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저금통
임병식 rbs1144@daum.net
얼마 전에 세상을 뜬 아내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서랍장에서 저금통을 발견했다. 플라스틱 돼지저금통을 반쯤 잘라낸 용기이다. 이것은 중풍으로 쓰러진 아내가 몸이 자유롭지 못한 것을 감안하여 쉽게 꺼내도록 한 것이다. 아내는 그동안 몸을 쓰지 못하고 심각하게 언어장애를 겪고 있었지만 인지기능은 어느 정도 작동하여 용돈관리를 해왔다.
거기에는 내가 매월 조금씩 용돈을 넣어주고 명절 때나 평일에 한 번씩 내려오는 두 아들이 먹고 싶은 걸 사드시라고 넣어둔 현찰이 들어 있다. 아내는 재택병상생활을 하면서 그 돈으로 요양보호사를 시켜 간식을 사먹거나 목욕 후 수고비로 얼마간의 돈을 건넨다.
간식은 주로 입맛이 없을 때 팥죽이나 피자, 아귀찜을 시켜먹었다. 그렇다고 매일 주문을 하는 건 아니고 늘 잔고를 신경 쓰며 어느 정도 여윳돈이 있다 싶으면 다소 값이 나가는 통닭이나 돼지족발을 시켜먹고 더러는 나의 내의도 사주었다.
아내는 저금통의 잔액을 훤히 꿰고 있었다. 얼마 있을 거라고 하면서 나더러 한 번씩 샘을 해보라고 하는데 그때마다 세어보면 거의 액수가 틀림이 없었다. 나는 그러한 인지능력을 통하여 아내의 건강상태를 간접적으로 체크했다.
‘아직은 정신이 맑구나’
하면서 안도 했다. 저금통을 찾아내어 액수를 확인하니 57만원이 들어있다. 꽤 되는 액수이다. 얼마 전 출장길에 큰아이가 다녀갔는데 그때 넉넉하게 용돈을 넣어두고 간 모양이다. 저금통에 용돈을 넣을 때는 두세 번 접어서 넣어둔다. 확인할 때 시각적으로 잘 보이도록 감안한 것이다. 그런 저금통을 대면하니 갑자기 목울대가 후끈해진다. '저것이라도 다 쓰고 갔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격하게 밀려온다.
아내는 장장 22년간을 병상생활을 했다. 그중 2년은 병원에 입원을 했었고 나머지 20년은 집에서 보냈다. 퇴원을 하면서 나는 집에서 돌보는 생활을 택했다. 가까운 곳에 요양원이 있고, 그런 곳을 소개받기도 하였지만 외면하였다. 그런 이유는 2년여에 걸쳐 입원해 있으면서 그곳에서 직접 보고 들으며 느낀 것이 많았던 것이다. 병원에서는 주간은 간호사, 야간에는 간병인이 돌보는데 눈에 거스른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특히 야간에 간병인이 돌보는 상황을 보면 너무나 환자에게 소홀한 것이 목격되었다. 환자를 구박하는 것은 일상이고 식사시간에 밥도 성의 있게 먹여주질 않았다. 그나마 제 손으로 수저를 들어 밥을 먹은 환자는 좀 낫지만 아내처럼 사지를 쓰지 못하는 환자는 떠먹이다 흘리기 십상인데 그런 때는 눈치를 주고, 음식물을 빨리 넘기지 못하면 대충 우겨넣고 끝을 내었다.
기저귀 하나도 정성껏 갈아주는 법이 없고 환자의 몸뚱이를 마치 나무토막 굴리듯 함부로 이리저리 굴리고 환자복 하나도 정성껏 입혀주질 않았다.
환자가족이 있는 곳에서도 그러니 만약에 보호자가 없는 상태에서는 얼마나 함부로 대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것을 많이 보고 느꼈기에 요양원에 보내는 것은 나로서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 환자에게 함부로 대하는 실상을 적나라하게 목도했던 것이다.
집에서 돌보는 일도 늘 요양보호사가 문제가 되었다. 아내는 사지를 전혀 쓰지 못하는 1급 중환자인데, 식사 후에 이를 닦아 주는 일로 갈등을 빚었다. 환자가 몇 차례를 더 요구하는데도 너무 많이 시킨다느니, 허리가 아파다 느니 하면서 짜증을 내며 요구를 잘 들어주지 않았다.
누워있는 환자에게 밥을 먹이려면 휠체어에 앉혀야한다. 그 과정에서도 트러블이 많았다. 기운이 없고 허리가 아프다며 기피하는 바람에 어느 날부터는 내가 그 일을 전담하게 되었다. 그리 하는데도 하는 일이 힘들다고 한 두 달 하다가 그만두기를 거듭하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나는 긴 간병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요양보호사에게 대변처리를 맡긴 일이 없다. 아내도 그것을 원치 않았지만 처음부터 아예 궂은일과 힘든 일은 내가 도맡아하기로 작정을 하였다.
