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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홍수로 전재산과 가족들을 잃고, 살던 곳을 떠나 먼 곳으로 이사를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힘든 나날을 보내던 중 이웃의 전도를 받아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평생 처음 다니는 교회의 모든 순서가 어색했지만, 교인들의 친절한 영접과 푸근한 분위기는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드디어 목사님의 설교시간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은혜의 단비가 내리길 원합니다." 목사님의 설교는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생수가 넘치길 원합니다." "폭포수 같은 성령님의 역사를 체험하길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 속에 잠기시길 축원합니다." "은혜의 홍수가..." 남자를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며 중얼거렸습니다. "뭐가 비가 내리고, 넘치고, 잠기고, 결국에는 홍수야! 위로받으러 왔더니 염장을 지르는구먼.“
설교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말씀의 의미보다 단어에 마음이 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상처가 깊은 사람은 당시 상황을 떠오르게 하는 단어도 싫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죠. 그래도 우리 공동체 가족들은 오늘 단어보다는 내용에 더 마음을 두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교회 가족들 마음을 움직여서 창립 50주년을 미리 준비도록 하고 계십니다. 기도할 때마다 교우들은 충실하게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시간을 정하고, 또 무엇보다 마음을 더 교회 공동체를 위해 쓰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며칠 전에 소개된 스포츠 뉴스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지난 9일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2023 동남아시안게임 여자 5천m 경기에 출전한 캄보디아 대표 보우 삼낭(20) 선수는 꼴찌로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기록은 1위에 6분 가까이 뒤진 22분 54초였습니다.
대부분 선수가 이미 결승선을 통과한 상태에서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달렸습니다.
중학교 때 운동을 시작했지만 가난해서 운동화도 한 켤레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진흙과 콘크리트에서 훈련했고 아버지는 몇 년 전에 사망했습니다. 평소 빈혈에 시달려 온 이 선수는 경기 당일에도 코치가 출전을 만류할 정도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녀는 결승선을 통과한 뒤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그녀를 열광하며 맞아주었습니다. 그녀는 벼락스타가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묻습니다. 최악의 여건에서 무엇이 끝까지 달리게 했는지 말입니다.
그녀는 물론 경기를 포기할 권리가 있었지만 캄보디아를 대표하는 의무가 먼저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조금 느리게 가든, 조금 빠르게 가든, 포기 안 하면 목표를 이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인내하며 앞으로 계속 나아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교회에 맘을 쓰는 걸까요. 무엇 때문에 이렇게 힘든 세상 속에서 때로 짐을 짊어 지는 것 같은 공동체를 붙들고 있는 걸까요?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힘든 과정들을 참아내고 서로 인내하며 때로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예배자의 삶을 살아내는 걸까요.
그 답은, 하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입니다. 성령님 때문입니다. 맞습니까?
캄보디아 대표로 꼴찌로 들어올 것을 뻔히 알면서도 완주를 했던 그녀가 말한 캄보디아를 대표하는 의무가 먼저이기 때문이라고 한 것처럼....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나라 자녀라고 믿습니다. 죄인이며 죽고 영원한 형벌을 받을 나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선물 받았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천국을 맛보고 죽음 후에 영원한 나라에서 안식을 얻으며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믿음이 없다면 결국 교회 공동체를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하는 일에 마음을 둘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교회 공동체를 하나님이 나에게 이 땅에서 맡겨준 사명이라 믿고 최선을 다해 섬기고 헌신하며 사랑하게 됩니다.
