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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강) 영접하는 자가 받는 상!
(마 10:34-42)
오늘 본문은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34-39절에서 '검을 주러 왔노라'고 하셨고, 40-42절에서는 '성도가 받는 복'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는 제목을 40-42절에서 얻었습니다. ◀제목 소개!▶
'예수 믿는다'는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수를 따른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과 예수님을 따른다는 말을 같은 의미입니다.
막1:19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안드레와 베드로를 부르실 때 '나를 따라오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실 때도 '그 아비 세베대를 삯군들과 함께 배를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라 가니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을 따르는 사람도 다양합니다. 정치적 지도자를 따르는 자도 있고, 미신이나 혹은 사이비 종교지도자를 따르는 자가 있는가 하면 깽 두목을 따르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34-39절까지는 생명의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몇 가지 각오할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34절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이 말씀을 많은 사람들에게 혼란과 충격을 줄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평화의 사도로 오신 메시아'이시기 때문입니다. 눅2:14절을 보면 주님이 탄생할 때에 천국천사들이 찬양하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가 이 땅에 오시기 6-7백 년 전부터 예언하기를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이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을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평화의 왕으로 믿고 있고, 평화의 왕으로 기대하고 있는데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고 하시니, 혼돈이 올 수 있습니다. 요14:27절에서도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않다.'고 하셨는데, 본문에서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고 하시니 정말 혼돈이 올 수 있습니다.
여기서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이미 마음 속으로 막연하게 품고 있던 어떤 기대를 수정하라는 경고입니다. 당연히 제자들은 이제 시작해야 할 자신들의 전도 사역이 그 즉시 평화로운 결과를 낳을 것이고, 따라서 자신들의 사역도 순조로운 것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을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이러한 생각이 사실은 잘못된 것임을 깨우쳐주고, 그들의 안일한 생각을 바로 잡아야 할 필요를 느끼셨습니다.
화평이란 말과 평화란 말은 똑같은 단어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검을 주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갈등을 주고 혼란을 주는 이 말씀은 도대체 무슨 의미입니까?
검이란 싸움을 의미하는 것이요, 분쟁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내가 너희를 화해시키러 온 것이 아니라 분리시키려 왔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싸움시키러 왔다는 뜻입니다.
검은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서로 분쟁하다. 다투다, 전쟁한다.'는 뜻이 있고, 또 하나는 '옳고 그른 것을 나눈다.'는 뜻이 있습니다. 분리한다는 뜻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복음이 들어가면 모든 것을 흔들어 놓고 갈라놓습니다. 우리 사회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개인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양심의 가책이라고 하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나면 가책이 생깁니다. 왜 그런지 아시지요?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가정에서도 예수님을 믿게 되면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과 다툼이 생겨지고 거래에 분리가 생겨집니다.
▶이것은 정말 오래된 사건입니다. 아마도 거의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갈현동에 윤상이란 어린아이가 유괴되어 살해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윤상이는 그 집에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었습니다. 그런 아들이 살해되자 그 어머니는 완전히 정신을 잃고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삽니다.
이 무렵에 한 집사님이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윤상이 어머니는 '글쎄요, 한번 생각해 보지요?' 교회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시어머니, 그러니까 윤상이 할머니는 절대로 반대했습니다. '교회에 가면 안 된다.' '왜요?' '아이고, 예수 믿게 되면 예수 귀신하고 네가 믿는 불교 귀신하고 싸울 텐데 그러면 우리 집안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굉장히 무식한 표현이지만 그러나 그 말 가운데 좀 이해도 갑니다. 사실 한 가정이 예수 믿고, 불교를 믿으면 그 가정이 평안치가 않습니다. 어째든 예수 믿게 되면 마음에 갈등이 생겨집니다. 선과 악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가정에서도 갈등이 생기고 싸움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죄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사탄에 대하여 정복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그 세상이 주는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진정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 이 땅에 평화를 갈라놓아야 했습니다. 더 쉽게 표현하면 '하늘의 평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땅의 거짓된 평화는 무너져야 한다.'는 진리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아멘!/
그러니까 본문의 의미는 ⑴세상의 거짓 평화를 깨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⑵참된 평화란 이러한 죄와 불법과 사탄의 세력과 싸워서 이기므로 얻어지는 것임을 교훈 하신 것입니다.
