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1.29일 최보식의 언론에 신성대 논설위원이 올린 尹統에 관한 일종의 느낌글인데 씁쓸한 웃음을 짓게 하는군요.
◆ ◆ ◆
죄인을 가두어 두는 곳을 감옥(監獄)이라 한다. 조선시대에는 옥에 갇힌 죄수의 관리를 담당하는 관청을 전옥서(典獄署)라 불렀는데 요즘으로 치면 교도소가 되겠다. 당시의 형벌은 징역이 없었기 때문에 감옥은 일종의 미결수를 가둬두는 곳으로 현대의 구치소와 같은 개념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무신(武臣)이 역모를 꾀하거나 가담하면 반드시 극형에 처하였다. 귀양 보냈다가는 그곳에서 무력을 모아 난을 일으킬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반면에 문신(文臣)은 대개의 경우 모반의 주동자인 경우가 아니면 극형에 처하는 일이 드물었다. 대부분 관직을 박탈하고 유배(귀양)를 보내는 형벌로 그쳤다.
아무리 고약한 임금이라도 나약한 문신의 목숨까지 빼앗는 일은 조금 비겁한 행위로 비쳐지는 탓도 있었지만, 만약 그랬다간 후세의 역사가들(모두 문인들이었다)이 두고두고 자신을 포악무도한 자로 기술할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문신은 무력도 용기도 없으니 멀리 보내놓아도 모반할 염려가 없었다.
딱히 정해진 형기 같은 건 없었고, 덜 미운 신하는 한양에서 가까운 강화도 같은 곳에, 약간 미운 신하는 따뜻한 남쪽으로, 매우 얄미운 신하는 추운 함경도 쪽으로 보냈다. 그러다가 임금의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다시 불려갈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조선시대 귀양은 일종의 근신형인 셈이다.
그러니 원망은커녕 유배지로 떠나면서부터 일편단심 임을 향한 시(詩)를 지어 임금님의 귀에 들어갈 때까지 끊임없이 읊어대야 했다. 반대로 무신(武臣)은 죽으면 죽었지 그런 짓은 못한다. 글을 몰라서가 아니다.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면서 임향시를 남긴 적이 있던가.
기실 한국 고전문학의 주재료는 대부분 조선시대의 유배 제도 덕분에 생겨났다고 하겠다. 대표적으로 고산 윤선도, 송강 정철, 다산 정약용 등이 있는데, 만약 이들이 장기간 유배를 가지 않았더라면 율곡 이이처럼 과로로 일찍 죽었을 것이다.
근대적인 교도소는 구한말 갑오개혁 때 근대적인 법정과 함께 들어왔다. 이때 한성감옥이 세워졌는데, 1899년 박영효 일파의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이승만이 이상재, 이준 등 다른 개혁파들과 함께 체포되어 그곳에 갇혔다.
배재학당 출신인 이승만을 위해 아펜젤러, 벙커, 언더우드, 케일, 헐버트 선교사들이 석방운동을 벌이는 한편 기독교서적과 교양서적을 넣어주어 감옥에 작은 도서관과 학교가 만들어졌다. 이승만은 이 감옥에서 세례를 받고 영문서적을 통해 영어 공부를 하였는데, 5년 7개월 후 출소하여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워싱턴 대학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
대한민국 건국 후 정권에 항거하다가 교도소에 간 좌익 혹은 민주화 운동을 하던 이들 중에는 옥중편지나 집필로 유명해져 출소 후 크게 출세한 이들이 여럿 있었다. 서양에서도 그런 사례는 무수히 많다. 그런 지식인이나 정치인에게 징역은 '안식년'이라 해도 되겠다.
엊그제 윤석열 대통령이 김진홍 목사에게 부탁해 사인을 받은 성경을 구치소에 들였다고 한다. 무속에 심취해 후보 시절 손바닥에 '임금 왕(王)'자 쓰고 나왔던 그도 실은 소년 시절엔 교회에 다닌 적이 있다고 한다.
평생 칼을 휘둘러 수많은 사람들을 감옥으로 보낸 이가 대통령이 되어 구치소에 갇혔으니 그 심정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조선의 광해군이나 연산군의 심정이 그러했을까? 박근혜 전 대통령의 심정이 그러했을까?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고 살아온 자가 과연 하나님에게는 충성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어쨌든 그가 성경을 다시 찾았다니 다행스런 일이다. 다시 복귀할 수 있을지 아니면 그대로 징역을 살게 될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쪼록 그 교만의 반의 반 만큼만이라도 겸손해진다면 하나님도 외면하지 않으시리라.
출처 : 최보식의언론(https://www.bosik.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