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2시간 강의를 하려고 왕복 10시간 이상을 거리에서 보내는 날이면 마중 나온 분들이 내게 하는 인사다. “나라도 크지 않은데… 그리 먼 길도 아니고 즐겁게 온 걸요” 이렇게 답하면, “듣고 보니 그렇긴 하네요”라며 상대방도 공명의 파장을 전해준다. 1980년대 말 이후, 북한을 제외한 세계여행 자유화가 가능해지면서, 분단된 한반도를 벗어나 광활한 대륙 중국을 비롯해 이웃 마을 가듯 국경을 넘나드는 유럽 대륙 여행도 가능한 시대를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꿈꾸는 ‘길 위의 여정’
지난 6월, 의성도서관과 하동도서관을 다녀온 날들도 ‘길 위의 날’들이었다. 국가 경제력에 비해 떨어지는 삶의 질을 높이는 평생교육을 내건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 그 파장을 타고 평생 처음으로 가보는 산속 마을 도서관, 정겹게 맞아주시는 지역 분들과 영화로 나누는 인문학 공부길이 이젠 내겐 ‘길 위의 여정’ 즐기기로 변모하는 중이다.
오가는 여정, 기차나 고속버스 안에서 멍 때리며 바깥 풍경 감상하기, 강의 내용 떠올리며 어떻게 재미있게 꾸려갈까 궁리해보기, 그러다 지치면 눈감고 휴식의 즐거움에 젖어 들기, 그러노라면 절로 그려지는 ‘로드 무비’ 영화들, 곧 ‘길 위의 인문학’이 ‘길 위의 영화’ 코드로 연결된다.
이를테면 〈델마와 루이스〉(Thelma & Louise, 1991, 리들리 스콧)의 몇몇 이미지들이 번쩍 떠오른다. 오랜만에 같이 여행을 떠나는 델마(지나 데이비스)와 루이스(수잔 서랜든), 이 두 여성이 오픈카를 타고 머플러 날리며 기념사진을 찍는 장면은 쾌활함 자체로 빛난다. 반복적 일상으로부터의 탈주, 자유롭게 살아보기, 거기서 느끼는 해방감 …, 그래서 사람들이 휴가 여행길을 꿈꾼다. '로드 무비'란 장르가 인기 있는 이유도 그 점을 활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주로 남성 짝패나 ‘두 남성과 한 여성’이라는 삼인조 관습을 깨고 등장한 〈델마와 루이스〉는 희귀한 여성 로드 무비의 상징적 작품이기도 하다. 남편 허락을 받기 힘들어 여행을 떠나고파도 못 떠난다는 델마에게 루이스는 “네가 어린애냐?”라며 일갈을 날린다. 거기에 자극받은 델마는 남편 허락 없이 여행길을 떠난다. 당당하고 능동적인 루이스와 늘 강자에게 기대고 살아온 델마의 동행에 성추행 사건이 끼어들면서 계획된 여정은 급변한다. 여독을 풀러 잠시 들린 술집 주차장에서 한 남자가 델마에게 벌인 성희롱이 총격사건으로 터져버렸기 때문이다. 탈주행으로 바뀐 이 여정에서 델마는 이렇게 고백한다. “난 너와 이렇게 같이 할 때 기분이 최고야. 이제 내 길을 가는 거야”, 라고. 이 대목은 길 위의 변화에 주목하는 로드 무비의 클라이막스를 보여준다. 로드 무비의 매혹은 길 위에서 벌어지는 인물의 변화과정인데, 그것은 ‘영웅되기’ 과정인 신화적 여정으로부터 내려온 고대적 의식이기도 하다.
여름철 화제를 모으는 ‘길 위의 영화’들
최근 화제를 모으며 여름맞이처럼 연이어 개봉되는 다큐멘터리들은 주로 '로드 다큐'로 공명의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고양이가 귀신의 형태로 둔갑하는 공포영화사를 가진 한국에선 길냥이가 죽어 나간다. 그러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2017, 조은성)는 고양이와 인간의 평화공존을 위해 한국-대만-일본을 오가는 로드 다큐로 대안적 삶을 보여준다.
대한민국 서울, 천만 인구가 사는 대도시에는 다양한 생명체들이 공존하고 있다. 그중 20만 이상으로 추정되는 ‘길냥이’들은 인간을 피해 숨어 지낸다. 그러나 같은 동아시아 지역인 대만의 ‘허우통’은 연간 50만 여행객이 찾는 길냥이 마을로 유명하다. 길냥이 사진찍기에 매혹된 한 여성 작가의 기지로, 폐광촌으로 몰락해가는 마을에 이런 대안적 변신이 이루어진 것이다. 다른 한쪽엔, 세계 6대 고양이 마을로 꼽히는 일본의 '아이노시마'도 있다. 거주민보다 많은 숫자의 고양이가 사는 이 작은 섬에도 평화로운 일상을 즐기는 고양이를 보러 오는 여행객의 발길이 이어진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는 구텐베르크보다 먼저 나온 ‘직지’라는 심증을 갖고 유럽 5개국 7개 도시를 누비는 추적 여정의 〈직지코드〉(2017, 우광훈, 데이빗 레드먼)도 세계의 길로 나가는 '로드 다큐'이다. 아픈 역사의 파고를 진혼무로 풀어내며 시베리아 대륙을 횡단하는 〈바람의 춤꾼〉(2017, 최상진)도 '로드 댄스 다큐'이다. 이렇듯 길 위의 여정은 뜨거운 태양 빛조차 즐겨야 하는 여름살이 여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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