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그 해 여름
1993년, 현대수필로 등단을 하고 그 다음 해부터 나는 편집위원이 되어 일에 합류하였다.
어느 잡지는 편집위원이란 이름만 걸고 있는가 하면 우리는 직접 교정을 보고 책을 발송하면서
동참하였다. 그 해 여름 어느 날, 한낮의 더위가 오늘을 닮았다고 생각하자 그 날의 모든
기억이 숨죽었던 야채가 물을 만나면서 슬금슬금 일어나듯 그렇게 피어나는거다. 그 날과
상황이 닮았거나 날씨가 비슷하거나 하면 기억이 정확하게 피어난다는 것이 신비스럽다.
한낮의 골목은 그냥 풍경화가 되었다. 너무나 더워서 길에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데
어디선가 매미소리가 들릴 듯 나른하지만 평화로왔다. 우리는 길을 물어가며 집을 찾는
중이었다. 골목의 리어커들은 벽에 기대어 자고 있고 그 날의 온도가 39도라고 했다.
나는 36도 정도까지는 덥다는 말을 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데 그 날은 정말 덥다고 말을
한 날이다.
그 날도 날씨만 뜨거운게 아니라 내적 열기도 견디기 어려울 만큼 힘들었는데
오늘도 마찬가지다. 어머니가 입원을 하고 다른 노인들이 쓰러져 응급실마다 만원이라는
뉴스가 떴다. 노인을 혼자 있게 하지 말라는 의사의 경고다. 목디스크로 인한 팔 저림
현상과 급소를 누를 때마다 지독하게 아파서 진저리를 치곤 했다. 어머니가 아파 하는
것을 보는 것은 고문과 같다.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통증이 멎기를 바라게 되었고 시술을
통하여 모든 것이 일단락되었다. 한 동생은 어머니 병원에서 자신이 잠자는 당번을
하겠다고 나섰다. 병원의 에어컨은 견디기 좋을 만큼만 시원하게 하여서 피서란 말도
어울린다. 우리는 어머니가 며칠 그 곳에 머물다가 나가기를 바랐으나 몸이 회복되면
병원은 부자유한 곳이 되어버린다. 우리가 경고문을 읽어주면서 병원에 잠시 머물다가
나가자고 하여도 이 또한 통하지 않는 주문이 되었다. 겉도 덥고 속도 더운 날,
뉴스에서 증언한다. 1994년의 날씨와 같다고 한다.
딱 그 날의 조건으로 살기란 요원하듯, 딱 그 기분으로 살기도 요원하다. 누구든
과거가 희석되어 드러나고 다른 사람의 기억이 섞여 인식되기 마련이니, 일상사에서는
명명백백하기를 꿈꾸지 않는게 좋을 듯하다.
뇌가 익는다는 말을 할 정도로 덥다. 이유없이 지하철로 가는 노인들, 큰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가서 홀을 지키는 사람들, 커피집마다 만원사례다, 힘든 일이 생기면
반드시 웃음이 터지는 일도 생긴다. 어머니에게 몰입하는 사이에 집에서 들여다보지
않아서 다행인 일이 선물처럼 왔다. 생명을 중시하면서 살다가 보면 인생결산의 결과도
그 정도에 비례하리라는 확신이 든다.
최근 우리집에서는 전자제품이 죽기 경쟁을 벌인듯 하나씩 줄줄이 명을 달리 했다.
냉장고, 세탁기, 컴퓨터, 가스레인지 심지어 탁상 스텐드와 각 방의 전구들까지 바톤을
이어받더니 올 여름 들어 에어컨이 사망신고를 받았다. 하는 수 없이 보름 정도
견뎌보려는데 더위가 물러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더위를 피해 용평으로
전신자 성지순례를 가서 며칠을 번 것 같다. 절묘하게 얻은 3일간의 추억은 무엇이라
말 할 수 없이 강렬하다. 상대적 시원함에 재미와 시잡간 딸 가족이 합류하여 대화의
잔치를 벌였다.
행사의 캠프파이어 시간과 여흥의 시간에 손자가 끼어들어 가족의 관심이 모아지면서
하나되는 시간이 되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