김성운 / 이재현 / 59년) <미련의 부르스>(김성운 / 이재현 / 60년) <서울의 부르스>(이재현 / 이재현 / 60년) <호남선 부르스>(반야월 / 김부해 / 64년) 등으로 브루스 제목이 붙은 노래를 많이 취입했다.

<대전 부르스>는 출반 3일 만에 서울과 지방의 도매상으로부터 주문이 쇄도했다. 회사는 야간작업까지 강행했지만 주문량을 맞춰 주기 힘들었다. 레코드 회사 창사 이래 가장 많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20여 년이 흐른 뒤인 1980년대에 조용필의 리바이벌로 세상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일까? 80년대 이후에 처음으로 <대전 부르스>를 듣게 되었던 사람들 대부분은 이 노래를 조용필이 부른 노래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노래의 리바이벌은 국내 가수들 뿐 아니라, 일본어로 번안되어 미즈모리 카오리(水森かおり), 아오에 미나(靑江三奈) 등 일본 엔카 가수들이 앞을 다투어 취입하기도 했다.
모임이 있을 때 술이 몇 순배 돌아가면 누군가 좌중을 헤치고 비척 비척 일어나 소주병이나 막걸리병을 입에 대고, 또는 노래방에서 목청껏 부르는 노래가 <대전 부르스>다.
이 노래는 만남과 이별, 귀향과 가출, 생성과 소멸의 상반된 이미지를 내포한 역(驛)을 내세워 5,60년대 어려웠던 소시민의 애환을 잘 나타내고 있다.
기다렸던 아니면 오지 말았어야 할 마지막 열차가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오는 역의 실루엣은 많은 작가들의 단골 소재이기도 했다.
1959년 2월 제33열차로 탄생한 이 기차는 밤 8시45분에 서울을 출발 대전역에 0시40분에 도착. 다시 목포를 향해 0시50분에 출발했다.
지금은 서대전역을 통해 호남선이 다니지만 당시에는 대전역을 거쳐 갔다.
그래서 이 열차를 주로 이용한 사람들은 대전역 인근 시장에서 광주리 물건을 팔던 농사꾼이거나 술에 얼큰히 취해 막차를 기다리던 지방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눈물에 젖게 하던 대전발 0시50분 열차가 없다.
1년만인 1960년 2월 대전발 3시5분발 차로 시간이 변경되면서 짧은 수명을 다했다.
이후 아세아레코드사를 설립하여 사장까지 올랐던 최치수와 작곡을 업으로 삼던 김부해는 이승을 버렸다.
반면 안정애는 지금도 무대에 서면 어김없이 이 노래를 부른다.
또한 이 노래 <대전 부르스>는 대전역에 노래비로, 대전도시철도가 운영하는 1호선 전철이 대전지하철역에 도착할 때면 경음악으로 들려주어 언제나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곁들여 남기고 싶은 말은 노래비에 관한 것이다.
1999년 9월 18일에 세워진 노래비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작사 작곡가의 표기는 있으나 가수의 이름은 없다.
듣기로는, 추진위에서는 응당 처음으로 부른 안정애의 이름만을 새겨 넣으려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에겐 가수로서의 영예며 자자손손에 이어 자신의 이름을 빛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안정애의 거부로 가수의 이름이 없는 상태로 제막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노래비를 건립하면서 추진위 측에서 안정애의 이름만을 새겨 넣는다고 하였을 때 그녀는 후배가수 조용필 때문에 다시 알려지게 된 노래니 조용필의 이름과 함께 새겨 넣을 것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리바이벌과 리메이크가 있을 수 있는 가요계에서 그때마다 가수의 이름을 새겨 넣게 되면 노래비의 의미가 퇴색될 뿐 아니라 원칙 또한 모호해 지니 노래비를 건립하면서 최초의 가수 이름을 넣는 건 당연한 일이다.
조용필과 함께 넣을 수 없을 바에는 차라리 자신의 이름도 넣지 말라는 안정애의 단호한 뜻이 있어 지금껏 이름을 새겨 넣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름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남긴 가수 안정애.
자신이 불렀던 노래를 다시 불러 크게 히트시킨 후배의 공을 고스란히 지켜주고 싶은 숭고한 마음, 남의 공에 편승하지 않으려는 떳떳한 기개가 돋보인다.
가수 안정애가 남의 공도 자신의 공으로 돌리려고 하는 말법의 시대에 던지는 묵언의 항변이며 무서운 채찍이라 생각된다.
자신이 불렀을 때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대전 부르스>를 알게 한 후배가수의 공덕을 외면하지 않으려 자신의 명성조차도 기꺼이 포기한 떳떳한 자기 주장이기에 이것이야말로 노래비 자체보다 얼마나 인간적이고 가슴 뭉클하게 하는 이야기인가!
이 노래비 앞면에는 ‘대전사랑 추억의 노래비’라 했고 뒷면에 가사를 새겨 처음에는 대전역사 정문 앞에 세웠으나 지하철 공사가 시작되고 역사 확장 과정에서 광장 동측으로 옮겨졌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떠나가는 새벽열차 대전발 영시 오십분
세상은 잠이 들어 고요한 이 밤
나만이 소리치며 울 줄이야
아 ㅡ 붙잡아도 뿌리치는 목포행 완행열차
기적소리 슬피 우는 눈물의 플랫트홈
무정하게 떠나가는 대전발 영시 오십분
영원히 변치말자 맹세했건만
눈물로 헤어지는 쓰라린 심정
아 ㅡ 보슬비에 젖어가는 목포행 완행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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