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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5. 묵상글 들 ( 부활 제4주일-착한 목자와 착한 양의 두 성소 중에서 나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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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5.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활 제4주일-착한 목자와 착한 양의 두 성소 중에서 나는?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부활 제4주일은 이름하여 <착한 목자 주일>이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착한 목자이심을 기념하고 감사하며,
우리는 그 착한 목자의 또한 착한 양들이 되기로 다짐하는 주일입니다.
제가 자주 하는 얘기지만 주님을 우리의 좋은 목자라고 하지 않고
착한 목자라고 함은 성부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 잘 순종하는 목자인데
그런데 그 뜻이란 우리 양들을 위해 당신 목숨까지 바치라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성부의 이 뜻을 이루기 위해 오신 것이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 왔나이다."라고 누차 말씀하셨고,
성부의 흩어진 양들 또는 이스라엘의 흩어진 백성을 모으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러기 위해 당신 목숨까지 내놓으셨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런 목자이기에 아버지께는 착한 목자이지만 우리에게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목자 또는 좋은 목자라고 함이 좋을 듯 싶습니다.
아버지에게만 착한 아들이 아니라 동생들에게도 좋은 맏형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누구보다 상속을 많이 받고 그래서 부모에게는 아주 효도하지만
동생들과는 우애가 좋지 않고 상속 재산을 하나도 동생들애개 내놓으려
하지 않는 형들을 많이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아버지께 효도와 순종을 잘하는 착한 아들이자
동생인 우리에게도 잘하는 맏이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런 뜻에서 우리는 주님을 착한 목자 또는 좋으신 목자라고도 부르지만
형님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고 주님께서도
여러 차례 우리를 당신의 형제라고 부르셨지요.
최후 심판 비유에서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고 하셨고,
어머니와 형제들이 당신을 보러왔다고 했을 때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라고 하셨으며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고 전하여라." 하셨지요.
이런 묵상을 올해는 다른 해와 달리 하였는데
또다른 묵상도 올해는 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처럼 착한 목자가 되는 것과 착한 양이 되는 것중에서
나는 어떤 것을 선호하고, 또 다른 사람 특히 요즘 젊은이들은 무엇을
선호할까 묵상한 것인데, 오늘이 바로 성소주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저는 주님처럼 감히 양들의 착한 목자가 되겠다고 했고
그래서 사제 성소를 선택하였는데 이제는 자기를 다 내어줘야 하는
부담스러운 착한 목자보다는 목자의 보살핌을 그저 잘 받기만 하면
되는 착한 양의 성소를 살고 싶습니다.
제가 이렇게 된 것은 겸손의 차원도 있지만
제가 약해지면서 이기주의적이고 안주적인 제가 된 것이 큰 이유지요.
그런데 착한 양의 성소도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착한 양은 착한 목자를 진정 잘 따라야 하는데
착한 목자를 잘 따르는 것은 십자가의 길을 잘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런 뜻에서 저는 프란치스코의 여섯 번째 권고를 같이 나누며
다시 한번 착한 목자와 착한 양의 두 성소를 잘 살기로 결심합니다.
“우리 모두 당신 양들을 속량하기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견디어 내신
착한 목자를 주의 깊게 바라봅시다. 주님의 양들은 고난과 박해,.유혹 등
모든 점에서 주님을 따랐고 그리하여 주님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인들은 이렇게 업적을 이루었는데 우리는 그저 이야기만 하고,
영광받기만 원하니 이것은 하느님의 종들인 우리로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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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5. 부활 제4주일. 고도미니코 신부님. -터키 에페소 기도의집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목자와 양의 비유를 들으시며 당신이 착한 목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본래 목자는 목축업을 하는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이후 목자라는 말은 성서 안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은유적으로 적용되어 사회적 지위나 종교적 신원 및 직분을 가리키는 칭호로 바뀌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목자의 의미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르면 지역 교회 또는 본당 공동체의 성무를 수행하는 교구 주교나 본당 주임 신부를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세례받은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 즉 히느님 백성 전체가 신자들의 공동 사제직에 관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 에언자요 사제 그리고 목자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하느님과 당신 백성과의 친밀한 관계는 성서의 기본주제 중 하나입니다. 이런 관계는 성서 안에서 목자와 그가 돌보는 양 떼와 비유되어 표현되어 발전하여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하느님의 자비 넘치는 목자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느님에 의해 부름을 받을 당시의 모세와. 다윗 그리고 아모스 예언자 실제로 양 떼를 치던 목자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구약성서 안애서 목자의 직엽은 존중을 받았고 옥자의 칭호 또한 비유적인 의미로 쓰여 존귀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에수님 당대에 옥자의 직업은 유대교의 랍비들에 의해 부정직한 직업으로 여겨져 천대받았습니다. 세리처럼 목자들 또한 법정에서 증인으로 채택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둑과 사기꾼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이렇게 목자가 천대받았던 배경에는 고용된 목자들이 가축들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남의 목초지에 무단으로 방목하고, 가축이 새끼를 가진 경우 이를 주인 몰래 팔아 횡령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목자상이 지배하던 시대에 예수님께서 ‘나는 착한 목자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죄수들의 형벌인 상징으로서 치욕으로 여겼던 십자가를 거룩한 십자가로 되돌린 것처럼 천대받던 목자상을 원래의 참된 목자상으로 되돌려 놓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참된 목자는 이리가 침입하는 위험한 상황에 양들을 버려 두고 도망치는 삯꾼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참 목자이신 예수님을 본받도록 우리 신앙인 모두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고 도미니코 o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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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5. 부활 제4주일. 김명겸요한 신부님.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각각의 양들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에 대해서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목자만 자기 양들을
잘 아는 것이 아니고
양들도 자기 목자를 잘 알고 있습니다.
목자가 자신의 모습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에
양들은 목자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서로 관계를 맺기 위해 필요한 것이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것입니다.
서로에 대해서 아는만큼
관계는 깊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감추고 속이면
오히려 관계는 피상적으로 변해갑니다.
깊은 관계를 위해
서로에 대한 관심과
상대방에게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깊은 관계는
결국 일치를 향해 나아갑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가
서로 안다는 것은
성부와 성자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목자와 양들도 서로 알아가면서
일치를 향해 나아갑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다른 위격이면서
한 분 하느님으로 일치를 이루십니다.
하느님과 인간은
창조주와 피조물로서
서로 다르지만,
관심과 개방성으로 서로에 대해 알아가면서
일치를 향해 나아갑니다.
하느님을 믿는 우리 각자도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일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은 점점 분열로 나아갑니다.
그것이 싫어서 일치를 이야기하지만,
강압에 의한 일치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어느 한 쪽으로 획일화되는 일치는
또 다른 분열을 만들어 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하나되시기 위해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육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하느님에 대해서 알려고 노력하고
나 자신의 모습도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드러낼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여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치,
나 자신을 내어주며
서로를 인정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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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5. 부활 제4주일.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여행 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언어가 다른 지역으로의 여행은 언어의 장벽으로 힘듭니다. 간단한 대화야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만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한 번은 외국의 한 성지에서 혼자 있는데 한 외국인이 다가와서 한국인이냐고 묻습니다. 맞다고 하자, ‘나주 성모’에 관해 묻는 것입니다. 간단한 대화 이상은 불가능한 저에게 이단에 관한 대화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 뒤 외국인과 대화하는 것에 늘 긴장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에 읽은 책에서 이런 제 생각의 전환을 가져올 수 있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저자는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과 대화 나누는 것이 너무나 즐겁다는 것입니다. 눈빛, 손짓 그리고 온몸으로 필요한 말만 주고받는 것이 즐겁다는 것이었지요. 무엇보다도 경청하려는 노력을 서로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에게서는 볼 수 없는 경청의 모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생각해보니 그렇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더 집중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경청하려는 노력만으로도 아름답고 의미가 있습니다. 굳이 심각한 토론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저 필요한 말을 서로 들어주려고 노력하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만남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에 대해서도 묵상하게 됩니다. 외국인의 말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온몸 전체로 집중하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께 얼마나 집중하고 있었을까요? 이런 집중을 제대로 하지 못하니, 주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은 주님의 부르심에 대해 생각하는 성소주일입니다. 그 부르심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모습과 가장 필요한 모습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과의 시선을 맞춰야 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생명까지 내놓으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그런데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양들보다 자신의 안위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삯꾼과 같은 세상의 목소리만 듣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세상이라는 삯꾼은 내가 잘못되는 것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자기만 잘 되면 그만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지가 분명해집니다. 바로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따르는 착한 양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역시 주님을 착한 목자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이 주님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부르심을 제대로 따르는, 자신의 성소를 지키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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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의 반대는 욕심이 없음이 아닌, 잠시 내게 머무름에 대한 만족입니다(달라이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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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와 인생
예전에 지방에 갔다가 큰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빙판길에 제 차가 빙글빙글 돌아서 어느 담벼락에 그대로 충돌한 것입니다. 차는 곧바로 정비소로 향했고, 저는 다시 인천으로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호출했던 보험사 직원은 렌터카를 불러준다고 하는데, 너무 놀라서 과연 운전해서 인천까지 갈 수 있을까 싶은 것입니다. 이 순간, 정말로 운전하기가 싫었습니다. 하지만 대신 운전해 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또 인천에서 해야 할 일도 많아서 반드시 가야만 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하기 싫어도 운전을 해서 인천에 가야 합니다.
이 운전과 우리의 삶이 비슷하다고 생각해봅니다. 차를 직접 운전해야지만 자신이 원하는 목적지에 갈 수 있는 것처럼, 제 삶도 제가 직접 이끌어야 원하는 목적지에 갈 수 있습니다. 물론 고통과 시련으로 아무것도 하기 싫고 도망치고 싶은 순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망치기만 하면 진짜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힘들어도 해야지만 자신의 목적지에 갈 수 있습니다.
내 삶의 주인은 바로 ‘나’입니다. 나만이 운전할 수 있는 나의 삶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내가 원하는 삶이 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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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5. 부활 제4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신부님.
“나는 착한 목자이다.”
오늘은 부활 제4 주일이며, 성소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향하여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베드로는 예수님 부활의 선물인 성령으로 가득 차서,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 이름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밖에는 없다고 증언합니다.
<제2 독서>에서 요한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그분처럼 되고, 그분을 뵙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착한 목자”로 선포하시면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고 생명을 얻어주는 부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요한 10,11)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은 당신 백성의 “목자”로 언급됩니다. 그리고 유배를 겪으면서 예언자들은 하느님을 당신 백성을 모아들일 미래의 “착한 목자”로 소개합니다(에제 34,11-16;스바 3,19;미카 2,12 등). 그리고 미래에 나타나 백성의 목자가 될 다윗 가문의 한 인물을 언급합니다(예레 3,15;23,4-6;에제 34,23-24;37,24;미카 5,1-4).
