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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
메시야의 초청(마11장25-30)
성경본문|마태복음11:25~30
25.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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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박조준목사
우리가 마태복음 11장을 읽는 동안 세례 요한이 그의 재자들을 보내서 예수님의 메시야 여부에 대하여 물으신 일,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냉대한 것이나 가버나움 인근의 도시들이 예수님을 불신한 사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거부하는 세력과는 반대로 순수한 구도자(求道者)를 보시면서 감사하시며 메시야로 서의 예수님은 사람들을 향하여 초청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25 - 27절은 주님의 기도이고 28 - 30절은 주님의 초청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28 - 30절의 부분은 마태복음에만 있는 독특한 기사입니다.
25절 첫 부분을 보세요 !
그때에 이것은 분명한 그리고 구체적인 때를 지적하는 말입니다.
그때가 어떤 때입니까?
한편은 불신의 풍조가 일고 다른 한편은 신앙의 순수성이 나타날 때입니다.
우리는 오늘과 그때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바로 그때와 같지 않은가 합니다.
시간적으로는 20세기가 흘러갔지만 분명히 외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지만 인간이 그리스도를 대하는 태도는 그 때와 오늘이 꼭 같지않은가 생각이 됩니다.
사람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적그리스도요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어거스틴이 그의 유명한 책 <신의 도성>에서 말한 것처럼 인류역사의 흐름이 바로 이 두가지입니다.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사람과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들의 싸움이 계속되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싸움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사람이 반그리스도적인 사람 그들의 세력을 완전히 정복하고 승리할 때 하나님의 도성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상황속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벵겔이라는 성경학자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과 그리스도 자신의 생각과 제자들의 동향에 대하여 말씀하였습니다.
“천재의 주제이신 아버지여 !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지적이 깊이를 말하고 슬기는 분별력을 말하는 줄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서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이란 그 시대의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두고 한 말씀일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떤 세상적인 지혜와 분별력이 있는 자에게는 숨기셨다는 뜻입니다.
그때 지혜롭고 슬기있다고 자처하던 랍비는 주님에게 거절당하고 오히려 어린 아이같이 순박한 갈릴리의 어부들을 용납하시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식 많은 사람들이 사용된 것이 아니라 겸손하고 단순한 사람들을 환영하셨고 그들을 들어 쓰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뜻하신 바가 무엇인지 우리는 분명히 조심해서 보어야만 할 것입니다.
조금 잘못하면 오해하기 쉬운 구절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지혜도 없는 어리석은 사람 분별력도 없는 형편없는 사람에게만 복음을 나타내 주셨습니까?
예수님은 지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것은 소위 지적인 교만을 거부한 것입니다.
프럼머는 ‘머리가 아니고 마음이 복음의 집이다‘ 고 하였습니다.
현명한 사람에게 복음을 숨기신 것이 아니라 교만한 사람에게 천국의 진리를 숨기셨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에게 나타내신 것이 아니라 겸손한 사람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즉 무지한 것이 신앙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낮아지는 겸손이 신앙에 가장 필요한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사람이 솔로몬과 같이 지혜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 사람이 순박함 신뢰함이 어린아이의 마음같이 결백성이 없으면 그는 그 자신이 그의 마음을 닫아버리는 결과 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던 랍비들의 지성적인 교만이 얼마나 위험하다는 것을 보았고 그들 자신이 현명하다는 랍비보다 순박한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가까움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지식 많은 사람도 겸손해야 합니다.
권세있는 사람도 겸손해야 합니다.
재물 많은 사람도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나타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어린 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도 바로 이런 뜻이 있는 줄 압니다.
26절 하반에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 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크라크 같은 사람은 ‘이는 위대한 진리요 구원의 열쇠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지음을 받았고 성자 예수님에게 위임이 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사이에는 조그마한 비밀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일은 누구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오직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된 자 즉 택함을 받은 성도들만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교제에 참예하여 하나님을 아는 특권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을 사람에게 나타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요한복음에 보아도 요한복음 14 : 8 - 11에 “빌립이 주여 !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시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할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안에 계신 것을 알지 아니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하셨습니다.
여기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만일 네가 하나님 보기를 원하면, 만일 네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원하면, 만일 네가 하나님의 성품을 알기 원하면. 만일 네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대한 모든 자세를 보기 원하면 나를 보라.‘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혁신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확신을 줄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겸손하고 신뢰심만 가지면 예수는 그에게 확신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11 : 28 - 30은 메시야의 초청장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하십니다.
