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 13,1-8; 마르 6,14-29
+ 오소서 성령님
간밤에 눈이 왔는데요, 오늘 아침에도 여러 형제 자매님들이 오셔서 눈을 함께 치워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제1독서인 히브리서 13장은 그전까지와 다른 내용이 나오기 때문에 나중에 덧붙여진 것으로 보는 사람들(William L. Lane 등)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Mary Healy 등)은 바로 앞 단락에 나오는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느님을 기쁘게 경배합시다.”(12,28;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라는 말씀과 연결된 것으로 봅니다. 즉 무엇이 하느님을 기쁘게 경배하는 길인지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형제애가 여러분 가운데 머물도록 하십시오.”입니다. ‘형제애’는 그리스어로 ‘필라델피아’인데요, 미국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에 ‘필라델피아’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가 있지요? 이는 사랑을 뜻하는 ‘필로스’와 형제를 뜻하는 ‘아델포스’가 합쳐진 말입니다.
히브리서는 이 형제애를 한두 번 실천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형제애가 여러분 안에 계속 머물게 하라고 권고합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형제자매입니다.
두 번째는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형제애의 실천에 이어, 형제가 아닌 사람에 대한 지침입니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다”고 하는데요, 대표적 인물은 아브라함(창세 18,1-2; 19,2), 롯(창세 19,2), 기드온(판관 6,19), 삼손의 아버지인 마노아(판관 13,15-16), 그리고 토빗(토빗 5,4-14) 입니다.
셋째, 감옥에 갇힌 이들과 학대받는 이들을 기억해 주라고 하는데요, 신앙 때문에 감옥에 갇히고 고난받고 있는 사람들을 기억하라는 의미로 보입니다.
넷째, 혼인을 존중하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혼인에 대해 두 가지 상반된 태도가 있었는데요, 물질을 악한 것으로 보던 영지주의자들은 혼인을 비하하였습니다. 이와 정반대로 육체적 욕망을 신봉하던 이들은 혼인 밖에서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하려 하였습니다. 히브리서는 이 두 가지 태도 모두 비판합니다.
다섯째, “돈 욕심에 얽매여 살지 말고 지금 가진 것으로 만족하십시오.”라고 권고합니다. “돈 욕심에 얽매이지 말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아필라르귀로스”라는 단어인데요, 직역하면 ‘돈을 사랑하지 마라’는 뜻입니다. 여기도 사랑을 뜻하는 ‘필로스’라는 단어가, 돈을 뜻하는 ‘아르귀로스’와 합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맨 처음 나온, ‘필라델피아’와 연결해서 보면, ‘돈을 사랑하지 말고, 형제를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한편, “지금 가진 것으로 만족하라”는 권고는,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하면서 했던 말과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입니다. 곧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라는 말씀을 믿으며,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는 분이시니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라는 말씀으로 제1독서는 맺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당신은 언제나 같으신 분 당신의 햇수는 끝이 없습니다.”라는 시편 102장(28절)의 말씀, 그리고 영광송 기도와도 연결됩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믿었던 예수님과 내가 믿고 있는 예수님은 같은 분이시며, 영원한 분이십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파견하셨고, 내일 복음에서 사도들은 돌아와 자기들이 한 일을 보고할 것입니다. 그 사이에 오늘 복음인 세례자 요한의 죽음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교회의 복음 선포의 시작이 되듯, 세례자 요한의 죽음도 사도들의 복음 선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복음 선포는 이렇듯 누군가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침으로써 시작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와 헤로디아는 구약에서 이사야 예언자를 죽이려 했던 아합과 이제벨을 연상하게 합니다. 세례자 요한을 죽이고 싶었던 헤로디아는 딸을 동원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룹니다. 헤로데는 괴로워하면서도 맹세한 일과 체면 때문에 청을 들어줍니다. 이렇게 전혀 ‘왕’답지 않은 처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반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복음은 일부러 그를 ‘임금’이라고 부릅니다.
만일 헤로데가 오늘 제1독서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형제를 사랑하고, 손님을 접대하며, 혼인을 존중하고, 지금 가진 것에 만족했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을 잡아 가두고, 자신과 나라를 그르치는 사람들의 말에만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러한 헤로데의 태도는 나중에 예수님을 처형하게 될 빌라도의 등장을 암시합니다.
논어에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君子 喩於義, 小人 喩於利)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익에 밝은 사람들이 잠시 득세하는 것 같지만, 의로움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의 소신과 용기 안에서 일하시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도 이로움이 아니라 의로움을 따라 살려는 수많은 세례자 요한들에게 화답송의 말씀을 들려 드립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죠반니 디 빠올로, 감옥에 갇힌 세례자 요한을 방문하는 제자들, 1455
출처: Saint John the Baptist in Prison Visited by Two Disciples | The Art Institute of Chica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