오늘 <복음>에서 “착한 목자”는 하느님과의 하나 됨에 그 바탕이 있습니다. 곧 그는 하느님이 보낸 목자인 동시에, 보낸 분의 마음에 드는 목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삯꾼과는 달리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일로 드러납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요한 10,14-16)
여기에는 “착한 목자”의 특성이 세 가지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착한 목자”의 <첫째> 특성은 양들과 서로 압니다. 곧 양 없는 목자는 있을 수 없으며, 목자는 항상 양과 함께 있어야 목자 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께 있기에 서로 압니다. 이는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알 듯, 밤낮 같이 지내면서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을 말합니다. 곧 양들을 “안다”(γινωσκω)는 것은 ‘사랑으로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착한 목자”의 <둘째> 특성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습니다. 곧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목자는 양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양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놓을 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바칩니다. 이것이 바로 목자의 존재 근거요 신원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다는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 3,16)
“착한 목자”의 <셋째> 특성은 ‘양 우리 밖’에 있는 양들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요한 10,16)
예수님께서는 이를 실행하기 위해, 스스로 자유로이 목숨을 내놓으십니다. 그리하여 목숨을 다시 얻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요한 10,17)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사랑의 죽음과 부활,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요한 10,17)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를 항상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일’, 바로 이 일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우리 주님에게서 받은 명령입니다.
오늘은 성소주일입니다. 성소는 바로 이처럼, 부여받은 소명을 사는 일입니다. 곧 자신이 아니라, “양들을 위하여” 사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셨듯이, 성소도 “양들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일입니다. 이처럼, 성소는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양 우리 밖”에 있는 양들을 데려오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고귀한 사랑을 성소로 받아 살아가고 있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선사하신 이 아름다운 ‘사랑의 성소’를 삶으로 불태워야 할 일입니다.
리지외의 소화데레사 성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성소는 사랑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5)
주님!
당신의 눈은 항상 저를 향하고 계십니다.
저를 살리기 위해 당신을 내놓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보십니다.
주인이면서도 군림하지 않으시고 시중들기 위하심입니다.
이 지고한 당신의 사랑 앞에, 황송함으로 무릎 꿇어 경배합니다.
오늘 제 마음이 형제를 향하여 있게 하소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놓기 위해서 그러하게 하소서.
섬김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그러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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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5. 부활 제4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스크랩 부르심의 꿈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제58차 성소 주일 담화 (2021년 4월 25일)
성 요셉: 부르심의 꿈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지난해 12월 8일, 요셉 성인이 보편 교회의 수호자로 선포된 지 150주년을 기념하여 성인께 바치는 특별한 해를 시작하였습니다. 요셉 성인은 특별한 인물이지만 동시에 “우리 저마다의 인간적 상황과 매우 밀접한” 인물입니다. 성인은 딱히 놀라운 일을 한 것도, 고유한 은사를 받은 것도, 만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 만한 특별함을 드러낸 것도 아니었습니다. 복음서들은 그의 말을 단 한 마디도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평범한 일상을 통하여 하느님의 눈에 특별해 보이는 무엇인가를 성취했습니다.
요셉 성인은 우리 저마다의 부르심에 있어 세 가지 핵심 단어를 제시합니다. 첫 번째 단어는 꿈입니다. 사람들에게 그들 삶의 꿈을 한마디로 표현해 보라고 할 때에, ‘사랑받는 것’이라는 대답을 상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실 우리가 삶을 내어 줄 때 비로소 삶은 우리 자신의 것이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요셉 성인은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 주실 것입니다.
복음서는 우리에게 네 가지 꿈들을 보여 줍니다(마태 1,20; 2,13.19.22 참조). 꿈을 꿀 때마다 요셉은 자신의 계획을 변경하고 위험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 성인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꿈이 안내하는 대로 따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인의 마음이 하느님을 향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 마음이 하느님께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꿈들은 그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경험들로 그를 이끌었습니다. 첫 번째 꿈은 그의 약혼을 혼란에 빠뜨렸지만, 그가 메시아의 아버지가 되게 해 주었습니다. 두 번째 꿈은 그를 이집트로 피신하게 하였지만, 가족들의 생명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예언한 세 번째 꿈 이후, 네 번째 꿈은 다시 한번 그의 계획을 변경하게 하여 나자렛으로, 곧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시작하실 곳으로 그를 이끌었습니다. 이러한 온갖 출렁이는 파도 속에서도 그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용기를 찾았습니다. 부르심도 이와 같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우리가 첫걸음을 내딛게 하고, 우리 자신을 내어 주게 하며, 앞으로 나아가라고 재촉합니다. 성인의 받아들임은 능동적 수용이었습니다. 요셉은 “분명 수동적으로 굴복하는 사람이 아니라, 용기 있게 굳건한 의지로 상황을 주도하는 사람입니다”(「아버지의 마음으로」, 4항). 성인께서 모든 이들, 특히 자신을 위한 하느님의 꿈이 실현되도록 식별 가운데 있는 젊은이들을 도우시기를 빕니다.
두 번째 단어는 섬김입니다. 이는 요셉 성인의 여정과 성소의 여정을 특징짓는 말입니다. 자기 증여의 구체적인 표현인 섬김은 요셉 성인에게 그저 고결한 이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위한 하나의 규칙이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보금자리를 찾고 준비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또한 그는 헤로데의 분노에서 예수님을 보호하고자 때를 놓치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이집트로 피신할 채비를 갖추었습니다. 잃어버린 예수님을 찾으러 지체 없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타향살이에서조차 노동으로 가정을 일구어 나갔습니다.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전형인 기꺼이 내어 주는 마음을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보호자요 교회의 보호자인 요셉 성인을 성소의 보호자로 여기게 되어 기쁩니다. 실제로 기꺼이 섬기려는 마음에서 그분의 보호하는 마음이 나왔습니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갔다.”(마태 2,14)라고 하는 복음서의 말씀은 가족의 선익을 위하여 요셉 성인이 민첩하고도 헌신적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사려 깊고 배려하는 보살핌이 참다운 성소의 징표이며 하느님 사랑으로 감도된 삶의 증거입니다.
우리의 위대한 꿈들을 실현시켜 주는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고, 관대한 섬김과 배려 어린 보살핌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응답이 있습니다. 이에 더하여, 요셉 성인의 삶과 우리 그리스도인의 성소를 관통하는 세 번째 특징인 성실성이 있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마태 1,19)입니다. 요셉은 날마다 조용히 일하는 가운데 하느님께 그리고 하느님 계획에 인내로이 따랐습니다. 이러한 성실성은 어떻게 길러집니까? 하느님의 성실성에 비추어 봅시다. 요셉 성인이 꿈에서 들었던 첫 번째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초대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당신 약속에 충실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아라”(마태 1,20).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형제자매 여러분에게 건네시는 말씀입니다. 이는 요셉 성인처럼 자신의 삶으로 날마다 성실하게 하느님께 “예.” 하고 대답하는 이들을 따르는 후렴구와도 같은 말씀입니다.
이러한 성실성이 기쁨의 비결입니다. 이는 소박함에서 나오는 일상의 순수한 기쁨입니다. 이는 참으로 중요한 것, 곧 성실하게 하느님과 맺는 친교 그리고 이웃과 맺는 친교를 지켜나가는 이들이 증거하는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바로 이러한 기쁨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너그럽게도 여러분은 하느님을 여러분 삶의 꿈으로 택하였습니다. 순간의 기쁨만을 가져오는 덧없는 선택과 감상의 시대에 강력한 증거가 되는 성실성을 통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형제자매들 안에서 하느님을 섬기려 하는 것입니다. 성소의 보호자이신 성 요셉께서 아버지의 마음으로 여러분의 길에 함께해 주시기를 빕니다!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2021년 3월 19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에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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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5. 부활 제4주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0,1-10: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1절) 목자가 드나드는 ‘문’은 바로 ‘성경’을 의미한다. 성경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데려다주고 우리에게 하느님에 관한 지식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를 그분의 양 떼로 만들어 주며 우리를 이리떼로부터 막아준다. 부활하신 주님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시니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문이시고, 우리를 보살피는 목자이시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2절) 목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들어가는 사람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본받으며 그리스도의 겸손을 잘 아는 사람이다. 양들의 목자는 가르침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며, 문을 이용한다. 온 마음으로 삶으로써 우리에 들어가는 사람이다. 그는 다른 모든 이에게 그들이 배불리 먹고 이후로도 계속 먹어야 할 말씀의 양식을 보여 줌으로써 그들을 양들처럼 풀밭으로 인도한다. 그 목자는 말씀, 곧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또 멀리해야 하는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 가르치며 인도한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준다.”(3절) 문지기는 주님이시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문’으로 또는 ‘목자’로 표현하신다. 문지기는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다. 그러니 당신을 열어주는 이는 당신 자신을 눈에 보이게 드러내 보여 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문이시며 진리이시다. 문을 열어주시는 분이 우리 모두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목자는 이들을 이름으로 부른다. 그리고 그들은 목자를 따른다. 양들은 그들이 듣기 좋아하는 목소리를 지닌 목자를 따른다. 이 목자는 양들을 앞에서 이끄신다. 양들 앞에서 양들이 따라가야 할 곳으로 앞장서서 간 분은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 다시는 죽지 않는 주님이시다. 이 양들은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도망친다. 우리는 목자의 소리를 따라야 한다. 주님께서 목자로서 문을 통해 우리를 부르실 때, 그분을 따라야 할 것이다.
“나는 문이다.”(9절)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문이시다. 구약과 신약의 모든 백성이 그 문을 통하여 아버지께로 들어가게 된다. 곧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하여 모두가 하느님과 일치하게 된다. 그분은 길이시다. 당신 자신을 통하여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를 안으로 들여보내 주는 문이시며, 우리를 물가에서 쉬게 하시고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여 그곳에 머무르게 하는 목자이시다(시편 23,2 참조).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10절) 이것은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갈라 5,6)을 말한다. 이러한 살아있는 믿음으로 그들은 우리로 들어가고 생명을 얻는다. 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이다(로마 1,17 참조).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뿐 아니라, 이 문을 통하여 들어감으로써, 즉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써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된다. 진리를 통한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사는 우리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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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5. 부활 제4주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 11)
부르심은
한줄기
빛이다.
부르심은
신비이다.
부르심은
버리지 않고는
따를 수 없는
결단의
지속적인
여정이다.
부르심은
참된
소명이다.
우리가
누군지를
깨닫게된다.
부르심의 고백은
신앙의 고백이
된다.
부르심은
은총이다.
부르심은
우리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이다.
부르심은
우리의
생활로
드러난다.
부르심은
착한 목자이신
주님과의
참된 만남이다.
참된 만남은
참된 사랑으로
깊어가야 한다.
회개와
망각 사이에
부르심이
있다.
부르심은
회개를 통한
변화이다.
부르심을
돌보시는 분은
언제나
주님이시다.
부르심은
목숨이다.
착한 목자는
목숨을
내놓는다.
부르심은
기쁨이다.
착한 목자와
함께하는
참된
행복이다.
부르심은
착한 목자를
향한 신뢰이다.
싱싱한
부르심은
풍요로우신
주님의
현존이다.
부르심의
그 뜨거움을
다시 만나는
성소주일이다.
모든 부르심의
기쁨을 위해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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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5. 부활 제4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요한 10,11-13).”
“나는 착한 목자다.” 라는 말씀에서 ‘착하다.’는 말은,
단순히 성품이 착하다는 뜻이 아니라, 물론 그 뜻도 포함해서,
선(善) 자체이신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 일한다는 뜻입니다.
‘선하신 하느님의 뜻’은 ‘인간 구원’입니다.
‘착한 목자’가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은, 하느님의 그 뜻을 실현하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 분이기 때문에 ‘착한 목자’이신 분이고,
원래 ‘착한 목자’이신 분이기 때문에 자기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착한 목자’의 반대말은 ‘악한 목자’인데, ‘악한 목자’는 하느님의 뜻은 외면하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목자입니다.