또 맡겨진 교회 공동체가 발전하고 부흥하고 더 많은 일을 하고 최선을 다해 남긴 달란트를 소유한 종처럼 그렇게 되길 모두는 원합니다. 그래서 훈련을 받고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사랑하는 마음을 쏟고, 진심으로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이러한 마음이 고스란히 공동체 안에 나타나게 될까요.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그 시대의 고린도 교회를 생각해 보면 답을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고린도 교회가 세워진 것은 사실은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기적입니다. 그 지역은 우상숭배가 넘치고 매일 1천여 명의 여사제들이 종교적 매음을 하기 위해 밤마다 도시를 유혹하고 다녔습니다. 특히 그 지역의 젊은 소녀들을 선발하여 그 일을 시켰습니다. 그곳에 바울이 1년 6개월 동안 머물며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떠났고 교회가 세워진 5년쯤 되었을 때 교회 안에 다양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바울이 알게 되어 서신을 통해 교회가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끝까지 믿음을 지켜주길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부탁한 것입니다.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하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 본당 출입구에도 걸려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교회 공동체가 가져야 할 믿음의 태도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사탄의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몸으로써의 건강한 교회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하나가 되기 위해 고린도 교회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 교회 지도자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네 개로 파벌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나는 바울을, 나는 아볼로를 그리고 어떤 이는 게바를 또 다른 이들은 이것도 저것도 싫고 그리스도에 속하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면 교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잘 굽히지 않습니다. 이유는 자신의 마음에 분명 이것이 진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또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어서 목회자의 성향이 다름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하나님은 일꾼을 사용하십니다. 하지만 어떤 특정한 사람들은 특정한 지도자만 원하고 그 권위만 따르려고 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은 전임자와 새로 부임한 담임자 사이에 아직도 전임자에 대한 향수에 취해 있는 이들 때문이라고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전임자에게 전화를 걸어서 의논하고 상황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보다 전임자를 더 권위를 두려고 하는 행동입니다. 물론 어떤 것들에 대해 충고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목회에 대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지도하고 떠났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움직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지도자를 세웠습니다. 그는 주목할 만큼의 유명한 인물이 아니었나 봅니다. 분명한 것은 그런 그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마음에 안 맞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율법보다 믿음을 강조하였습니다. 그의 말씀은 능력이 있었습니다. 바울에 빠진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볼로는 말을 잘했습니다. 그는 학문적 성향이 강한 지식층들이 좋아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루살렘에서 이주한 이들이 있는데 그들은 베드로를 알았습니다. 그들은 베드로를 자주 이야기하며 그와 같은 지도자를 원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고집스럽게 자신들만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고린도 교인이라면 어떤 파에 속할 것 같습니까?
현재 우리 시온성교회는 창립 47주년을 맞았습니다. 여러 명의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들 그리고 성도들께서 함께 섬겼습니다. 그중에 일부는 여러 가지 이유로 떠났습니다. 아쉬움이 남는 대목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랜동안 교회를 섬겨 오신 분들은 과거의 이야기 중에 그때 그렇게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이야기하십니다. 맞습니다. 그때 그렇게 했어야 합니다. 그랬더라면 훨씬 나은 공동체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또 섬겼던 교회를 이런 이유로 저런 이유로 떠나온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 그렇게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아쉬움이 다 있습니다.
그럼 지금은 어떻게 하면 가장 좋은 방법일까요. 앞으로 미래에서 과거를 돌아보아 현재를 본다면 그때 어떻게 했던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일까요. 현재의 지도자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가 속한 교회 공동체가 가장 좋은 모습을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주장하기보다 공동체를 위해 권위를 인정하고 따르고 그리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위함이 되는 것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은 반드시 가야 할 길입니다. 그래야 공동체가 든든하게 서게 되고 건강한 걸음을 걷게 됩니다.
둘째 사랑이 부족함을 인식하고 사랑하기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해결하는데 가장 쉬운 것은 법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쉬운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의 형편과 처지와 상황은 무시합니다. 그리고 정한 법대로 합니다. 그러면 가장 쉬운 일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법대로 한다면 세상을 운영하시는데 쉬울 것입니다.
하지만 그 법보다 위에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습니다. 그 위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의 법입니다.
짧은 영상 중에 우리 교회 이찬수 목사님의 이야기 ”사람을 살리는 것은 논리가 아닙니다.“ 이 영상을 몇 번이고 봤습니다. 은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목사님께 이찬수 목사님도 배웠던 모양입니다. 교회는 용납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목양실 액자에 써 놓은 글귀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이 액자를 본다고 합니다.
”덜 논리적이면서 더 사랑하라“ 이유는 간단합니다. 영혼을 살리는 것은 논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시시비비를 가려내고 그것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어떤 것이 분명한지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같은 뜻을 영어 성경에는 judgement로 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의 뜻은 판단입니다. 그리고 뜻 앞에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해하면 됩니까? 무슨 일이든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덜 논리적이고 더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이성적인 생각과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이 아니라 더 사랑하는 마음이 이성적인 생각과 시시비비를 가리고 잘, 잘못을 따져 물어 둘 중에 하나는 상처를 받는 것보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져주라는 것입니다. 상대의 마음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각 사람의 영혼을 귀하게 여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마음을 따르기 위해입니다.
