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의 길을 걷다간 사람
임병식 rbs1144@daum.net
문인은 어떤 족적을 남기는 것일까. 영국속담에는 ‘시를 만드느니 차라리 버터를 만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허튼 수작으로 감동을 지어내지도 못하면서 공연히 헛수고를 한다는 말로 읽힌다. 그렇지만 무모한 도전으로 보이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얼마나 각광을 받는 것인가.
이는 젊은 여성소설가 한강이 최근 오랜 우리의 숙원사업이던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됨으로써, 문학의 진가를 잘 보여 준 것과도 관계가 있다. 저작한 작품 판매부수의 폭증으로 거둔 경제적 이익은 별개로 치더라도 본인의 명성을 드높이고 대한민국 국격도 한껏 높여 준 것이 아닌가.
이후로도 아직 젊은만큼 어떤 성과를 더 낼 지 앞날이 주목된다. 무엇보다도 문학상 수상이 의미가 있는 것은 여러 가지 국내외사정으로 우울과 침체에 빠져있는 국민에게 커다란 위로를 선사한 점이다. 놀라운 일이며 자긍심을 한껏 높여준 쾌거가 이닐 수 없다.
한강 소설가에 대해서는 앞으로 지켜볼 일이 많을 것이다. 해서 오늘의 대상인물은 과거를 살다간 사람, 당시에는 그 나이가 평균치는 된다고 하지만 너무나 아까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백호(白湖) 임제(林悌.1549-1587)선생을 만나볼까 한다.
선생은 1577년 알성시 을과에 1등을 하여 예조정랑과 홍문관지제관을 지냈다. 이후 1583년 평안도 도사에 부임했다. 이때 세상을 풍미하는 화제를 뿌리게 된다.
청초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었는다.
홍안은 어디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럴 슬허 하노라(청구영언)
풍류를 아는 그가 그냥 당대의 명기 무덤 앞을 지날 수 있겠는가. 무덤에 간단한 제물을 올리고 시 한수를 읊었다. 세간에는 그 일로 인하여 부임도 못하고 탄핵을 받아 파직이 되었다고 하지만, 기록을 찾아보면 그렇지는 않다. 다음해인 1584년 평안도사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부벽루에서 문인 몇 명과 수창하여 ‘부벽루 영상록’을 남긴 기록이 있는 것이다.
선생은 그 일이 있고 3년 후인 1587년 8월에 39세의 나이에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중용을 800번을 읽었다는 선생을 성호세설은 '기상이 호방하여 검속당하기를 싫어했다' 고 평했다.
한편, 죽음에 이르러 아들들이 통곡을 하자 “천하의 여러 나라가 제왕을 일커르지 않는 나라가 없었다. 오직 우리나라만이 끝내 제왕을 일컫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못난 나라에서 태어나서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 너희들은 조금도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 " 하고 곡을 하지 말라했다.
선생은 대곡 성운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남인의 학풍에 영향을 주었다. 한편으로, 선생은 효종시대 남인의 영수이던 허목(許穆)선생의 외조부이기도 하다. 미수선생이 쓴 외조부 행장에도 보면 ‘타고난 재질이 절등하여 하루 수천 언(言)을 외울 수 있었고 문장이 호탕한데 시에 특징이 있었다’고 찬 하였다.
선생은 삼당시인(三唐詩人) 백광훈선생과 친분이 깊었다. 두 사람이 함께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두 사람이 풍류 유람 차 관서팔경 구경을 마치고 개성에 도착했을 때였다. 해가 저문 데다 노자마저 떨어져 하는 수 없이 어느 부잣집 신세를 지기로 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선생이 수작을 걸었다.
“주인장 어르신, 오늘 은혜에 보답하고자 제가 데리고 다니는 하인 놈이 글을 곧 잘하니 시나 한 수 읊게 하시지요?”
하면서 ‘운자를 서울 경(京)이다 하며 옥봉에게 분부했다.
