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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합 왕의 실패 / 한서노회
본문은 승승장구하던 이스라엘의 왕 아합이 전쟁 후 실패하는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특히 열왕기상 20장은 아람왕 벤하닷과 아합 왕 사이에 벌어진 두 번의 전쟁에 관하여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전쟁은, 아람 왕 벤하닷이 32명의 왕과 동맹을 맺고 이스라엘에 대하여 무조건 항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아합은 각 도의 방백의 소년 232명과 이스라엘 자손 7,000명이 벤하닷과 동맹한 32인의 왕을 기습 공격하여 전쟁에서 쉽게 승리하게 됩니다.
아람왕 벤하닷은 10만 대군의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가다듬고 두 번째 침공을 준비하게 되자 아합도 군인들을 계수하고 이에 맞서게 됩니다. 그러나 7,000 여명의 군인으로 10만이 넘는 대군을 물리치기에는 매우 미약한 숫자입니다. 그러나 전술적으로 불리한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7일 동안의 대치 끝에 보병 10만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1. 아합 왕의 경솔함
아합 왕의 승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들의 승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바 된 하나님의 군대였기 때문입니다. 승리의 주원인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람군대 10만 명을 이스라엘 손이 붙이시므로 아람군대는 패하고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왕상 20:30) “그 남은 자는 아벡으로 도망하여 성읍으로 들어갔더니 그 성이 그 남은 자 이만 칠천 위에 무너지고 벤하닷은 도망하여 성읍에 이르러 골방으로 들어가니라”
벤하닷 군대 10명은 죽고 남은 자 2만 7천은 아벡 성으로 도망하였으나 성이 무너져 죽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의 전적인 대승리였습니다. 아람왕 벤하닷은 도망하여 골방에 숨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쟁의 승리를 준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기시도록 한 사실을 만인에게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은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고, 승전의 기쁨과 함께 영적인 감각을 잃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아람 왕 벤하닷의 문제를 잘못 처리한 까닭이었습니다. 아람 왕과 신하들은 베옷을 입고 아합 왕에게 생명을 살려 달라고 애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위장 전술이었습니다.
(왕상 20:32) “저희가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테두리를 머리에 이고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러 가로되 왕의 종 벤하닷이 청하기를 나의 생명을 살려주옵소서 하더이다 아합이 가로되 저가 오히려 살았느냐 저는 나의 형제니라”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테두리를 머리에 이고’라는 표현은 죄인이 용서를 빌거나 상대방에게 복을 표할 때 취하던 고대의 관습적 자세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굵은 베는 ‘참회’의 표시이며 ‘테두리’는 ‘굴복’의 표시입니다. 더구나 벤하닷이 아합 왕에게 ‘왕의 종 벤하닷’이란 말을 쓰므로 신하의 입장을 자청하는 굴복의 표시를 하였습니다.
이에 아합 왕은 벤하닷에게 ‘저는 나의 형제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여기서 벤하닷에게 ‘형제’란 말은 쓰므로 너무 경솔함을 드러내었습니다. 아람 왕 벤하닷은 이스라엘의 대적이자 여호와 하나님을 모독한 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벤하닷을 멸하기로 작정하셨다(28절, 42절). 그런데도 아함이 벤하닷을 가리켜 ‘나의 형제’라 하였으니 이는 크나큰 실책인 것입니다. 아합의 행동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죄의 근원은 뿌리까지 뽑혀야 함을 영적으로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사울 왕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아말렉 군대를 멸하라고는 명령을 받았으나 자신의 뜻에 따라서 좋은 전리품들을 남겨 놓았다(삼상 15:9). 그 결과 그는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전쟁에서 패배하고 만다.
(삼상 15: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아합은 하나님께서 그 손에 붙이신 악인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진멸하지 아니하므로 외적으로는 승리한 것 같지만 진정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아합의 이런 행동은 그를 파멸로 몰아가는 첫걸음이 되었다.
2. 어리석은 약조
(왕상 20:33) 그 사람들이 징조로 여기고 그 말을 얼른 받아 대답하여 가로되 벤하닷은 왕의 형제니이다 왕이 가로되 너희는 가서 저를 인도하여 오라 벤하닷이 이에 왕에게 나아오니 왕이 저를 병거에 올린지라“
여기서 벤하닷의 신하들이 아합의 말에 대하여 ‘징조(徵兆)로 여기고’라고 하였는데, 이는 ‘열심히 관찰하다’는 뜻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말은 곧 어떤 결과를 판단해 내기 위해 열심히 동정을 살펴보는 동작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본 절은 항복 소식을 전하러 온 벤하닷의 신복들이 과연 벤하닷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지 열심히 살피는 교활한 눈매를 연상케 합니다.
