名流 洪渾 墓碣銘[鄭斗卿]
洪氏著于高句麗。 有唐遣學士八人來敎東土, 洪其一也, 家于唐城。 後裔殷悅佐麗祖封太師。 自是以來, 八百餘載, 巨公繼出, 公其後也。 公諱渾, 字渾元。 高祖諱淀, 原州判官; 曾祖諱任, 知中樞府事; 祖諱景霖, 工曹判書, 策靖國功封益原君。 考諱弼世, 中樞府都事。 妣坡平尹氏, 將仕郞諱桓之女, 觀察使諱喜孫之孫。 嘉靖辛丑, 生公。 在髫齕, 益原君奇之曰: “此兒必昌我家。” 賜其金帶。 二十六, 明廟丙寅, 登第, 卽除承文正字。 宣祖戊辰, 薦入注書、翰林, 陞典籍、工曹佐郞, 移拜司諫院正言。 坐救鄭大年黨金安老罷, 後見史草, 大年劾安老者也, 卽復正言。 轉歷吏、禮、兵、刑曹郞官, 內歷司諫院憲納・司諫、司憲府監察・持平・掌令・執義、弘文館修撰・校理・應敎・典翰・直提學、侍講院輔德、成均館直講・司藝・司成、議政府檢詳・舍人, 外歷中和郡守等職。 丙子間, 公不樂仕宦, 退居龍津之時雨洞, 凡有除拜皆不就, 時稱時雨山人。 庚辰, 特命陞通政拜承旨。 內歷吏、兵、刑參議、判決事, 外歷江原監司、星州・楊州牧使等職。 其在臺閣, 糾無貴賤; 其在銓曹, 用無親疎; 其在守令、方伯, 必革弊。 公爲人樂易, 任眞直言, 不能俯仰流俗。 性嗜酒, 得酒輒醉, 醉必歌, 歌甚慷慨, 蓋傷時也。 其在時雨洞也, 與田夫、野老忘形, 自適山水間。 與西厓柳相善, 入城必訪, 沈醉倒載而歸, 每至家, 僮報曰: “醉客至矣。” 西厓作《時雨山人傳》, 傳在集中。 公雖酒人, 性本剛直。 其在楊州, 王子臨海君桀黠奴橫甚民間, 民莫敢近, 捕繫獄中, 笞掠幾死。 金昭容寵冠後宮, 其家恃內勢, 偸葬其祖母于他人墓山, 山主呈訟, 據法竟移葬。 後坐故失分養馬降資, 未幾, 還職牒。 壬辰春, 拜副提學。 時倭賊入寇, 上西幸, 公病深, 扶曳護駕。 至松都, 復拜吏曹參議, 上引見嘆。 病隨駕至安州。 大駕幸義州, 命公留護世子于成川。 直斥大臣之失, 有不悅者, 果爲所彈。 病篤, 詣行在乞骸骨, 上許之, 召見給路資。 歸至禮山農舍卽卒, 癸巳四月二十日也, 享年五十三。 以病先歸, 只參原從, 人多恨之, 贈吏曹參判。 戊戌十二月, 上念公之賢, 筵席問: “洪渾家屬安在?” 李公好閔對曰: “洪渾妻率其子淪落驪州地, 窮不能資生云。” 上聞之惻然, 卽下敎曰: “洪渾生無産業, 經亂身死, 妻孥飢寒, 勢所必然。 令該司賑恤其婦授職厥子, 以副予未忘之懷。” 吏曹除其子恭陵參奉, 戶部卽令道臣計減本州田稅, 頒給朔料。 自戊戌至戊申, 上昇遐乃止, 十年受祿, 實曠百世異數也。 夫人陽城李氏, 僉正諱允良之女, 左參贊承召之曾孫也。 行冠一門, 聞宣廟賓天, 望京痛哭, 素服三年, 眞古之女士也。 後公三十三年而卒, 天啓乙丑六月初六日也, 享年八十四。 公初葬于禮山, 後改葬于驪州治之東丹樹里卯向之原, 夫人祔焉。 有子二人: 有範、有疇。 有疇, 早夭。 有範卽授恭陵參奉者也, 娶趙得人之女, 生一子, 聃齡。 娶縣監金盖世女, 生男女, 男錫賢早夭, 以族子時賢後。 女適士人鄭履亨。 有疇娶護軍鄭祖榮女, 生男女: 男龜齡, 無子, 以族子斗慶繼。 女適都事柳東輝。 聃齡來乞銘, 爲之銘: 唯彼洪氏, 自中國東底。 東底伊何? 實惟唐城。 上下千載, 世繼厥聲。 厥聲世繼, 逮于公生。 公際宣廟, 是遷是擢。 獻納論思, 大蒙恩渥。 歲在壬辰, 倭虜入寇。 公病在床, 從上西狩。 不敢言病, 從上之故。 上念公病, 乞骸乃許。 卽世之後, 上念冞篤。 上臨于朝, 問公家屬。 有以實對, 上爲之惻。 縻子以爵, 給家以粟。 有此榮寵, 不光後昆? 是撰是刻, 表公之原。
홍혼[洪渾]의 묘갈명(墓碣銘) -정두경(鄭斗卿)