우리 몸으로 이야기하면 각자는 몸에 여러 가지 기관이 있습니다. 눈과 입과 코와 손과 발과 그 외에 손도 손가락, 발도 발가락, 입 안에도 혀가 있고 치아가 있습니다. 그리고 몸 안에 기관들은 더 복잡합니다.
각 기관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우 이성적으로 변했습니다. 시시비비를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그 몸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지만 몸은 잘 압니다.
바울은 그걸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고전 12: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고전 12: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고전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덜 논리적이 되더라도 더 사랑하면 어떨까요. 지금부터라도 말입니다. 따져 물어야 할 것이 있겠지요. 분명 범죄자를 잡기 위해,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 근본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먼저 생각하고 판단하고 그 판단에 따라 행동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살리기 위함이며 동시에 이 시대에 많은 교회들이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집니다.
셋째 성령의 도우심을 강력하게 구하여야 합니다.
내 의지, 내 힘, 내 지식으로 모든 것이 다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인생은 의지는 있다고 해도 안 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랬습니다. 마음으로는 나를 도와 함께 기도하길 원하지만 육체가 약하구나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는 일에 힘을 쏟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힘써야 합니다. 영적으로 건강할 때 교회 공동체는 어려움을 극복할 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부족할 때 교회는 작은 어려움에도 넘어지고 무너지고 흩어지게 되고 시험에 빠져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요즘 면역력을 높여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뜻은 사람이나 동물의 몸 안에 병원균이나 독소 등의 항원이 공격할 때, 이에 저항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면역력이 강할 때 웬만한 질병들의 공격을 그냥 견디고 이깁니다. 감기도 면역력이 떨어졌을 때 찾아오면 꼼짝 없이 당하고 맙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이 감기에 자주 걸립니다. 면역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김성권 권사님이 퇴원이 한 주간 더 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폐렴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면역력이 떨어지니까? 얼마든지 이길 수 있는 균을 이기지 못하고 걸린 것입니다.
맞습니다. 교회의 성도들이 기도하는 일에 게을리하고 영적으로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그의 인도하심을 얻지 못하면 사탄에게 넘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을 의지하는 교회가 강한 교회입니다. 같은 마음으로 시험을 이겨내고 같은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강력하게 전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영적 면역력을 높여야 합니다. 그것은 한 사람만 그래서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가족들이 다 같이 기도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그때 교회는 성령의 역사를 얻게 되고 다양한 은사를 통해 영적으로 축복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어느 목사가 새벽에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다가오셔서 물으셨습니다. “너는 나 때문에 행복하니?” 목사는 주님께서 “너는 나를 위해 목숨을 다해 충성하니?”라고 물어보셨다면, “그렇습니다. 주님을 위해 목숨 바쳐 충성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을 텐데,
“너는 나 때문에 행복하니?”라고 묻는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울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목사의 어깨를 감싸며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나를 위해 목숨을 바쳐 충성하는 것보다 나 때문에 행복하기를 원한다. 나를 위해 목숨 바쳐 충성하는 것도 기쁘지만,
나는 네가 나 때문에 행복하기를 원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 공동체가 짐이 되어 불행해지고, 충성을 경쟁하듯 서로 경쟁심에 빠져 교회 생활을 하는 것을 주님은 원치 않을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게으르고 무감각하고 무기력한 것을 원하시지도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의 창립 50주년이 여러분에게 짐이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교회를 섬기는 일이 누군가의 헌신 때문에 혹시 나는 못하는데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이런 마음이 없었으면 합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데도 남들에게 보이려고 애를 쓰고, 얼굴은 웃고 있지만 마음으로 괴로워하는 것을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같은 지체라면 누군가 50주년이라는 우리 모두가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그날이 부담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성령님이 원하시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분의 가르침도 우리가 진정으로 모두 기뻐하며 행복해 하며 즐겁게 그날을 기념하고 서로 축복하는 날이 되길 원하실 것입니다.
자신의 형편과 처지대로,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따스하고 사랑스러운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지나친 비전과 계획은 오히려 우리를 무너지게 할 것입니다. 할 수 있는 일을 마음을 두고 서로 협력하여 모두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할 오늘이며 또 내년이고 그리고 또 그날들이 올 때마다 감사와 사랑이 더욱 넘쳤으면 좋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