벤하닷의 신복들은 아합 왕이 자신이 뱉은 말을 철회할 수 없게끔 얼른 그 말을 받아 되풀이하여 ‘벤하닷은 왕의 형제니이다’고 못밖게 됩니다. 이렇게 된 이상 아합으로서는 설령 자신의 말을 철회할 마음이 생기더라도 체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아합이 벤하닷을 자신의 병거에 태워 자세를 나란히 하여 곧 그와 동반자 관계임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그의 행동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독하고 또한 이스라엘 영토를 침략한 벤하닷에게 아합을 마치 동지처럼 여기는 실수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벤하닷의 말에 그는 완전히 속아 넘어가게 됩니다.
(왕상 20:34) 벤하닷이 왕께 고하되 내 부친이 당신의 부친에게서 빼앗은 모든 성읍을 내가 돌려 보내리이다 또 나의 부친이 사마리아에서 만든 것같이 당신도 다메섹에서 당신을 위하여 거리를 만드소서 아합이 가로되 내가 이 약조로 당신을 놓으리라 하고 이에 더불어 약조하고 저를 놓았더라“
아합은 벤하닷이 하는 ‘내 부친이...빼앗은 모든 성읍을 돌려 보내리이다.’는 말에 큰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벤하닷은 아합에게 다메섹에 ‘아합의 거리’를 만들라는 제안에 그는 큰 수익과 부국을 꿈꾸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이 조건으로 약조(約條)를 하고 그를 풀어 주게 됩니다. 그가 맺은 약조는 하나님의 뜻과 공의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이처럼 아합이 몇몇 성읍의 반환과 이에 따른 이익을 보장 받고 벤하닷을 살려준 조치는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앙인들에겐 납득할 수 없는 행위였습니다. 아합의 처사는 눈앞의 조그마한 경제적 이익과 하나님의 공의(公義)를 맞바꾼 불순한 결정이었습니다.
아무튼 아합은 이런 신앙적 나태함과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이방 여인을 왕비로 맞아들이며(16:31), 우상 숭배를 자행하고(16:32, 33),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앙을 경시한 점 등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입장에 대치되는 어리석은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이런 행동으로 인하여 그는 열왕기 기자로부터 역대에 줏대 없는 왕이며, 극히 미련한 왕으로 평가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하박국 선지자의 간증이 더욱 귀히게 여겨집니다.
(합 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
3. 선지자의 교훈
아합의 이런 무분별한 행동으로 인하여 국가의 정체성에 큰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한 선지자가 아합 왕을 깨우쳐 주기를 원하였습니다.
(왕상 20:35) 선지자의 무리중 한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그 동무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치라 하였더니 그 사람이 치기를 싫어하는지라“
‘선지자의 무리’라고 한 것은 사무엘 시대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선지자 학교의 생도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러한 선지자 집단들은 엘리사의 활동과 관련해서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왕하 2:3; 3:11; 4:1,38; 6:1,2). 여기서 선지자 생도의 동료 즉 함께 생활하고 교제하는 친구에게 하나님의 뜻이니 ‘너는 나를 치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선지자의 동료는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선지자가 그의 동료에게 말하기를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나를 떠나갈 때에 사자가 너를 죽이리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그 사람은 사자가 그를 만나 죽게 되었습니다.
(왕상 20:37) 저가 또 다른 사람을 만나 가로되 너는 나를 치라 하매 그 사람이 저를 치되 상하도록 친지라“
그 선지자는 결국 상하게 맞은 후에 눈에 붕대로 감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는 변장의 목적이 기도하지만, 아마도 이때 타박상올 입은 곳이 눈부위였던 것 같습니다.
이 비유는 선지자의 단호한 결의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분변치 못하고 인간적 정에 사로잡혀 감히 칠 엄두를 내지 못하는 약한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이는 아합왕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그만큼 크고 단호하였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그러한 의아심은 해소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선지
자의 동무는 인간적 정에 연연하기 보다는 먼저 하나님의 뜻에 순복했어야 마땅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눈으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때도 있습니다.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사건(창 1:- 2:), 아브라함에게 독자를 바치라는 명령(창 22:1-2), 바다를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신 예수님(마 8:26),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먹이신 사건(막6:44), 소경의 눈에 흙을 이겨서 씻으므로 낫게 하신 내용(요 9:11).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일 등은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들입니다.
(고전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미련하게 보이는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인간적인 정과 무례함이라 생각되는 것 때문에 결국 하나님이 뜻을 수행하는 일에 거부하다가 죽음을 당하는 낭패를 보았습니다.