눅12:51절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고 하셨습니다. 그 앞서 49절에서는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굉장히 과격한 말씀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불의와 불법은 불에 타야 합니다. 모든 죄와 악은 검으로 찔러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진정한 평화란 모든 악과 죄와 사탄의 세력들이 쫓겨간 뒤에 오는 평화를 의미합니다.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마귀의 지배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흑암에서 빛으로 옮겨진 사람이 되기에, 빛과 어둠이 하나님과 사탄이 충돌되는 일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영적으로 싸우고 이겨야 합니다. 이겨서 얻어지는 평화! 이 평화가 주님이 주시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할/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과 싸워야 할까요?
⑴죄와 싸워야 합니다. 죄에서 구원받고 새 생명을 가진 크리스천들은 죄와 싸우고 불의와 싸워야 합니다. 저항 없이 세상 물결 따라 떠내려가는 사람은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⑵원수 마귀와 싸워야 합니다. 영혼이 거듭나서 영안이 조금이라도 열린 사람이라면 순간, 순간 사탄 마귀가 저항해 오고 핍박해 오고 유혹해 올 때에 마귀와 타협하거나 그 고난의 길을 피해 가지 않습니다. 마귀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약4:7-8절에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⑶잘못된 육신의 정욕과 싸워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못 박힌 정욕이 다시 살아 발동하지 못하도록 날마다 육신의 정욕과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이런 영적 싸움을 싸우려면 무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 무기, 검은 무엇인가? 첫째는, 기도입니다. 기도가 없이는 절대로 마귀를 이길 수가 없고 죄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어디서 옵니까? 기도입니다. 주님은 막9:29절에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말씀으로 물리쳤습니다. /아멘!/
▶35-36절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또 다시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말씀입니다. 평화가 아니라 검이라고 말씀하셨을 때에도 굉장히 놀랐는데 원수가 바로 자기 집안 식구라니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가정에 복음이 들어가면 불화가 먼저 시작된다는 의미입니다. 온 식구가 한날한시에 합심하여 같이 믿게 된다면야 이처럼 복된 길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 먼저 믿는 식구는 그 가정에서 핍박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심판을 받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핍박을 받고 딸이 아비에게 핍박을 받고, 지금도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가정에서 핍박받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핍박의 관계를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고 했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가까운 가족이니까 핍박도 하지요! 그런데 핍박받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마5:11-12절에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할/
오늘 본문에서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혈연관계보다 복음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고 희생할 수 있습니다. 형제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고 희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만은 생명의 복음만은 양보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입니다. 여러분, 다 양보하셔도 다 참으셔도 믿음은 절대로 양보하지 마십시오, 왜 그런지 아시지요? 믿음은 생명이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남편이라도 내 생명을 보장 못합니다. 내 부모도 내 생명을 보장 못합니다. /믿/
본문의 '가족이 원수다, 그러므로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복음이란 그 가족마저도 버릴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 쉽게 표현하면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는 자식마저도 포기할만한 어떤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 이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할/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외아들 이삭까지도 복음을 위해서 버렸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흐르는 하나님의 사상은 '가정을 귀하게' 보십니다. 예수님도 얼마나 가정을 귀하게 보셨으면 첫 이적을 신혼과정에서 베푸셨을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의 뜻을 보면 '복음은 너희들의 혈연관계보다도 본질적으로 우선하는 것'임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더 쉽게 표현하면 복음을 방해하는 자세에 대하여는 인간이 가장 소중하고 가장 친근해야 할 부모형제, 혈연의 관계까지도 희생을 각오하라는 결단의 의미입니다. /이해하기가 어렵습니까? 성령 님의 도우심이 있기를 기도합시다!/아멘!/
▶인도의 성자 썬다싱은 부유한 가정에 이교도를 믿는 가정에 아들로써 기독교에 개종할 때에 아버지가 조용히 타이르고 달래다가 협박하고, 형들이 저주할 때에는 그는 자기 방에 들어가서 사이크교도의 표시인 긴 머리를 싹둑 잘라버렸습니다.
아버지가 노발대발하며 '우리 집안을 먹칠하는 놈은 집안에 둘 수 없다.'고 하시면서 아들로 여기지 않겠다며 집에서 쫓아 내버렸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예수님을 버리지 않고 어렵게 미션학교를 나오고 신학을 나와서 인도의 성자 썬다씽이 된 것입니다. /할/
이제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에 대해 예수님은 한 가지를 더 말씀하고 계십니다. 무엇입니까? '주어진 십자가를 기쁘게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37절에서는 '부모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라'고 하셨고, 36절에서는 '십자가를 기쁘게 지라'고 하셨습니다.
