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행과 포교하는 사부대중 >
가족 모두가 스님이 된
비구니회장 본각 스님!
본각스님
취재 | 전현자 (미주현대불교 한국주재기자)
기자: 스님! 전국 비구니회 회장이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스님: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기자: 불교를 믿는 나라들 중에서도 비구니스님을 인정하는 나라는 많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비구니회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님: 조계종 전국비구니회는 1968년에 뜻있는 비구니스님들이 모여서 ‘우담바라회’라는 명칭으로 결성해서 교육, 수행, 포교, 복지 등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85년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전국비구니회’로 명칭을 변경했고, 1988년에는 비구니회에서 목동청소년회관을 개관하여 지역사회의 문화, 복지에 기여했습니다. 2002년 5월에는 서울 수서동에 전국비구니스님들이 힘을 모아 수행교육을 위한 회관을 건립해서 지역주민을 위한 문화강좌, 전국비구니회의 종무행정과 교육연수, 포교 등의 장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전국비구니회는 서울 지회를 비롯하여 전국에 약 17곳의 지회를 통하여 전국비구니가 결속하고 있습니다.
저는 26년간 중앙승가대학교에서 비구, 비구니 스님들께 저의 전공인 화엄학과 대승불교를 가르쳤고, 2017년에 퇴임했습니다. 학문적으로 좀 더 깊은 연구를 시작하려던 차에 지난해 11월에 전국비구니의 직접선거에 의해서 제12대 대한불교조계종 전국비구니회장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기자: 아, 그럼 몇 달 안 되셨군요.
스님: 몇 달 안됐어요.
기자: 근세의 한국불교에서 비구니의 역할은 어떤 것이었나요?
스님: 과거의 비구니 어른 스님들을 되돌아보면 저희 대한불교조계종이 제자리를 잡은 것이 60년대 초반이예요. 그 전에는 국가적으로는 전쟁도 있었고, 전쟁 뒤에는 선교사를 시작으로 많은 서양 문물이 들어와 지금은 거의 서양화되어 있잖아요. 전쟁의 와중에서 먹고 살 것도 없고 정신적으로 빈곤했던 그때의 한국 불교를 되돌아보면 안타까움이 많습니다. 더욱이 조선조 500년 동안 극심한 탄압을 받았고, 일제 36년간 한국 민중이 독립하지 못한 상태였고요. 조선조 말기에 일본 승려의 힘을 빌어서 한국승려가 겨우 사대문 안을 왕래할 수 있었던 슬픈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조선조에서는 승려가 천민으로 전락한 상태였고, 비구니는 더 비참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뼈저린 조선조 불교탄압의 역사를 우리 불자님들도 잘 모르셔요. 대외적으로는 도성 출입도 못할 만큼 불교가 굉장히 박해를 받은 거죠. 일본불교 승려들이 한국 승려들의 도성출입을 도와주기는 했지만, 이런 것 때문에 역효과도 많았지요. 특히 대처승제도를 강압적으로 실시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지요. 50년대나 60년대는 불교의 정체성을 재정립한다거나 조선조 500년 동안 압박받은 불교에서 전통 불교를 다시 회복하며 계승해 나아가기 어려운 혼란의 시대였습니다. 그때의 한국불교는 거의 산중불교였기 때문에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조차도 우리 불교계 어른들이 모르셨을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 혼란에도 불구하고 1947년 봉암사 결사는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1954년에는 한국불교의 수행정신을 회복하려는 실질적인 행동으로 정화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정화운동에서 비구니스님들은 비구스님들을 도와서 정화운동에 필요한 물자를 모으고, 현장을 지키며 각 사찰에 연락해서 뜻을 모으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정화가 끝났을 때 비구니스님들의 노력을 높이 평가해서 종단차원에서 본사의 하나인 대구 동화사를 짧은 기간이지만 비구니 도량으로 내어줄 만큼 비구니스님들의 역할이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화사를 비구니도량으로 지키지는 못했지만, 한국비구니의 역할이 컸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사건입니다.