4. 아합에게 임한 저주
선지자가 맞은 부위를 수건으로 가리고 길 가에서 왕을 기다리다가 왕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왕이 지나갈 때에 소리 질러 왕을 불러 말을 시킵니다. 그는 왕에게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것은 그가 전장에서 잡을 포로를 감시하도록 명을 받았는데, 만약에 포로를 놓치면 그 일로 인하여 은 한 달란트를 물어내거나 아니면 포로의 생명을 대신한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는 부주의로 인하여 포로를 놓치게 되므로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는 주된 임무를 망각하고 다른 일로 분주한 잘못된 영적 상태를 비유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즉 덜 중요한 것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을 희생시킨 아합의 행위를 견주어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합은 적군 앞에서 자신의 이익과 안위 그리고 당장의 우쭐함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것을 빗대는 비유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왕은 대답하기를 이것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왕의 답이 끝나자 그 선지자는 수건을 벗자 왕이 그를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왕은 그에게 다시 한번 엄히 말합니다.
(왕상 20:42) 저가 왕께 고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저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저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하셨나이다“
본 절에서 ‘하나님께서 멸하기로 작정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하람)의 뜻은 본래 ‘금하다’, ‘저주하다’의 뜻입니다. 아합 왕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계획하신 일은 어느 누구도 마음대로 변개할 수 없다는 뜻을 명확히 하였습니다.
(롬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왕상 20:43) 이스라엘 왕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그 궁으로 돌아가려고 사마리아에 이르니라“
아합 왕은 선지자의 예언을 듣고 마음에 큰 동요가 일어났습니다. ‘근심하고’ 라는 단어의 뜻을 볼 때, 아합 왕은 이 일로 인하여 슬퍼하였고, 격노하며, 안달하였습니다. 그는 예언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고, 후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부터 돌아서지는 못했습니다.
(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의 판단에 합당한 것인가를 생각하여 자기의 잘못을 진정으로 뉘우치고 돌이키는 데까지 나아가는 근심입니다. 이는 ‘신령한 근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M. Henry). 이에 비해 ‘세상 근심’은 분노하고 원한을 품으며 자기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애쓰는 근심입니다. 이 근심의 결과는 낙담하고 좌절에 빠져 자기 파괴적인 상황으로 발전합니다.
아합은 선지자의 말을 듣고 후회하였을지는 몰라도 회개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부패된 생활로 돌아가 실패를 자초하였습니다. 잠시 갖는 근심과 후회는 파멸로 치닫고 진정한 회개는 구원에 이르는 길이 됩니다.
결국 아합은 전쟁에서 활에 맞게 되고 과대 출혈로 죽게 된다. 그의 마차는 창기들이 목욕하는 곳에 방치되었고, 그것을 개들이 와서 핥는 그의 비참한 최후를 보여 주었습니다(왕상 22:34-38).
예화)
어떤 철도사업가가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종업원을 거느린 거대한 철도왕국을 이룩했고 수 천만 달러의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눈앞에 둔 이 사업가는 아들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아들아, 너는 지금 이 세상에서도 가장 비참한 실패자의 손을 붙잡고 있다.”
그때 아들이 대답하기를
“무슨 말씀을 하세요, 아버지가 실패자라뇨? 아버지는 위대한 철도왕국을 건설하셨고, 수많은 사람들을 고용했으며 수 천만 달러를 벌어들이셨잖아요.”고 하였습니다.
그때 사업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결코 그렇지 않다. 이런 일을 하는 동안에 나는 그리스도를 멀리 떠났다. 그리스도 안에서 있지 아니한 모든 자는 다 실패자들이다.”
그의 말은 참으로 옳습니다. 그리스도 없는 인생을 산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리석은 자여, 너는 실패한 자로다’라고 말씀하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브릿지 - 신앙에 ‘실패했다’, ‘성공했다’고 말하지 말고 차라리 ‘순종했다’, ‘불순종했다’라고 말하라.
결 론
하나님의 뜻에 충실한 해가 됩시다. 내 생각과 내 마음의 뜻에 따라서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뜻을 실천하는 삶이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남 그 자체가 실패의 원인이며, 승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 있습니다.
(전 9:11)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
승리와 재물과 은총은 사람이 예측할 수 없고,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정해집니다. 이와 같은 시기와 때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전 3:1-8).
아합 왕의 실패의 원인은 하나님이 주신 승리에 대한 감사와 순종보다는 스스로의 자만심이 만들어 낸 어리석은 관용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에 신중함이 없는 경솔함을 보여 주었고, 스스로의 자만심에 충만하여 미혹의 말에 빠져 어리석은 약조를 쉽게 해 주는 미련함을 보였습니다.
그는 선지자로부터 오는 교훈을 외면하고 잠시 ‘근심하고 답답하게’ 여겼으나 끝내 결단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파멸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지혜를 구하며 신령한 근심을 통하여 승리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출처 한서노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