(사실상 목자가 아닌, 거짓 목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삯꾼’은 바로 그런 ‘거짓 목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에제키엘서에 이런 예언이 나옵니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 그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야 했다.
흩어진 채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다(에제 34,2-5).”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그 목자들을 대적하겠다(에제 34,10).”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에제 34,15-16).”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에제키엘서의 예언이 이루어진 일입니다.
거짓 목자들을 꾸짖는 에제키엘서의 말씀에서 복음서의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2,38-40).”
(여기서는 율법학자들만 언급되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학자들뿐만 아니라,
바리사이들과 사제들과 지도자들까지 모두 겨냥한 말씀입니다.
그들은 당시에 ‘목자’로 행세했던 자들입니다.
또 과부들만 언급되었지만, 실제로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모두 해당됩니다.
힘없는 서민들은 기득권층 사람들의 착취와 억압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의 예언이 구약시대에서 끝나는 일일까?
예수님의 말씀이 당시의 상황을 비판하는 말씀으로 그치는 것일까?
오늘날의 상황은 어떤가?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4-15).”
여기서 ‘안다.’ 라는 말은 ‘일치’를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양들의 일치의 원형은 아버지와 예수님의 일치입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라는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사람으로 사신 것은
바로 사람들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사람들을 하늘로 데려가십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면서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 쪽에서도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착한 양’이 되어야 한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착한 목자이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 쪽에서도 ‘착한 양’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제대로 응답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으신 일을 ‘헛일’로 만들어버리게 됩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 자체는 결코 ‘헛일’이 아니지만,
그 은총을 안 받아서 못 받는 사람에게는 ‘헛일’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쪽에서도 착한 양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은,
“부르심(성소)에 제대로 응답해야 한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그래서 이 말을 ‘탈렌트의 비유’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탈렌트의 비유’에서 주인이 종들에게 탈렌트를 나누어 주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종들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신 일도,
또 우리 각자에게 제각각 다른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 주신 일도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탈렌트의 비유’에서 사람마다 다르게 탈렌트를 받는 것은
은사의 ‘크기의 차이’가 아니라, ‘다양성’을 나타냅니다.
성소의 다양성과 은사의 다양성은 차별도 아니고 불공평한 일도 아닙니다.
각자에게 가장 적당한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소와 은사에 ‘우열’의 차이는 없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받은 성소나 은사에 시기 질투를 하면 안 되고,
자신이 받은 것에 열등감을 가질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는 ‘탈렌트의 비유’에 나오는 세 번째 종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최소한 죄는 짓지 않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은혜를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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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5. 부활 제4주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2017년 5월 7일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에제키엘 예언서는 참되고 착한 목자에 대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전에 먼저 못된 이스라엘 목자들(에제 34,1-10)에 대한 말씀을 전하지요.
“나의 양 떼는 목자가 없어서 약탈당하고, 나의 양 떼는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는데,
나의 목자들은 내 양 떼를 찾아보지도 않았다. 목자들은 내 양 떼를 먹이지 않고 자기들만
먹은 것이다.”(8절)
하느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다시는 그 목자들이 양 떼를 자기들의 먹이로 삼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양 떼를
그들의 입에서 구해 내어, 다시는 그들의 먹이가 되지 않게 하겠다.”(10절)
이어서 예언자는 착한 목자에게 대한 하느님 말씀을 전합니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자기 가축이 흩어진 양 떼 가운데에
있을 때, 목자가 그 가축을 보살피듯, 나도 내 양 떼를 보살피겠다. 캄캄한 구름의 날에,
흩어진 그 모든 곳에서 내 양 떼를 구해 내겠다.”(11-12절)
하느님께서는 친히 착한 목자가 되시어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도 도로 데려오고
부러진 양은 싸매주고 아픈 양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시편저자는 하느님이신 목자를 믿고 따르는 행복한 양에 대한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시네.
당신 이름 위하여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시편 23,1-4)
사도 베드로는 박해받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우들을 향해 ‘주님께서 친히 길 잃고
흩어진 양들을 찾아 나서시는 인자하신 목자’이심을 전하는 편지를 씁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었지만, 이제는 여러분 영혼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그분께 돌아왔습니다.“(1베드 2,24-25)
주님께서는 참된 목자이십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요한 10,3-4)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양과 목자와의 친밀한 관계를 들어 당신과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과의 사랑의 관계를 설명하십니다.
사랑이 많은 부모는 자녀들에게 무엇이든 주려고 합니다. 그것이 사랑의 특징이지요.
목자이신 주님께서도 당신 자녀들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합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 저자는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9-10절)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생명까지도 바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사랑이신 주님께서는 양떼인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려서 아버지
하느님께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생소하겠지만 목자는 들판에서 양떼를 데리고 다니다가 날이 어두우면 주로
동굴에 양들을 넣고 그리고 자신은 문 앞에서 지냅니다. 야생 동물들이 양들을 물고 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유목민들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동굴 앞에 돌을 쌓고 문을 만들어 저녁에는 양들을
집어넣고 또 아침에는 양들을 꺼내서 데리고 풀이 있는 곳으로 나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몇 백 마리 되는
양들을 목자는 압니다.
양들이 새끼를 낳고 어미를 따라다니는 것까지도 알고 있지요. 그래서 그 나름대로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것입니다.
저녁에 우리에 집어넣을 때 한 마리 한 마리 이름을 세어보며 양들이 다 있는지를 확인하지요.
그러다가 없어진 양이 있으면 양들을 우리에 둔 채 양의 이름을 부르며 낮에 다녔던
들판을 다닙니다.
왜냐하면 길 잃은 양은 사나운 늑대나 이리에게 죽기 때문이지요. 놀라운 것은 양이
그 이름을 부르면 양은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를 냅니다. 그래서 목자는 그 양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하느님을 신뢰하는 시편저자는 이렇게 청원의
기도를 바칩니다.
“내 당신을 부르던 그날,
당신의 귀를 기울여 주셨음이로다
죽음의 올가미가 나를 에우고, 지옥의 올무가 나를 덮쳐,
슬픔과 괴로움에 잠겨 있었노라
나는 당신 이름 부르며 빌었었노라
“주여, 이 목숨 살려 주소서” 하고.
주님은 의로우시고, 다정도 하시어라,
우리들의 하느님은 인자도 하시어라 (시편 116,2-5)
오늘은 성소주일입니다.
교회의 많은 젊은이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우리고
봉사자, 수도자, 사제의 길로 나갈 수 있도록
온 교회가 기도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주님께서 우리의 목자이심을 기억하며
더욱 주님께 의지하며 우리의 삶을 살 수 있는
다짐을 하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삶의 무게에 짓눌린 사람들을 초대하시며
다 당신에게 나오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때로 슬프고
때로 고통스럽더라도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께 시편저자가
부르짖은 것처럼 우리도 부르짖고 의지하며 그분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이름을 기억하시며 내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도 우리를 불러 주시며 들어주십니다.
목자이신 우리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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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5. 부활 제4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코로나19를 예방하기 위해서 ‘백신’을 맞았습니다. 2번에 걸쳐서 백신을 맞았습니다. 처음 맞았을 때는 약간 뻐근했지만 생활에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2번째 맞았을 때는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몸이 아팠습니다. 미열이 있었고, 근육통이 있었고, 기력이 없었습니다. 백신 접종 후 발열, 오한, 피로, 두통, 또는 주사 부위 쓰라림/붓기 등의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백신은 강력 할 수 있지만, 이는 신체가 코로나19에 대항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백신을 통해서 내 몸에 코로나19의 대한 저항력이 생긴다고 합니다. 백신과의 경쟁에서 항체를 만들어 내는 내 몸의 면역체계가 고마웠습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하는 성소주일입니다. 성소 주일은 1964년 바오로 6세 교황이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정하였습니다. 이날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성소를 계발하고 육성하는 일에 꾸준한 기도와 필요한 활동으로 협력해야 할 의무를 자각하게 하는 기회가 되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되는 것은 성령을 받아 악의 세력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혼인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작은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수도자가 되어 가난, 정결, 순명의 삶을 사는 것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성직자가 되어 성사를 집전하는 것은 교회의 봉사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된 그리스도인은 3가지 직무를 실천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예언직(預言職)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양심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양심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끄러움을 알아야 합니다.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 합니다. 옳고 그름을 식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양심을 버리고, 하느님과 멀어졌을 때면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예언자는 잘못된 길을 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습니다. 예언자는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시대의 징표를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예언자는 높은 망루에서 어둠을 밝히는 등대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봉사직(奉仕職)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의 위선과 허영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의 말은 따르지만 그들의 행동을 배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베들레헴의 구유로 오신 것은 봉사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봉사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기 위해서 왔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강도 당한 이웃을 도와준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헐벗고,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제사직(祭祀職)입니다. 예수님께서는 7성사를 제정하셨습니다. 성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실한 성사생활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세례성사를 통하여 죄를 사함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견진성사를 통해서 성숙한 신앙인이 됩니다. 고백성사를 통해서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습니다. 병자성사를 통해서 치유해 주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혼인성사를 통해서 성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신품성사를 통해서 교회의 봉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성체성사를 통해서 예수님을 받아 모실 수 있습니다. 성사생활을 충실하게 하는 신앙인은 이미 다가온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착한목자’에 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착한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 생애를 거쳐 이 말씀을 실천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계속되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것입니다. 이미 부르심에 응답한 사제나 수도자들은 하느님과의 깊은 친교에서 오는 기쁨과 행복을 삶 안에서 보여 주어야 합니다. 또한 각 본당과 신앙 공동체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려는 이들에게 많은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성소주일인 오늘 우리 교회 공동체는 사제 성소자와 봉헌 생활 성소자들을 이 나올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은총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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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5. 부활 제4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착한 목자 예수님 닮기
- 꿈, 섬김, 성실성 -
오늘은 부활 제4주일이자 성소주일입니다. 일명 착한 목자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오늘은 특히 교회의 사제, 수도자, 선교사 증진을 위한 날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두의 성소를 생각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성소주일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시작되던 1964년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9,37-38) 하신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정한 날입니다. 그러니 올해는 제51차 성소주일이 되는 해입니다.
올해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제58차 성소 주일 담화 내용도 참 깊고 풍부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성 요셉: 부르심의 꿈”이란 주제에, “이제 저희는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따르렵니다.”(다니3,41) 성구 말씀도 은혜로웠습니다. 어제 저녁 성무일도시 마리아의 노래 후렴,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알아 보며 나를 따르노라, 알렐루야, 알렐루야” 구절도 이와 일맥상통하여 참 정겨웠습니다.
우리의 성소 역시 참 은혜로운 선물이자 평생과제입니다. 끝까지 착한 목자 예수님을 평생 시종일관 한결같이 충실히 따를 때 완성되는 우리의 성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믿는 이들의 삶 역시, 성소의 여정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다. 문제는 오늘 지금 여기 나의 현주소입니다. 과연 착한목자 예수님을 잘 따르고 있는지, 착한 목자이자 영원한 도반, 길벗인 예수님과의 우정의 관계는 날로 깊어지고 있는지 성찰하게 됩니다.
어제의 은혜로운 체험을 나누고 싶습니다. 수도원의 십자로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착한 목자 예수 성심상에 관계된 이야기입니다. 올해 사순시기 첫날 재의 수요일 아침에 발견한 예수 성심상을 받치고 있는 바위판 측면의 기도하다가 바위가 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 이후 날마다 산책때 마다 눈여겨 보며 감동을 받곤 합니다.