법룡사 법문
기자: 스님! 스님의 모든 가족이 출가 하셨다고요!
스님: 저희 형제는 굉장히 독특해요. 우리 아버지는 오형제 중 막내셨습니다. 선비 집안이었고, 할아버지가 훈장을 하셨는데 일찍 돌아가셔서 아버님께서는 교육을 못 받으셨어요. 그래서 고향을 나와서 장사를 하셨어요. 필목 문방구 장사 등을 하셨는데, 그 당시에는 선비집안에서 장사를 하면 야단을 들을 일이었답니다. 그래서 본가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요. 혼자 자수성가하셔서 육남매를 두셨어요. 제가 막내입니다. 제일 위가 혜근 스님, 두 번째가 천제스님, 세 번째가 적조스님, 네 번째가 보명스님, 다섯 번째가 삼소스님, 여섯 번째가 저 본각입니다. 오빠 스님인 천제스님이 중학교 갈 때에 저희가 합천에 살았거든요. 합천에서 살다가 오빠를 교육시키기 위해서 가족 모두가 마산으로 이사를 갔고, 마산에서 아버지는 병을 얻어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의 49재가 인연이 되어서 오빠는 성철 큰스님을 만났고, 우리가족 모두는 출가하는 인연이 되었습니다. 저는 가족을 따라 3살에 절에 왔고, 인천 부용암 육년스님께서 저를 양육하고 교육을 맡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14살 때 석남사와 운문사를 거쳐서 공부를 했고, 72학번으로 동국대학교에서 서양철학을 전공했습니다. 그 뒤 일본에 유학해서 동경에 있는 고마자와대학에서 1992년 불교학 박사학위를 받고 중앙승가대학교에 26년간 봉직하게 되었습니다.
기자: 한 분도 환속하신 분은 안계세요?
스님: 안 계셔요. 다 같이 출가하려고 작심한 그런 옛날 도반이죠. 그래서 다 출가해서 저까지 벌써 70을 바라보니까 다 잘 산 것이지요.
기자: 아! 스님 부모님께서 불자이셨습니까?
스님: 아버지는 유교신자셨습니다. 불교에 대해서는 '불'자도 모르고, 아버지는 교회나 절에 가는 것을 싫어하셨어요. 오직 가족을 살피는 데에만 전념하셨던 분이셨습니다. 아버님 돌아가시고 49재 지내러 가서 우리가 다 출가한 것입니다.
중앙승가대학정년퇴임
기자: 그런데 어떻게 절에 다니시지도 않으시고 49재를...
스님: 고모이신 삼인스님께서 그때는 그냥 재가자셨어요. 먼 친척 고모셨는데 재가불자셨죠. 49재 지내기를 권해서 통영 안정사로 데리고 가셨고, 우리 다 출가하고, 고모님도 출가하셨어요.
기자: 대단한 가족이십니다.
스님: 제가 살아보니까 전생에도 저는 스님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그걸 느껴요. 불교에 관련된 것은 굉장히 쉽게 잘돼요. 그런데, 세속적인 것은 너무 안 되는 걸 보면 전생에도 내가 스님이었나 보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샤카디타의 한국 공동 회장이시라고요?
스님: 예, 오래 됐죠.
기자: 아주 훌륭한 일을 전 세계의 비구니 스님들께서 해 오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스님: 2002년 대만에서 개최된 샤카디타 7차 대회에 참가하면서 2004년 8차 대회를 한국에서 개최했습니다. 그때 추진위원장을 맡게 되었고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2015년 샤카디타코리아 한국지부가 결정될 때, 서울대학교 조은수 교수와 함께 공동대표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습니다.
기자: 스님은 누구십니까?
스님: 본각입니다.
인터뷰 날짜: 2월 1일
장소: 비구니 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