홍씨(洪氏)는 고구려(高句麗) 때부터 드러났다. 당(唐)나라가 학사(學士) 8인을 우리나라에 보내어 가르치게 하였는데, 홍씨는 그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당성(唐城)에 터를 잡아 거주하였다. 그 후예인 홍은열(洪殷悅)은 고려 태조(太祖)를 보좌하여 태사(太師)에 봉해졌고, 이로부터 8백여 년 동안에 명망이 높은 인물을 잇달아 배출하였는데, 공은 그의 후손이다.
공의 휘(諱)는 혼(渾)이고, 자(字)는 혼원(渾元)이다. 고조(高祖)는 홍정(洪淀)인데 원주 판관(原州判官)을 지냈고, 증조(曾祖)는 홍임(洪任)인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할아버지는 홍경림(洪景霖)인데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내고 정사 공신(靖社功臣)에 책훈(策勳)되어 익원군(益原君)에 봉해졌다. 아버지는 홍필세(洪弼世)인데 중추부 도사(中樞府都事)를 지냈으며, 어머니는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장사랑(將仕郞) 윤환(尹桓)의 딸이요, 관찰사(觀察使) 윤희손(尹喜孫)의 손녀인데, 가정(嘉靖) 신축년(辛丑年, 1541년 중종 36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7, 8세가 되었을 때부터 할아버지 익원군이 기특하게 여기어 말하기를, “이 아이가 반드시 우리 가문을 창성하게 할 것이다.”고 하고서, 금대(金帶)를 선물로 주었다. 26세 때인 명묘(明廟) 병인년(丙寅年, 1566년 명종 21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즉시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제수되었다. 선조(宣祖) 무진년(戊辰年, 1568년 선조 원년)에 천거를 받아 주서(注書)ㆍ한림(翰林)으로 들어갔고, 이어 전적(典籍)ㆍ공조 좌랑에 승진하였으며,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이배(移拜)되었다가 정대년(鄭大年)을 구명(救命)하는 당인(黨人)이라는 죄목으로 연좌되었다. 김안로(金安老)가 파출(罷黜)당한 뒤에 사초(史草)를 보았더니, 정대년은 김안로를 논핵한 사람이었다. 이에 즉시 다시 정언에 복직되었고 이조(吏曹)ㆍ예조(禮曹)ㆍ병조(兵曹)ㆍ형조 낭관(刑曹郎官)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어 내직(內職)으로는 사간원(司諫院)의 헌납ㆍ사간, 사헌부의 감찰ㆍ지평ㆍ장령ㆍ집의, 홍문관(弘文館)의 수찬(修撰)ㆍ교리(校理)ㆍ응교(應敎)ㆍ전한(典翰)ㆍ직제학(直提學),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 성균관(成均館)의 직강(直講)ㆍ사예(司藝)ㆍ사성(司成), 의정부(議政府)의 검상(檢詳)ㆍ사인(舍人)을 역임하였으며, 외직(外職)으로는 중화 군수(中和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간혹 병자년(丙子年, 1576년 선조 9년) 사이에 공은 벼슬살이가 즐겁지 아니하여 용진(龍津)의 시우동(時雨洞)에 물러나 살았는데, 무릇 벼슬에 임명하면 모두 나아가지 않았으므로, 당시에 시우 산인(時雨山人)이라고 불리었다.