당시는 초봄이라 무채색의 쓸쓸한 배경의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신록의 단풍나무에 진홍의 철쭉꽃과 샛노란 애기똥풀꽃들의 배경이 되어 참 아름답습니다. 그러니 봄, 여름, 가을, 겨울 일년사계,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거기 그 자리에서 기도하다가 바위가 된 사람의 모습은 요즘 제 성소의 여정에 샘솟는 활력의 샘이 됨을 깨닫습니다.
어제는 기도하다가 바위가 된 분 옆에서 같은 포즈로 사진도 찍어 여러분과 카톡 전송을 통해 나눴고 마침 만난 몇분도 찍어 드렸더니 참 기뻐했습니다. 오늘 성소주일에 참 좋은 주님의 선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착한목자 주님과 우정의 여정입니다. 마침 교황님의 성 요셉을 중심으로 한 성소주일 담화문 내용도 성소의 여정에 좋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요셉 성인은 우리 저마다의 부르심에 있어 세가지 핵심 단어를 제시합니다. 첫 번째 단어는 꿈입니다. 두 번째 단어는 섬김입니다. 세 번째 단어는 성실성입니다.’라는 요지를 중심으로 다채롭고 풍요롭게 펼쳐진 담화문이었습니다.
부전자전입니다. 양부 요셉을 그대로 닮은 착한 목자 예수님이요 부르심을 받은 우리의 신원을 새로이 하는데도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세 측면에 걸쳐 자신의 성소를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요셉처럼, 착한 목자 예수님처럼 꿈꾸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하늘 나라를 꿈꾸는 사람입니다. 마침내 꿈이 현실화 될 때 우리 모두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나라가 되어 살게 됩니다. 이래야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불림받은 우리들은 얼마나 자랑스런 존재인지요! 제2독서 요한 사도 말씀이 참 고맙습니다. 그대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복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 바로 이것이 평생 우리의 꿈이자 소원입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을 따라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은 그대로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이 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녀답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원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역시 선물이자 평생 과제입니다. 예닮의 여정에 한결같이 충실하면서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로 시작되는 주님의 기도 역시 예닮의 여정, 하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둘째, 착한목자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성 요셉처럼 섬김의 사람입니다. 아니 우리를 섬기시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섬김의 권위, 섬김의 직무, 섬김의 사랑, 섬김의 겸손, 섬김의 순종, 섬김의 환대, 섬김의 순교, 섬김은 착한 목자 예수님의 모두이자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의 모두가 됩니다.
참으로 그가 하느님의 자녀인지 검증할 수 있는 잣대가 섬김입니다. 참으로 섬김의 삶에 충실할수록 투명히 드러나는 예수님이자 하느님입니다. 바로 섬김이 착한 목자와 삯꾼 같은 거짓 목자를 분별하는, 또 진짜 하느님의 자녀인지 분별하는 잣대가 됩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의 신원을 다음 복음 서두 말씀이 잘 요약합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참으로 착한 목자 예수님을 닮은 섬김의 삶,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사는 이들이라면 날마다 하루하루 목숨을 내놓는 삶이어야 할 것입니다. 날마다 죽고 태어나는 파스카의 삶은 그대로 섬김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우리의 평생공부는 무엇인가?
하느님의 자녀로, 섬김의 삶으로 불림 받은 우리의 평생공부는 착한목자 예수님과 참나를 알아가는 공부입니다. 평생학인의 기본적 자질이 성실성과 더불어 항구하고 열렬한 주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진실하고 성실하고 절실한 삼실의 사랑에 공부입니다. 이런 사랑 공부와 더불어 함께 가는 앎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베드로의 명쾌한 고백이 고맙습니다.
“이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
이래서 동방수도자들이 바치는 ‘하느님의 아드님,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라는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기도를 권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 가득 담아 끊임없이 바치는 기도가 주님과의 우정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의 거듭된 말씀도 감동입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어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참으로 착한 목자 주님을 사랑하여 알아가는 평생공부가 주님의 양들은 우리에게는 얼마나 중요한 공부인지 깨닫게 됩니다. 착한 목자 주님과 사랑으로 하나되어 갈수록 주님과 더불어 참 나를 알게 되니 바로 이것이 영원한 생명의 구원이요 무지와 허무에 대한 유일한 치유의 처방이 됩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불림 받지 못한 이들이 대한 착한 목자 예수님의 관심 역시 명심해야 합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소원을 반영하는 예수님의 고백입니다.
“나에게는 우리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아 바로 이 또한 하느님의 꿈이자 예수님의 꿈이요, 하느님의 소원이자 예수님의 소원입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을 사랑하여 따르는 우리 모두의 꿈이, 소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성소주일입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을 따라 평생 주님을 사랑하여 따라 닮아가는 성소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꿈꾸며 주님과 이웃을 섬기며 성실히 성소의 완성을 향해가는 우리의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입니다.
형제들과 더불어 성소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착한 목자 당신과의 신록新綠의 우정을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 당신은 저희의 모두이옵니다.
저희의 사랑, 저희의 생명, 저희의 기쁨, 저희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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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5. 부활 제4주일.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팔레스티나 지역의 목동들에게는 두 종류의 큰 위협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리나 늑대 같은 야생 짐승의 출몰이고, 다른 하나는 순식간에 나타나 양을 둘러메고 사라지는 강도들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양 떼를 이끄는 목동들은, 어두워지면 임시 울타리를 세워 만든 우리에 양들을 불러들여 보금자리를 만들어 줍니다. 이렇게 양 떼가 우리 안으로 들어가면 가장 취약한 부분은 문입니다. 그래서 그 앞에 불을 피우거나, 개를 풀어 두거나, 목동이 문지기가 되어 양들을 지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나는 양들의 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문’이신 당신을 통하여 양들이 우리 안으로 들어가면 들짐승이나 강도들로부터 보호받아 생명을 얻고, 또 문으로 드나들며 풀을 찾아 먹게 됨으로써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문은 양들에게 생명과 풍성함을 주는 기준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에게, 특히 다른 이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새로운 기준이 되셔야 합니다. 예수님이라는 기준을 통하여 양들에게 가고자 한다면 모든 것이 바뀌게 됩니다. 나의 기준에만 맞추어 양들을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나의 욕심과 수준에 맞추어 양들을 대하고 사랑한다면, 그 양들을 풀밭으로 보내 양식을 얻게 하거나 울타리가 되어 보호해 주기는커녕 그 양들에게 상처만 줄 것입니다. 마치 강도처럼 양들을 훔치고 죽이고 씨를 말리는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의 기준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준으로, 곧 아픈 이의 울부짖음에 귀 기울이고 애끊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가장 낮은 이를 찾아 나서시는 예수님의 눈으로, 목숨까지 내어 주시는 예수님처럼 살아야 ‘착한 목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나의 기준에서 사랑한다고 말하는지, 예수님의 기준으로 말하는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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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5. 부활 제4주일.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복음(요한 10,11-18)은 예수님께서 양들을 위한 착한 목자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당신을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라고 하신(요한 10,7-9) 예수님께서는 이제 착한 목자(11절, 14절)라고 하십니다. 다윗(1사무 17,34-35; 시편 78,70-71)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이사 40,11; 44,28; 예레 23장; 에제 34장; 즈카 11장)을 통하여 일깨워주었던 착한 목자는 임금, 또는 장차 오실 구세주를 가리킵니다. 또한 시편은 착한 목자와 그를 믿고 따르는 이들(양들)의 태도에 대해서도 잘 말해줍니다(시편 23장; 80장).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는 목자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목자처럼 일하지만 “삯꾼”은 “이리”와 같아서 양 떼를 물어 가고 흩어버린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빛”(요한 1,9)과 “빵”(요한 6,32)과 “포도나무”(요한 15,1)로 비유하실 때에는 “참”(ἀληθινὸν)이라고 하셨지만, “목자”라고 하시면서는 온순함과 부드러움 뿐만 아니라 “자기 몫을 충분히 다 한다.”는 뜻으로 “좋은”(καλός: 착한)이라는 말을 붙이십니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잘 알고, 양들도 그 목자를 잘 알기 때문에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잘 아시듯이, 양들은 착한 목자께서 자기들을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그분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1요한 3,6). 반면에 “삯꾼”(바리사이들, 수석 사제들, 최고의회 위원들)은 착한 목자가 아니라서 양들과 인격적이며 개인적인 친교가 없으며(요한 10,3), “이리”처럼 낯이 설기 때문에 양들은 그들에게 물릴까봐 흩어지고, 죽을까봐 피해서 달아납니다(요한 10,5).
“양들” 가운데에는 착한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르기 때문에 목자의 양 우리에 있는 이들(유다인)도 있지만(요한 10,3), 목자의 우리 안에 들지 않는 양들(사마리아인과 이방인)도 있기 때문에 목자는 그들도 데려와서 그들이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이런 일은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하십니다(에페 2,11-22). 이는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사랑과 양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며, 또 그렇게 죽으시면 아버지께서 새롭게 살게 해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요한 8,29). 결국 예수님께서는 자기 민족(유다인)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흩어져 있는 이들(사마리아인과 이방인)을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이시려고 목숨을 내놓으실 것입니다(요한 11,51-52).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양쪽을 당신의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들이 서로 지닌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실 것입니다(에페 2,14-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요한 3,16)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당신의 양 우리에 있던 이들)과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들(목자의 우리 안에 들지 않았던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실 것입니다(요한 1,12).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을 완수하시면,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고(요한 15,16),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묵시 ,17) 이제 착한 목자의 살과 피로 속량된 양들에게는(에페 1,7; 히브 9,15)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도 햇빛도 필요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빛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묵시.22,5)
제1독서(사도 4,8-12)는 사도들이 최고의회 원로들 앞에서 주님의 부활을 증언합니다.
피의자로 신문을 받는다면 용서를 청하면서 처벌을 기다리는 것이 일반적인 일인데, 베드로 사도는 오히려 거꾸로 자기들을 고발한 이들을 설복시키려고 목소리를 높이는 듯합니다. 성령께서 베드로를 돌변하게 하시어, 마치 마지막 기회인 것처럼, 최고의회 의원들 앞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유된 이에 대해 열변을 토합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처음으로 베드로 사도의 입을 통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힘과 그 효과를 표현하기 위해 보편적인 뜻을 담고 있는 “구원”이라는 단어를 소개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모퉁이의 머릿돌”, 그리고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으로 번갈아 부르면서 초대교회의 복음 선포형식에서 중요한 단어인 “십자가에 못 박음”, “죽으심”, 그리고 “일으키심”(부활)을 반복합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시편 118,22)은 건물의 전체 구조에서 무게와 중압을 견뎌내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돌로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뜻합니다. 중요한 머릿돌(예수님)을 처참하게 버린 유다인들에게는 수치스러운 일이었지만, 버려진 머릿돌의 새로운 쓰임새는 오래전부터 계획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최고의회의 원로들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구원을 원한다면 그 힘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에서 나오는 것이니 그분을 믿으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제2독서(1요한 3,1-2)는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들의 미래를 설명합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인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큰 사랑에 의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큰 사랑은 바로 하느님의 성령이시며,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로마 8,14). 이것은 바로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가 하느님의 본성인 거룩함에 참여하게 되었다(2베드 1,4)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런 우리의 기쁨을 아직도 모르는데 그것은 바로 세상이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고, 그래서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로마 8,29) 이렇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하느님처럼 거룩하게 되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가 이미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우리는 아직 우리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로마 8,23).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이며”(콜로 3,4),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때에 우리는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입니다.”(1요한 3,2)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속한 양들을 잘 아시는 것은 물론 양들도 목자를 잘 압니다. 이렇게 양들이 자기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착한 목자가 누구신지 잘 안다면 그 목자의 소리에 항상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우리는 양떼이고, 예수님은 착한 목자이십니다. 착한 목자가 우리를 아시는 만큼 양떼인 우리도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분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착한 목자의 목소리를 정확하게 들을 수 있다면 우리도 목자에게 속한 양떼가 됩니다. 그래서 비록 멀리 떨어져있을지라도, 때로는 부족할지라도 우리를 파란 풀밭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주시고 생기를 돋우어 주시는(시편 23,2-3) 착한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모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같은 우리 안에 한 양떼가 될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착한 목자의 소리를 들으려면 자기 소리를 묶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침묵 가운데 머무르면서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무관심해질 수 있을 때 목자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착한 목자의 소리를 잘 들을 수 있다면 그분의 뜻을 주어진 나의 상황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목자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응답한 것에 책임을 지고 살아가기 위한 첫걸음이며, 최선의 방법입니다.
