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6일(토요일) 스물둘째날 - 사도바울의 ‘겟세마네’
말씀제목
- 사도바울의 ‘겟세마네’
말씀본문 - 사도행전 9장 8-9절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개역개정)
“울은 땅에서 일어나서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끌고, 다마스쿠스로 데리고 갔다. 그는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새번역)
말씀묵상
사울이던 시절, 길에서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그는 격분했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선지자 이사야의 말이니 굳이 따지자면 틀린 내용도 아니죠. 이 우주가 온통 하나님의 ‘성전’이니까요.
그러나 영리한 사울은 스데반의 ‘저의’가 매우 괘씸했을 겁니다. 주변 강대국들에 비해 정치적 힘이 없는 이스라엘로서는 유일하게 백성들을 결속시키고 버텨낼 힘을 주는 곳이 성전인 걸요. ‘문제라면 성전 제사장들이 타락한 것이지 성전 건물 자체는 아니지 않나. 로마 속국으로 민족적 자긍심도 바닥인 마당에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신앙적 결속이 중요하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울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예수는 무려 ‘성전을 허물라’는 ‘망언’을 한 자가 아닙니까? 스데반은 그를 따르는 사람인가 본데, 감시 ‘성전’의 상징성을 허물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상징으로 대체하겠다고 합니다. 이러한 주장을 분히 여긴 사울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당연하다고 여겼을 겁니다.
이후 신앙적 열심을 가지고 누구보다 앞장서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사울, 그의 ‘겟세마네’는 순교의 장소 로마가 아니라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이지 싶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이미 죽은 사람을 박해했다고? 그를 종교적 상징물로 만들려는 사람들을 처벌한 것이지! 그런데 너무나 선명히 만난 빛, 이후 사흘 동안 아무 것도 보지 못한 그때가 그에겐 인간적 고통이 가장 크게 느껴지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종교적 열정이 많았던 그는 음식을 삼키지도, 물을 마시지도 못하고, 해답을 얻으려는 고통으로 몸부림을 쳤을 것입니다.
‘부활의 그리스도’가 왜 성전을 대체하는 종교적 상징이 되어야 하는 지에 대해 기도하며 치열하게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고통의 ‘겟세마네’를 통과하며 예루살렘으로 모여드는 구심적 선교를 넘어서는 깨달음을 얻었겠지요.
무너지면 끝나는 성전은 제한성이 있다는 것, 나아가 유대교에 갇힌 특수주의일 뿐이라는 것, 그러나 하나님과 연합한 사람, ‘그리스도로서의 예수’께서 구원의 상징이 될 때, 혈연과 지리적 제한을 갖지 않는 인간 구원의 역사가 가능해진다는 것! 겟세마네를 통과하며 경계를 넘는 결단을 하게 된 바울은 이렇게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어디든 거침없이 그가 깨달은 진리의 복음을 전하러 나아갔습니다.
찬송
507장 저 북방 얼음산과
기도
하나님, 우리로 어두운 눈을 밝히사 우리의 신앙 열심이 성령을 앞서는 실수를 하지 않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의 영과 연합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