옥봉 백광훈은 행색은 하인이지만 약속한대로 붓을 들어 거침없이 일필휘지를 했겠다. 주인이 그걸 한참 들여다보더니 한마디 했다.
“전라도에서는 백옥봉과 임백호가 글을 잘한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글 잘하는 하인은 생전 처음 보았소.”하며 경찬을 하였다. 이때 선생이 나서서,
“저희들이 바로 백옥봉과 임백호입니다.”하여 박장대소를 했다.
선생은 단명하기도 했지만 그리 높은 벼슬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탈속한 기개로 유유자적하며 주옥같은 훌륭한 시와 기상천외한 일화를 많이 남겼으니 그 삶이 값없다 할수 없으리라. 더구나 당신의 외손이 당대를 대표하는 남인의 영수로서 훌륭한 정치와 명필로서의 유명한 묵적(墨跡)을 남겼으니 얼마나 잘 산 것인가. 당대 문인들은 선생의 행적을 그리워하며 많이 읊었다. 매천 황현선생은 <회진천 임백호 옛집에서 읊다>라는 글에서,
“천리의 명마에 수없이 단련된 검이니
호해를 휘날리며 풍류의 시서로 날렸도다(이하생략)“
라고 읊었다. 그리고 송강 정철은,
“새벽에 일어나 그대를 찾으니 그대는 없었네
긴강의 구름은 자리산에 접했는데
후일 죽림에 꼭 찾아오시게
막걸리는 내 노처가 마련할 것이니“
하고 선생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선생은 거칠 것 없는 호걸의 기품을 유지하고 살다가 세상 떠나 전남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 산걸산에 잠들었다. 후손들이 묘역을 잘 정비하여 관리중이다.
묘역에 오르는 길에는 ‘백호선생시비’라는 시비가 우뚝하다. 한 시대를 풍류 속에서 살다간 삶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숨을 거둔 시기를 따져보니 그때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년 전이요, 호남을 피로 물들인 정여립 사건이 일어나기 2년 전이다. 그런데 아들은 그 사건에 연루되어 곤욕을 치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선생도 살아있었다면 그 어떤 수난을 당했을지 모른다. 남인의 거두가 아니었던가.
그점을 걸 생각하면 정철이 선생에게 바친 애도한 시가 참으로 공교롭고 괴이쩍게 여겨지기만 한다. (2024)
첫댓글 호는 白湖, 謙齊, 楓江, 嘯痴, 碧山이고 자는 子順인 林悌선생의 면면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나주에 백호임제문학관이 몇 년 전에 건립되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자유분방하고,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글공부에 정진하여 우수한 성적을 빛냈으며 중용을 800번이나 읽은 일화가 유명합니다. 1577년 알성시 을과에는 1위로 급제하여 예조정랑과 홍문관지제관을 지내고, 본인의 호방한 성격, 동서 붕당 분쟁을 개탄 하고 명산을 찾아다니며 詩를 짓고 유랑을 하다가 39세에 여생을 마쳤으니 정여립 사건을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白湖集(700여數 詩), 원생몽유록, 愁城誌, 花史 작품이 남아 있으니 황현, 정철도 임제 선생을 애도했을 것입니다.
좋은 작품 잘 읽었습니다^^
모처럼 임제선생을 알보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자유분망한 성격에 무엇을 한번 들으면 잊지 않고 음을 줄줄이
외웠다니 천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정여립 사건이 일어나기 3년전에 작고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큰 화를 입을뻔 했습니다.
외손자 미수 허목이 찬을 했으니 더욱 빛나지 않는가 합니다.
단지 황진이를 추모한 시로만 인식하고 있었던 임제에 대하여 소상히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알고 보니 임제의 손윗처남이 황진이의 첫사랑이었네요 그래서 황잔이에게 관심이 깊지 않았을까하고 유추해 봅니다
임제는 보통 시재를 타고난 분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어디서나 술술 시가 나왔으니 과히 천재라 할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