오늘 성소주일은 자신이 어떻게 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는지, 하느님께 “처음에 지녔던 사랑”(묵시 2,4)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 했던 약속과 다짐대로 잘 살고 있는지, 그리고 주님의 뜻을 잘 실현하고 있는지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운명론적인 말이 아닙니다. 인생이란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팔자소관이라거나, 하느님께서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영구적으로 어떤 지위를 미리 결정해 놓으셨다는 예정설에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인간의 삶이 자신의 의지에서 우러나오는 자유로운 결정을 할 수가 없이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조종을 당하는 기계와 같다는 것도 아닙니다. 정말 우리에게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예수님을 닮도록 미리 정해주셨다는 것입니다(로마 8,29). 그래서 우리는 “부끄러울 것 없이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일꾼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애써야 하고”(2티모 2;15),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써야 합니다.”(에페 4,3) 우리의 마지막 운명은 하느님께 우리 삶에 대해 셈을 해드려야 하는 것입니다(히브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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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5. 부활 제4주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진리의 부르심에 목숨 바쳐 응답한 성소자들, 마테오리치와 이벽의 경우
⒈ 오늘은 부활 제4주일이고, 성소주일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진행되던
1964년에 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오늘은 특히 사제, 수도자, 선교사 성소의 증진을
위한 지향을 두고 기도하며, 성소 육성에 필요한 협력을 해야 할 의무를 자각하는
기회로 삼고 있습니다.
⒉ 그런데 사제, 수도자, 선교사가 되고자 하는 성소는 저절로 생겨날 수 없고,
누군가 하느님 신앙이라는 씨앗을 뿌려주어야 싹이 틀 수 있는 법입니다.
대개는 신자 가정에서 부모의 신앙을 비옥한 토양으로 해서만 가능한 은총입니다.
따라서 사제, 수도자, 선교사를 위한 성소와 함께 이 성소주일의 지향에는
혼인 성소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혼인 성소는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맺어진 부부가
나자렛 성가정을 기준으로 삼아 가정 성화를 이룩하겠다는 다짐으로 혼인 성사의
은총을 수용하는 것이기에 사제, 수도자, 선교사 성소의 시작이 됩니다.
혼인 성소가 모든 성소의 시작이라면, 혼인 성소를 축복하는 것은 혼인 성사입니다.
그리고 혼인 성사를 비롯한 성사는 교회가 세워져야 가능한 것이고, 혼인 성소에서
비롯되어 뿌리내리고 싹을 틔운 사제와 수도자 및 선교사 성소도 교회에서라야
꽃을 피울 수 있고 열매도 맺을 수 있는 것이기에 성소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교회에 입문하는 세례 성사요 또한 이 세례 성사를 가능하게 하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⒊ 그런데 우리가 오늘날 이 땅에서 신앙 진리를 믿을 수 있게 되고,
교회가 세워지게 했으며, 따라서 모든 성소를 가능하게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특히 기억해야 할 선각자는 마테오 리치와 이벽 세례자 요한입니다.
이 두 사람은 진리의 구도자로서 진리를 깨닫고 이 진리를 전하라는 부르심에
목숨을 바치고 일생을 바쳐 응답한 성소자였습니다, 한 사람은 서양 선교사로서
16세기 중국에서, 또 한 사람은 양반 출신 선비로서 18세기 조선에서.
마테오 리치는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소속 선교사로서 중국에 파견되어
시경(詩經)이나 서경(書經) 등 중국 고전에 기록되어 있던 ‘상제(上帝)’의 개념이
바로 그리스도 신앙의 하느님이심을 한문 서적으로 저술하여 상제를 모르고
살아가던 중국 선비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했고, 또 이벽 세례자 요한은
마테오 리치가 중국 고전에서 발견해 낸 그 ‘상제’ 개념은 한민족으로부터
전래된 ‘천(天)’의 개념으로서 고조선 시대부터 우리 민족이 이미 숭배하던
하늘이었음을 알아보는 한편 유럽 가톨릭교회가 전해 준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를
담은 책을 써서 한국인들에게 예수님과 교회를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⒋ 이 두 선각자가 이렇듯 위대한 진리에의 성소를 받게 된 경위를 알아보겠습니다.
마테오 리치(1552~1620)는 로마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던 중 예수회에 입회하여
동양에 선교할 꿈을 품고 인도 고아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1582년에 예수회로부터 중국으로 선교하러 가라는 지시를 받고 마카오에 도착하여
중국어와 한문 그리고 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중국 선교에 있어서 그가 봉착한
어려움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당시 중국 사람들은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는 다른 민족들은 다 미개하며 야만적인 오랑캐라고
무시하고 있었다는 편협한 세계관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공자는 기원전 3세기 경에
이미 상제라는 인격신을 전제하여 시경과 서경을 써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유학자들이 해석한 주석대로 비판 없이 기계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무신론적인
가치관입니다.
⒌ 그리하여 마테오 리치는 지도를 제작하여 세계의 실상을 알려 주면서
서양의 과학기술 서적도 한문으로 번역하여 알려 주었습니다.
이때 제작된 중국 최초의 세계 지도가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입니다.
또한 공자가 저술해 놓은 시경과 서경에서 음양과 태극의 이치만이 아니라
이를 조성하신 인격신으로서 ‘상제’ 개념이 전제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이 ‘상제’가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느님이라고 논증한 책이 ‘천주실의(天主實義)’입니다.
마테오 리치는 유학의 가르침을 전부 수용하면서도 단지 상제를 천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 신앙 진리로 보충하려는 입장에서 천주교를 전하고자 했기 때문에
당시 명나라 지식인들에게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마테오 리치의
보유론(補儒論)은 원시유교와 천주교의 동질성을 철학적인 체계와 이론으로
논증함으로써 당시 중국 사회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토착화시키는 합리적인
인식체계를 세우려 한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유교의 뿌리를 되찾아 준다는
명분이 있었던 덕분에 거부감을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당대 수많은
중국 사대부들이 천주교로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⒍ 더군다나 서양의 앞선 과학기술 지식과 문물을 함께 소개했었기 때문에
마테오 리치의 보유론적 입장은 지적으로도 권위가 있었으며, 공허하고 관념적인
이기론(理氣論) 논쟁을 일삼던 성리학밖에 알지 못하던 조선 선비들에게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새 학풍은 실용적인 가치를 추구한다는 뜻에서
‘실학(實學)’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1779년에 천진암에서 열린 강학회의 배경입니다.
마테오 리치가 ‘천주실의’를 출판한 이후 천진암 강학회에서 이 책을 독서와
연구의 교재로 삼아 토론하기까지 시차가 180년이 넘습니다.
그런데 이벽은 5대조 할아버지였던 이경상으로부터 이 책을 포함한 천주교 서적들을
물려받아서 어려서부터 읽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임금은
인조로부터 항복을 받으면서 왕세자를 볼모로 중국에 보내라고 요구했는데,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경상이 소현세자를 수행하여 북경에서 8년간이나 머무르면서
독일 출신 예수회 소속 아담 샬(Johann Adam Schall von Bell, 湯若望(탕약망), (1591~1666) 신부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웠고, 귀국하면서 천주교 서적들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벽은 다른 선비들에 비해 천주교 교리에 대한 이해가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실학을 주제로 하여 열렸던 천진암 강학회는
이벽이 합류하면서부터 천주학 강학회로 성격이 전환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⒎ 천진암 강학회의 주제가 서양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저술한 과학기술 서적을
탐구하던 실학에서 천주실의를 비롯한 서학(西學)으로 전환되면서 이벽을 위시한
선비들은 천주교 신앙 공동체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마테오 리치가
천주실의를 저술하기 위해 ‘상제’ 개념을 발견해 낸 중국 고전보다 1,000년이나
더 오래된 한국 고전에 이미 ‘천(天)’의 개념이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제천행사와
각종 민속 등으로 불교와 유교가 들어오기 전까지 선조들이 하늘을 숭상해 왔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테오 리치가 ‘천주실의’에 보유론적인 관점에서 저술해 놓은
천주교 교리를 외래 사상으로가 아니라 주체적인 시각에서 학습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여 저술한 책이 ‘성교요지(聖敎要旨)’이고 이를 다시 한글로
풀되 4·4조 가사로 만든 노래가 ‘천주공경가’입니다. 정약종은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지었고, 이승훈은 ‘십계명가’를 지었습니다. 그 후 부친이 동지사 수행원으로 가게 된
이승훈으로 하여금 정식으로 천주교 세례를 받아 오도록 북경으로 보내기로 한
배경이 이러했습니다.
⒏ 그 결과 천주교 신자가 된 이승훈이 돌아와서 이벽, 권일신과 정씨 형제들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정식으로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될 수 있었습니다.
이벽은 이승훈과 함께 한양의 선비들에게 천주교를 알리는 선교활동을 활발하게 벌였고,
한 해 동안에 1,000명이 넘은 세례자를 얻을 정도로 커다란 호응을 얻었습니다.
그러니까 마테오 리치가 당시 명나라 지식인들에게서 얻은 호응 정도보다도
더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천주교 교리의 합리성이 조선에 내려오던
사상과 전통의 뿌리이며 정수인 천지인 사상을 확인해 주었다는 자부심도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 명나라 말기에는 마테오 리치가 유학을 천주교가 보충한다는
보유론적인 관점에서 선교를 시도했다면, 이벽은 유학이 아니라 전통 천지인 사상을
천주교로써 완성하게 되었다는 관점에서 선교를 시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테오 리치가 ‘천주실의’로써 공자의 원시유학을 소개한 덕분에 주자가 주석해 놓은
성리학의 족쇄를 벗어버리고 이를 디딤돌로 삼아 한민족 본래의 천지인 사상을 통해서
신앙 진리를 펼칠 수 있었던, 사상의 혁명이었습니다.
⒐ 그리하여 지식인들을 선교하고자 한문으로 쓴 ‘성교요지’의 내용을 한글로 풀어서
서민 대중에게 선교하려던 ‘천주공경가’에는, 효(孝)와 충(忠) 같은 유학적 가치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한문으로 쓰여진 유학 경전을 알지 못해도 살아서나 죽어서나
하늘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고 조상대대로 믿어온 민중의 정서를 반영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하느님을 믿고 알아 왔었기 때문입니다.