▶37절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본문에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사랑하지 말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아들이나 딸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습니다. 바울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효도를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를 혼란케 합니다. 그러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깊은 교훈은 여기서 '순서를 강조한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부모를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6: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멘!/
부모를 먼저 사랑하면 주님께서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자녀들 먼저 사랑해도 주님은 합당치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부모를 섬기고 주안에서 자녀를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38절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주님은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이 치러야 할 또 하나의 대가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헌신과 희생입니다. 좁은 길이요, 좁은 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에는 '와루수'라는 장군이 있었는데, 예수님 당시 갈릴리 유대에 반란이 일어나자 그 반란군을 격퇴하고 유대인들을 2천명이나 처형할 때 십자가 처형을 했습니다.
이 포로들이 십자가를 매고 처형장까지 비틀거리며 가는 모습을 당시에 살았던 유대인들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주님이 십자가를 지기 전, 그러니까 반란군이 십자가를 지고 자기가 죽어야 할 처형장까지 가는 모습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사형 틀입니다. 십자가형은 사형 가운데에도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일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보장되어야 할,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가치마저 완전히 박탈해버리는 사형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사형이 이미 확정되어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이고 지금 그 사형이 실제로 집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십자가를 진 제자는 사실상 죽은 것입니다. 그에게는 자기 목숨이 없으며, 그에게는 자신의 안위도 없으며, 그에게는 자기의 명예도 없습니다.
막8:34절에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는 것을 가리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십자가형에 처해져서 죽는 사람처럼 '그 자신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스스로 추구하던 '모든 인간적 욕심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의 목숨까지도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바쳐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이기적 욕망의 성취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위해 살고 또 죽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주님은 '그가 오히려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이 살아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 자신이 지배하는 삶을 살고 자기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사는 사람은 지금 살아있는 것 같아도 '영원히 목숨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잘 믿고 따른다는 것은 바로 자기가 처형당해야 할 무거운 십자가를 자기가 매고 가는 길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나는 이런 남편을 섬겨야 하나? 왜 이런 시어머니를 만나야 하나? 나는 왜 이런 직장에서 일하는가? 나를 왜 이런 억울한 일에 개입해서 희생을 강요당해야 하는가?' 이것이 지금 우리가 지고 가는 십자가입니다.
'도대체 무슨 이익이 있다는 말입니까?'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보기 싫은 사람, 항상 보고 살아야합니다. 정말 하기 싫은 일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할/ 그런데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그것들을 피하려고 하지 말라, 도망가려고도 하지 말라, 차라리 섬기라, 어차피 만나는 것이다.' 즉 '기쁘게 그 사람을 만나라, 기쁘게 그 일을 하라, 손해를 감수하면서라도 해라' 바로 이런 뜻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하고 나면, '세상이 변하고, 상황이 변하고, 내 인격이 변하고, 조건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십자가 뒤에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능력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달려갈 때, 하나님은 그 안에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를 붙잡아 주십니다. /아멘!/
▶39절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도 버릴 각오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역설적인 교훈들이 많습니다.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잃음으로써 얻는 종교요, 또 남에게 줌으로써 간직하는 종교입니다. 죽음으로써 사는 종교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위해서 내 생명을 잃게 되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께 드리면 그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 창고에 쌓여지기 때문에 영원히 내게 간직하는 것이 됩니다. /할/
'잃을 것이요,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죽어야 삽니다. 주어야, 베풀어야 흔들어 넘치게 안겨주는 종교입니다. 눅6: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아멘!/
이제 40-42절까지는 영접하는 자에게 주는 상입니다.
▶40절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여기서 '너희는' 제자들을 말합니다. 즉 주의 종들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영접하는 것을 말합니다. 종은 주인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종은 주인을 대리하는 사람들입니다.
