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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계절적으로 “봄”을 연상케 합니다. 봄이 되면, 성내천을 비롯하여 곳곳에 벚꽃이 만발하고, 가까운 남한산을 비롯하여, 산마다 벚꽃이 산을 덮습니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물들이 녹아 졸졸 흘러, 샘물이 바위를 뚫고 솟아오르고, 용수철이 튕겨 오르듯 얼어붙었던 땅에서는, 생명의 기운들이 솟아오릅니다. 오스트리아의 시인이자 작가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봄을 그대에게”라는 시를 보면, “갖가지의 기적을 일으키는/ 봄을 그대에게 보이리라/ 봄은 숲에서 사는 것/ 도시에는 오지 않네 / 쌀쌀한 도시에서/ 손을 잡고서/ 나란히 둘이서 걷는 사람만/ 언젠가 한번은 봄을 볼 수 있으리”라고 합니다. 유머자신감 연구원 원장인 용혜원 시인 역시, “봄 꽃 피는 날”이라는 시로 봄을 노래했습니다. 소개하면, “봄 꽃 피는 날/ 난 알았습니다. / 내 마음에/ 사랑나무 한 그루 서 있다는 걸 / 봄꽃 피는 날/ 난 알았습니다. / 내 마음에도/ 꽃이 활짝 피어나는 걸 / 봄 꽃 피는 날/ 난 알았습니다. / 그대가 나를 보고/ 활짝 웃는 이유를”이라고 합니다. “아가”라는 본서의 명칭은, “뛰어난 노래,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모든 영역 성경들은 “노래 중의 노래”라고 합니다. 아가서는, 문학적인 형식으로는, “성경의 오페라”라는 별칭이 있습니다. 출연진은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 그리고, 예루살렘 여성합창단입니다. 이 글을 잠잠히 읽어보면, 한편의 오페라를 감상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이러한 아가서에 대해, 이스라엘의 랍비들은 오랜 세월동안, 본서는 남녀간의 애정표현을 담은 책이기에, 성경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랬다가, 주후 90년에 대표적인 랍비들이 모인 “얌니아 회의”에서 본서의 내용은 남녀의 사랑을 말하지만, 그 후면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사랑이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성경전서에 포함시켰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신 구약 전체를 통해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일관되게 전개하면서, 구속사의 원리를 다양한 측면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사람들로 하여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으로 초청하는 “아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성경에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적인 의미가 배제된다면, 성경은 도덕 교과서이며, 역사서이고, 문학 작품일 뿐, 생명의 말씀을 담은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가서를 구속사적 예언서로 읽어야 그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솔로몬을 하나님으로, 그리고 솔로몬의 사랑을 받는 술람미 여인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스라엘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 이스라엘은 오늘날 세계 곳곳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우리의 어떠한 의심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며, 구원해 주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일어나서 함께 가자”라는 말씀은, 공동번역에서는, “어서 일어나오, 이리 나와요”라고 하는데, 이는, “어서 일어나 빨리 나오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하나님 앞에 죄인된 우리를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아가서에 기록된 시적 표현은, 단순히 인간의 애정 뿐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깊고 영적인 관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두 번이나 강조되는, “일어나서 함께 가자”라며, 우리를 찾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0절을 보시면,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인 우리를 향해 “일어나서 함께 가자”라고 하십니다.
본문에서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에게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라고 합니다. 솔로몬은 본문에서 술람미 여인을 찾아와 창으로 엿보다가 술람미 여인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봄기운이 약동하는 자연 속으로 들어가자고 불러냅니다. 여러분, 새 봄을 맞이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해서는, 일어나야만 합니다. 그냥 앉아서 말로만 함께 가자고 하거나 함께 가겠다고 한다는 것은, 알 수 없는 말입니다. 이처럼,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의 부름에 화답하며, 일어나서 행동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하지만, 믿음이 잠든 사람이나, 영적인 감각을 잃어버린 자에 대해 사도 바울은, 밤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며, 사도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자라고 합니다. 교회나 성도가 이러한 자세로 있다면, 맛을 잃은 소금과 다를 바 없습니다. 성도된 우리는, 행 3: 1 - 8에 나오는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앉은뱅이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소리를 들을 때, 벌떡 일어나서 행동으로 실행한 것처럼, 우리도 행동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이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행위의 실천입니다. 그럼, “누가 내 이름을 부르며,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외치는 사람이 없어요”라고 할 수 있지만, 영적으로 앉은뱅이와도 같은 우리를 부르는 이는, 목회자도 아니요, 곁에 있는 성도도 아니라,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이십니다. 성령의 음성은, 내 의지의 음성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고, 나와 언제 어디서나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의 음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에서 들리는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성도의 특징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임마누엘의 행복을 만끽하는 겁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별세를 살아가는 별세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아가서에서,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에게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내용입니다. 그러기에,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라는 표현에는, 성도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존귀함이 있고, “일어나서 함께 가자”라는 초대에는, 함께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자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 43: 4을 보시면,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이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이 밭에서 일하느라 얼굴이 거무스름해졌어도,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죄로 얼룩졌어도 하나님은 우리의 겉모습을 보지 않고,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의 증표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달리신 “골고다의 십자가”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사망의 상징도 아니요, 죄인의 형틀도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성도는, 스바냐 선지자가 습 3: 17에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고 찬양하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이 말씀에 의지하여, 하나님을 더욱 더 가까이하며,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며, 하나님께 더욱 더 충성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절망의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고난의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삶의 진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붙들어주시며, “내가 너를 사랑한다.” “온 세상 사람이 너를 버리고 다 떠나도, 나는 너를 절대로 버리지 아니하고 떠나지 아니할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더 이상 절망의 자리에서 또, 슬픔의 자리에서, 고통의 자리에서 앉아 있지 말고, “일어나서 함께 가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1 - 13절을 보시면,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라고 합니다. 성도의 봄은, 하나님의 은혜의 때이며, 구원의 날입니다.