이후의 선교 역사에서, 이벽과 이승훈이 문중으로부터 박해를 받아 비극적인 죽음을
당하고 이어서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천주교를 금지하고 박해를 무려 백 년 동안
가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반층 신자들은 떨어져 나갔어도, 한문을 알지
못하던 중인 이하 서민 출신 신자들은 떨어져 나가기는커녕 차라리 치명을 함으로써
천주님께 대한 신앙을 증거하거나 박해를 피해 교우촌을 이루며 후손들에게 신앙을
전수했던 놀라운 선교 역사의 비결이 이러하였습니다.
⒑ 교우 여러분! 이탈리아를 떠나 낯선 땅에서 20년 넘게 한문과 유학을 배우다가
마침내 중국 고전에서 ‘상제’ 개념을 발견했을 때 마테오 리치의 심정이 과연
어떠했을른지 상상해 보십시오. 편협한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고 하느님을 알지 못하던
무신론의 세상을 복음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벅찬 꿈을 가슴에 품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가 쓴 ‘천주실의’를 읽고 난 이벽이 조상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던 하늘의 뜻이
서양 천주교의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교리로 전달되었을 때, 더 이상 세계의 중심이
아닌 중국이 전해준 성리학을 종교처럼 신봉하느라 답답한 조선을 개혁하고 신앙의
진리로 민족을 복음화하는 꿈을 꾸며 가슴이 설레고 벅찼을 그 순간을 상상해 보십시오.
마테오 리치와 이벽 세례자 요한이 받은 성소 덕분에 진리는 이렇듯 오묘한 방식으로
이 땅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이 진리를 밝히 알고 또 전하는 일이 우리 모두의
성소입니다. 진리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그 바탕 위에서 혼인 성소는 물론 사제,
수도자, 선교사 성소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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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5. 부활 제4주일.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착한 목자의 착한 양을 그려주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양들을 치는 목자, 그것도 착한 목자라고 계시하십니다. 목자는 구약성경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비유지요. 주님과 메시아, 백성의 지도자에게 부여된 목자의 소명은 맡겨진 백성을 사랑과 자애로 돌보고 보호하는 일입니다.
그 돌봄과 보호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아니, 목숨을 바치기까지 돌보고 보호하는 것이 그 한계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나겠네요. 양들을 향한 착한 목자의 사랑은 생명을 건 헌신입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가장 큰 사랑이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요한 15,13)이라는 예수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므로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목자야말로 가장 큰 사랑의 실천가지요.
제1독서에서는 사도들이 한 "착한 일"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병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한 사실"(사도 4,9)
못 걷던 이가 걷게 되었는데 오히려 이 좋은 일을 한 베드로와 요한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신문을 받습니다. 그들 앞에서 베드로는 이 기적에 대해 그저 "착한 일"이라고 겸손하고 단순하게 표현하지요.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사도 4,10)
이 기적은 과연 "착한 일" 맞습니다. 고통 속에 있던 이가 해방되어 구원으로 걸어들어간 "착한 일"이지요.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한 일인데, 어찌 "착한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 맺는다."(마태 7,17)는 말씀 또한 떠오릅니다. 스승이신 착한 목자의 제자이고 양들인 그들은 그분을 닮아 착한 제자요 착한 양으로 양성되었고 성령을 받아 "착한 일"을 행합니다. 착한 나무에서 착한 열매가 맺힌 것은 당연하지요. 게다가 선한 스승이고 착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일이니 제자들이 행한 구원의 기적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착한 일"입니다.
제2독서는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의 미래 모습을 들려 줍니다.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3,2)
사랑이신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좀 더 명확해집니다. 자녀가 아버지를 닮는 것이 당연하듯, 좋은 나무이신 아버지에게 붙어 있는 가지인 우리가 좋은 가지인 것은 당연합니다. 사랑이신 아버지를 닮아 자녀인 우리가 사랑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결국 우리는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고 그분처럼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봄"으로써 그분에게 물들게 되어 그분을 닮아가고, 결국 "그분처럼 됨"이라는 궁극의 차원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닮은 착한 양들입니다. 사랑이신 아버지를 닮은 사랑의 자녀들이기도 하지요. 이 착함과 사랑의 극치에는 목숨을 바치는 헌신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의 수혜자이면서 동시에, 그런 분을 따라가고 닮아가는 여정 안에 있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 품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오늘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담긴 착한 일로 채우시길 기원합니다. 성소주일을 맞아 착한 목자에게 사랑받는 착한 양으로서 저마다의 사랑의 성소를 살아 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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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5. <부활 제4주일> -성소 주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10,11)
'부활 제4주일'인 오늘은 '제58차 성소 주일'입니다.
우리 모두의 성소인 '보편 성소'를 기억하면서, 특히 성직자, 수도자, 선교사 성소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4월25일 자 가톨릭평화신문 제1면 머리기사에, "코로나19로 성소 계발 '직격탄' 맞았다."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학령인구가 감소하고 있는 가운데 코로나19로 '성소의 황금어장'이었던 본당 주일학교와 복사단 활동이 중단되면서 성소 계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번 성소 주일 담화를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부르심인 성소를 망설임 없이 따랐던 요셉 성인의 모범을 본받아 주님 사명을 실천해 달라고 당부합니다.
교황은 "모든 참된 성소는 자기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는 것, 곧 성숙한 희생의 결과로 생겨난다."며, "이러한 성숙함은 사제직과 축성 생활에서도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성소'란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며, 날마다 하느님 부르심에 맞갖은 삶으로 응답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백성의 지도자들과 원로들에게 '예수님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다."고,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분이 바로,
'집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님!'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길은 이런 예수님을 굳게 믿고, 삶으로 하느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처럼 너를 위해 나를 내어놓는 희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보편 성소이며,
특별 성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이들이 보다 더 충실하게 살아내야 할 성소입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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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5.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저 아이들에게는 저밖에 없습니다!
성소주일을 맞아 제 지난 봉헌생활을 돌아봅니다.
사부이신 돈보스코와 청소년들을 향한 열정으로 활활 불타올랐던 사제서품 후보자 시절, 서품 성구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 라는 질문 앞에 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다른 형제들은 성경 말씀에서 뽑았는데, 저는 청소년들을 향한 사랑이 가득 담긴 돈보스코의 고백을 뽑았습니다.
“저는 청소년들을 위해 일하고, 청소년들을 위해 공부하며, 청소년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흐르고 흘러 뒤돌아보니 큰 부끄러움만 한 가득 남습니다.
말과 글로만, 강론대에서만 청소년 청소년 했지, 솔직히 제대로 된 청소년 사목을 하지 못했습니다.
크게 가슴치면서 지금이라도 뭔가 할수 있을까 고민해보지만, 이제는 너무 연세^^가 들어 아이들이 슬금슬금 도망가버립니다.
가끔씩 본격적인 청소년 사목 현장에서 헌신하고 있는 형제들이나 수녀님들이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할때 마다
제가 건네는 단골 멘트가 있습니다.
“메뚜기도 한철이랍니다.
나이들면 청소년 사목 하고 싶어도 안시켜줍니다. 솔직히 부럽습니다.
몸과 마음이 많이 힘들겠지만 지금이 살레시안으로서 제일 행복한 때인 줄 아십시오.”
올초 과분하게도 교구 신부님들 연례피정을 동반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일주일 내내 착한 목자 돈보스코에 대해서 소개해드렸습니다.
돈보스코의 생애, 영성, 그가 겪은 고통, 기도생활, 성모신심...제 개인적으로 강의를 준비하면서 다시 한번 돈보스코에 대해서 깊이 공부하는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돈보스코는 착한 목자의 전형이자 모델이었습니다.
그의 머릿 속은 오직 청소년들의 영혼 구원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외의 것들은 들어올 틈도 시간도 없었습니다.
돈보스코가 토리노 오라토리오를 떠나 로마로 출장을 떠날 때 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언제나 아이들에 대한
걱정, 사랑, 연민의 정으로 가득했습니다.
로마에서 보낸 돈보스코의 편지 안에 그런 마음들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청소년 여러분, 저는 멀리서나 가까이서나 언제나 여러분을 생각합니다.
제게 있어 단 한 가지 소원은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행복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여러분과 떨어져 지내는 것이 제게 얼마나 큰 섭섭함이요 괴로움인지 여러분은 짐작하지 못할 것입니다.”
성소 주일을 맞아 우리 모든 사목자들의 마음 속에도 돈보스코가 지녔던 양떼를 향한 애틋한 마음, 열렬한 사랑의 불이 다시금 활활 타올랐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든 사목자들의 마음 안에 어떻게 하면 양들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어떤 감동적인 강론과 구체적인 삶의 모범으로 양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선사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성소주일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 사목자들이 그렇게 노력할 때, 양들은 참으로 행복해할 것입니다.
세파에 지쳐 쓰러져 울다가도 우리 사목자들을 떠올리며 존재 자체로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의 얼굴을 떠올리며 포기하지 않고 희망하게 될 것입니다.
돈보스코가 젊은 사제 시절이었습니다.
돈보스코는 당시 토리노 교구 내 큰 손이었던 바롤로 후작부인이 운영하는 소녀 기숙사 지도신부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토리노 뒷골목 노동 현장에서 착취당하는 청소년들을 만나고 있었습니다.
꽤나 파격적인 연봉을 받으면서 사목하던 돈보스코였지만, 바롤로 후작부인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본업에 충실해주면 좋겠는데, 즉 기숙사 소녀들에게만 전념해주면 좋겠는데, 돈보스코는 틈만 나면 토리노 뒷골목을 샅샅이 훑고 다녔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없으면 어느새 소년 교도소에 가있었습니다.
어느날 화가 잔뜩 난 바롤로 후작 부인이 담판을 짓기 위해 돈보스코를 호출했습니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나입니까? 아니면 저 뒷골목 아이들입니까?”
제가 돈보스코 같았으면, ‘죄송합니다. 후작 부인! 제가 요즘 좀 지나쳤죠? 앞으로 기숙사 소녀들에게
더 많은 신경을 쓰겠습니다.’ 그랬을텐데, 돈보스코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후작 부인꼐서는 돈이 많은 분이니 얼마든지 좋은 사제를 고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 아이들에게는 저 밖에 없습니다. 저는 저 아이들을 선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저 아이들에게는 저 밖에 없습니다.” 라는 표현이 오늘 제 가슴을 크게 칩니다.
오늘 우리 모든 사목자들도 이런 고백을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 가난한 양들에게는 저 밖에 없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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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5. 부활 제4주일(성소주일). 전삼용 요셉신부님.
왜 목숨을 바쳐야만 사랑받는가? : 사랑의 값은 생명이기 때문에
오늘은 착한 목자 주일, 곧 성소 주일입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착한 목자들이 많이 탄생하기를 기도하는 날입니다.
목자들은 양들을 위해 그리스도처럼 목숨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삯꾼들은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로우면 양들을 버립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런데 만약 목숨을 내어놓지 않는다면 하느님은 아드님을 사랑하지 않으실까요?
부모는 자녀가 잘났건, 못났건 사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꼭 아드님이 목숨을 내어놓아야 하는 조건으로 사랑하시는 것일까요?
이것은 어떤 관계에서든 ‘사랑의 값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사려면 돈을 내야지 돌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도 오직 생명으로만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다면 곧 영원한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태국의 공익광고입니다(
한 남자가 길을 걷다가 물벼락을 맞습니다.
그 남자는 다른 사람들이 피해갈 수 있도록 그 물이 떨어지는 곳에 화분을 놓습니다.