그런 관계로 만약에 내가 외출이라도 할 때에는 미리서 대비를 한다. 사전에 대소변을 보이고 기저귀를 채워둔다. 그렇지만 나는 한 번도 그 일을 귀찮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당연히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일로 생각하며 보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아내로부터 마음을 상한 일보다는 오직 요양보호사문제로 애를 닳고 속을 많이 상했다.
엊그제는 직장 선배로부터 식사제의를 받았다. 식사를 하면서 하는 말이 그토록 내가 오래 간병인생활을 한줄 전혀 몰랐다는 것이었다. 누구 한사람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이 없어서 막연히 조금 아프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나는 거의 내색을 않고 지내왔다. 그러나 끝까지 모를 수만 있겠는가. 2년 전이다. 나는 시청 사회복지 공무원으로부터 전화한통을 받았다. 신분을 밝히지 않은 어느 시민이 전화를 하길, ‘오래토록 집에서 부인을 간병하는 사람이 있는데 표창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서 사실 확인차원에서 전화를 한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에 시장표창장이 전달되었다. 나는 그것을 ‘가장의 도리로 알고 하나의 본을 보인 징표’로 생각하고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나는 아내를 떠나보내면서 들었던 두 가지 말을 새삼 음미해 본다. 장례지도사가 한 말로 염을 해보니 오랜 침상생활을 해온 시신치고는 욕창하나도 생기지 않아서 놀랐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간병을 잘해왔는지 알 수 있었다고 입관을 하는 자리에서 말을 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아들이 스치듯 한 말이다.
“어머니는 아버지 간병으로 10년은 더 사셨어요”.
이보다 더 인정받은 말이 있겠는가. 아내는 편히 눈을 감았다. 마지막은 독감으로 인한 폐렴이 원인이지만 가족에게 많이 도와주고 세상을 떠났다. 병원응급실로 실려간지 13시간. 서울에 거주하는 자식들이 내려와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도록 하고서 잠을 자듯이 편안히 영면에 들었다.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지만 적당한 시기에 세상을 떠났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아들이 현직으로는 현재 맡고 있는 일을 내년 초에는 그만둬야하는데, 현재는 몸을 담고 있어서 수도권 여러 지자체에서 조의를 많이 표해주었다. 그것도 어찌 생각하면 아내가 마지막 도와주고 간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동안 아내의 용품 중 옷가지와 신발 등은 모두 내어놓았다. 몇 가지 남은 것 중에 저금통을 보니 먹고 싶은 것 마음껏 먹도록 도와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남는다. ‘그것이나마 다 쓰고 갔더라면.’ 하는 아쉬운 마음만 든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몸은 떠나고 함께한 흔적으로 저금통만 남아 있다. 그것이 보는 마음을 먹먹하게 만든다.끝
첫댓글 20여 년, 기나긴 간병의 고초와 애환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사모님의 저금통은 '열린 금고'였군요. 유품을 정리하시면서 그 저금통에 남아있는 돈을 확인하곤 다시금 눈물지으시는 선생님 모습이 애처롭습니다. 그러나 염습하던 사람들의 말도 그렇지만 아버지의 지극한 보살핌으로 어머님께서 10년은 더 사셨다는 아드님의 한 마디는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겠어요. 대체 행복이 무엇인지 자꾸만 생각게 되는 시간입니다.
집사람의 플라스틱저금통은 지금 유물이 되었습니다. 다른 것은 치우면서 그것은 그자리에 그대로 두었습니다.
동전주머니도 함께. 그것이 집사람의 정신줄을 붙들어 매고 있었다는 생각에 차마 치울수가 없군요.
형님은
어떻게보면 위대하다는생각입니다
아무나 할수있는일이 아닙니다
자네가 어떻게 회원가입을 했네.
자네가 먼곳에서 다녀간 것은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네.
뜨거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네.
청석님은 천성이, 착하고 정직하며 신실하시어 사랑으로 가득하신 분임을 알 것 같습니다.
청석님이 평소 아무렇지 않게 여기시는 일을, 며칠 간병으로 온 요양 보호사 조차도, "너무 많이 시킨다. 허리가 아프다"
하는데 청석님은 그 보다 더한 대소변을 20여년을 묵묵히 다 시중 드셨으니 참으로 위대하십니다.
오죽하면 "어머니는 아버지 간병으로 10년은 더 사셨어요" 이 말이 웅변으로 말해 줍니다.
하늘이 내린 사모님에 대한 사랑꾼이었습니다. 그간 참 수고 많으셨습니다.
부부의 도리로 마땅히 해야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으니 아내도 그 정성은 알고 있을 겁니다.
집에서 환자를 돌보며 가장 힘든 일은 요양보호사가 진득하니
있어주지 못하고 자꾸 바뀌는 일이었습니다.
어느 정도 숙달이 되어간다 싶으면 그만두는 일이 많아
그점이 가장 속상했습니다.
푸른솔문학 2024년 여름호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