사신이나 대사들을 푸대접하면 그 나라 임금을 푸대접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특별히 주의 종을, 하나님의 종들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주의 종들은 참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자기 고집도, 취미도, 감정도 있지만 그것을 노출시켜서는 안 되고, 참고 견디며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노심초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지위가 높고 특권이 많은 사람들을 잘 받들고 섬기고 대접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섬기고 대접함으로 말미암아 그에 대한 보상과 특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의 종들을 우습게 여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습게 보고, 비판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멸시받고 천대받는 지극히 작은 주의 종에게 잘하는 것이 곧 주님께 잘 하는 것이요, 주님께 잘 하는 것이 하나님께 잘 하는 것으로써 이는 반드시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영접한다.'는 말은 '받아들인다. 시인한다, 품에 안는다, 귀를 기울이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종들을 영접하면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요,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을 영접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주의 종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연대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10:5절에 보면, '주의 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셨고' 요3:10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사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문화를 보면 유대인들을 어떤 사람이 보낸 사절이나 사자를 영접하는 것은 그를 보낸 자를 영접하는 것과 똑같이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춘향전에 이 도령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과거에 합격하여 암행어사로 왔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행색을 초라하기 그지없는 행색을 하고 나타나니 변 사또가 무시하지 않습니까? 그 외모를 보고 무시했다가 암행어사 출두할 때 그 앞에서 벌벌 기는 모습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 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실 이 도령이 무서워서가 아닙니다. 그를 보낸 왕이 두려워서입니다. 그는 왕을 대신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변 사도는 그를 알지 못하고 푸대접하고 온갖 악행을 했으니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지요. /할/
본문 40절에는 두 가지의 진리가 들어있습니다. 파송과 영접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제자들을 보내셨습니다.
여기서 신앙의 본질 하나를 발견하는데, 그것은 파송이라는 것입니다. 보내는 일이 없다면 신앙은 죽은 것입니다. 신앙을 떠나는 것이요, 보내는 것입니다. 죄와 죽음과 파멸이 있는 곳에 빛과 생명과 사랑을 파송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또 하나는 영접입니다. 영접이 바로 축복입니다. 요1: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할/
본문은 주의 종을 영접하는 자는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목사가 심방할 때 주의 사신으로 가는 것입니다. 심방예배에 복이 있습니다. 요13:20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을 주님처럼 영접했습니다. 갈4:14절에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41절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①선지자를 영접하고 대접하는 자에게 선지자의 상급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왕상17:8-16절은 사르밧 과부가 선지자 엘리야를 대접했다가 받는 복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또한 왕하4:8:37절의 교훈은 수넴에 사는 귀부인이 선지자 엘리사를 잘 대접하다가 득남을 하였고, 또 흉년이 들어 피난을 갔다 왔으나 하나님은 그의 땅의 소출을 손해 보지 않고 다 받게 해 주셨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나 예언자는 모두 하나님의 종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선지자와 같이 예언하고 설교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선지자가 받는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선지자를 돕고 영접하고 협력할 때 하나님은 그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멘!/
②의인을 영접하는 자에게는 의인의 상급을 받습니다. 의인이 누굽니까? 의인은 하나님의 의를 행하는 자를 멸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자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든 성도가 다 의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는 성도들을 잘 영접하고 대접하면 그 상급은 하나님이 결단코 잊지 않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모든 사람이 의에 빛나고, 선에 빛나는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와주고 선한 행실로 살아가면 하나님이 분명히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할/
▶42절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라운드 폴 공의 꿈 이야기'라는 단편집이 있습니다. 그는 한 성을 다스리는 공작이었습니다. 그에게는 평생의 한 가지 소원이 있었는데 그것은 유월절 성만찬 때 예수께서 사용하신 금잔을 손에 넣는 것이었습니다.
라운드 폴 공작은 그 금잔을 찾기 위해서 의복을 차려 입고 성문을 나섰습니다. 성문을 나서는데 한 거지가 '채리티' 하고 외칩니다. 채리티란 말은 '적선 하십시오'라는 뜻으로 먹을 것이 없는 불쌍한 거지를 도와 달라는 간절한 호소입니다.
그는 매우 기분이 나쁘고 마음이 언짢아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거룩한 일을 막 시작하려는 마당에…' 그는 기분이 나빠서 그냥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세월은 흘렀고, 가지고 나간 돈도 다 떨어지고 화려했던 옷도 재대로 세탁하지 못해서 남루한 옷같이 보였습니다. 초라한 모습으로 성으로 돌아오는데 한 거지가 '체리티! 먹을 것을 좀 주세요!'하고 적선을 구했습니다. 성문을 나설 때 바로 그 거지였습니다.
그는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그의 모습이나 자신의 모습이 별 차이가 없어 보였습니다. 단지 다른 것은 집에 들어가면 그는 돈이 있지만 거지는 돈이 없는 것 차이 이외에 모든 것이 비슷해 보였습니다.