그리고 길을 가는 중 손수레를 끌기가 힘들어 보이는 아주머니를 도와줍니다.
음식을 먹는데 낯선 개가 배가 고픈 표정으로 이 남자를 바라봅니다.
이 남자는 본인 먹을거리의 반을 내어줍니다.
식당 가게 주인은 이 행동이 이해가 안 되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습니다.
그 남자가 다시 길을 가는데 가난한 어머니와 딸이 ‘학교에 가게 해 주세요!’라는 푯말을 놓고 구걸합니다.
남자는 지갑을 꺼내 보지만 돈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비록 적지만 소중한 돈을 두 모녀에게 기꺼이 내어줍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이웃집 할머니의 집 앞에 바나나를 걸어두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그는 오늘 하루만이 아니라 매일 같은 친절을 베풉니다.
광고는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매일매일 이런 친절을 베풀고 이 남자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주위 사람들은 그런 친절을 베풀며 자신은 가난하게 사는 이 남자를 탐탁지 않게 쳐다봅니다.
광고는 가난한 식탁에 앉아 혼자 외롭게 밥을 먹는 이 남자를 비춰주며 이런 결론을 내어줍니다.
“그가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더 부자가 되지도 않을 거다. TV에 나와 유명해지지도 않는다.”
그는 손수레를 밀어주며 아주머니와 한바탕 웃습니다. 힘들지만 같이 웃을 사람이 있습니다.
길을 갈 때는 친구처럼 개가 따라와 줍니다. 구걸하던 어린 소녀가 더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녀의 목소리. 소녀는 교복을 입고 서서 수줍은 듯 미소를 지어 보입니다.
어느새 이 가난한 남자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오릅니다. 바나나를 받은 할머니는 그를 따듯하게 안아줍니다.
그리고 그가 물이 흐르는 곳에 놓은 화분은 꽃을 피워 나비가 쉬게 합니다.
광고는 이렇게 결론을 내며 끝납니다.
“대신 그가 얻은 것은 이러한 감정들입니다. 행복을 보게 되고, 더 잘 이해하게 되고, 사랑을 느낍니다.
그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얻습니다.
먹이로 빵을 받은 개는 남자를 따르고, 놓아둔 화분에서 꽃이 피어나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집니다.
소녀는 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고, 리어카상인 아주머니는 그런 온정으로 활력을 얻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당신의 삶은 어떤가요? 당신은 무엇을 바라며 살아가고 있나요?”
사랑으로 받는 감동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생명입니다.
밥은 40일을 굶어도 살 수 있지만 사랑은 4일만 굶으면 죽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도 죽고만 싶었던 주인공이 참사랑과 이해를 받게 되고는 다시 살고 싶다는 말을 합니다.
참으로 사랑받을 때 진정으로 죽을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은 이렇게 생명이기에 사랑을 사려면 생명을 내어주어야 합니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는 것 같지 않다면 내가 그 사랑을 사기 위해 나의 생명을 지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지 않으면 생명이 올 수 없습니다.
사랑 중에 가장 큰 사랑은 하느님 사랑입니다.
사랑을 위해 생명을 내어주어야 한다는 말은 내가 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제든 수도자든 평신도이든 내 생명을 내어주지 않으면서도 사랑을 추구하려고도 합니다.
하지만 사랑의 상처만큼 하느님을 자랑스럽게 만드는 것이 없습니다.
유튜브에 ‘흙 묻은 아이’(https://www.youtube.com/watch?v=URQJA... 공익광고가 있습니다.
엄마는 아이를 데리러 학교에 옵니다.
아이는 옷과 몸에 진흙이 묻어있습니다.
엄마들은 아이들을 보며 속상해하고 화를 냅니다. 장난을 치다 그런 줄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실험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일하시는 할아버지가 수레를 끌다가 바퀴가 빠져 진흙에 물건들이 떨어집니다.
그때 지나가던 아이는 할아버지를 도와주다가 옷에 흙을 묻힌 것입니다.
이것을 동영상으로 찍어서 엄마가 아이를 만나는 장소에서 틀어줍니다.
이 광경을 보고는 엄마들이 아이들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옷에 흙이 묻지 않은 아이들의 어머니는 오히려 속이 상합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할아버지를 도와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몸에 흙이 묻은 아이들의 어머니는 자녀들이 자랑스러워 뽀뽀 세례를 퍼붓습니다.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아이로 컸다는 것은 어머니에게도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라도 이렇게 부모에게 영광을 줄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부모라도 더 예쁜 자녀가 있고
그렇지 못한 자녀가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그만큼 사랑을 위해 더 죽을 줄 아는 것을 배운 이에게 더 가게 되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사제들에게 양의 냄새가 나게 하라고 하십니다.
양의 좋은 냄새가 아닌 양을 깨끗하게 하려고 더러워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아끼는 목자는 사랑받을 자격을 잃게 됩니다. 죽는 소중함을 깨달을 때 참사랑을 받게 됩니다.
사랑의 값은 언제나 죽음임을 잊지 맙시다.
죽음으로 비워지면 언제나 그 안에 사랑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나를 영원히 살게 합니다.
결국, 사랑과 생명은 같은 뜻입니다. 생명을 주면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으면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생명을 내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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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5. 부활 제4주일. 복음묵상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오늘은 성소주일입니다. 성소가 무엇인지는 오늘 매일미사에도 언급이 돼 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 성소 하면 제일 먼저 사제나 수도자를 생각하게 될 겁니다. 몇 년 전에 성소주일에 제 본당에 한 신부님이 1년 동안 안식년을 하시면서 더부살이를 하셨던 신부님이 계십니다. 성소주일에 미사를 집전하시면서 성소에 대한 강론을 하셨습니다. 지금은 다른 본당에서 사목을 하시고 계십니다. 영명이 저와 똑같습니다. 베드로 신부님이십니다. 강론 중에 그분이 퀴즈를 하나 냈습니다. 저는 처음엔 솔직히 몰랐습니다. 힌트를 주시는데 그때 저는 정답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속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미사 중에 정답을 말하기엔 분위기가 좀 그렇지 않습니까?
신부님의 질문이 지금 정확하게 생각은 나지 않지만 아마 가장 기본이 되는 성소가 뭔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이 힌트였습니다. 바로 ‘세례성사’였습니다. 세례는 누구나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니 가장 근원적인 성소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착한 목자와 삯군이 나옵니다. 대부분 오늘 복음을 보면 복음에서 목자가 나오니 아마 성직자이신 신부님들만을 생각하실 겁니다. 물론 예수님이 제일 먼저일 겁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다른 걸 한번 묵상하고자 합니다. 작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 압송로를 걸었습니다. 그땐 제 생애에 마지막이 될지 몰라서 걸었습니다. 약 60킬로미터입니다. 세 번 참석해서 두 번 완주하고 한 번은 중간까지만 걷고 다리 상태가 좋지 못해 중도에 포기했습니다. 작년에는 어떻게 시간이 되셔서 전주교구호남사 연구소장님으로 계시는 사도요한 신부님이 참석하셔서 같이 걸었습니다.
마침 많은 시간을 신부님과 대화를 하면서 걸었습니다. 그때 춘천교구에서 참가한 자매님도 같이 나란히 걸으면서 이 자매님이 특히 순교자 영성에 대해 관심이 많을 뿐만 아니라 교회사에 대한 지식도 많이 가지고 있어서 이에 관련한 심도 깊은 대화를 신부님과 이야기하시는 것을 저는 들으면서 중간 중간에 그 내용에 대해 질문만 하면서 중요한 내용은 가슴에 담기만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지점에서 신부님과 저와 둘만 대화를 하다가 성소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가장 인상적인 내용 하나가 기억에 남는 게 있었습니다. 지금 기억이 조금 희미합니다. 그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건 기억이 납니다.
본당 신부는 지옥에까지 가서라도 영혼을 구원하고 난 후에 자기(신부,사목자)는 나중에 구원을 바란다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요지는 그렇습니다. 이런 예가 더 쉬울 겁니다. 배에 조난이 되었을 때 선장이 있습니다. 선장은 제일 먼저 탈출을 하는 게 아니라 승객의 안전을 위해 구호조치를 다 마무리한 후에 마지막에 자신의 몸을 생각하는 그런 내용과 흡사합니다. 지금 신부님께 전화로 여쭤보기엔 민폐라 다음에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난 후에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이때 신부님의 그 말씀을 듣고 순간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진짜 목자는 그래야 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땐 저는 목자가 될 사정은 아니지만 수도자가 되려고 마음을 먹은 상태였기 때문에 비록 수도자는 사목하는 신부님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정신만을 그런 정신으로 살고, 그런 마음으로 수도자의 길을 간다면 그것도 훌륭한 수도자가 되는 길이지 않을까 생각하고 가슴에 담았습니다.
지금은 다시 세상에서 살게 되었지만 오늘 복음에 나오는 목자의 심정은 꼭 성직자만 그런 마음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평신도도 평신도로서 왕직, 예언직, 사도직도 수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길을 가기 위해서 우리는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폼으로 세례를 받은 게 아닐 겁니다.
목자는 고달픕니다. 양들이 말을 잘 들으면 괜찮지만, 양은 온순한 동물로 알지만 실제는 성격이 좀 그렇습니다. 한 성격 합니다. 그러니 이사야에도 제 갈 길을 가고 싶어 뿔뿔이 가는 것으로 묘사를 한 걸로 보면 고집도 보통 고집이 아닙니다. 이런 양들을 지키려고 지금도 기도하시는 착한 목자이신 신부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오늘은 그분들을 위해서 사제를 위한 기도를 한 번씩 다 바쳤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목자이신 신부님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를 하고 그분들의 고충을 헤아려보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마음도 조금은 이해를 할 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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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5. 부활 제4주일. 김 로마노 형제님.
부활 제4주일(성소주일) 제1독서 (사도4,8~12)
"이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 이십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11~12)
베드로는 산헤드린 최고 의원들 앞에서 예수님을 지칭하면서 과거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가리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하신 마태오 복음 21장 42절 말씀을 인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후에 자신이 기록한 서신인 베드로 1서 2장 7절에서도 예수님께 관하여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하고 언급한다.
건축의 관점에서 보면, 모퉁이의 머릿돌은 서로 맞닿는 두 벽을 견고하게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집을 짓는 데에 없어서는 안된다.
이런 이유로 어떤 건물을 완성한 건축자들(집주인)은 그 건축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모퉁이 돌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어 자신이 그 건축물의 주인임을 드러낸다.
오늘 본문은 시편 118장 22절의 인용이다.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러한 구약의 내용을 바탕으로 보면, 이스라엘은 이방의 강대국들에게 건축자의 버린 돌같은 보잘것 없는 존재로 여겨졌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들어서 집을 짓는데 긴요한 모퉁이 돌, 즉 모퉁이의 머릿돌로 사용하여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내용을 역설적으로 적용하여 자신의 사명의 성격을 나타내셨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건축자들이 버린 돌처럼 무가치하게 여겨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교회를 세우시고(요한2,20~22) 교회의 모퉁이 머릿돌이 되셔서 귀하게 사용되실 것을 예언하신 것이다.
'사람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서'에서 '주어진'으로 번역된 '데도메논'(dedomenon)은 '주다'(give)를 뜻하는 '디도미'(didomi)의 완료 수동태 분사인데, 여기서 수동태는 그 주체가 유일신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구원받는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에서 '없습니다'에 해당하는 '우크 에스틴'(uk estin)은 현재 시제이다.