경진년(庚辰年, 1580년 선조 13년)에 임금의 특명으로 통정 대부의 품계에 승진하여 승지(承旨)에 임명되었고, 이어 내직으로는 이조ㆍ병조ㆍ형조 참의, 판결사(判決事)를 역임하였으며, 외직으로는 강원 감사(江原監司), 성주(星州)ㆍ양주 목사(楊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대각(臺閣)에 재직할 때에는 귀천(貴賤)을 막론하고 규탄(糾彈)하였고, 전조(銓曹)에 재직할 때에는 친소(親疎)를 막론하고 등용하였으며, 수령(守令)과 방백(方伯)으로 고을을 다스릴 때에는 반드시 폐단을 혁파하였다.
공은 사람됨이 진솔하게 행동하였고 곧이곧대로 말하기를 즐겨하면서 유속(流俗)을 따라 부앙(俯仰)하지 못하였으며, 성품이 술을 즐기어 술을 얻으면 번번이 취하도록 마셨고 취하면 반드시 노래를 불렀는데 노래가 매우 강개(慷慨)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시속(時俗)을 상심(傷心)한 것이었다. 그가 시우동에서 살 때에는 전부(田夫)ㆍ야로(野老)와 더불어 형세(形勢)를 잊고 산수(山水) 사이에 자적(自適)하였으며, 서애(西厓) 유상(柳相, 유성룡(柳成龍)을 말함)과 사이좋게 지내어 도성(都城)에 들어가면 반드시 그를 방문하여 몹시 취하도록 마시어 쓰러진 채로 실려 돌아왔는데, 그가 찾아갈 때마다 가동(家僮)들이 유상에게 알리기를, “취객(醉客)이 왔습니다.”고 하였다. 서애가 시우산인전(時雨山人傳)을 지었는바, 그 전(傳)이 문집(文集)에 실려 있다.
공은 비록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나 성품이 본래 강직(剛直)하였다. 양주(楊州)에 재임할 때에 왕자(王子)인 임해군(臨海君)의 난폭하고 교활한 종이 민간에 횡포를 몹시 부렸으나 백성들이 감히 그를 가까이하지 못하였는데, 공이 그를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고서 거의 죽도록 매질을 하였다. 소용(昭容) 김씨(金氏)가 후궁(後宮) 중에서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는데 그 집안사람이 대궐 안의 세력을 믿고서 남의 선산(先山)에 그 조모(祖母)를 투장(偸葬)하였는바, 산의 주인이 정송(呈訟)하였으므로 공이 법에 의거하여 마침내 이장(移葬)하도록 하였다. 뒤에 분양마(分養馬)를 고의로 잃어버린 일에 연좌되어 자급(資級)이 강등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직첩(職牒)을 되돌려 받았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 봄에 부제학(副提學)에 제배되었다. 그 당시에 왜적(倭賊)이 쳐들어와 노략질을 하여 임금이 서행(西行)하자, 공은 병이 깊었는데도 몸을 이끌고 어가(御駕)를 호종하여 송도(松都)에 갔으며, 다시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제수되었다. 임금이 공을 인견(引見)하고 공의 병을 탄식하였으며, 어가를 따라 안주(安州)로 갔다. 대가(大駕)가 의주(義州)로 피난하면서 공에게 남도록 명하여 성천(成川)에 가서 세자(世子)를 보호하라고 하였는바, 공은 대신(大臣)의 잘못을 직척(直斥)하였으므로 마침내 공을 좋아하지 않는 자에게 탄핵을 받았다. 병이 위독해지자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가서 임금에게 고향에 돌아가 죽게 해달라고 간청하니, 임금이 허락하고 불러 만나본 뒤에 노자(路資)를 지급하였다. 돌아오던 중에 예산(禮山)의 농사(農舍)에 이르자 졸(卒)하였으니, 계사년(癸巳年, 1593년 선조 26년) 4월 20일이었으며 향년(享年)은 53세였다. 병 때문에 먼저 죽은 까닭에 단지 원종 공신(原從功臣)에만 참록(參錄)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대부분 아쉽게 여겼으며,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무술년(戊戌年, 1598년 선조 31년) 12월에 임금이 공의 어짊을 기억하여 연석(筵席)에서 신하들에게 “홍혼(洪渾)의 가속(家屬)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자, 이호민(李好閔)공이 대답하기를, “홍혼의 아내가 그 아들을 데리고 여주(驪州) 땅에서 고생스럽게 살고 있는데 가난하여 끼니도 잇지 못한다고 합니다.”고 하였다. 임금이 그 말을 듣고 측은히 여기어 즉시 하교하기를, “홍혼이 살았을 때에 모아둔 재산이 없는 채로 난리를 겪다가 자신이 죽었으니, 처자식들이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는 것은 형세로 보아 그럴 수밖에 없다. 해사(該司)로 하여금 그 아내를 진휼(賑恤)해 주고 그 아들에게 관직을 제수하도록 함으로써 내가 아직 그를 잊지 않고 있다는 마음을 부응하게 하라.”고 하였다. 이에 이조에서 그 아들에게 공릉 참봉(恭陵參奉)과 호부(戶部, 호조를 말함)의 낭관을 제수하였고,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본주(本州)의 전세(田稅)를 줄여서 그에게 삭료(朔料)를 반급(頒給)하도록 하였는데, 무술년(戊戌年)부터 시작해서 무신년(戊申年, 1608년 선조 41년)에 임금이 승하(昇遐)한 때에 이르러서야 중지되었으니, 10년 동안이나 녹(祿)을 받은 것은 실로 1백 년 사이에 없었던 특별한 은전(恩典)이었다.