본문 11 - 12절을 보시면,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라고 합니다. 삶을 살아가는 동안 때때로, 성도인 우리는 겨울과 같은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 기간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 같은 고통의 연속적인 순간입니다. 한없이 잘 되던 사업이 갑자기 무너져서 바닥을 치며, 믿고 의지했던 사람이 배신하고 등을 돌리는 날들이 겨울입니다. 건강했던 사람이 갑자기 앓아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언제 완쾌될 지 기약도 보이지 않는 것이 인생의 겨울입니다. 그 속에서, 마음에는 절망의 겨울이 깊어져 가기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고난의 겨울이 다가오는 것은, 대표적으로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우리의 믿음을 더욱 강하게 연단시켜서, 정금과 같은 믿음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고, 둘째는, 우리의 삶 속에서 죄악을 제거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본문에서 전하는 봄이, 성도인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여겨집니까? 4계절의 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봄은 고후 6: 2에 나옵니다. 보시면,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합니다. 본문의 봄이 어떤 의미입니까? 하나님께서 성도인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은혜의 때이며,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는 구원의 날입니다. 즉, 성도인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새로운 시작을 이루는 희망의 계절입니다. 그러기에, 추운 계절에 얼어붙었던 물들이 녹아서 흐르는 것처럼, 하나님과 성도인 우리의 사이가 더욱 가까워지고, 더욱 영적으로 친밀해졌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이제껏 겪었던 고난과 시련이 끝나고, 새로운 희망과 기쁨의 시기가 왔다는 겁니다. 봄이 오면, 온 산천에 꽃이 만발합니다. 시작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봄이 되면, 벚꽃이 온 산천을 하얗게 뒤 덮습니다. 그것은, 벚나무의 뿌리가 겨울내내 얼었다가 녹아서 흐르는 수분을 흡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시 1: 3을 보시면,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 하나님과 함께 걷는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그의 행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형통합니다. 그러기에, 봄은 희망의 계절입니다. 성도의 봄은,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희망을 품는 새 희망의 계절입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우리가 잘 났을 때도 나의 하나님이시고, 내가 못 났을 때도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함에 있어서 변치 않는 성도에게는, 겨울은 절대로 겨울로 멈추지 않습니다. 고난의 겨울이 긴 것 같아도, 결국 희망의 봄으로 바뀌어 우리 곁으로 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곁에서 우리를 붙잡고,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삶의 봄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본문 13절을 보시면,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라며, 재차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라고 합니다. 겨울의 기나긴 터널을 지난 이제, 하나님 안에서 새 희망의 봄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때요, 구원의 날을 만끽하며,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4절을 보시면,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라고 합니다. 성도의 신앙은, 하나님께로 얼굴을 돌리는 겁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함에 있어서, 우리의 더럽고 추한 모습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중심을 보시며, 우리를 사랑할 사람으로 보아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의 은혜에 대해, 나는 그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며, 끝까지 자신의 “의”만을 고집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완악한 행위요,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은, 우리의 “의”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때문이며, 이 사랑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변화되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성화는, 어느 한 순간에 이루어져서 완벽해 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계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자나깨나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의 “의”를 만족시키는 충성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감으로, 하나님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얼굴을, 우리의 중심을,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겁니다. 눅 23: 42을 보시면,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 중 하나가 예수님께 고백한 마지막 말입니다. 이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가상칠언만을 기억하지는 않습니까? 이 강도의 말이 우리의 말이 되어야 합니다. 이 강도의 말은, 그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으로 나갔다는 겁니다. 이제, 성도된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어지럽고, 우리의 삶이 고달픈 겨울에 있다하더라도, 그 속에서 움크리지 말고, “일어나서 함께 가자”라며,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하나님께로 달려 나가야 합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 북한에서 날리는 오물풍선으로 우리의 마음은 불안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국회에서는, 대외적인 우리나라의 국가위상과 국내의 안정 또, 물가안정으로 인한 서민경제의 회복에 대해서는 아량곳 하지 않고, 서로 간의 주장만 펼치는 설전이 가득하여,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불안으로 몰아가고, 우리의 삶을 겨울의 중심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속에서도 십자가에서의 사랑을 보여주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또,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가 보는 가운데 재림하십니다. 그 날과 그 시기가 언제이든,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와 구원의 축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