여기서 현재 시제는 변치 않는 진리(truth)와 사실(fact)을 나타낸다.
그리고 본절에서 '구원'에 해당하는 '소테리아'(soteria)는 '치유'와 '구원' 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먼저 '치유'는 육체적 구원이라는 의미를 갖는다(히브11,7). 이 경우는 앉은뱅이가 베드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기고 하고 뛰기도 했던 역사(役事)를 가리킨다(사도3,6~8).
두번째, '구원'은 영적인 구원의 의미이다(2코린7,10).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대제관과 그 무리들이 구원받지 못할 백성임을 밝힌 셈이다.
위의 두 가지를 종합하면, 베드로는 '구원'이라는 단어의 이러한 이중적 의미를 통해서 자신을 죄인 취급하며 심문하는 대제관과 무리들을 향해 '성전의 아름다운 문에 앉아 구걸이나 하던 앉은뱅이가 예수의 이름으로 육신의 구원을 얻은 것처럼, 너희들도 예수의 이름을 믿어 영혼의 구원을 얻으라'고 촉구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육신의 질병이나 물질의 축복만을 구한다. 또 반대로 어떤 이들은 육신의 일이나 현세의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면서 영적인 구원에만 집중한다.
그러나 진정한 구원이란 영혼과 육신이 모두 온전해지는 총체적이고도 전인적인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부활 제4주일(성소주일) 복음(요한10,11~18)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11~12)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 10장 7절에서 11절과 동일한 '나는~이다'에 해당하는 '에고 에이미'(ego eimi; I am)라는 양식을 사용해서 당신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밝히셨는데, 여기서는 '착한 목자'로 밝히신다.
이것은 '양의 문'과 '착한 목자'가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짐을 보여준다.
여기서 '착한'에 해당하는 '칼로스'(kalos; good)는 '도덕적으로 선한', 혹은 '모든 면에서 흠잡을 것이 없는', '칭찬할 만한' 등의 의미를 전달한다.
즉 이것은 예수님께서 모든 면에서 흠잡을 것이 없는 목자이심을 나타내는 말이다.
다윗은 주님을 가리켜서 '나의 목자'라고 하였다(시편23,1).
히브리어 '야훼로이'(yaheh roi)는 새 성경이 번역한 것처럼 '주님은 나의 목자이시다' 라는 뜻인데, 70인역(LXX)은 이것과 다르게 '주님께서 나를 먹이신다'(kyrios poimainei me'; '퀴리오스 포이마이네이 메')로 번역했다.
'먹이신다'에 해당하는 '포이마이네이'(poimainei)는 '포이마이노'(poimaino)의 3인칭 단수 현재 시제이며, 목자의 직분을 잘 나타낸다.
말하자면, 양을 인도하고, 안내하고, 다스리며, 보호하고 양육하다는 뜻이 이 동사 안에 함축되어 있다.
또한 이 동사가 현재 시제로 되어 있어, 주님께서 자신을 이처럼 계속적으로 돌보고 계심을 다윗은 증거한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착한 목자라고 말씀하셨들 때에, 너무나 유명한 시편 23장에 나오는 다윗의 고백 속에 담긴 목자의 의미를 염두에 두셨을 것이다.
그리고 착한 목자의 특징은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는다는 것이다.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에 해당하는 '텐 프쉬켄 아우투 티테신'(ten psychen auteu tithesin; lays down his life; gives his life)는 능동형으로서, 외부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일치하는 선언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오셨다(1요한2,2).
죄 중에 있는 인생들을 속량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오신 것이며, 많은 이들의 죄를 대속하는 몸값은 예수님 당신의 목숨이셨다(마르10,45).
예수님께서 의인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경건치 않은 불경한 자, 곧 죄인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죽으신 사실(로마5,6~8)을 주목해야 한다.
이렇게 당신 목숨마저 양들을 위해서 내놓으시는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악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대조된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점을 물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았으며(마태23,4), 사람들을 모두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마태23,15).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과 대조적으로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사람들에게 다가가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었던 것이다(마태7,15).
오늘날도 역시 가장 경건한 것처럼 보이는 종교 지도자들 가운데 노략질하는 이리가 있을 수 있다.
사탄은 위장술의 대가이기 때문에 자신을 빛의 천사로 위장하며, 사탄의 졸개인 마귀들도 자기들을 의로움의 일꾼으로 꾸미는 특성이 있다(2코린11,13~15).
착한 목자와 같은 일꾼과 마귀의 일꾼을 분별하는 가장 명확한 방법은 과연 그가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주님께서 주신 사명에 충실하는지의 여부에 있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삯꾼'에 해당하는 '미스토토스'(misthotos; the hired hand)는 '고용하다', '일을 시키다'라는 뜻을 가진 '미스토오'(misthoo)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주인이 아니라 돈 때문에 고용이 되어 일하는 사람이다.
70인역(LXX)에서는 주로 '품꾼'을 뜻하는 히브리어 '싸키르'(sakir)의 번역어로 나타난다(탈출12,45; 레위19,13 등).
이 사람들은 양들을 돌보는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보수를 위해 일하기 때문에 참된 목자와는 대조를 이룬다.
이들은 비록 외형적으로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고 해도 참된 목자는 아니다. 그들의 관심은 그들에게 맡겨진 사람들의 영혼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질 물질에만 있기 때문이다.
'목자가 아니고'에 해당하는 '카이 우크 온 포이멘'(kai ouk on poimen; is not the shepherd)에서 '온'(on)은 '에이미'(eimi; is)의 현재 분사인데, 부정어 '우'('ou'; 모음 앞에서는 'ouk')가 분사와 함께 쓰일 때에는 강한 어조나 대조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여기서는 목자가 아니라는 확실성을 강조한 표현이다.
또한 현재 시제가 진행 중의 동작이나 지속적인 상태에 있는 것을 나타낸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은 앞으로도 도무지 목자가 될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알 수 있다(요한10,1; '도둑이며 강도다'; 로마2,21.22; 마태21,12.13; 마태23,16~19).
착한 목자들은 자신의 보호 아래 있는 양들이 실제로는 자신의 소유가 아닐지라도, 자기 양처럼 여기고 보호한다.
하지만 삯꾼은 다르다. 그는 다만 품삯을 위해서만 일하는 사람이어서 양들을 돌보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이들은 주인 의식이 없기 때문에 양들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다.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요한 복음 10장 11절에 나오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착한 목자와 대조적인 모습이다.
여기서 '보면'에 해당하는 '테오레이'(theorei; sees)는 '테오레오'(theoreo)의 단수 3인칭 현재 시제이며, '응시하다', '감지하다'는 기본적인 뜻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즉 이것은 양을 노리는 이리가 접근하는 것을 현재 감지하고 있는 긴박한 상태를 나타낸다.
그리고 양들에게 매우 위협적인 존재인 '이리'로 번역된 '뤼콘'(lykon; the wolf)의 원형 '뤼코스'(lykos)는 성경에서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 같다 (마태10,16)고 말씀하신 것과, 바오로가 에페소 교회의 감독들에게 사나운 이리들이 들어와 양 떼를 해칠 것(사도20,29)에 대해 경고한 점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그들의 위험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70인역(LXX)에서는 히브리어 '제에브'(zeeb)의 번역어로 나오는데, '제에브'(zeeb)는 개과로 알려진 육식성 포유 동물로서 혼자서, 혹은 떼를 지어 사냥을 하며, 용감하고 난폭하며 탐욕적이어서 보통 먹을 수 있는 분량 이상을 사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리가 접근한다는 것은 양들에게 위험이 임박했다는 징조인데, 이때 삯꾼은 양들의 안전을 지키려고 위험에 맞서는 대신에 양들을 버리고 도망치고 만다.
'버리고 달아난다'에 해당하는 '아피에신~카이 퓨게이'(aphiesin ~kai pheugei; abandons~and run away)는 모두 단수 3인칭 현재 시제로서, 위험을 감지한 삯꾼이 취하는 약삭빠른 행동을 실감나게 보여 주며, 이 두 동사가 모두 현재 시제라는 점은 삯꾼들이 늘 이와같이 행동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 목자와 삯꾼의 차이 ♣
오늘 우리 사회는 물론 교회에서 조차도 그 존재 이유인 헌신적이고 목숨을 내어 놓는 사랑, 인간의 존엄한 가치를 위해 고통과 시련 중에 있는 이들과 함께하는 증거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듯하다.
가난과 소외와 불의에 맞서는 ‘양 냄새나는 목자’, ‘국민과 함께하며 국민의 아픔과 시련을 어루만져주는 정치지도자’,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서로를 따뜻이 품어주는 손길이 있어 소박한 행복과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그리운 때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양들 위에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양떼를 잘 알고 친히 하나하나 생명을 돌보시는 목자로 표현된다.
당시 팔레스타인 관습에 따르면 여러 목자의 양떼들이 밤중에는 한 우리에 갇혔다가 날이 밝아 목자들이 오면 각기 자기 목자들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들을 따라갔다.
예수님은 ‘삯꾼’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착한 목자’이시다(10,11).
‘착한 목자’와 ‘삯꾼’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착한 목자는 양과 깊고 친밀한 관계를 맺기에 자기 양들을 잘 알며(10,14) 헌신적이며 사랑으로 책임을 질 줄 알며, 목숨까지도 내놓는 희생을 감수하는(10,11. 17) 지도자이자 동반자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10,16)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밖의 ‘다른 양들’도 그분의 목소리 곧, 복음 말씀을 듣고 모이게 된다는 뜻이다.
특히 ‘목소리를 들을 것입니다’란 미래형 표현은 일종의 예언으로서 그 무엇도 방해할 수 없다는 약속과 확실성을 시사한다. ‘착한 목자’는 ‘모두’를 사랑하며, 그 사랑은 끝이 없다.
삯꾼은 착한 목자와는 전혀 다르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10,12-13)
삯꾼은 양들과의 친밀한 내적 관계를 맺고 있지 않으므로 무관심하며(10,13) 헌신적이지 않으며 오직 품삯과 자신의 안위만을 도모한다.
이런 삯꾼의 모습은 영광만을 서로 주고받는 유대 지도자들(5,44; 12,43), 율법을 모르는 이들을 저주하거나(7,49) 사람들을 회당에서 내쫓는 바리사이들(9,22. 34)을 가리킨다.
우리 사회와 교회에도 사랑으로 섬겨야 할 국민과 하느님 백성들에게는 무관심하고 사랑이 없으며, 자신의 안위에 영달과 출세만을 추구하는 지도자들도 없지 않다.
사랑으로 섬기고 저 낮은 곳으로 내려가 양 냄새나는 착한 목자, 사랑의 지도자, 더불어 삶을 호흡하는 진정한 동반자는 어디에 있는가?
허허로운 들판처럼 텅 비어 있고, 외딴 섬의 황혼처럼 쓸쓸한 외로움과 씁쓸함이 밀려오는 그 자리에 우리의 무관심과 이기적인 죄의 뿌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지도자와 동반자를 찾기 어렵다면 ‘나’ 자신이 ‘먼저’ 그런 존재가 되어보는 것은 어떤가?
‘나’를 떠나 사회적 약자를 위해 손길을 내밀고 헌신적으로 사랑하며, 자신의 시간과 땀과 재물을 내어 놓고 생명을 주고받는 바로 그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가 아니겠는가!
권위는 진정한 사랑 실천에 있는 것이지 ‘이름뿐인 직함’에 있지 않으니... 나 자신부터 ‘삯꾼’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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