권위적이면서도 친절한 초청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모든 인류를 향한 메시야의 절대적인 초청입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苦) 로 보고 그 원인을 무명으로 규정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깨달음으로 고에서 해방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어 밤죄한데서 즉 하나님을 떠나게 된 데서 모든 인생고가 생겼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돌아가므로 죄의 용서함을 받고 따라서 진정 한 평안이 있는 것을 말해줍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오라’고 초청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1 : 18에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찌라도 양털같이 되리라”하였습니다.
죄의 용서함 받을 길은 하나님께 나아오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나아오면 용서하시마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사야 55 : 1 이하에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목마른 인생, 굶주린 인생, 죽어가는 인생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공연한 수고하지 말고 참 생명수 샘이 되시고, 양식이 되시고, 생명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 나아오라고 초청하십니다.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 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진리를 찾기 위해 수고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내게로 오라’하십니다.
헬라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만일 네가 그를 찾았을 때 그에 대해서 누구에게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고 하였습니다.
칼빈도 비슷한 말을 하였습 니다. ‘내가 만일 하나님이 안계시다 하면 마음이 허전해 살 수가 없고 계시다 하면 마음이 놓이고 평안하나 설명할 때면 할 말을 찾기 어렵다’고.
욥기 11 : 7에 보면 소발이 욥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 고.
아일랜드의 유명한 시인 예이츠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떤 이가 힘써서 하나님에게 이를 수 있을까? 그는 깨끗한 마음속에 그 자신을 주신다.
그는 바라보는 것 외에 우리에게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지난 3일 저녁 생각한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분리되었는데 그것을 인간이 도덕으로, 종교로, 선행으로, 교육으로 다리를 놓아 볼려고 애썼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오직 한 가지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길은 정신적인 연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 뿐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할 터인데 바라본 사람은 살고 바라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습니다.
바라보는 것은 쉽습니다.
너무 쉽습니다.
그래서 보지 않은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겐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겐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오기만 하면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누가 이런 보장을 할 수 있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이 짐은 종교적인 짐도 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짐입니다.
마태복음 3 : 4에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유대 종교에서는 수를 셀 수 없는 규칙과 규례가 있었습니다.
어떤 이의 말대로 그들은 ‘평생토록 그 규례의 숲속에서 살며 하지 말찌니라’하는 말을 계속 들으며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율법의 멍에 계명의 멍에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거기서 벗어나 쉬기를 원하여 초청하십니다.
그 법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전연 멍에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새로운 멍에를 메는데서 모든 인생고의 멍에까지 벗어날 수 있습니다(죄의 짐, 근심 걱정의 짐 도).
성지에 가보면 멍에는 두 마리의 우마가 같이 메고 밭을 갑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멍에를 메는 것이 즐거운 일이요 평안한 일입니다.
더구나 멍에를 멜 뿐만 아니라 ‘내게 배우라’고 하였습니다.
배운다는 것은 그의 제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온유 그의 겸손을 배우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입니다.
강포하고 교만하여 남을 괴롭히는 사람은 자신도 괴로움을 받은 것입니다.
어떤 벌은 사람을 쏘면 얼마나 아픈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벌은 사람에게 그 살을 박고 나서 죽어버리고 맙니다.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우는 사람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하였습니다.
헬라어로 휴레세테인데 이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너희가 쉼을 찾으리니와 내가 너희에게 쉼을 주리라’
즉 그리스도의 쉼은 주어지는 것과 찾는 것의 당면적입니다.
그리스도의 쉼은 용서와 화해에서 주어지고 멍에와 무거운 짐에서 찾아집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예수님의 짐은 가볍기 때문입니다.
멍에는 멍에요 짐은 짐이지만 흑기의 말대로 그리스도와 같이 메기 때문에 쉽고 메이어의 말대로 사랑으로 메고 지기 때문에 쉽고 가볍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짐을 지는 자에게는 무거운 짐이 아니라 날을 수 있는 날개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쉽습니다.
헬라어로 쉽다는 말이 ‘크레스토스’인데 이는 ‘잘 맞추었다“는 뜻이 있습니다.
바클레이는 ‘나사렛 동네 목수 출신인 예수님께서 만드신 멍에가 여간 잘 맞추었겠느냐?’고 하였습니다.
‘너에게 메워진 모든 멍에는 다 내가 맞춘 것이야 네 책임, 네 생활환경, 다 내가 잘 재서 맞게 한거야’하는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메워진 멍에가 예수님이 맞춰주신 것을 기억하십니까?
‘내 짐은 가볍다’고 하였습니다.
랍비도 내 짐이 내 노래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메워진 짐을 사랑으로 질 때 가벼울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짐을 사랑으로 집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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