공의 부인은 양성 이씨(陽城李氏)로 첨정(僉正)을 지낸 이윤량(李允良)의 딸이요, 좌참찬(左參贊)을 지낸 이승소(李承召)의 증손녀인데, 행실이 한 집안에서 으뜸으로 꼽히었다. 선묘(宣廟)께서 빈천(賓天, 임금의 승하를 말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서울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통곡하였으며, 삼년 동안 소복(素服)을 입었으니, 참으로 옛날의 여사(女士)였다. 공보다 33년 뒤에 별세하였으니, 천계(天啓) 을축년(乙丑年, 1625년 인조 3년) 6월 초6일이었으며 향년은 84세였다. 공은 처음에 예산(禮山)에 장사지냈다가 뒤에 여주의 치소(治所) 동쪽에 있는 단대리(丹對里) 묘향(卯向) 자리에 개장(改葬)하였으며, 부인을 부장(祔葬)하였다.
두 아들을 두었는데 홍유범(洪有範)과 홍유주(洪有疇)이다. 홍유주는 일찍 요절하였고, 홍유범은 곧 공릉 참봉(恭陵參奉)에 제수된 자로서 조득인(趙得人)의 딸에게 장가들어 외아들 홍담령(洪聃齡)을 낳았다. 홍담령은 현감 김개세(金蓋世)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는바, 아들 홍석현(洪錫賢)은 일찍 요절하여 족자(族子)인 홍시현(洪時賢)으로 후사를 삼았으며, 딸은 사인(士人) 정이형(鄭履亨)에게 시집갔다. 홍유주는 호군(護軍) 정조영(鄭祖榮)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는바, 아들인 홍귀령(洪龜齡)은 자식이 없어서 족자(族子)인 홍두경(洪斗慶)을 후사로 이었으며, 딸은 도사(都事) 유동휘(柳東輝)에게 시집갔다. 홍담령이 나에게 와서 명(銘)을 지어달라고 하였으므로 내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아! 저 홍씨는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왔으니, 우리나라 어디에 살았을까? 실로 당성(唐城)에 살았네. 천 년의 오랜 세월 동안에 대대로 그 명성을 이어왔는데, 그 명성 대대로 계승하여 공이 태어나기에 이르렀네. 공은 선묘(宣廟) 때에 살면서 벼슬을 옮기기도 하고 발탁되기도 하였으니, 헌납(獻納)과 논사(論思)하는 벼슬을 지내면서 임금의 은혜를 크게 입었네. 바야흐로 임진년에 왜노(倭虜)가 우리나라에 쳐들어오니, 공은 병이 들어 침상에 있다가 임금을 따라 서행(西行)하였네. 감히 병이 들었노라고 말하지 않았으니 임금을 호종하려는 까닭이었네. 임금이 공의 병을 걱정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죽도록 허락하였네. 세상을 떠난 뒤에도 임금께서 공을 매우 깊이 염려하였네. 임금이 조회에 임하여 공의 가족에 대하여 물었고, 사실대로 대답하는 신하가 있자 임금께서 측은하게 여기었네. 공의 아들에게 벼슬을 내려 주고 집안에는 식량을 지급하였네. 이러한 영광과 총애가 있었으니 공의 후손들이 빛나지 않으리오. 이 글을 지어 비석에 새기어서 공이 묻힌 언덕에 드러내노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