라운드 폴 공작은 짐 보따리에서 남은 빵 한 조각을 꺼내서 모두를 건네주었습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허겁지겁 먹는 바람에 목이 말라 보였습니다. 폴 공작은 거지에게 물을 떠주기 위해 말에서 내려 성문 옆에 있는 우물가로 가서 추운 얼음을 깨고 옆구리에 찼던 표주박으로 물을 떠서 거지에게 주었습니다.
그 순간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거지가 물을 마시고 있는 표주박이 라운드 폴 공이 일평생 찼던 예수님의 금잔이었습니다. 표주박이 금잔으로 바뀐 것입니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공작은 창고를 열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라운드 폴 공의 꿈'이란 단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서 환대를 잘 함으로 복을 받은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도 가축을 키우면서 살아가는 유목민이었습니다. 베두인들의 전통에 의하면 지나가는 나그네가 텐트 끈에만 닿아도 의무적으로 3일은 집안에 초청하여 묵고 가게 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창18장을 보면 마침 아브라함이 장막 문에 앉았다가 멀찍이 지나가는 나그네를 보고 달려나가 영접하여 집안으로 들려 환대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에게 고운 가루를 가지고 떡을 만들라고 부탁합니다. 아내가 만든 떡과 함께 버터와 우유를 곁들입니다.
하인에게 명령하기를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고 하여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 고기로 극진히 대접하고 푹 묵어가도록 합니다(창18:1-8).
아브라함은 극진하게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대접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그 결과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소식도 미리 알게 되었고 조카 롯도 구하게 된 것입니다. /할/
여기 '소자'는 누구입니까? 마25:40절에서 '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했고, 마 25:45절에서는 단순히 '지극히 작은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네 형제 중에'란 말씀은 '천국 형제'에게 먼저 사랑을 실천할 것을 교훈 합니다. '천국 형제'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마12:50)요, '거룩함을 입은 자들'(히2:11)임을 뜻합니다.
소자란 말씀은 문자적으로는 '어린 아이'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사회에서 무시당하는 계층인 '노동자, 소작농부, 목수, 석수, 세리, 죄인, 여자, 아이'들을 다 포함하는 사회적 의미로 쓰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을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고백했는데, 여기서 '작은 자'란 신앙적 의미로 '믿음의 형제'를 뜻합니다. 믿음 때문에 낮아진 사람들, 믿음 때문에 천대와 멸시와 핍박을 받는 사람들에게 먼저 사랑의 윤리를 실천하라는 교훈입니다.
오늘 주님은 믿음의 형제나 믿음의 가정들을 우선적으로 돌아보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회에서 무시, 멸시 당하는 소외계층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교회가 사회의 양심이요, 빛이요, 소금이라면 순수한 사랑의 수고가 시행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멘!/
여기 '냉수 한 그릇'을 한국적 개념으로 생각하면 그 의미가 축소됩니다. 그곳 팔레스틴 땅은 물이 귀한 곳이고, 또 물이 금방 미지근해 질 수밖에 없는 기후입니다. 그래서 시원한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하려면 즉석에서 길러오는 물을 대접해야 하므로 손님이 원할 경우 즉시 달려가야 합니다.
여기 또 소자는 보잘 것 없는 것이란 뜻으로, 당시 제자들은 유대인들의 눈에 볼 때 정말 보잘 것 없어 보였습니다. 오늘날 큰 교회 목사들은 크게 보면서 개척교회 목사들을 우습게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어렵게 목회하고 주의 일을 하는 감당하고 있는 주의 종들을 절대로 잊지 않고 지금도 사랑하고 계신 줄 확실히 믿습니다. /아멘!/
어떻게 주어야 하는가? 자기의 이름을 감추어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리하면 냉수 한 그릇도 잊어버리지 않으시는 주님께서는 그 행한 대로, 사랑의 씨앗을 뿌린 종류대로, 분량대로 보상을 실시하십니다.
이것은 곧 천국백성에게 주어지는 면류관들입니다. 예수께서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고 보상의 원리를 밝혔습니다.
그렇습니다. 냉수 한 그릇으로 우리는 천국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아무 대가 없이 냉수 한 그릇이라도 줄 수 있다면 주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가치 없어 보이는 냉수 한 그릇이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대접할 때 하늘의 상이 클 것입니다. 교회 주변과 우리의 이웃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나누어줍시다. /할/